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 (2)
* 아래는 브라이언 마쑤미(Brian Massumi)의 , 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의 99개의 테제 가운데 테제21부터 테제40까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원문은 https://manifold.umn.edu/read/a9a025ba-dd4f-46ac-a149-f6bdd7b07399/section/5a143d0f-7f69-4b07-8a20-44e5eac69f0f#toc에서 볼 수 있다
브라이언 마쑤미
테제21
탈자본주의적 과정을 추동할 수 있는 대안 가치는 창조성이다.
주석
창조성이라는 용어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전유된 것이 사실이다. ‘혁신’과 ‘창조적 자본’이라는 말이 그 사례이다. 그런데 자본의 창조성의 질은 이와 연관된 ‘창조적 파괴’라는 어구에서 가장 잘 전달된다. 이는 생성 중인 삶을 ‘경제화’하는 데서 행사되는 본래적 폭력을 표현한다. 그러나 경제화와 무관하게 내재적 외부에서 작용하는 삶의 생성 그 자체를, 삶의 창조적 진전을 살펴볼 수 있다. 삶의 과정 또한 자기추동적이며 자신을 축으로 전환하면서 스스로 반복한다. 초과를 중심으로 앞으로 움직인다.
테제22
자본주의의 수량화에 연료를 제공하는, 질적인 삶의 잉여가치가 존재한다(Massumi 2017b)
보조정리a.
경제화란 삶의 잉여가치를 자본주의적 잉여가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보조정리b
질적인 삶의 잉여가치는 경제 체계에 주어질 수 있는 만큼이나 빼내어질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잉여가치로 전환되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기 전에라도 발을 두 방향의 흐름 모두에 담그고 자본주의 너머를 미리 그려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너머에서는 삶의 잉여가치가 축적에 복무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량화가 삶의 잉여가치에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테제23
암호화폐 같은 기존의 대안경제 모델들은 시장의 맥락에서 정의되는 화폐를 모형(母型)으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 암호화폐들은 그 정의를 넘어서 잉여가치 창조의 동학을 향한다.
주석a
암호통화의 설계자들은 종종 화폐의 3중적 정의에 명시적으로 호소한다. 그 배경으로 부각되는 것은 암호화폐의 투기적 동학이다. 암호화폐들 자체가 상품이 되고 투기를 하기에 무르익은 금융도구들이 된다. 요컨대 자본이 된다. 이는 비트코인의 역사를 보면 명확하다. 비트코인의 뒤를 이어서 2015년 무렵에 시작된 새로운 암호통화들의 폭발적 발행과 함께 초기 코인 공개(“initial coin offering”, ICO)가 점점 더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IPO(initial public offering, 기업공개)를 모델로 한 ICO는 암호화폐를 증권과 유사한 것으로 취급한다. 달리 말하자면 자기자본(equity)의 한 형태로 취급한다. (자기자본이란 잉여가치와 이윤이 파생되는 기초자산을 가리킨다.) 양적인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과정 어느 경우에나 이 투기적 동학이 착취의 연료를 공급한다(Sassen 2017). 비트코인의 경우 생산수단(코인을 채굴하는 데 필요한 컴퓨팅 파워)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긴다. 암호통화의 초자본주의적인(hypercapitalist) 투기적 차원과 그 착취의 바탕이며 그에 동반되는, 자유방임주의적(libertarian) 수사(화폐는 모두에게 동등하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 자유방임주의적 담론은 자본의 개념 전체를 가린다. 공정한 교환과 개방성으로 정의되는 시장을 방어하는 듯이 행동하지만, 사실은 자본의 개념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긴다.
주석b
착취를 제거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암호 기반 대안경제 기획 두 개
① Faircoin (https://fair.coop/faircoin/)
② EnergyCoin (개발중; https://medium.com/@RafeFurst/energycoin-d08ddcab4a0c),
태양열 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채굴되며, 코인의 증가된 가치는 코인 소지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마이크로 보장소득(micro–guaranteed income)처럼 균등하게 분배된다.
암호화폐를 집단화하고 그 자유방임주의적 표징을 희석시키는 여러 방식들이 있지만, 대부분 시장의 논리와의 타협을 받아들인다. 최대로 비타협적인 포스트블록체인 대안경제는 이 텍스트의 말미에 제시된다(T93–T98).
테제24
지역화폐는 자본의 투기적 측면을 무력하게 하고 단순한 화폐모델로 복귀하려고 노력한다.
주석
지역통화들(공동체 기반 토큰 체계, 또는 LET[지역교환거래체계])은 화폐에게 있는 측정단위와 교환수단으로서의 측면을 활용한다. ‘보유비용’(demurrage)[통화를 일정 기간 이상으로 보유하면 발생하는 비용을 가리킨다―정리자])나 마이너스 이자를 사용하여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측면을 의도적으로 빼내어 축적을 못 하도록 막는다. 그래도 일정한 불평등 혹은 계급격차가 다시 들어설 수 있다. 중산층이 소유한 희소한 도구나 지식은 시간을 거의 들이지 않고 크레딧을 벌지만 하층계급은 시간을 많이 들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Ingham 2004, 185). 일반적으로는 공동체적인 풍토 내에서이지만 평등한 교환이 그 모순과 함께 신화로서 유지된다.
테제25
공유경제 역시 경제적 투기를 무력화하려고 노력하며 나름대로 평등한 교환의 논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주석
공유경제에서는 공정한 교환이라는 관념이 지역통화의 경우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시간 요소에 다시 부착된다. 공식적 측정단위나 교환수단은 없으며, 가치저장도 없다. 그러나 비공식적 등가 계산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교환되는 서비스에 혹은 필요한 숙련을 개발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들어갔는지를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공식적 통화가 부재하면 시간 자체가 비공식적 통화가 된다. 이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노동 등식(시간= 화폐)을 유지한다(T94, Strat. d). 이는 이윤이라는 요소를 퇴장시키려는 실제적 시도이지만, 경제적 교환이 삶의 시간의 포획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가시화하고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의 기본적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를 정당화한다.
테제26
암호화폐, 지역화폐, 공유경제(우버나 비앤비는 여기서 말하는 공유경제와 관계가 없다)는 대안경제적 노력의 일부로서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구축하는 데 모두 한몫을 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가치를 재가치화한다고 할 수 없다. 모두 나름대로 자본의 등식을 되풀이한다.
테제27
잉여가치의 투기 엔진이 가치의 재가치화에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주석
가치를 재가치화하는 열쇠는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발전된 부문인 금융시장의 동학을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하는 데 있을 수 있다. 바로 그 심장부로 향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테제28
질적 삶가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 자체로 가치인 어떤 것이며, 교환될 수 없는 경험으로서 유통된다.
주석
삶가치는 다른 경험과 교환될 수 없는 만큼 가치를 가진다. 경험의 특이한 색이 그 경험을 삶가치로 만든다. 삶가치는 고유한 발생이라는 질적 성격을 가진 가치이다.
보조정리
‘발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삶가치가 사건적(evental)이기 때문이다. 삶가치를 되찾는 것은 자본의 비(非)순차적 시간[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으로만 축적되는 시간― 정리자]을 다시 삶의 질적 생성의 사건성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테제29
삶가치는 삶의 잉여가치이다.
테제30
자본주의적 잉여가치는 다른 모든 잉여가치가 그렇듯이 결과의 초과를 생성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 관건은 ‘지레로 올리기’(leveraging, 레버리징)이다[금융에서는 차입금을 들여와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을 레버리징이라고 하는데, 이는 여기서 말하는 레버리징의 한 사례일 뿐이다 ―정리자].
주석
레버리징에서 산출은 투입과 직렬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결과는 원인과 같이 놓고 측정할 수 없다. 결과가 창발적(emergent)이기 때문이다. 지레 효과는 ‘더 많이’를 구현한다. ‘더 많이’의 발생은 어떤 개별적인 심층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요인들의 합작품이다. 부분들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산출하는 것은 부분들의 관계가 낳는 효과(relational effect)이다.
테제31
잉여가치의 레버리징은 과정의 심화이다.
주석a
레버리징의 고전적 사례는 임금관계를 통한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생성이다. 노동과정으로부터 가치의 초과분을 걷어내는 것은 투입되는 노동시간과 그 결과로 나오는 생산물의 시장가격 사이의 단순한 등식 이상의 것이다. 이는 노동과정의 심화로부터, ‘생산성’의 증가로부터 나와서 경쟁력 획득을 향한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낳는 것은 주어진 기업과 그 경쟁기업들 사이의 생산성의 격차이다.
주석b
노동과정의 심화란, 삶의 이질적인 형성체들과 수준들에 속하는 외부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삶의 구석구석까지 촉수가 뻗어있는 방대한 요인들이 합쳐져서 더 많은 양을 산출하는 통합적 방식을 단 하나의 수로 총합한 것이 이윤이다.
보조정리
어떤 과정의 심화도는 그 과정에 통합되는 질적 변화치(differential)들이 퍼지는 정도에 따른다.[앞으로 ‘differential’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Δ’로 옮긴다―정리자] 그 촉수를 삶의 장의 틈들로 얼마나 멀리 그리고 어떤 식으로 보내는지에 따른다.
테제32
이윤은 경제적 가치이기 이전에 삶의 잉여가치이다.
주석
이윤은 삶의 질이 영속적으로 증가하는 경제적 수량으로 전환된 것이다. 회계장부들은 이 전환의 지표들이다. 회계장부들은 삶의 잉여가치를 경제화하여 포획하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삶의 잉여가치는 회계장부에 도달할 때 사유재산으로 전환된다.
테제33
임금관계는 자본주의적 잉여가치 생성의 한 사례일 뿐이다. 급속하게 자동화하는 경제에서는 임금관계의 우선성이 점증적으로 위협을 받는다. 인터넷과 금융시장에서는 잉여가치가 관계적 운동효과로서 직접 생성된다. 흐름의 잉여가치(surplus-value of flow)라는 개념이 제안된다.
주석a
인터넷에서 관계적 운동효과는 이질적인 경향들이 복잡하게 서로 작용하면서 화폐화될 수 있는 경향들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데이터 마이닝(채굴)’을 통해 포획됨으로써 생성된다. 생성되는 이윤은 삶의 장 전체에서 일어나는 정동, 주목, 욕구의 흐름들 사이의 교차접촉의 양적 표현이다. 포획되는 삶의 잉여가치는 흐름의 잉여가치이다. 이윤의 양은 시간·노동·투자의 공식적 투입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소비자들이 비공식적 생산자들이 된다. (이들은 데이터를 채굴할 수 있는 장치들의 형태로 고정자본을 제공하기도 한다.) 투입과 산출 사이의 이러한 점증하는 불비례 때문에 노동가치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주석b
흐름의 잉여가치 개념은 “이미 잉여가치를 잉태한” 화폐인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외삽한 것이다. 생성되는 이윤은 구매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이 행위가 “자본의 전반적 운동과 연관되는 방식”의 결과이다(Marx 1991, 463). 잉여가치의 잉태는 자본주의적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포괄한다. 잉여가치의 잉태는 관계적 창발 효과를 생산할 잠재력의 잉태이다. 신자유주의에서는 흐름의 잉여가치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중요성은 유동성(liquidity)에 대한 투자자들의 집착으로 나타난다. 과정의 전체 운동과의 연관을 잉태한 잉여가치의 일반화된 개념을 기계적 잉여가치(machinic surplus-value) (Deleuze and Guattari 1983, 232–35)라고 부를 수 있다.[‘machinic’을 ‘기계적’으로, ‘mechanical’을 이와 구분하여 ‘기계론적’이라고 옮긴다―정리자] 이는 흐름의 잉여가치와 동의어로서, 컴퓨터화 및 자동화와의 중첩을 강조한 것이다.
주석c
노동가치론을 넘어서는 것이 맑스 자신의 저작에 맹아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계적 잉여가치( = ‘흐름의 잉여가치’)는 「기계에 관한 단상」에 나타난 그의 분석을 더 밀어붙인 것이다. 맑스는 자동화를 ‘일반지성’의 대상화로서 분석한다. 여기서는 “사회적 지식”이 “직접적인 생산력”이 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생산력이 단순히 앎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직접적 기관들로서, 실질적 삶의 과정의 직접적 기관들로서 산출되는 정도를 보여준다.”(Marx, 706) “직접적 기관들”이란 자동화된 기계들이다. “알아서 움직이는 노새들”이라고 맑스는 불렀다. 맑스는 몰랐던 디지털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질적 삶의 과정”의 전반적인 운동이 (실리콘밸리에 의해 세상에 풀려서 전지구적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하는 자동코드 노새들 덕분에) 잉여가치의 생산을 자율적으로 추동하는 “직접적 힘”(direct force)이 될 때, 잉여가치와 ‘필요노동시간’의 상응관계는 무너질 정도로 약화된다. 맑스도 이런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 “노동시간을 부의 유일한 척도요 원천으로 설정하면서도 노동시간을 최소로 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자본은 그 자체가 움직이는 모순이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시간을 잉여의 형태로 증가시키기 위해서 필요의 형태로는 감소시킨다.”(Marx, 706) 오늘날 자동화된 데이터마이닝에서 (‘실질적 노동’과 ‘실질적 부’로부터 벗어난) “과잉” 형태의 증가가 가장 극적이 된다. 여기서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는 무한소의 한계치에 도달한다. 인간의 투입은 클릭 한번으로 줄어든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 삶의 과정과 그 (소셜미디어를 통해) 심화되는 관계망에 푹 빠져서, 쉴 때조차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보조정리a
디지털 세계에서는 흐름의 잉여가치가 정보의 잉여가치와 동의어이다.
보조정리b
금융시장은 흐름의 잉여가치 위에서 작동하는 표본적 사례이다.
주석d
파생상품들은 흐름의 잉여가치의 순전한 작동자들이다. 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 유통의 생산물이다.
테제34
Δ들의 레버리징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모든 수준에서의 특징이다.
보조정리a
자본주의적 과정의 Δ생성적 작동방식의 분석은 여러 핵심 이슈들(자본주의적 주체성, 계급, 실물경제의 지위,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의 성격 등)에 광범한 영향을 미친다.
주석a
금융시장의 경우 Δ들은 경제 부문들, 일국 통화들, 금융 도구들, 특히 시간 간격들(이것의 함수로서 모든 다른 Δ들이 변동한다) 사이에 퍼져있는 형태를 띤다. Δ들은 전반적인 운동에서 시간에 따라 서로 상관적으로 움직인다.(테제18) 금융시장들은 Δ들(특히 시간 Δ들)을 흐름의 잉여가치를 생성하는 방향으로 조작한다.
주석b
자본은 여러 형태를 띤다. 임금도 자본의 한 형태(‘가변자본’)이다. 장비도 자본(‘불변자본’)이다. 저작권으로 보호되는 지적 재산도 자본이다. 위신가치(prestige value)도 사회적 자본의 한 형태이이다. 평판도 그렇다. 신자유주의적 계산에 따르면 개인도 자본의 한 형태이다. 금융시장은 이 모든 자본의 형태들(+x) 사이에서 Δ들을 조작한다.
보조정리b
신자유주의에서 개인은 인간 자본(human capital)으로 나타난다.
주석C
개인은 자본의 전반적 운동을 국지적으로 구현하는 만큼 인간 자본이다. 개인은 자신의 인신을 전반적 운동의 축소판으로서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흐름에 몸을 담근다. 개인의 삶의 활동은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퀀텀(quantum)이 된다. 개인이 하는 일은 자본의 운동에 맞추어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급속하게 변하는 일자리시장의 연속적인 파도들을 타고 넘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파도타기가 개인을 흐름의 잉여가치의 인격화로서 형성한다. 개인의 직무기술서(job description)가 삶기술서(life description)가 되어 삶의 장을 구성하는 질적 Δ들을 전략적으로 조작하게 된다. 근본적인 과제는 정보의 잉여가치를 획득하여 레버리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성의 잉여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인식의 잉여가치의 생산도 포함된다.
이러한 삶의 잉여가치를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과정이 포획한다. 인간 자본의 한 단위는 (자본의 고유한 역동적 자기추동의 한 기능으로서 자본의 전반적 운동에 포섭되는) 삶의 잉여가치의 퀀텀이다. 인간 자본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를 낡은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노동자 형상을 대체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발명되었다. 자본에 의한 포획을 자발적 행동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개인 기업가”(entrepreneur of oneself)라는 단 하나의 형상으로 환원된다(Foucault 2008, 224–26). 자본에의 연루가 개인의 삶의 근본적인 실존방식이 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노동자-자본가 적대를 대신한다. 이것이 체제의 외적 한계(전통적인 말로는 ‘모순’)를 표시하는 적대를 내부의 경제적 작동자로 내화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보조정리c
금융자본은 메타-자본(meta-capital)이 된다(Bryan and Rafferty 2006, 13).
주석d
금융자본은 자본의 정수로서, 잉여가치의 추동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금융 부문은 실물경제로부터 분리된다. 흐름의 잉여가치를 메타 수준에서 풀어놓는다. 생산적 경제의 ‘기초자산’(underlying assets)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이러한 자립화는 파생상품(옵션들, 헤징hedging, 신용파산스왑credit default swaps 등)의 형태를 띤다. 옵션과 헤징에서 이윤은 기초자산의 상하운동에 투기함으로써 만들어진다. 휘발성 자체를 기반으로 자본화하는 것이다. 신용파산스왑에서는 기존의 자산들을 나누고 재결합함으로써(‘트랜칭’tranching) 이차적 금융도구들이 구축된다. 전략적 혼합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이다(이것이 증권발행을 통한 자산유동화securitization이다). 그런데 번들로 묶인 자산이 거래됨으로써, 새로운 층위의 자산이 전적으로 파생적으로 창출된다. 파생상품의 가치는 기초자산의 소유와도 무관하고 그 개별적 평가와도 무관하게 변동할 수 있다. 자산유동화는 바로 투기로 이어진다. 사실 기초자산이 일반적인 의미의 자산일 필요는 없다. 신용파산스왑의 경우에는 부채(주택저당대출mortgages, 자동차할부대출car loans, and 학자금대출student loans이 가장 주된 사례들이다)가 기초자산이 된다. 이차적인 부채시장이 부채를 (정상적인 이자 낳는 자본보다 더 강력한) 신용도구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마법을 부린다. 자본의 이러한 메타수준에서는 자산과 부채 사이의 구분이 삭제된다. 이와 함께 생산적 경제활동과 비생산적 경제활동 사이의 구분의 중요성도 삭제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특징은 금융자본이 생산적 경제로부터 점점 더 벗어나는 경향이다. 그래서 이제는 생산적 경제가 금융자본에 비해서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를 정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경제의 이 두 영역은 여전히 상대를 중심으로 돌지만, 역관계는 뒤집어졌다. 이런 상황은 휘발성을 증가시킨다. 이는 흐름의 잉여가치를 조작할 능력을 증가시킨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마치 고양이인 양 계속해서 공중에 던진다. 땅에 제대로 발을 딛고 착지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에서는 민스키(Herman Minsky)의 말처럼 높은 위험도의 휘발성 파도타기가 경제에 통합되어서 이제 “안정성이 불안정성을 낳는다”(“stability is destabilizing”)(Minsky 1982, 26). 이렇게 보면 ‘유동자산화/증권화’(securitization)는 형편없는 자본주의적 농담이다.[‘증권’을 의미하는 ‘security’에는 ‘안전’이라는 의미가 있다―정리자]
보조정리d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화가 아니라 금융을 모형으로 하여 출발하는 대안경제가 ‘파생물’(‘파생상품’이라는 경제적 의미보다 넓은 의미로 취한 것)의 논리를 기반으로 탈자본화할 수 있을 것이며, 생산주의(productivism)와 노동 패러다임을 넘어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 패러다임은 자본주의 정치경제와 전통적인 맑스주의 정치경제 사이에 적-동지 간 유대를 이룬다.) 대안경제 기획은 창조적 놀이(creative play)의 패러다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주석e
금융거래의 디지털 자동화는 데이터 분석을 가속화함으로써, 금융거래의 회전속도를 높임으로써, 흐름의 잉여가치의 역할을 강화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광속으로 격상시킨다. 잉여가치 생산이 비등한다. 기계적 잉여가치 생산이 인간의 의식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점점 더 큰 자율성을 얻는다. 이 현상에는 다른 형태의 잉여가치가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개입이 바람직하거나 필요한 의사결정 지점들이나 압박 지점들이 항상 존재한다. 그 복잡성이나 속도가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전통적으로 그 예외성을 정의하는 데 사용한 수단(숙고를 통한 추론, 정연한 합리주의)을 채택해서는 인간의 개입이 이루어질 수 없다. 당일매매 거래자들(day traders)이나 장내거래자들(floor traders)은 ‘감’(gut feeling)이나 직관을 말한다.(Lee and Martin 2016, 79, 90, 134, 245, 271; Knorr Cetina and Preda 2007, 132). 이는 지각(perception)의 잉여가치들이다. 즉 지각의 정상적 상태의 초과분을 자본화한다. ‘감’으로 지각의 잉여가치들을 생성하는 것이 인간이 기계와 비등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방식이다. 인간이 개입한다는 것은 ‘인간의 (직관을 통한) 기계적으로 되기’를 실행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계적 과정에 병합된다. 이는 인간의 삶과 능력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모범적 사례이다. 인간 자본 개념은 기계적으로 되기(becoming machinic)에 대해서 명확하다. 인간 개인은 기계적 잉여가치 생산의 벡터가 된다. 두 개의 다리를 가진, 알아서 움직이는 노새가 된다.
주석f
신자유주의에서 인간 삶의 자본에 의한 포섭은 트레이딩플로어(trading floor, 증권이 실제로 거래되는 곳)에서 정점에 이른다. 인간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주인이 아님이 확실해진다. 인간은 자기형성에서조차도 포로들이다. 인간이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인간을 관통해서 달린다. 인간 자본은 권력형성체로서의 자본주의의 자기성취이다.
보조정리e
인간과 기계 사이의 Δ가 자본주의적 동학의 중추이다. 인간 본성은 이 Δ의 전개와 완전히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테제35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있는 인간 이상의 것이다.
테제36
이러한 상황을 비탄할 필요는 없다. 탈자본주의적 미래로 가는 경로는 좋은 ‘실물’경제를 ‘허구적’ 자본의 나쁜 경제로부터 구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주석
실물경제나 금융이나 모두 삶을 포획하고 절단하는 권력의 체제들이다.
보조정리
인간에게 있는 인간 이상의 것을 껴안아, 돌려, 그 생성의 방향을 바꾸라.
테제37
시간 Δ의 우선성이 선물(先物, futures)을 표본적 금융도구로 만든다. 궁극적으로 자본이 포획하는 대상은 미래이다. 미래의 포획은 잠재력, 변화, 생성의 포획이다. 이것이 금융의 힘이다.
주석
앞에서 논의한 금융자본의 형태들은 확대된 의미의 선물들이다.
테제38
투기적 금융이 레버리징하는 Δ들은 삶의 질적 Δ들과 연동되어 있다.
주석
가령 일국 통화의 변동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사이의 삶의 질과 정치권력에서의 Δ들을 반영한다. 이런 종류의 Δ들은 집단적이어서 인구와 관련된다. 또한 관계적이어서 그 인구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모여서 복잡하고 늘 요동하는 삶의 장을 이루는 방식과 관련된다. Δ들은 개인의 차원에 갇히는 법이 없다. 트레이딩플로어에서 가격이 설정될 때 장 요동(field-fluctuation)의 간격이 단일한 수량화된 데이터 지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집단의 변화하는 합리성이 단일한 분리된 양으로 집중되며 회계장부에서 최종적으로 고정되어 포획된다. 이 포획을 조건짓는 n차원의 삶 요인들이 경제적으로 등록 가능한 이윤점이라는 일차원으로 환원된다. 삶의 장의 초개인성이 하나의 점으로 즉 개인이 소유하는 축적의 사건으로 집중된다. 모두의 것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공통적인’) n차원의 생태가 포장되어 소유물이 되며, 이와 함께 광활하게 열린 삶의 관계가 사적인 전유로 종획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영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커먼즈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자본주의의 한 역사적 국면이 아니라 그 영원한 작동방식이며 ‘축적’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보조정리
모든 잉여가치의 생산은, 거기에 전환(turnover)이 관여되며 전환은 질적 Δ들에 의해서 조건지어지고 에너지를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초개인적이다. 금융시장은 하나의 특권적인 사례일 뿐이다.
테제39
자본주의는 경제화에 다름 아니다. 삶의 질적 장이 경제적으로 전유되고 영속적인 양적 성장의 원칙에 포섭되는 과정이다.
테제40
경제 체계를 이해하는 것과 포획장치로서의 삶의 경제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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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