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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리즈 설명

나는 요즘에 와서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 재미있고 행복하고 쌔끈한세상이 오려면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활력의 관점에 대해서는 (비로 이 말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멋있는 철학자, 소설가, 시인, 예술가들이 말을 해놓았다. 이것을 내 말 속에 섞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동류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씨리즈도 완결을 안 해놓았는데 또 무슨 씨리즈를 시작하냐,고 스스로 항의한다. 그냥 일이 그렇게 되는 걸 어쩌겠는가,라고 스스로 답한다. 사실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씨리즈도 그렇지만) 이 씨리즈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대략 써놓았고 그 일부를 다듬어서 내보내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얼마 동안은 주로 하는 일(번역)이 있고 그 일로 인해서 백수이면서도 당분간은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번역 이외의 글을 쓰고 싶기 때문, 쓰지 않으면 못 배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동과 욕구를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다스리려는 사람은 덕과 그 원인에 대한 지식을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진실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즐거움으로 자신의 정신을 채우려고 한다. 그는 결코 인간의 단점들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동료들을 흠잡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유를 허위적으로 과시하는 데 탐닉하지도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 윤리학V부 정리10 주석)

 

 

활력의 관점은 철학적으로는 스피노자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

 

활력의 관점은 정동의 관점이다. 정동은 활력의 증감(+그에 대한 생각)이며, 따라서 정동의 관점에서는 기쁨(활력의 증가)과 슬픔(활력의 감소)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기쁨의 정동이 기쁨을 주는 대상에 대한 생각과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고, 슬픔의 정동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대상에 대한 의식과 함께 하는 것이 증오이다.

 

정동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하여금 사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한에서 나쁘거나 해롭다.”(윤리학V부 정리9 증명) 인간은 정동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정동의 방해를 받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핵심은 정동의 원인에 대한 적실한 생각(지식)의 형성이다. 형성된 적실한 생각은 다시 기쁨의 정동을 증가시킨다. 기쁨의 증가가 바로 다중만들기의 주요한 원리이다.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1

심판의 체제를 끝내야 한다.

 

적실한 생각(지식)의 형성을 막는 거대한 체제가 있다. 들뢰즈는 이것을 심판의 체제라고 불렀다.[각주:1] 들뢰즈에 따르면, 심판의 교설은 그리스비극에서부터 근대 철학에 걸쳐 다듬어지고 발전되었으며, 스피노자가 유대-기독교 전통과 단절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아마도 최초의) 철학자이다.

 

삶에 내재적인 정동의 체제와 달리[각주:2] 심판의 체제의 핵심은 삶을 삶의 외부에 있는, 혹은 삶보다 더 높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가치의 이름으로 재단하는 것이다.[각주:3] 심판의 교설은 정동의 체제를 전도시키고 대체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심판을 피하는 길은 자신을 기관없는 신체로 만드는 것, 기관없는 신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신체를 그 생성 속에서, 그 강렬성 속에서, 정동을 야기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활력으로서, 즉 활력에의 의지로서 정의하는 것이다.

 

심판의 체제를 떠받치는 단위는 인격’(person)이다. ‘인격은 정체성으로 환원된 신체를 전제한다. 사법적 재판은 바로 이 인격에게 가해지며 모든 심판의 성격을 가진 사회적개인적 비난도 인격에게 가해진다. 개인은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여러 행위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러 요소들 혹은 행위들 중 해로운 성격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것을 다른 전체에 뒤집어씌우는 것이 바로 심판의 성격을 가진 비난이다.[각주:4] 이렇게 부분을 전체에 뒤집어씌우려면 신체 외부에서 어떤 규범이나 코드를 불러와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성격을 갖지 않는 비난은 그저 증오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증오의 표현이 심판의 성격을 가진 비난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상대의 해로운 부분에 대한 증오가 상대의 유익한 부분에 대한 사랑과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스피노자에 따르면 후자가 더 강력한 활력의 표현이다.[각주:5]) 들뢰즈는 잔인의 체제 즉 실존의 특징 중 하나로서 전투(le combat)를 든다. 전투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물론 심판과 싸우는 전투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맞섬 전투’ le combat-contre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오한 형태의 전투는 전투를 하는 개인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전투, 즉 그 개인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전투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사이전투’le combat-entre라고 부른다) 맞섬 전투는 어떤 힘을 파괴하거나 물리치려고 하는 반면에 사이 전투는 어떤 힘을 잡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사이 전투는 생성의 다른 이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전투는 전쟁과 다르다. 전쟁은 맞섬 전투의 측면만을 가진다. 전쟁은 파괴에의 의지, 파괴를 무언가 정당한것으로 바꾸는 신의 심판일 뿐이라고 한다. 전쟁의 경우에 힘에의 의지란 권력(pouvoir)이나 지배의 최대치로서 힘을 원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내재적 활력의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활력이 가장 낮은 사례 즉 병이다. 이에 반해 전투는 힘을 힘으로써 보완하고 접하는 것을 풍요롭게 하는, 강력하고도 비유기적인 활력이다. 이렇게 볼 때 상대의 무력(활력의 부족 혹은 병)에 자신의 무력(전쟁)으로 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지 아니한가. 그런데 의외로 주위에서 늘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어리석음이다. 활력의 관점, 다중만들기의 관점에서는 스스로 생성하며(활력의 증가) 동시에 상대를 (만일 우리와의 사이에 공통적인 것이 조금이라도 형성된 상대라면) 생성시킨다.

 

  1. 들뢰즈의 Critique et Clinique(영어본 Essays Critical and Clinical))에는 이 주제에 관하여 두 개의 글이 실려 있다. [본문으로]
  2. 이것이 들뢰즈가 니체에게서 읽어내는 ‘잔인의 체제’이다. ‘잔인’이란 말에 속으면 안 된다. 잔인의 체제는 오직 정동에만 의거하는 삶에 내재적인 체제이다. 니체에게는 ‘잔인’이 바로 정의(正義)이다. 들뢰즈는 잔인의 체제를 그냥 ‘실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3. 『공통체』Common Wealth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삶의 외부를 초월적transcendent 차원과 선험적transcendental 차원으로 나눈다. [본문으로]
  4. 이는 비난이 표현되는 형태와 무관하다. 아무리 점잖게 표현된 것일지라도 심판으로서의 비난 혹은 비판일 수 있고, 욕의 형태를 띠더라도 정동의 표현일 수 있다. 아마 요즘 사람들은, 특히 지식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욕을 하는 것은 비난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활력의 관점, 정동의 관점에서 보면 욕을 하는 것이 삶의 외부에서 온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삶에 내재적인 것일 수 있다. 욕은 상대에 대한 자신의 증오만을 보여주며 상대가 옳다 그르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증오의 내재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 참조.) 따라서 옮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 즉 행위로 표현되는 활력의 외부에 있는 어떤 기준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증오의 표현일 뿐이다. 이런 한에서 욕은 심판과 다르다. 물론 욕이 증오의 표현으로서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욕은 자신을 전혀 높이지 않고 상대에게 증오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증오는 정동의 실재적 발현이다. 다중만들기는 물론 기본적으로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우리와 유사한 본성을 가진 존재에 해를 가한 자에 대한 증오(사랑에 기반을 둔 증오)인 ‘분노’는 다중만들기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분노를 결핍한 자들이 많이 있는 공동체(예를 들어 한국의 대학교)가 쉽게 망가지는 것을 교훈으로 삼으면 된다. [본문으로]
  5. 에 대해서는 제사에서 인용한 부분을 볼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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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namjah

* 나는 가끔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가 맞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분명 근대(즉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인식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세계적으로는 이른바 탈근대를 말하는 시대에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성숙해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본가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국 자본주의를 이끈다는 신자유주의 세력은 자본주의라는 생산메커니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는 노력도 없고 또 지적 능력도 점점 더 퇴화하는 것 같다. 그럼 실제로 세계 전체를 운영하는 자본가들,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숭앙해 마지 않는 거물 자본가 세력은 요즘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이 생각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된 것 중 하나로서 세계 경제포럼 (그 유명한 다보스 회의)의 2012년 연례회의 사업개요 내용을 간이 번역의 형태로 소개한다. (이 방면의 전문가는 아닌지라 용어가 정확하게 옮겨지지 않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이해 바란다.) 이 문서가 그들의 속마음을 어느정도 표현하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모든 것은 주체의 소화능력에 달려 있다. -- 정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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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경제포럼 2012년 연례회의

사업개요

 

Davos-Klosters, Switzerland 25-29 January

The Great Transformation:

Shaping New Models

거대한 변형 :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기

 

Purpose

목적

 

We are living in the most complex, interdependent and fast-paced era in recent memory. It is also the new context in which leadership will be exercised for the foreseeable future. Thus, the purpose of the World Economic Forum Annual Meeting 2012 is to ensure that leaders exercise their responsibilities jointly, boldly and strategically to improve the state of the world for future generations.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최근의 역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속도가 빠른 시기에 살고 있다. 이 시기는 또한 예측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 지도력이 발휘될 새로운 맥락이기도 하다. 그래서 2012년 세계경제포럼 연례회의의 목적은 지도자들이 책임감을 (공동으로, 그리고 대담하고 전략적으로) 발휘하여 미래 세대를 위해 세계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In Davos, leaders will share insights on what has changed fundamentally in the world, explore new conceptual models that are emerging, catalyse sought-after solutions and collaborate on the risks and opportunities that lie ahead. To this end and for over 40 years, the Annual Meeting has provided an unrivalled platform for leaders from all walks of life to shape the global agenda at the start of the year.

다보스에서 지도자들은 세계에서 근본적으로 변한 것에 대한 통찰들을 공유하고, 새로이 등장하는 개념 모델들을 탐구하며, 추구하는 해결책들의 마련을 촉진하고, 눈앞에 놓인 위험 및 기회들과 관련하여 협동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40년 여 동안 세계경제포럼은 해마다 연초에 전지구적인 의제를 형성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에게 마련해 주어왔다.

 

The New Context

새로운 맥락

 

Across the world, decision-makers are struggling to take action on critical economic, political and societal issues arising in a variety of contexts. Most apparent is that the speed of change continues to accelerate worldwide, fuelled not only by globalization, but also by increasingly sophisticated technology.

세계 전역에 걸쳐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중대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조치를 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매우 명백한 것은, 변화의 속도가 지구화만이 아니라 점증적으로 세련되어지는 테크놀로지로 인해 전세게적으로 계속적으로 가속화된다는 점이다.

 

The contextual change at the top of minds remains the rebalancing and deleveraging that is reshaping the global economy. In the near term, this transformation is seen in the context of how developed countries will deleverage without falling back into recession and how emerging countries will curb inflation and avoid future economic bubbles. In the long term, both will play out as the population of our interdependent world not only passes 7 billion but is also interconnected through information technology on a historic scale. The net result will be transformational changes in social values, resource needs and technological advances as never before. In either context, the necessary conceptual models do not exist from which to develop a systemic understanding of the great transformations taking place now and in the future.

가장 주목해야 하는 맥락변화는 여전히 균형 재조정과 부채경감’(the rebalancing and eleveraging)이다. 오늘날 이것이 전지구적 경제를 다시 형성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이 변형은 선진국들이 불황에 빠지지 않고 차입자본을 감소하고 개발도상국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미래의 경제거품을 줄이는 데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세계 인구가 70억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정보테크놀로지를 통해 역사에 남을 규모로 상호연결됨에 따라 양자[‘균형 재조정과 부채경감’]는 끝까지 진행될 것이다. 그 순전한 결과는 사회적 가치의 변화 및 자원에 대한 욕구의 변화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진전이 유례없이 진행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든 현재 일어나고 있고 미래에 일어날 이 거대한 변형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개념적 모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Integrating people, systems and technologies is an indisputable leadership challenge that ultimately requires new models, bold ideas and personal courage to ensure that this century improves the human condition rather than capping its potential. Thus, the Annual Meeting 2012 will convene under the theme, The Great Transformation: Shaping New Models, whereby leaders return to their core purpose of defining what the future should look like, aligning stakeholders around that vision and inspiring their institutions to realize that vision.

사람들, 체계들, 그리고 테크놀로지들을 통합하는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이 지도층이 직면하는 과제가 될 것이며, 이것은 (금세기에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기보다 증진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모델, 대담한 생각 그리고 개인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2012년 연례회의는 거대한 변형 :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기라는 주제 아래 모일 것이다. 이로써 지도자들은 미래가 어떨 것인가를 정의하는 핵심적 목적으로 되돌아가서 이해관계자들을 그 비전을 중심으로 정렬하고 제도들로 하여금 그 비전을 실현하도록 격려하게 될 것이다.

 

The Great Transformation: Shaping New Models captures not only the context but also the purpose with which leaders must now act ensuring that our future is one of inspired collaboration and bold solutions to global, regional and industry challenges and not a return to status quo. As is the tradition of the Annual Meeting, the programme will challenge long-held assumptions about society, politics, technology, business and economics to generate the powerful ideas and collaborative spirit desperately needed to manage the future course of world affairs.

거대한 변형 :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기라는 주제는 맥락을 포착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목적 또한 포착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미래가 현상유지로 되돌아가지 않고 고취된 협동의 시대, 전지구적지역적산업적 과제들에 대한 대담한 해결책들의 시대가 될 수 있도록 한다. 연례회의의 전통대로, 포럼의 프로그램은 사회, 정치, 테크놀로지, 사업 및 경제학에 대한 오래된 전제들에 도전을 하여 세계의 미래의 과정을 관리하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강력한 아이디어들과 협동정신을 만들어낼 것이다.

 

Thematic Roadmap: The Great Transformation: Shaping New Models

주제 로드맵 : 거대한 변형 :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기

 

A complex, interdependent and fast-paced world creates not only diverse outcomes but also unintended consequences that constantly test the cognitive limits of leaders and force us to shape new models. Thus, the four sub-themes of the Annual Meeting programme are conceptualized as dual imperatives to underscore the linkages between various models when addressing complex global, regional and industry issues.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속도가 빠른 세계는 다양한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또한 낳으며 이것들이 항상 지도자들의 인식의 한계를 시험하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모델을 구축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래서 이번 연례회의 프로그램의 네 세부주제는, 복잡한 전지구적지역적산업적 이슈들을 다룰 때 다양한 모델들을 서로 연결할 것을 강조하는 이중적으로 긴요한 것들로서 개념화되었다.

 

Growth and Employment Models

성장과 고용 모델

 

The policy prescriptions, industry models and performance incentives that emerged from an era of consumption and debt-driven growth must be transformed to deliver quality growth. Growth that is sustainable, entrepreneur-driven and employment-creating should be the outcome of the rebalancing and deleveraging of the global economy. As traditional work opportunities decline as a result of production increasingly based on knowledge and ingenuity, individual entrepreneurship will become a critical factor for future job and growth creation.

소비와 부채에 의해 추동되는 성장의 시대에 출현한 정책처방, 산업모델, 수행 인센티브는 질을 중시하는 성장을 낳는 것들로 변형되어야 한다. 지속 가능하고 기업가에 의해 추동되며 고용을 창출하는 성장이 전지구적 경제의 균형 재조정과 부채경감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 지식과 발명의 재능에 점점 더 기반을 두는 생산의 결과로서 전통적인 일자리가 하락함에 따라 개인의 기업가정신이 미래의 일자리와 성장 창출에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Leadership and Innovation Models

지도력과 혁신 모델

 

The leading countries and global governance institutions of the Cold War era must create space for major emerging economies, private sector institutions and multistakeholder partnerships. These new actors should have the responsibility not only to address important global and regional challenges but also to introduce innovative solutions. The future will also show that younger and older generations will play a greater role compared to today. Thus, the rebirth of intergenerational responsibility must be embedded in leaders to avoid a future demographic divide.

냉전 시기의 주도적 국가들과 전지구적 통치제도들은 새로 등장하는 경제, 민간부문 제도들 및 다수 이해관계자들의 협력이 들어설 공간을 창출해주어야 한다. 이 새로운 행위자들은 중요한 전지구적지역적 과제들을 다룰 책임감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혁신적 해결책들을 도입해야 한다. 또한 미래에는 노소를 막론한 모든 세대가 오늘날보다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에게 다른 세대에 대한 책임감이 다시 살아나도록 하여 미래의 인구 분할을 피해야 할 것이다.

 

Sustainability and Resource Models

지속 가능성과 자원 모델

 

The realization that human activities have a major impact on Earth’s ecosystem must drive future changes in behaviour and policies. Our ecological footprint will have to be fully internalized in business models. A new mindset should drive collaboration and innovation among governments, industries and companies to ensure that future resource constraints do not lead to greater energy, food and water insecurity.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생태계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깨달음이 미래의 행위와 정책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우리가 생태에 남기는 족적은 비즈니스 모델에 완전히 내화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고방식이 정부들산업들회사들 사이에 협동과 혁신을 추동하여, 미래의 자원 제한으로 인해 에너지식량물을 확보하지 못하는 불안이 더 커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Social and Technological Models

사회적기술공학적 모델

 

The next wave of technological innovation, particularly in life sciences, nanotechnology and artificial intelligence, will not just deliver productivity gains but will also transform us by adding new dimensions to our lives. At a societal level, the norms, behaviours and values that are protected and celebrated in the physical world are neither clearly established nor firmly anchored in the digital world. As the “Internet of things” that connects billions of sensors and devices becomes a reality, stakeholders should work together to safeguard the knowledge, data and networks that are critical resources for our future development.

특히 생명과학에서 일어날 기술공학적 혁신의 다음 번 파도인 나노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은 생산성의 증가만을 낳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의 삶에 새로운 차원들을 추가함으로써 우리를 변형시킬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보호받고 찬양받는 규범들행위들가치들은 사회적 수준에서는 명확하게 확립되지도 않을 것이고 디지털 세계에 굳건하게 닻을 내리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수십억의 센서들과 장치들을 연결하는 사물들의 인터넷이 현실이 됨에 따라 이해관계자들은 우리의 미래의 발전에 중요한 자원들인 지식데이터네트워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한다.

 

The World’s Foremost Multistakeholder Community

세계 최고의 다수 이해관계자 공동체

 

Participation in the World Economic Forum Annual Meeting is by invitation only and limited to the world’s leading:

세계경제포럼 연례회의에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며 이들은 아래와 같은 세계의 지도층에 국한된다.

 

. Chief executives of our 1,000 Partner and Member companies

. Political leaders (from the G20 and other relevant countries)

. Heads of international organizations

. Experts representing our Global Agenda Councils

. Representatives from key civil society stakeholder groups

. Young Global Leaders

. Social Entrepreneurs

. Technology Pioneers

. Global Shapers (under the age of 30)[각주:1]

. Media Leaders

. Spiritual and Cultural Leaders

 

The World Economic Forum Annual Meeting 2012 will provide participants with strategic insights from each of the four thematic clusters, with the development of a Risk Response Network among its defining legacies. Particular emphasis will be placed on addressing the question of “How” in the true Davos Spirit, and elaborating innovative ideas and solutions to global challenges in a multistakeholder environment.

세계경제포럼 2012년 연례회의는 참가자들에게 이 네 주제군 각각에 담긴 전략적 통찰들을 제공하고 포럼이 그 동안 특유하게 이룬 것들로 위험대응네트워크를 발전시키도록 할 것이다. 포럼은 진정하게 다보스적인 정신으로 어떻게의 문제를 다루는 데, 그리고 다수 이해관계자라는 환경에서 혁신적인 생각들을 그리고 전지구적 과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특별하게 강조할 것이다.

  1. [도도] Shapers are exceptional in their potential, their achievements and their drive to make a positive contribution to their communities. Aged under 30 and working in diverse fields, the Shapers are a network of hubs founded and led by the next generation. http://forumblog.org/2011/10/who-are-the-global-shaper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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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namjah

정당별 당선자 분포도를 보다가 아래와 같은 그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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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namjah
TAG 선거, 안경

제너럴 부인(Mrs. General)은 디킨즈의 걸작 소설 리틀 도릿)(Little Dorrit, 1855-57)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자 주인공 에이미 도릿(Amy Dorrit)과 그녀의 언니인 패니(Fanny)에게 상류사회의 예절과 일반적 교양을 가르치는 (“정신을 형성하는”) 가정교사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은 가정교사가 아니니 친구 혹은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해 달라고 하고, 에이미의 아버지 도릿 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제너럴 부인은 고위 성직자의 딸로서 거의 45세까지 노처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에서 상류사회를 주도하며 예의범절이라는 4두마차를 몰고 다닌다. (물론 비유다.) 그러던 중 병참을 담당하는 60세의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4두마차에 오른다.[각주:1] (역시 비유다.) 이 남편이 사망하고 그녀는 그의 유산을 기대했으나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그는 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녀를 속이고 결혼했다.)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상황에서 그녀는 가정교사가 될 생각을 한다. 한 홀아비의 딸을 맡게 되어 약 7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는데, 그 사이에 외국을 여행하면서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예의범절이라는 무기에 내 눈으로 안 보고 남의 눈으로 보기라는 무기를 추가한다. “7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할 잡다하게 많은 사물들을 대부분 보았다.자신이 가르친 딸과 홀아비인 그녀의 아버지가 모두 결혼을 하게 되어 제너럴 부인은 일을 그만두게 된다.

 

제너럴 부인은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상황에서 도릿 씨를 만나게 되며 1년에 400 파운드를 받고 도릿 씨의 두 딸 에이미와 패니를 가르치게 된다. 제너럴 부인을 처음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22장에서 작가는 제너럴 부인에 대하여 이렇게 알려준다.

 

그녀의 용모와 머리카락이 (마치 그녀가 어떤 빼어나게 품위 있는 방앗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 듯) 밀가루를 좀 바른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그녀가 보랏빛 분을 발라서기 때문이거나 백발이 되어서라기보다는 그녀가 전적으로 백악질의 피조물(chalky creation)이기 때문이었다.[각주:2] 만일 그녀의 눈에 표정이 없다면 이는 필시 표현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에게 주름살이 거의 없다면 이는 그녀의 정신이 그녀의 얼굴에 그 이름을 쓰거나 아니면 다른 것을 새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너럴 부인에게는 견해가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형성하는 방식은 정신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신적인 홈들 혹은 레일들로 이루어진 작은 순환궤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궤도 위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실은 작은 열차들을 출발시켰으며, 이 열차들은 결코 서로 따라잡지도 않았고 특별히 도달하는 목적지도 없었다. 그녀의 예의바름조차도 세상에 예의없음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너럴 부인이 그것을 제거하는 방식은 안 보이게 하는 것이며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정신을 형성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즉 모든 어려운 물건들을 벽장 안에 쑤셔 넣어 잠그고 나서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으며,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예의에 맞는 방식이었다.

  제너럴 부인에게는 충격적인 것을 말하면 안 되었다. 사고들, 구두쇠들, 관리들은 그녀의 앞에서 언급되면 안 되었다. 열정은 그녀의 면전에서는 잠들어야 했으며 피는 우유와 물로 바뀌어야 했다. 이 모든 빼내기를 한 후에 세상에 남는 얼마 안 되는 것이 바로 제너럴 부인이 광을 내는 분야였다. 이렇게 표면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가장 작은 붓을 가장 큰 통에 담갔다가 고려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의 표면에 광을 냈다. 그 대상이 깨져있으면 깨져있을수록 제너럴 부인은 더욱 광을 냈다.

 

요컨대 제너럴 부인을 특징짓는 어구는 표면을 형성하여 광내기이다. 이는 처음에는 한 개인의 처세하는 수단으로서 시작한다. 그러나 교육의 원리가 되고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특이성이 말살된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차원으로 상승한다. 그리고 현실을 그 풍요로움을 거세하고 표면만이 지배하는 차원으로 환원하는 메커니즘이 된다. 실제로 제너럴 부인은 도릿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면서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제너럴 부인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 놀라운 규모로 표면의 형성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표면에는 용기 혹은 거리낌 없이 나오는 정직한 말이라는 결함은 하나도 없었다.(27)

 

제너럴 부인의 표면아래에 정신은 없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녀는 보수로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 물어보는 도릿 씨의 물음에 가격을 직접 언급하기가 그렇다고 (예의에 어긋난다고) 피하면서도 이전에 자신이 얼마를 받았는지 보수를 준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방법을 슬쩍 가르쳐 준 다음에, 가르치는 학생이 두 명이니 1명에 대한 보수(300파운드)3분의 1을 더 얹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400파운드이다.) 물론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로 받는 보수를 늘리려는 것은 실상 그 자체만으로는 비난받을 일이라고 하기 어렵다. 문제는 그녀의 빛나는 표면아래에 있는 의도란 보수의 형태이든 남편의 재산의 형태이든 돈과 관련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첫 남편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그녀는 재산을 노리고 도릿 씨와 결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로서는 불행하게도 도릿 씨가 사망함으로써 이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를 말하면서 제너럴 부인과 그녀의 표면 광내기를 왜 이렇게 (이런 글로서는) 비교적 길게 이야기한 것인가? 제너럴 부인은 소설의 주인공도 아니고, 플롯상으로도 결혼에 성공하지 못한 채 해고당하고 마는, 별로 주목할 것 없는 인물 아닌가?

 

그렇지 않다. 최근 약 10~20년 동안 한국에서 성장한 신자유주의 문화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표면의 형성혹은 표면 광내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선 인물형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경험한 사람들 중에 제너럴 부인과 같은 행태를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상당수 있었다. 속을 항상 숨기고 입을 열면 유체이탈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 남이 확인하기 힘든 거짓말을 마음대로 활용하며, 앞에서의 행동(표면)과 뒤에서의 행동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앞에는 그럴듯한 가짜 표면을 내세우고 실제 자신은 그 뒤에서 암중에 움직이는 사람들......예전에는 이런 인물들이 권력에 발탁되지 못했다. 권력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시점부터 이들이 권력의 근처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소수지만 최상층 집단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형 차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너럴 부인의 특성은, 연장선을 잘 그어보면 철학과 정치의 중요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사실 내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다만 현재 집중해야 할 다른 일로 인해서 긴 글을 쓰기 힘들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수는 없다. 그래서 다음에 (신자유주의 문화 씨리즈가 아니라 별도의 글에서) 이 문제를 ‘서두 없이 바로’(ins medias res) 살펴보기 위해서 그 앞부분이라고 할 이 글을 오늘 빨리 일단락 짓고자 한다. 다만 정치의 문제와 관련하여 조그만 실마리만 남겨 놓기로 한다.

 

현대의 제도권 정치는 대의정치이고 대의정치는 제너럴 부인의 표면’에 입각한 정치이다. 정치인들은 열심히 '표면'(이미지)을 형성하고 광을 내며, '표면'이 빛나는 정도에 비례하여 표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이것은 사실이다. 최근의 한국은 그 중에서도 독특하다. '표면 광내기'보다 남의 '표면'에 흠집내기가 더 우세한 것도 그렇고, 대부분의 언론이 특정 당파를 위해서만 '표면 광내기 및 흠집내기' 작업을 하는 것도 그렇다. (보수언론들이 공들이는 이른바 '프레임설정'이란 것이 '표면'의 형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판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표면'이 가지는 가치에 휘둘린다는 점에서 똑같이 보인다. 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를 주장하고 싶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시 살아난 제너럴 부인을 영원히 과거로 돌려보내는 정치 말이다.

 

대의정치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니냐고? 무엇이든 시작은 있을 것이니, 세상에 시기상조란 없다. 성패에 관계없이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투표를 하지 말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표면이라는 근본적인 적을 알자는 것이다. 근본적인 적을 아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그 방향을 온전히 구현하는 어떤 가시적 선택지가 눈앞에 있으니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면 현재 존재하는 선택지들의 한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대상의 한계를 아는 것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서이다. 투표를 하자! 다만 돌파를 위해서!

 

 

 

 

  1. 영국에서는 1869년까지 민간인이 제복을 입고 병참일을 했다고 한다. 이는 이 소설이 출판되기 이전이다. [본문으로]
  2. 그녀가 분을 발랐거나 머리가 백발이 된 것이 사실의 차원에서는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디킨즈는 이보다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마치 분(백악질)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측면을 슬쩍 더 앞세운다. 그리고 이어서 제너럴 부인에게는 하얀 표면(face, 얼굴) 말고는 정신적 내용이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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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장소 중 하나인 ‘대학’이라는 곳에 재직했던 덕분에, ‘신자유주의적 유형’이라고 부를 인간들이 사회의 상층부로 이동하는 모습을 비교적 일찍부터 목격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욕심, ‘부자’가 되고 ‘사장’이 되려는 욕심을 틈타 사회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대통령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부자’가 되기는커녕 큼지막한 깡통을 차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내가 파악한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실력이 없다.

이들은 무언가 알맹이 있는 것을 하는 능력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질직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사회에 유익한 재화를 생산하는 능력이 없다. 아마 이것이 다른 모든 특징들(문제점들)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2) 상대와 협상할 줄 모른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욕심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무언가 비판하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린다. 그리고 답변이라고 써 보내는 경우에 겉으로는 그럴 듯한 말을 늘어놓지만 그 내용은, 마치 무조건 자기 욕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는 어린 아이처럼 막무가내이다.

 
3) 언어를 도구로서만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언어가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재현하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될 도구일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제 한 말과 정반대되는 말을 오늘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제는 그 말이 자신의 필요에 맞았고 오늘을 이 말이 자신의 필요에 맞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아마, 어떤 것이 정말로 자신의 진심을 담은 말인지 자신도 모르는 드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4)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이들은 사람을 돕기보다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니체가 말하는 ‘약한 자’의 전형적인 유형이다. 자신의 활력의 부족,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confidence in her/his being, 로렌스의 말)의 결핍을 다른 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채우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들은 심지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을 봐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짓밟는다. ‘대한민국’의 대학이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쉽게 ‘통제사회’(들뢰즈)로 이동한 것은 이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대학에 많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5) 괴롭히는 방식은 주로 법의 이용이다.

이들이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은 의외로 ‘합법적’이다. 넓은 의미의 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대학과 같은 경우에는 규정을 이용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규정을 제멋대로 바꿀 수 있는 조건(대학위원회들의 장악)의 형성이 중요하다. 국가의 법의 경우, 예컨대 국가보안법 같이 이전 시대에 물려받은 낡은 것을 포함한 공적인 성격의 법도 이용되지만, 명예훼손 고소·고발과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같은 사적인 성격의 것이 이들의 고유한 영역이다. 파업노동자들을 망가뜨리는 것이 파업관련 공법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성격의 손해배상청구소송임을 생각해보라.


6) 무척 꼼꼼하다.

보통 사람은 알기 어려운 법을 이용하는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들이 꾸미는 일에 매우 꼼꼼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곳에서 약점을 찾고,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을 새로 개발하여 사람을 괴롭힌다. 마치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을 늘 연구하는 것이 이들의 일인 듯하다. 이들이 이런 꼼꼼함을 생산적인 곳에, 사람들에게 유익한 곳에 썼다면 어떨까. 하지만 이런 ‘낭비’는 일어나지 않으니 ‘대한민국’이여 안심하라. 이들은 남을 괴롭히는 일 이외에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꼼꼼하므로!


7) 사회에 대한 책임감은 전무하다.

그렇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 좀더 확대해도 자신과 관련된 아주 조그만 범위의 사람들의 '이익'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 너머의 사람들, 즉 일반적인 사회는 전혀 관심 밖이다. 아마 눈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죽는다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사회적 싸이코패스이다.  이들이 '대학 발전'을 말하고 '국익'을 말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사람은 저 앞의 3)번을 다시 읽어보라.


8) 분열을 조장한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하고도 연합할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구라도 배반할 수 있다. 아래 사람을 쓰더라도 말 그대로 '아낌없이' 부려먹는다. 절대로 그 사람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당연한 귀결로 이들이 가는 모든 곳에서 친목과 화합이 깨진다. 그 자리에 메마른 이기주의만이  독버섯처럼 피어난다.

9) 표면에 무척 신경을 쓴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은 없으면서도 사회 일반에 내세우는 자신들의 이미지는 무척 중시한다. 사실 실력보다는 이러한 이미지가, 허구가, 속임이 이들의 지위를 유지시킨다. 그래서 이들은 주류 미디어와 무척 사이가 좋다. 주류 미디어가 이들의 이미지를 좋게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10) 목적은 오로지 돈이다.

이 모든 특성들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돈에 대한 욕망이다. 아마 이들은 자본주의가 양성하는, 사적 소유에 대한 욕망의 최후의 화신들일 것이다. 사적 소유에 대한 집착이 이보다 더 발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이제 사적 소유의 역사가 일정한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들이 존재하면 할수록 사회가 망가진다는 것을 사회가 알게 될 때, 심지어는 ‘대한민국 국민들’도 알게 될 때 이들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은 끝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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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의 경우처럼 공통적인 것은 두 개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하나는 존재론적 시간, 즉 존재 자체의 특성이다. 즉 존재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 및 그로 인한 (그 부분들의)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몸들의 조우.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시간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에 새롭게 형성된 조건과 연관되며 기존의 그 어떤 형태의 공동체들(혹은 그것을 자임한 것들)이 가졌던 것과도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 성격은 다음으로 구성된다.
 
1. 규모의 전지구성.
과거의 공동체들에게는 항상 외부가 있었던 반면에 이제는 외부가 없다. 교환행위, 교환가치를 발생시킨 그 행위는 처음에 외부의 존재로 인해 가능했다. 그리고 외부가 관계의 풍부화를 가져오는 한에서 교환의 전면화는 문명화하는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한편으로는 과거와 같은 형태의 외부(초월적 형태의 외부)는 사라진다. 그러나 권력화된 사회적 관계(소외)의 형태로 모든 원자화된 개인들을 감싸는 공기와도 같은 새로운 외부가 등장한다(선험적 외부). 이 새로운 형태의 외부는 자본과 그 운명을 같이 한다.

2. 무매개성, 직접성

외부가 사라진 지금 모든 것은 내적 연관이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지구적 생산기계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발생한다. 이는 권력화된 사회적 관계인 자본을 안에서부터 붕괴시키는 잠재력을 가진다. 과거에 자본이 나름 대로 외부와의 관계를 맺어주는 기여를 했다면, 이제 자본은 내적 연관에 벽(라이센스, 특허권, 지적 재산권 등으로 생산기계에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존립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그 존재 자체가 이러한 벽이 되어간다.

3. 특이성
맑스에 따르면 모든 사용가치는 모두 이질적이며 같은 척도로 잴 수 없다. 자본은 이를 가치(교환가치)로 덧코드화함으로써 척도에 종속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사용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러한 덧코드화의 조건은 화폐에 의한 매개이다. 이 매개는 맑스에 따르면 국지적 성격을 띠는 사용가치에 사회 전체와의 연관을 부여한다. 이제 탈근대에 형성된 전지구적 규모의 사회적 결합은 화폐에 의하지 않고도 하나의 생산행위나 생산물에 세계 전체와의 연관이  담기도록 한다. 따라서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특이성이 발생한다. 모든 생산요소들과의 연관 속에서 발생하는 특이성. 마치 시의 경우 전체의 맥락에서 특정 단어나 어구의 특이한 의미가 생성되는 것처럼. 이 특이성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 연속적 변이, 연속적 재특이화로 열려있다. 따라서 공간적 외부가 사라진 대신 시간적 외부가 열린다. 이는 길이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측정이 불가능한 ‘때’의 시간이다.

4. 주체성
자본은 생산주체와 생산의 객관적 조건의 분리에 기반을 둔다. 이 주객분리가 바로 원자화된 근대적 개인의 조건이다. 근대적 개인에게서는 주체성이 객체와 분리되어 있으며 화페의 매개를 통해서만 결합된다. 따라서 그러한 매개의 불필요함은 근대적 자아의 조건을 무너뜨린다. 이제 주체와 객체는 이미 결합되어 있다. 오직 자본과 기타 권력들의 위계화, 분할 등의 작업에 의해서만 분리된다.  이제 모든 생산은 잠재적으로 주체성의 생산이며 새로운 삶형태의 생산이다. 삶이란 결국 주체성의 존재방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맑스가 읽어내는 자본의 사명은 자본주의 이전의 공동체 사회에서와는 달리 사회 전체와의 연관을 매개 없이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개인' 혹은 자유로운 개인성의 잠재적 조건을 생산력 발전의 측면에서 형성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더 덧붙일 수 있다.

-- 공통적인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 시대에 자본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주요한 지형이다.
-- 자본은 공통적인 것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며, 다중은 공통적인 것을 새로운 삶형태를 창조하는 활동(여기에는 저항도 포함된다)의 조건으로 삼는다.
-- 공통적인 것이 자본의 착취의 대상이 될 때 그 생산물은 탈특이화되어 측정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자본을 구성하는, 척도에 종속된 가치.
-- 다중이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두어,  공통적인 것 속에서 생산할 때 그 특이한 생산물은 측정불가능한 가치, 즉 초과이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삶형태의 창출을 구성하거나 그러한 구성으로 이어진다. 
-- 자본이 아무리 노력해도 공통적인 것이 자본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다중이란 공통적인 것이 가진 창조적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만남의 방식이며, 미리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특이성의 선을 따라서 탐구, 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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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 1 ― 빗처들의 문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정책이나 기업들의 고용 관련 정책에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신과 감성에 내화되어 특정 유형의 주체성―가따리가 ‘자본주의적 주체성’이라고 부른 것―을 산출하는 문화현상이기도 하며, 이런 의미에서 삶권력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내가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처음, 그리고 어떤 이론적 인식의 매개 없이 직접 감지한 것은 대학에서 일어난 변화에서이다. 이 변화는 90년대 중반 정도부터 시작되어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었다. 나는 이러한 문화가 대학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되어 있다는 것을 곧 확인하였으며, 현 대통령의 당선도 이러한 문화가 ‘대한민국’에서 일정하게 지배적이 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신자유주의적 문화의 한 측면을 ‘빗처들의 문화’라고 부를 것이다. 빗처(Bitzer)는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의 소설 『어려운 시절』 (Hard Times, 1854)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하나로서 공리주의적 원리에 입각하여 설립된 학교의 우등생이다. 그는 공리주의와 정치경제학의 원리 위에서 철저하게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하는 인물로 키워진다. (“우리가 호소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자기이익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잡고 있어야 할 유일한 것이지요.”) 그의 모든 행동은 냉철한 이해타산의 결과이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여 정상적인 업무를 보는 것 외에 밀고자 노릇을 하여 보너스를 더 받으며 살아간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후에 어머니를 구빈원(workhouse, 빈자들을 수용하여 저렴한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곳)에 보내는데, 1년에 겨우 차[茶] 반파운드를 어머니에게 보내드리면서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정치경제학의 법칙을 자신이 어긴 것에 스스로 못 마땅해 한다. ‘공짜’로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연합하는 일과 관련해서도 밀정 역할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존재의 제일의 고려사항”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다닌 학교를 설립한 사람의 간곡한 부탁을 냉정하게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학교에서 공부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돈을 냈어요. 거래였지요. 졸업하면 거래는 끝난 거지요.”

지금 한국의 대학은 바로 이러한 빗처들의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대학 운영자들, 교직원, 학생 할 것 없이 다 이 문화에 푹푹 절어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빗처와 같다는 말은 아니다. ‘빗처들’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빗처들이 ‘인격’(person)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빗처는 모든 사람들의 주체성에, 그 정신과 감성에 작용하는 하나의 경향, 하나의 힘이다. 실제로 개인들은 이 힘, 혹은 경향과의 관계에서 스펙트럼의 형태로 분포된다. 한 쪽 극단에는 거의 빗처의 현신이나 다름없는 개인들이 있고 다른 쪽 극단에는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에서도 그렇듯이) 빗처의 것과는 전혀 다른 원리로 사는 개인들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 사이의 어떤 위치에 있다. 이렇듯 어떤 식으로든 이 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바로 ‘빗처들의 문화’는 현재 지배적인 문화이다.

문교부, 교육부, 교육인적자원부, 교과부로 이어지는 교육 관련 부서가 줄곧 대학을 실질적으로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대접해 주었다는 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의 대학운영자들의 문화는 항상 빗처들의 문화였으므로, 이들에 관해서는 새로이 말할 것이 없다.[각주:1]  주목할 것은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 빗처들의 문화가 정착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주체성,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으로 환원된 주체성이 형성되는 현상이다.

이제 대학을 새로운 삶을 살거나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성장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찾기가 쉽지 않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예리하게 갈고 닦겠다는 학생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취업에 대한 걱정에 강박되어 있거나(소극적 유형)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학점을 포함한) ‘이익’을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적극적 유형). 학생들의 대학생활이 이 방향으로 유도되는 배경에는 사실 대학 내 신자유주의자들의 대학운영 방침 이외에도 청년실업이라는 사회적 사실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대학생활이 청년실업이라는 문제를 절대로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청년실업은 자본의 논리 및 지배층의 신자유주의적 태도와 연관된 사회적 문제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은 사회적인 방식으로만, 즉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의 증가와 집단적인 이론적․실천적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만 생각해서는, 자신의 이익만 쫓아서는 상위 몇 퍼센트를 제외하고는 취업에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로서의 청년실업은 그대로 온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위 몇 퍼센트가 되려면 실력이 필요하다. 자본이 바로 이 실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학생들이 대학을 다니면서 모은 이익들이 ‘하이 스펙’이란 이름으로 취업에 중요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실력과는 다른 것이다. 경쟁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실력을 쌓는 것은 우연히 중복될 수는 있지만 원리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전자는 고정된 척도를 전제하지만, 후자는 고정된 척도를 부단히 초과하는 노력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실력이니 뭐니 하기 전에 개인들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으로만 환원시키는 빗처들의 문화는 현대 사회의 핵심적 특성인 소통 및 네트워킹 능력의 양성에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자본의 ‘이익’에 반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자신의 증식을 위해 요구하는 것들 중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 이른바 ‘인간 자본’(human capital) 즉 개인들의 지적, 정신적, 감성적 능력인데, 빗처들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능력의 양성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교수 또한 빗처 같은 존재로 양성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회적으로 교수에게 요구되는 일이란 실재의 어떤 측면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창출하는 것(연구)과 학생들의 활력 즉 지적․감성적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교육)이다. 연구는 인류 전체를 향해야 하고 교육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향해야 한다. 칸트는 전자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불렀고 후자를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이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새롭게 양성되는 교수형상은 이 공적, 사적 차원 모두로부터 일탈한다. 이른바 업적평가는 교수들의 연구 및 교육을 증진시키기보다는 교수들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존재로 축소시켰다. 연구의 경우 그 내용보다는 개인의 업적평가 점수로 환원되는 측면이 더 중요해지고, 강의의 경우도 강의가 가진 실제적인 교육효과보다는 개인의 점수로 환원되는 측면만 중요해진다. 요컨대 평가는 내용으로부터 분리되어 순전히 형식적이 되고(아주 낯익은 관료화의 과정이다) 그럼으로써 교수의 활동을 증진시키는 촉진제가 되기보다는 통제의 메커니즘으로서 작용한다.

이와 더불어 이른바 대학에서 일어난 고용의 불안정화 및 비정규직화는 교수들의 지위를 현저하게 약화시켜 노예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었고, 이와 함께 대학본부를 거점으로 하는 중앙 권력이 공고화되었으며 이 중앙 권력은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문구들로 사회를 기만하면서 대학의 탈민주화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대학마다 그 정도나 양태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민주적인 대학이 하나라도 있는가?

제대로 된 학문연구는 오로지 자유로운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은 이제 정리해고된 지 오래다. 제대로 된 교육은 오로지 선생과 학생의 애정 어린 상호작용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도 벌써 퇴출당했다. 주위에 만나는 사람을 (아무나!)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자신의 점수(이익)가 올라가는 컴퓨터 게임이 있는데, 빗처들에게 사회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죽여야 할 주위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원리적으로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이 ‘챙기는’ 그 이익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생산된 것이라는 자본주의의 상식에도 눈을 닫는다. 일종의 사회적 싸이코패스이다. 그렇다면 빗처들이 사회를 장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자본의 산물들이 자본의 토대를 갉아먹는 시대를. 니체가 말한 최후인들의 시대를. ♣




  1. ‘사유재산’은 물론 국립대학교의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국립대의 운영자들 중 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의식을 투철하게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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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namjah

도둑

분류없음 2011/02/21 21:58


몇 주 전에 집에 도둑이 들었다. 밤새 후배들과 술을 신나게 마시고 이른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찬바람이 어디선가 훅 불어온다. 보니까 현관 맞은편의 현우 방에 창문이 조금 열려 있다.

현우가 왔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현우 방과 안방의 옷장에서 옷들이 다 끄집어져 나와 있고 방안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찾은 흔적이다. 아마도 현금이나 귀금속을. 현우가 아닌 도둑이!

물론 나의 집에는 그런 것이 없다. 옷장이 아니라 다른 어디에도 없다. 찬장에도 없고, 냉장고에도 없고 신발장에도 없다. 현금은 내 호주머니의 지갑에 든 게 전부이고 내 소유의 귀금속이란 아예 없으므로. 크기 대비 가격으로 보자면 현재 나의 최고의 재산은 거실에 놓여있는 맥북인데 이 도둑은 다행히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는 유효하긴 하지만 안 쓰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지갑에 넣어 양말 서랍에 넣어 놓았었는데 이 카드도 멀쩡하게 그냥 있다.

현우 서랍에는 '딸라'가 조금 든 지갑과 별로 무게가 안 나가는 평범한 반지가 두 개 있었는데 (이는 그 당시 나는 몰랐던 일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멀쩡하다. 이 도둑은 옷장만을 뒤지는, 아마 매우 전문화된 '프로'들인가 보다.

도둑이 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밤새 마신 술을 깨야 하니 일단 잠을 청했다. 오후, 하고도 좀 늦게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일종의 '수사'를 해보니 도둑은 현우 방의 창문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내 집은 아파트 4층이라서 스파이더맨 도둑의 표적인 될 수 있는 높이인데도 창문을 전혀 잠가놓지 않는 나의 습관이 도둑을 초청한 것이다. 도둑은 아마 바깥으로 기어 올라와서 현우 방 창문으로 들어와 아주 짧은 시간에 옷장 두 개를 뒤진 후 현관문으로 재빠르게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무슨 집이 가진 게 이렇게 없느냐고 투덜거렸을까? 아니면 일종의 동정 비슷한 말을 욕에 섞어 뱉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나는 이들에게 아무런 부정적 계열의 느낌―찝찝함, 불쾌함, 두려움 등등―을 느끼지 못했다. 도둑이 들고 나면 기분이 나쁘다는데, 찝찝하다는데, 무섭다는데... 처음에는 술에 취한 상태라서 배짱이 커졌기에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술이 깬 다음에도 여전히 나는 도둑들에게 별다른 부정적 감정을 못 느끼고 있다. 현재까지 그렇다. 개인적으로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미세하게나마 현우 방과 안방에서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지우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지금도 그냥 있다. (미세해서 식구들은 모른다.) 발자국이 찍힌 하얀 색의 셔츠들은 빨아서 다시 입고 있다. 내가 기분이 안 좋다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다.

무슨 현장보존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신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여러 집을 다녀갔는지 며칠 후에 도둑을 조심하라는 전단을 관리실에서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전단에 ‘우리 아파트에 도둑맞은 세대가 있다’는 말은 없지만 말이다. 아마 어느 집에선가는 의외로 큰 피해를 입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쳐도 이 도둑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물론 내가 집에 들어오다 도둑과 맞닥뜨렸으면 큰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나는 한참 동안을 생각했다. 이런 내가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설명인지 새삼스런 발견인지 모를 것에 도달했다. 신자유주의적 풍토가 대한민국에 뿌리를 박아온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주위에 합법의 탈을 쓴 뻔뻔스럽고 지저분하며 잔인하기 짝이 없는 도둑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런 나에게는 그저 어둠 속에 숨어있을 뿐인 스파이더맨 도둑들은 정말로 겁많은 좀도둑으로밖에는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 주위에 즐비한 신자유주의적 유형의 도둑들은 거의 모두가 사회의 이른바 ‘지도층’에 속하거나 돈이 많은 자들이다. 이들은 과거의 군사독재 유형과 다르다. 군사독재자들이 법을 초월하는 무력을 그 권력의 토대로 삼는 반면에 신자유주의적 도둑들은 합법을 형태를 빌어서 모두의 것(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그리고 다른 개인들의 것(사적인 것)을 자신의 재산(사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들이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 ‘변별적 특징’이 어디에 있느냐가 핵심이다.) 이러한 식의 도둑질을 점잖은 용어로 ‘사유화’(privatization)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골프장 건설자가 필요한 땅을 80%(85%인가?) 확보하면 나머지에 해당하는 주위의 땅을 강제로 수용할 수 있게 법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골프장은 공적인 것이 아닌데 공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라나. 그러면 나머지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땅과 집을 강탈당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재개발도 이와 비슷한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용산 참사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또한 (한국에서는 대학들이 심하게 뻥튀기로 선전되어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일이지만) 많은 대학들에서 사회 전체를 위해서 써야 할 자원을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용하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 현상은 또 어떤가?

이러한 ‘사유화’는 고전적인 자본가가 행하는 '착취'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착취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착취의 증대의 과정은 곧 생산력의 증대의 과정이다. 그러나 ‘사유화’를 행하는 이들 신자유주의적 도둑들은 생산력을 증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을 사유화를 통해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을 낮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전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생충들이다.

사실 지금 선진국들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유독 대한민국이 극성스럽게 신자유주의적이다. 보라! '사장님'이 일반적인 호칭이 된 나라, '부자되세요'가 인사인 나라, 무슨 짓을 해도 돈만 벌면 최고인 나라, 이런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는가? 그런 나라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적 유형의 도둑들의 천국에 다름 아니다.

이런데도 내가

이쁘게도 옷장만 뒤지고 가주신 이 도둑들에 대해,

불법을 합법이라 우기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나름대로 떳떳하게

근대식의 '절도기술'로 승부하는

이 시대착오적인 도둑들에 대해

기분 나쁜 느낌을 특별하게 가질 수가 있겠는가.

물론 나는 이들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나누는 것은 덕이지만, 빼앗는 것도 덕이 아니고 빼앗기는 것도 덕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나의 것을 이들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이들과 맞부딪치면 아마도 싸울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싸우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합법적인 신자유주의적 도둑들과 싸우는 일이다.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자들은 스파이더맨 도둑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서 멀쩡하게 사회인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사회를 위해서는 단 한 조각의 덕 있는 행동도 하지 않는 바로 이 자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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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에 관하여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철학에 관한 Antonie Vos라는 사람의 설명을 읽다보니 새삼 형식논리의 협소함이 느껴졌다. 플라톤을 분석철학의 기호논리학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스코투스의 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스코투스의 중요 개념인 ‘synchronic contingency’에 관하여 ‘M (ptk & –- ptl)’와 같은 기호를 동원하여 왈가왈부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얼음은 물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은 수증기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자신을 ‘과학적’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실상은 대상에 대해서 어떤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발언능력을 논리의 형태로 능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 논리체계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다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발언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형식논리 혹은 기호논리란 수증기도 아니고 물도 아니며 얼음, 그것도 일정하게 표준화된 모양으로 깎아놓은 얼음들의 체계에 불과하다. 아무리 복잡해도 그렇다. 이걸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지극히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된 몇 개의 공식으로 환원하겠다는 어이없는 오만에 불과하다.

내가 보기에 스코투스의 ‘synchronic contingency’(‘공시적 우연’이라고 옮겨야 할까?)는 들뢰즈의 잠재성, 푸꼬의 삶의 활력과 통하는 중요한 통찰이다. 가능성들의 공존, 혹은 힘(potency)이 가진, 실재를 바꾸는 능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겨우 논리적으로 맞고 틀림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다니!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만일 그렇게 수학을 닮고 싶으면 『윤리학의 스피노자에게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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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발전’이라는 것


한국의 대학들이 신자유주의화되면서 생긴 현상 중의 하나가 ‘학교발전’이라는 목표의 물신화(物神化)와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한 실제적인 노력들이다. 그리고 이 노력들 중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학교발전기금’의 조성이다.

아마 현재의 한국의 대학들을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대학의 이러한 노력들을 보며 ‘한국의 대학들이 학교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발전’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게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후 한국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듣기 좋은 말들을 그저 말로만 활용하는 것이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의 신자유주의자들이란 사실을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점은 제쳐 놓기로 하자. 우선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대학의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학교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학교발전'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대학의 사회적 기능인 교육 및 연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아니면 있더라도 그 관계가 부차적이거나 주변적이라는 점이다. 학교에 따라서는 교수업적평가의 평가영역에서 ‘학교발전에의 기여’라는 범주가 교육범주 및 연구범주와 나란히 존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발전기금을 내는 것이 ‘학교발전’에 기여한 하나의 사례로 인정되어 일정한 점수를 받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대학도 있다. 그러나 평가영역에 들어있든 아니든, 교육 및 연구와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미미한 ‘학교발전’이라는 것이 많은 대학들에서 학교정책의 중심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예컨대 한 교수가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것을 통해서 ‘학교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 보직을 하는 것? 학교발전을 위한 제안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은 결국 다시 ‘학교발전’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로 환원된다. 학교발전이 교육과 연구의 증진을 의미하는 경우라면 보직을 하는 것이 교육과 연구의 증진을 위한 행정 지원에 자신의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대신 교육과 연구를 어쩔 수 없이 소홀히 했으므로 그만큼 어쩔 수 없이 기여를 덜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교 발전이 교육과 연구의 증진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이것을 위해 열심히 보직을 한 경우라면 교육과 연구의 증진을 위한 행정 지원과는 관계없는 일에 열심히 ‘봉사’한 것이 된다.

그러면 교육 및 연구의 증진과 무관한 학교 발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바탕에서는 이것이 사유화(privatization)의 증진―원래 공적인 성격을 가졌던 대학의 많은 자원들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이는 것―에서 벗어난 것일 수가 없다.

대학에서 사유화가 나타나는 양태는 매우 다양하다.

―각 학문분야들(학과들)이 고르게 발전해야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 되는데 특정 학문분야에 재정지원이 몰리고 다른 분야들은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고사당하여 전체적으로 균형이 상실되는 것. 대학이 특정 분야나 학과의 전유물처럼 된다.

―연구에 들어간 자원이 개인의 것이 아닌 데도 연구의 결실을 사회의 공통적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만드는 것이 용인되고 더 나아가 조장되는 것.

―공적인 통로로 거두어들인 발전기금의 사용에 대해 학교권력을 구성하는 소수만이 의사결정권을 가지는 것.

이 이외에 학교마다 여러 상이한 양태의 사유화가 가능하다. 교수채용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도 일종의 사유화에 해당할 것이며, 행정과정의 민주성이 훼손되는 것도 소수의 대학 운영자들의 권력에 학교 전체의 운명이 맡겨진다는 점에서는 사유화이다. 빗처(Bitzer)[각주:1] 같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한국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풍토에서 이것 말고도 어떤 형태의 사유화가 더 진행되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의 대학들의 사회적 기능(교육 및 연구)을 크게 망가뜨리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선 대학 교수들이 연구할 조건이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일부 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교수들의 연구는 ‘학교발전’과 무관하므로 ‘학교발전’이 강조될수록 그만큼 무시당한다. 또한 ‘학교발전’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비대해지는 학교권력―이는 독재 유형에서 민주공화국 유형까지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이 동반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와 관료주의는 연구에 필수적인 자유로움을 박탈하고 심지어는 잡무의 과도한 부과를 통해 연구할 시간마저도 박탈한다.

교육 또한 무시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유화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들어가야 할 돈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발전기금’은 특히 과도하게 쌓여 있는 경우에는 마땅히 교육에 쓰였어야 할 돈이 쓰이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 또한 ‘학교발전’에 보탬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배척받는 학문영역이나 학과의 학생들은 멀쩡하게 등록금을 내고도 그에 합당한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기 쉽다. 실상 연구영역은 (그 중 일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연구자와 학교측에 사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교육 영역은 ‘돈’이 들기만 할 뿐 나오는 게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대학에서 가장 천대받는 것이 교육이다. 이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에도 마찬가지이며 아마 전 세계적으로 그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회가 대학에 기대하는 바와 다르며, 학생들의 등록금을 대는 학부모들이 기대하는 바와도 다르고, 심지어는 자본이 기대하는 바와도 다르다. 개별 자본가들의 관점은 다를 수 있지만, 자본 전체의 관점에서는 진정으로 실력있는 학생들이 다수 배출되고 증진된 연구의 결실이 모든 기업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재와 같은 대학의 ‘발전’행진이 아무런 제지 없이 계속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1. 빗처는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며 자신의 스승이나 심지어는 어머니와도 오로지 이익의 계산에 근거한 관계를 맺는다. 학교를 나온 후에는 공장주이자 은행가인 바운더비(Bounderby)의 회사 내 밀정 노릇을 하는데, 보수가 짭짤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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