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외부'
권력과 '외부'
권력은 내부적이다. 힘을 행사하는 측(지배세력)과 그 힘을 받는 측(피지배세력)의 통합적 관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바로 내부이다.
공동체(사회)의 외부는 전통적으로 적과 동맹세력으로 구분된다. 적대 혹은 동맹관계는 권력을 구성하는 관계는 아니다. 그 관계가 통합체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병행하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앤다.
권력을 내부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이러한 외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권력은 외부의 적을 내부화하는 강한 습성을 가진다. 내부의 일부(저항세력으로 된 피지배세력)를 적으로 외부화한다고 말해도 된다. 이 외부는 권력에 의해 형성되는 가상의 외부이지, 실제적인 외부가 아니다. 성주의 일을 놓고 말하자면, 권력(정부+여당+주류 언론 등등)이 ‘외부 세력'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성주군의 경계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겠지만 (사실 성주 내부냐 외부냐는 혹시 따질 일이 있더라도 성주 군민들이 따질 일이지 국민 전체를 내부로 삼고 있는 국가 차원의 권력이 따질 일은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허구적으로 내부화한 외부의 ‘적’이다. 사드 문제와 관련하여 말 그대로 ‘외부’는 사드의 실행 주체인 미국 말고는 없다. (물론 미국은 대한민국에서는 ‘적’이 아니라 ‘동맹국’으로 규정되는 외부이다.)
본래 외부인 적을 내부화하는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외부의 적의 존재를 빌미로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정지시킴으로써 내부의 저항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주된 방식이었다. 이는 냉전 체제와 그 꼬리 체제인 남북체제를 보면 안다.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들도 그 가시적 형상(외부를 향한 움직임)과는 달리 본질적으로는 내부의 저항세력을 표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외부를 내부화하는 방식에 속한다.
권력이 애초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통합체의 일부(지배세력)가 전체를 재현(대표)하는 것처럼 만드는 메커니즘 때문이다. 1권력을 쥔 세력, 즉 전체를 재현(대표)할 수 있는 세력은 전체 바깥의 존재 즉 외부를 규정할 자격을 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전체 재현의 환상은 피지배세력이 지배세력과 맺는 통합적 관계에 기반을 둔다. 만일 피지배세력이 지배세력과의 통합적 관계에서 빠져나가 버리면 전체라는 환상은 사라지며, 빠져나간 피지배세력이 그로 인해 어떤 운명을 맞든 권력관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는 사실상 권력의 존재는 피지배세력에 의존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피지배세력이 저항세력으로 변하는 순간 권력의 존재는 불안정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류의 역사에는 권력이 행하는 내부화의 반대 극단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외부화’의 경험이 존재한다. (한번 존재했던 것은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를 비롯한 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원시 사회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사회(공동체) 전체를 ‘일자’(一者)의 이름으로 통제하는 명분과 기원을 사회의 일부가 전유할 수 없는 '외부'―까마득한 옛날에 공동체를 창립한 선조들―에 둔다. 따라서 그 어떤 개인이나 세력도 앞에서 말한 권력과 같은 방식으로 전제를 재현(대표)할 수 없다. 추장은 구심력의 중심이지만 대통령과 같이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갈등의 조정자’(peacemaker)일 뿐이며, 그 능력은 ‘칼’의 능력이 아니라 ‘말’의 능력이다. 다른 한편 정치적 권력을 쥘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사들(warriors)은 ‘전쟁기계’ 2로서 사회 바깥을 향하여 원심적으로 발산되며 내부화되지 않는다. 권력이 목표가 아니라 아니라 전사로서의 명예 자체가 목표가 된다. 이런 식으로 원시 사회는 정치권력의 등장 즉 국가의 등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늘날 원시 시회에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예의 외부화―권력과의 통합적 관계로부터의 엑서더스―가 일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에 맞는 방식을 발명하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긴급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모양 좋은’ 선거를 통해 허용한 그 권력에 의해서 하나하나 내부의 ‘적’이 되고 종국에는 모두 ‘섬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엑서더스가 따라야 할 원칙은 자율의 원칙이다. 즉 나 혹은 우리를, 나아가서 전체를 대표(재현)하는 위치를 그 어떤 세력에게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수의 지식인들과 많은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태로 믿고 있는 대의제에 대해서 칸트 식의 비판을 넘어 니체 식의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