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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푸꼬, 칸트에서 계몽과 자기의 통치(2)

2(1983152교시)

 

여기서 푸꼬는 칸트의 계몽과 관련된 텍스트를 상세하게 독해하는 시간을 가진다.

 

푸꼬는 우선 칸트의 텍스트의 첫 단락을 그대로 인용한다. 여기서 계몽의 최초의 정의가 나온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각주:1] 여기서 미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Verstand)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말한다. 왜 스스로 초래한 것이냐 하면, 그 원인이 지성의 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의 결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Sapere aude!(과감하게 알라)가 계몽의 모토이다.

 

위 계몽의 정의에서 마주치는 첫 단어는 Ausgang’(벗어남, 풀려남, 탈출, release, emergence, exit)이다.

 

역사에 관해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데 있어서 현재적 순간을 지칭하는 세 가지 가능한 방식이 있다.

속한 시대를 적시하는 것. 예를 들면 우리는 데카당스의 시대에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

징후가 보이는 다소 임박한 사건에 준거하여 시대를 지칭하는 것. 예를 들면 영속적 평화 상태를 앞두고 있다와 같은 식.

현재적 순간이 이행의 순간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 이행을 거치면 완성, 안정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비코가 그의 Principles of the Philosophy of History의 마지막 장에서 현재를 이런 식으로 제시했다.

(*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비코가 왕정을 역사가 거치는 최종 단계로 보고 있다는 것. 첫째가 귀족정, 둘째가 민중정부정리자.)

 

칸트는 이 셋과 다르다. 그는 현재적 순간을 그냥 ‘Ausgang’으로서, 자신을 무언가로부터 분리하는 운동으로 지칭한다.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Ausgang’은 인간이 미숙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Mensch)이란 누구인가? 인류 전체인가? 보편적 인간 사회인가? 특정의 사회인가? 특정 개인들의 문제인가? 텍스트는 그저 인간의 벗어남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단락의 처음에 계몽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에는 어떤 운동의 서술(description)이었다. 그러나 단락의 마지막에 ‘Sapere aude!(과감하게 알라)’라고 했을 때 이것은 처방(prescription)이자 그 이상의 것이다. 칸트는 ‘Wahlspruch’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모토, 문장(紋章)[각주:2]의 의미이다. ‘Sapere aude!’는 명령인 동시에 남과 구분해주는 변별적 특징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칸트가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가 명확하거나 알기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 벗어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벗어남의 핵심은 무엇인가를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미숙이란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은 무력함의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칸트는 인간이 보행기(Gängelwagen))를 탄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둘째 단락의 처음에서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책임질 수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은 무력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완전히 책임질 수 있는데도 무언가 정의되어야 할 결함, 흠이 책임을 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미숙의 상태를 인류의 자연적 유아기와 같은 것과 혼동하면 안 된다.

 

미숙의 상태는 권력에 의해 권리가 제한된 상태도 아니다. 칸트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없거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남이 나서서 그들을 이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미숙의 상태로 드는 예만일 책이 나의 지성(Verstand)을 대신한다면, 만일 정신적 지도자(칸트는 Seeelsorger라는 말을 쓴다)가 있어서 나의 양심을 대신한다면, 나의 음식을 대신 결정해주는 의사가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수고할 필요가 없다― 를 보면 이것이 권리의 제한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관여된 것은 분명 자연적 의존성도 아니고 법적·정치적 권리박탈도 아니다. 또한 칸트가 권위를 정당하지 않다(illegitimate)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책이 존재하고 그것을 읽는 것을 칸트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지도자와 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의존성은 개인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 세 권위가 작동하게 만드는 방식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개인이 자신의 지성 대신 책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발견된다. 나머지 두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 예(, 정신적 지도자, 의사)에서 우리는 세 비판서―『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를 발견한다. 책의 예는 지성(Verstand)을 다루고, 정신적 지도자의 예는 도덕적 양심의 문제를 다루며, 의사의 예에서는 나중에 판단력비판의 도메인을 구성하는 핵들 가운데 하나를 본다. 미숙에 대한 분석은 이 세 비판서들과의 연관 속에서 해독해야 한다.

 

순수이성 비판은 이성의 한도 내에서의 지성의 정당한 사용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런데 이성의 한도 내에 있으려면 책의 권위에 우리를 맡기지 않고 자율적으로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 이 두 측면 즉 한도 내에 있음(비판의 측면)[각주:3]과 자율성(계몽의 측면)은 서로 보완한다는 면에서만이 아니라 한도를 넘어갈 경우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는 면에서 서로 상응한다. 비판의 한계를 넘어서 타자의 권위 아래 자신을 놓는 것이 바로 칸트가 이 저서에서 반대하는 바이다. 비판적 성찰과 계몽의 분석,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판을 계몽의 역사적 과정에 삽입하는 것이 여기에 개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실천이성 비판, 우리의 의무가 우리의 이후의 운명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데 우리 자신의 양심을 사용해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정신적 지도자가 우리의 의지의 제1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 행위를 이후의 우리의 운명에 근거시킬 때 정신적 지도자가 우리의 제1의 원리가 된다. 이렇듯 미숙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과 비판의 발휘는 연관되어 있다.

 

비판과 계몽 사이의 이러한 유대관계는 텍스트에 함축되어 있지 정식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그 효과와 반향이 텍스트 전체에 퍼져있다. 예를 들어 미숙 상태는 인간 자신에만 기인한다는 것을 칸트가 강조하는 것은, 칸트가 비판을 할 경우 오류를 반박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로 우리가 산출하는 환상들이 필연적일 수 있는가를 입증하려고 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몽에 관한 텍스트에서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미숙상태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권위에 힘입어 보행기에서 벗어나면, 넘어질까 봐 걱정하거나, 걷지 못하거나, 가장 좁은 도랑도 건너지 못하거나 실제로 넘어진다. 이는 저 유명한 이성의 비월’(flight of reason)이성이 자신의 한도를 넘어서서 자신을 지탱할 대기가 없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에 상하로 대칭되는 이미지인 듯하다. 비판과 계몽 사이의 상응관계는 택스트에서 상당히 명확하다. 은밀하지만 명확하다.

 

비판과 계몽 사이의 관계가 어떻듯,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첫째 것은, 미숙 상태는 이성의 사용과 타인들에 의한 지도 사이의 관계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통치와 타자의 통치(goverenment de soi et government des autres)[각주:4]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둘째 것은, 이성의 사용과 타인들에 의한 지도 가운데 어떤 것이 선택되는가는 권위의 폭력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 자신들에, 자기와의 특정 관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도덕 영역의 단어들을 차용한다. ‘게으름’, ‘비겁.’ 그런데 칸트가 여기서 표적으로 삼는 것은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에서의 자율성의 결함이다. 게으르고 비겁하기 때문에 자기와 자율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계몽이 해야 하는 일은 자기의 통치와 타자의 통치의 관계를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 재분배는 어떻게 일어나고(서술의 차원), 또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가(처방의 차원)?

 

이 지점에서 텍스트는 묘하게 방향을 튼다. 첫째, 칸트는 인간 스스로는 미숙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확증한다. 왜 그런가? 미숙 상태란 정의상 바로 자율이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비겁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보행기에서 풀어줘도 걷지 못한다. 장애물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스스로 미숙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해방시켜줄 수 있는 다른 개인들이 존재하는가? 칸트는 스스로 사유하는 사람들, 게으름과 비겁에서 탈출하였으며 스스로 사유하는 개인들로서 타인들에게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거론한다. 이들이 바로 타인들을 지도하는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자신들의 가치를 깨닫고 모든 이들의 스스로 사유해야 하는 소명(Beruf)을 깨달으면서 해방자의 역할을 하기로 결정한다. 권위를 사용하되 모든 이들의 스스로 사유하려는 의지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개인들이 인류를 미숙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지 못한다. 다른 이들을 자신들의 권위 아래 두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들은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강압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멍에 상태에 익숙해져서 자유와 해방을 담지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칸트가 말하기를) 모든 혁명의 법칙은, 혁명을 만든 이들이 필연적으로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권력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들 자신들, 혹은 특정의 개인들이 해방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제 어떻게 계몽이 일어나는지 보려면 미숙 상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숙 상태는 다음의 두 부당한(illegitimate) 짝들로 구성된다. 이성의 발휘의 부재와 복종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첫째 짝] 이성의 발휘가 부재하는 경우에는 복종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회에서 통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칸트는 세 가지 예를 든다. 따지지 말고 복종하라고 사병들에게 말하는 장교들. 따지지 말고 믿으라고 신도들에게 말하는 사제. 따지지 말고 세금을 내라고 말하는 세리(稅吏). 여기서 푸꼬는, 칸트가 사용한 단어는 ‘räsonnieren’이고, 이 단어는 특히 순수이성 비판에서 따지다라는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는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한다.[각주:5] 그렇다면 미숙 상태란 이성 능력의 발휘의 부재가 복종과 연결된 것이다.

 

칸트는 마음껏 이성을 발휘하라, 그러나 복종하라라고 말하는 단 하나의 존재가 세상에 있다고 한다. (누군지 말하지는 않는다.) 이 존재는 신인가, 이성 자체인가, 프러시아의 왕인가? 신은 분명 아니고, 이성 자체는 조금 가능하며, 셋째가 가장 유망하다.

 

미숙 상태를 특징짓는 둘째 짝은 공적인 것(Publikum)과 사적인 것(Privat)이다. 이것들을 다룰 때 칸트는 활동의 두 영역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사적이라는 말은 사물의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특정의 사용에 적용된다. 그가 공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물이나 활동의 영역이 아니라 능력을 사용하는 특정 방식이다.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말하자면 공적 활동에서 우리의 능력을 사적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와 약간 어긋난다.) 칸트가 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상 아마 우리가 공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 이것을 사적이라고 부르는가? 공적 활동을 하는 경우 우리는 단지 기계의 부품들이다. 특정의 장소에서 특정의 역할을 하는. 그런 만큼 우리는 보편적인 주체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성의 보편적 사용은 보편적 주체로서 보편적 환경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정치활동, 행정업무, 경제적 활동으로는 분명 이런 보편적 주체의 상황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이성적 존재로서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들을 대할 때에만 우리는 보편적 주체가 된다. 독자를 대하는 작가의 활동이 공적인 차원(=보편적인 차원)을 만나는 탁월한 사례이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보편적인 것의 차원과 마주칠 때, 여기서 우리의 지성의 사용은 공적인 사용일 수 있고 공적인 사용이어야 한다.

 

이성의 미()발휘와 혼동되는 복종의 원리가 지성의 사적 사용만이 아니라 공적 사용과도 함께 하게 될 때 미숙 상태가 존재한다. 복종이 이성의 미발휘와 혼동될 때, 그리고 그런 가운데 지성의 공적 사용이 억압될 때 미숙 상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성의 발휘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복종이 사적 사용에서 훌륭하게 이루어지고 이성의 발휘가 보편의 차원에서 (복종이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대중과의 개방적 관계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성숙의 상태에 도달한다. 미숙의 상태에서는 공적인 경우든 사적인 경우든 이성을 발휘하지 않으며, 성숙의 상태에서는 이성의 발휘와 복종이 분리된다. 사적인 사용에서는 복종이 강조되고, 공적인 사용에서는 이성의 발휘의 전적이고 절대적인 자유가 강조된다. 이것이 바로 계몽이며 이는, 칸트가 말하기를, 관용(tolérance)의 정반대이다. 관용이란 공적 형태의 이성의 발휘를 배제하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우에만 이성의 발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계몽은 자유를 보편의 차원에 위치시키고 복종은 사적 역할, 사회체 내에서의 개인적 역할에서만 유지시킨다.

 

미숙

성숙 (계몽)

관용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복종(=타자에 의한 통치)

사적 영역에서 복종, 공적 영역에서는 이성의 자율적 사용(=자기에 의한 통치).

공적 영역에서는 복종, 사적 영역에서는 이성의 사용

 

벗어남’(Ausgang)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벗어남이 이루어지고는 있는 것인가? 현재 우리는 그 과정의 어디쯤에 있는가? 칸트는 여기에 동어반복적인 대답을 한다. ‘우리는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답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칸트는 위의 물음에 그 내용을 부여하기 위해서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는데, 이것들이 그의 선행한 분석 작업 자체와는 모순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첫째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이 해방과정의 전조가 되는 징조들이 오늘날 존재하는데, 이 징조들은 이성의 사용에 걸림돌이 되었던 일부 장애들이 이제는 제거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장애가 없음을 안다. 인간 자신이 게으르고 비겁해서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칸트는 게으름과 비겁이라는 장애들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셈이 된다.

 

둘째로 이 해방의 개인 행위자()는 있을 수 없음을 일정한 만큼 상세하게 진술하고 입증한 후에 칸트는 프러시아 왕을 도입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많은 위험이 있는 종교의 문제에서 아무 처방도 내리지 않았으며 이것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계몽의 행위자로 만든다. 다른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강하고 기율이 잘 잡혀있는 군대로 공적 평화를 확보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보편적 형태로 발전할 자기의 통치(공적 토론, 이성의 공적 발휘, 지성의 공적 사용)와 다른 한편으로 사회에 속한 모든 이들의 복종 사이의 결합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바로 계몽인, 즉 복종과 사적 사용, 보편성과 공적 사용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재분배를 제대로 하는 인물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칸트는 첫째, 장애가 남아있는데도 장애가 제거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둘째는 개인 행위자들은 없다고 해놓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적 역할을 도입함으로써 자신이 말한 것과 모순되게 된다. 이제 텍스트의 마지막 대목에서 칸트는 공적인 사용과 사적인 사용에 대해서 자신이 지은 구분에 모순되는 말을 한다. 그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차원인 보편적인 것의 영역을 지성의 사용에 더욱 열어놓음으로써 이 지성이 시민 사회의 영역에서의 복종의 절대적 필요를 더욱 명확한 방식으로 입증할 것이라고 말한다. (애매한 대목이지만 푸꼬가 보기에는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사상에 자유를 더 허용하면 할수록 국민의 정신이 복종의 방향으로 형성되리라고 더욱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성의 자유로운 사용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이익이 사적 복종의 영역으로 이전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듯 칸트의 텍스트에 존재하는 모순을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칸트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계몽의 행위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데서 명확하게 경험했을 어려움은, 지난 시간에 다룬 1798년 텍스트에서 계몽의 행위자가 혁명으로 이전된다는 사실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혁명으로 전적으로 이전되는 것은 아니고, 혁명 주위에 널리 혁명의 열의가 산출되는 현상으로 이전된다. 1798년 텍스트에서는 혁명적 열의가 프러시아 왕을 대신하거나 계승하는 것이다.

[2강 끝]


  1. 푸꼬는 불어로 옮겨서 소개했다. 독일어 원문은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man's emergence from his self-incurred immaturity”이다. 칸트의 텍스트 정리 : http://minamjah.tistory.com/14 푸꼬는 ‘Ausgang’이라는 단어는 불어로 이루어진 원래 강의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2. 가문 등을 나타내는 문양. [본문으로]
  3. 한도 내에 있는 것을 비판의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은, 칸트에게서 ‘비판하다’(krinein)는 ‘한도를 밝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여기서 ‘de’―영어의 of―는 현재의 맥락에서는 주격으로 사용되었다. ‘자기’ 혹은 ‘타자’가 통치의 주체이다. 통치의 객체는 양자의 경우 모두 ‘자기’이다. [본문으로]
  5. 편집자는 주석에서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 단어가 발견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헤겔에게서 그렇게 쓰인다고 한다. 어떻든 푸꼬는 어떤 단어의 맥락에 따른 의미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안전, 영토, 인구』의 5강에서 프랑스어 ‘gouverner’의 여러 의미를 제시하는 대목도 참조해보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