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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노동의 관점과 텍톨로지--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01

* 아래는 McKenzie Wark의 Molecular Red : Theory for the Anthropocene (2015)의 1부  "Alexander Bogdanov: Workings of the World"의 전반부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나머지 후반부도 곧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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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동과 자연

1장 Alexander Bogdanov: Workings of the World

 

 

레닌의 경쟁자

 


보그다노프와 레닌이 체스를 두고 있고 고리키가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있다. 1908년도에 레닌이 고리키를 방문했고 마침 보그다노프가 손님으로 와있었다. 보그다노프가 이겼다. 레닌은 소탈한 사람은 아니었다. 고리키가 레닌과 보그다노프를 화해시키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리키는 레닌이 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 셋 가운데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레닌이다.


더 큰 게임에서 레닌은, 노동자 운동의 이론적·과학적·실천적 전략들을 조직하는 방법에 관한 보그다노프의 설계에 제동을 걸었으며, 이는 한 번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거물들이 흥분하여 공격한 대상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그 거물이 결국 패배한 사람이라면 패자들의 색바랜 전술들에서 무언가 이삭을 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레닌의 세계는 패배자들의 명단에 올라있으므로, 그의 상대자들의 전략을 훑어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세계를 다시, 또 다시 건설해야 하는 때이므로


우리의 유적 존재(species-being)는 세계의 건설자들이라는 데 있다. 이것이 보그다노프의 모든 사상의 핵심적 명제이다. ‘인간의 경계가 무엇일지에는 아직은 관심을 두지 말자. 이는 동물적인 것, 천상의 것, 혹은 기계적인 것이라는 범주들과의 차이 및 유사성에 부단히 관여되는 범주이다. 당분간은 다윈처럼 우리를 인구’(population)로서 생각하자. 보그다노프는 이 유적 존재의 정의보다는 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보그다노프의 사민주의(social democracy)는 국가를 장악할 당을 건설하는 것보다는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가 늘 관건이었다. 이는 항상, 삶의 한 양태를 조직하기 위해서 자연 속에서 자연에 맞서 투쟁하는 것에 더 맞추어져 있었다. 자연은 물론 실체를 잡기 어려운 범주, 물질적인 것과 신성한 것, 실체와 본질 사이에서 빠져나가기 쉬운 범주이다. 보그다노프가 잘 알고 있었듯이, 상이한 종류의 사회 조직화는 그것에 대한 매우 상이한 이미지들을 산출한다. 그렇다면 자연을 잠정적으로 내용 없는 범주로 설정하자. 단순하게 노동이 마주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1873년 산업 소도시 툴라(Tula)에서 태어난 보그다노프는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악의적인 권위주의를 경험한 그는 지배자들을 증오하고 모든 권위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는 1894년에 처음 체포되었으며 그 이후 여러 번 유배되었다. 1901년 볼로그다로의 유배는 오히려 그의 정치교육을 촉진시켰다. 거기에 국가에 비판적인 번성하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최초이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 가운데 하나인 안내서를 썼다


볼로그다에서 그는 다른 몇몇 유배자들을 만났으며 나중에 보그다노프는 이들을 러시아 사민주의의 볼셰비키 분파로 받아들인다. 이 중에는 나중에 교육인민위원이 되는 루나찰스키(Lunacharsky)자본론의 공동번역자들도 있다. 보그다노프는 1899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다


다른 많은 러시아의 활동가들처럼 그도 유럽으로 망명한 당의 지도자들의 분파투쟁에는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그는 1904년에 비로소 레닌을 만났는데, 이때 그가 31살이었고 레닌은 34살이었다. 볼셰비키 분파는 보그다노프를 반갑게 맞았다.

 

러시아로 돌아와서 그는 레닌이 앞에 내세우는 인물이 되었으며, 1905년 혁명에서 뻬쩨르부르크 소비에트의 볼셰비키 대표자가 되었다. 전설적인 볼셰비키 은행강도인 카모(Kamo)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학술적인 책들을 쓰고, 폭탄과 다이너마이트를 만든다. 알다시피 그는 또한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한다.”


1905년 감옥에서 그의 경험일원론을 완성하며 레닌에게 한 부를 보낸다. 핀란드로 피신해있던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긴 편지를 썼다. 보그다노프는 그들의 정치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 읽은 것으로 하겠다는 답장을 했다. 그의 레닌과의 연대는 1907년에 붕괴되었다.

 

세 가지가 걸려 있었다.

1) 보그다노프는 1905년 혁명의 실패 이후 레닌의 우() 선회에 반대했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선거에 참여하기를 원했고, 보그다노프는 당을 지하로 유지하고 혁명적 작업을 계속하기를 원했으며, 당 내의 다수가 보그다노프에 동의했다.

 

2) 당의 기금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다. 은행을 털어서 마련한 기음을 보그다노프와 크라신이 통제하고 있었다. 정치적 지적 독립에 대해 레닌이 많은 관용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둘이 재정적 독립과 결합되는 상황은 레닌에게 특별히 불쾌했을 것이다.

 

3) 두 사람은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동의한 적이 없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George Plekhanov)변증법적 유물론에 가까웠는데, 플레하노프는 보그다노프와 그의 주변에서 발현되기 시작하는 혁신에 공격적으로 반대했다. 플레하노프는 보그다노프에게 보그다노프 동지라고 부르지 않고 보그다노프 씨라고 부르기조차 했다. 레닌과 보그다노프는 전술에 동의한 한에서는 볼셰비키 내에서 통일을 유지했다. 이 통일이 무너졌을 때, 철학적 논쟁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보그다노프는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볼셰비키 좌파를 이끌었다. 레닌의 입장은 어려웠다. 보그다노프는 망명 중인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는 아직 러시아에 있는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레닌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었을 수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이 철학 영역에서 보그다노프를 공격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보그다노프의 경험일원론을 표적으로 삼았다


1904-19063권으로 출판된 경험일원론은 새로운 물리학이 맑스주의 사상에 미친 영향과 그로부터 나온 자생적철학인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 등의 철학을 다룬다. 마하에게 과학이론은 감각 경험을 서술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식일 뿐이었다. 그는 관찰된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는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승인을 철회했다.

보그다노프는 마하에게서 엥겔스와 플레하노프의 이른바 '유물론'으로부터 벗어날 유용한 선을 발견했다. 엥겔스와 플레하노프는 그 당시의 과학이론들을 형이상학적 법칙들로 끌어올렸다


러시아에서 정치적 탄압이 심해지고 당 내에 정치적 위기 일던 시기에 망명지의 레닌이 철학적 문제들을 연구하면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혁명투사들을 당황시켰다. 이 작업의 결과가 보그다노프와 기타 마하주의자들을 반박하는 레닌의 긴 논쟁서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이다. 고리키는 이 책에서 훌리건의 소리가 난다고 했지만 이 책은 목적을 달성했다.


정치적이지 않고 철학적이라는 점이 이 책이 검열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보그다노프의 이론적 혁신의 영향력만이 아니라 그의 정치노선의 영향력에도 확실하게 제동을 걸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의 볼셰비키로부터의 축출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이든 아니든) 정통 교리의 심판이라는 암울한 선례를 만들어놓았다. 마치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행동이 철학의 정확한 노선필요로 한다는 듯이 말이다.


보그다노프의 정치 전술이 레닌의 것보다 더 좋았는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지만, 보그다노프의 이론적 전술은 확실히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계속되고 있다. 비록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제1 원칙들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말했듯이, 철학에서 제1 원칙들은 제2, 3 원칙들보다 덜 흥미롭다.(Gilles Deleuze,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San Francisco: City Lights, 2001, Ch. 6) 그런데 제3 원칙들과 관련해서도 무익한 논쟁이 끝이 없다.


특정의 이론적 지형 위에 구축되는 종류의 지식의 실천들이 더 흥미로울 수 있다. 스튜어트 홀 : “이론은 항상 무언가 중요한 것으로 이르는 우회로이다.” 이 책(Molecular Red)의 주장은러시아 혁명기의 사람인 보그다노프가 <탄소해방전선>(Carbon Liberation Front)의 시기인 오늘날에조차도 지식의 실천을 구축할 토대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보그다노프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을 구축하려는 메마른 시도들로부터 벗어나서 감각 자체에 대한 리얼리즘적 접근을 자신의 입장으로 취하여 조직된 감각으로서의 지식의 실천이라는 생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런 실용주의는 오늘날 다시 적기를 맞은 듯하다.

주석: 인류세(Anthropocene)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질학적 시기를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Paul Jozef Crutzen)이 제안한 것이다. 크뤼천에 따르면 현재 지구 표면의 30-50%를 인간이 차지하고 있으면 담수의 반 이상을 인간이 사용하고, 어장은 대양에서 영양염이 많은 심해수 지역의 주된 생산의 25% 이상을 잡아치운다. 에너지 사용은 20세기에 16배 증가했다. 모든 토양 생태계에 자연적으로 고정된 것보다 더 많은 질소 비료가 농업에 투여된다. 이렇게 자연력과 인간력(?)이 서로 엮이게 되어 어느 하나의 운명이 다른 하나를 결정하는 최초의 시기가 바로 인류세이다. 워크는 18, 19, 20세기의 해방운동 가운데 오직 하나만 무한정하게 성공했다고 한다. 민족해방도 아니요 계급해방도 아니며 식민지 해방도 아니고 성 해방도 아니다. 심지어는 동물해방도 아니고 사이보그 해방도 아니다. 바로 탄소가 해방되었다. 땅 속의 탄소가 해방되어 공중으로 방출된 것이다. 그래서 워크는 인류세의 주된 테마는 바로 <탄소해방전선>이라고 한다. 


정치적, 실천적, 이론적 문제에서 레닌과 멀어진 보그다노프, 고리키, 루나찰스키는 자신들만의 분파를 결성한다. 그들은 1909년 카프리에서, 그리고 1910년 볼로냐에서 당 학교를 운영했으며, 유명한 작가로서 고리키가 번 돈으로 재정을 댔으며 보그다노프가 여전히 통제하는 전유기금의 일부도 들어갔는지 모른다. 카프리 모임이 일시적일지라도 지적으로 공개적인 볼셰비즘이 존재했던 순간이었다.

 

카프리 학교는 지속되지 못했다. 학생들이 러시아로 돌아오면서 체포되었다. 보그다노프와 고리키는 사이가 벌여졌다. 레닌이 고리키와의 관계를 복구했고 루나찰스키는 레닌의 영향 하에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당으로부터 소외된 1909년에 보그다노프는 자살을 고려한 바 있었다. 그는 1911년에 정치를 포기하고 문학과 과학 작업에 집중했다. 레닌 및 고리키와 사이가 틀어지고 볼셰비키들은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보그다노프는 러시아에서 펼쳐지는 반혁명의 길고 느린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혁명이나 당이나 보그다노프 개인이나 모두가 어려운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유토피아 소설을 썼다.

 

보그다노프의 유토피아 소설붉은 별(Red Star)현재 한국어본이 출판되어 있습니다[정리자]―은 다소 인기를 끌었고 소련 과학소설의 선구적 텍스트였다. 이는 곧 이어질 격동의 시대를 보그다노프가 항해하는 데 도움이 될 북극성이었다. 붉은 별을 살펴보면 우리는 보그다노프의 프로젝트를 좀 알 수 있고 <탄소해방전선>의 시대에 그것이 어떻게 다시 상상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붉은 화성

 

레닌이 보그다노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노동자들을 위해 소설을 써야 할 걸세. 약탈적 자본가들이 지구를 어떻게 약탈하고 그 모든 석유, 재목, 석탄을 탕진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이는 매우 유용한 책이 될 걸세, 마하주의자 씨!”(Quoted in Viktor Shklovsky, Mayakovsky and His Circle, London: Pluto Press, 1974, p. 117) 레닌이 카프리를 방문했을 때 이랬다는 것이 고리키의 회상이거나 뭐 그런 것이라고 한다. 레닌이 화나게도, 보그다노프의 소설은 그 보다는 좀더 독창적이고 선풍적인 것이었다.[각주:1] 


유토피아 소설 붉은 별(1908)과 그 뒤에 나온 전편인 엔지니어 메니(The Engineer Menni, 1913) 는 노동, 자연, 혁명에 대한 보그다노프의 사상을 널리 알린 교육 팸플릿이다. 더 오래되었고 태양으로부터 더 먼 화성에서의 삶은 지구보다는 덜 활력적이며 투쟁이 덜 격하고 더 선진적이었다. 두 책을 합하면 평행 행성에서 수행되는 사유 실험이 된다. 물론 어떤 변수들은 빠져있다. 화성에는 가령 경쟁하는 국가들이 없다. 그러나 본질적인 측면을 보면 혁명 전의 화성은 21세기의 지구가 <탄소해방전선>의 승리 이후에 실제로 처하게 된 상황과 다르지 않다


엔지니어 메니에서 이야기를 추동하는 것은 국가가 주도하는 방대한 개발프로젝트와 금융자본의 이익 사이의 긴장이다. 화성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지기 직전이다. 시장이 확대되어야 하지만 성장할 곳이 남아있지 않다. 엔지니어 메니는 해결책으로서 운하건설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이는 너무 방대해서 행성 전체의 공간형태의 변형을 가져올 것이었다 심지어는 기후를 변화시킬지도 몰랐다


미묘한 정치적 화해로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이 일을 담당하게 되지만, 이것이 금융 세력을 진정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는 동안 노동자들은 특별히 작업이 어려운 지형에서의 사상자율에 분노한다. 금융세력은 이를 기회로 전체 프로젝트를 사유화하려고 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운하의 대안 경로는 지진이 날 수 있는 시골을 통과하는 것이다. 작업이 더 쉽고 이윤이 신속히 추출되지만, 결국에는 위험한 새로운 경로를 따라 사는 인구들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자본축적이라는 논리가, 자연 안에서 자연에 맞서서 살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의 논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금융자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엔지니어가 지배하는 국가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나쁘다는 것을 발견한다. 급진적 엔지니어인 네티(Netti)1%에 맞서서 노동자-엔지니어 연합을 제안한다. 그는 프로젝트에 관한 부패 및 무능 적발서를 쓰고 총파업에 맞추어 그것을 발표한다. 보그다노프는 저항하는 물질과 직접 접 촉하며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직접적 노동과 자연에 관한 지식을 조직하는 정보를 해킹하는 사람들(엔지니어들)과 결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네티의 계획은 훨씬 더 야심적이다. “우리 자신이 늘 맘의 말을 그저 믿지만 말고 무언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건 불가능한가? 늘 상황이 현재와 같을 것인가?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앞으로 노예로 남을 텐데, 살아서 투쟁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가장 나쁜 형태의 노예상태는 앎의 노예상태가 아니라 믿음의 노예상태이다. 자신이 감각한 것을 조심스럽게 실험하여 도출하지 않은 것을 무턱대고 믿는 노예상태이다. 목표는 금융자본의 뱀파이어 촉수를 떼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과 지식의 총체를 다시 조직하는 것이다.

 

붉은 별엔지니어 메니이후의 일을 다룬다. 사회주의화되었고, 젠더 평등도 전반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여전히 남성적 규범을 중심으로 하지만. 화성인들은 정서벅 복합성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지만 억압적 도덕성으로부터는 해방된 성애(sexuality)를 즐긴다. 이는 볼셰비키 페미니스트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의 비전과 다소 유사하다. 화성의 의료는 물론 발전되어 있다. 치료법으로서 수혈을 실행한다. 여기서 보그다노프는, 인간의 신체의 조직들이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횡단적으로 옮겨가게 하는 기묘한 포스트휴먼 테크닉을 암시한다. 이는 그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 자신조차도 바치게 될 분야이다


화성에서 노동의 완전히 사회화되어있다. “인간들의 섬세한 두뇌를 기계의 튼튼한 기관들과 연결하는 선들은 외부인이 보기에 섬세하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 소설은 거의 마찰이 없는, 컴퓨터와 연결된 노동의 유토피아를 구축하여 우리 지구에서의 계급투쟁에 괄호를 치고 이 계급투쟁이 다른 투쟁, 즉 인간과 자연 사이의 투쟁을 어떻게 숨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시장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정보에 기반을 둔 새로운 생산양식을 구현하는 사이버 코뮤니즘에 대한 최초의 비전일 것이다.


보그다노프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주의적 평형상태가 아니다. 자연 안에서 자연에 맞선 투장은 계속된다. 한 화성인은 지구인 방문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다고요? 평화롭다고요? 어디서 그런 인상을 받았나요? 맞아요, 사람들 사이에는 평화가 감돌지요. 그러나 자연력과의 관계에서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웰즈(H. G. Wells)처럼 보그다노프도 유토피아 문학에 대해 다윈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했다. 이제 유토피아 문학은 역사적 시간의 지평 너머에 이상적 상태를 정립할 수 없었다. 다윈 이후의 유토피아는 언덕 위의 영원한 도시라기보다는 폭풍에 휩쓸린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화성인들은 운하 건설 프로젝트의 대가로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석탄이 고갈되고 수력발전으로의 이행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을 때 숲의 상당 부분을 파괴한 것이 행성을 변형시키고 수십 년 동안 기후를 악화시켰던 것이다.

 

숲 베어내기가 기후에 국지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그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다. 체호프의 Uncle Vanya에도 나온다. 보그다노프는 숲 베어내기와 태우기, 대기의 변화 따라서 기후변화 사이의 분자적 관계를 파악했다. 물론 그는 화성의 기후가 본질적으로 지구의 기후와 같을 것이라고 상상했지만분명하지 않은 것은 보그다노프가 국지적이 아닌 총체적 함축을 파악하고 있었느냐 아니냐이다.


새로운 에너지 자원을 찾는 데서 화성인들의 선택은 지구나 금성에서 얻는 것이다. 전자가 더 쉽지만, 지구인의 삶의 파괴가 불가피하다. 사회주의적 화성조차도 에너지가 고갈될 때에는 기후변화를 완화시키려고 하면서 절멸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조직화 문화는 그보다는 풍요로운 것이라서 이 선택은 기각된다. 보그다노프에게 폭력은 조직화 수준이 낮을 때의 논리적 선택이지 높을 때의 선택이 아니다


화성인들은 과학이나 기술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예술에도 관심이 있었다. 총체성의 비극(tragedy of the totality)이 그것이다. 보그다노프 : “계급들, 집단들, 개인들 사이의 투쟁은 전체라는 생각을 미리 배제하고 이 생각이 함축하는 행복 및 고통도 미리 배제한다.” 계급에 의한 계급의 착취는 (우리의 유적 존재의 노동에 저항하는 세계 안에서 그 세계에 맞서는) 인간 노력의 총체를 조직하려는 투쟁에서 극복되어야 할 물신이다." 이 이야기는 역사에서 끝이 없이 계속된다.

보그다노프는 노동의 관점에서 쓰기 위해서 유토피아 문학의 형식을 사용하지만, 자본이 제한하고 봉쇄하는 바의 노동의 관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전체의 행복과 고통이 보그다노프의 가르침 전체의 핵심에 놓여있는 것이다


노동은 예술과 과학을 통해서 총체성의 비극으로 상승해야 한다. 붉은 별의 목적은

노동운동에 그 목표에 대한 직관을 갖춰주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투쟁이 그 기원에서나 목표에서나 근본적으로는 지배계급에 맞서는 투쟁이라기보다는 삶의 잉여를 가꿀 공동체로서의 전체를 발견하고 창립하는 탐구라는 점을 제시하는 것(the quest to find and found a totality within which to cultivate the surplus of life)이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노동의 위대한 과제가 아닌가


형식들과 환경에 대한 체계적 사유는 낡은 계급들의 실존의 분할성과 그들의 경험의 분리성 및 일면성으로 인해 그들의 정신으로부터 배제되었다.” 그러나 전체의 기쁨및 고통이라는 이 생각은 프롤레타리아가 지향해야 할 어떤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물신들을 극복하여 자신의 활동들만이 아니라 활동들의 총체를 노동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보그다노프는 나중에 그의 텍톨로지를 구축한다. 텍톨로지는 그러한 탐구의 특유한 형식을 발견하는 특이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의 노력이 레닌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수십 년 동안 망각되었지만 말이다. ('tektology'는 그리스어로 '건설자'를 의미하는 'tekton'과 접미사 '-ology'가 결합한 것이다.-- 정리자)  


붉은 별에서 보그다노프가 <탄소해방전선>의 작동 및 그것의 기후와의 연관에 대해 이미 어렴풋하게 알아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기후변화의 이론적 가능성이 기후과학들에게 막 생각되기 시작한 때에 (아직 기후모델을 측정하거나 계산할 기반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성인(따라서 지구인)이 발생시킨 기후변화의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다. 붉은 별의 화성인들은 지구의 기후과학이 20세기 말에나 획득하게 될 전체적 지식 협조, 마찰 없는 데이터 수집, 계산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화성인들은 이런 기반시설을 가지고 인간이 이제야 발견한 것 즉 집단적 노동은 자연을 총체의 수준에서 변형한다는 것을 그때 발견한 것이다.

 

보그다노프는 유토피아 소설의 집필과 병행하여 다른 두 집필 과제를 수행했다. 그는 1907년과 1910년 사이에 낸 자본론세 권의 러시아어 번역의 편집 총책임자였다. 이 책은 소련에서 표준번역서가 된다. 비록 보그다노프의 이름은 거기서 빠지지만 말이다. 소비에트 도그마는 아중에 보그다노프를 '관념론적' 이단이라고 의식을 치르듯 비난하지만 사실 보그다노프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맑스를 더 잘 알았으며, 특히 자본론3권부터 보이는 맑스의 물질대사(metabolism, 원 독일어로 Stoffwechsel질료교환) 차원의 사유의 흔적들이 보그다노프의 사상에서 드러난다. (~ 보그다노프가 맑스의 그룬트리세를 알았더라면!!정리자)


보그다노프는 또한 그의 경험일원론 철학을 재편해서 1913년에 살아있는 경험의 철학(The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을 냈다. 엔지니어 메니와 같은 때이다. 그는 철학적 성격이 강한 그의 글들에서 그의 공상과학소설에서 함축되기만 한 것에 살을 붙였다. 노동자와 엔지니어의 연합, 노동의 관점, 변증법적이지도 유물론적이지도 않은 맑스주의, 혁명의 과제에 대한 제한된 낙관주의(the qualified optimism about the task of revolution). 우리가 <탄소해방전선>을 물리치기 위해서 여전히 일종의 혁명이 필요하다면,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도와서 보그다노프의 프로그램의 다른 요소들을 장비로서 갖추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경험의 철학

 


살아있는 경험의 철학(The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은 철학에서 나와서 새로운 지식의 실천으로가는 프로그램의 윤곽을 그린다. 철학 내에서 보그다노프의 사상은 일원론(monmism)하나의 실체만이 있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종착점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경험의 철학은 지식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이요, 프롤레트쿨트라고 불리는 문화의 새로운 실천인 텍톨로지(tektology)를 향한 발걸음이다.

 

보그다노프는 철학을 쓴다기보다 철학을 해킹하려고 한다. 철학은 이제 자기목적이 아니라 설계(디자인)와 조직을 위한 재료이다. 푸코가 권력/지식의 담론들이라고 부른 것이라기보다는 노동하기/알기의 실천들이다. 보그다노프가 염두에 둔 독자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들이었다. 니체를 읽었기에 보그다노프는, 해머를 들고 철학을 한다면 이는 전문적 철학자들이 아니라 전문적 해머쟁이들에게서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보그다노프의 실천은 철학을 다른 목적을 위해 전환전유(dètournmment, diversion)하는 것이다. 'dètournmment'은 상황주의자들이 발전시킨 용어로서 과거의 모든 문화와 지식을 커먼즈(commons)로서, 항상 그리고 이미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것으로 삼는 실천을 가리킨다. 맑스주의 전통이 부르주아 재산에 대한 비판이라면, 지식 재산 또한 비판의 대상이다. 보그다노프도 부르주아의 지식 재산에 대해 자기 나름의 비판을 했으며 뚜렷한 전환전유의 실천을 했다.

 

보그다노프는 특정의 주체성에 특유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두 종류의 집단적 앎에 있었다. 민속 지식 (속담 같은 것)과 과학적 지식이다. 둘 다 집단적 실천에 의해 확증되고 교정된다. 속담에 들어있는 민속 지식의 예를 들어보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처럼 집단적 노동의 경험의 응축이다. 조직된 노동의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나온, 협동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민속 지식이 이 두 양립 불가능한 속담 사이의 긴장에 함입되어 있다.

 

그 한계가 무엇이든 속담은 특정 종류의 공식적 철학(formal philosophy)보다 조직화와 관련된 지식을 더 많이 담고 있을 수 있다. 전문 철학자들은 다른 종류의 노동 및 일상적 삶으로부터 괴리되었다. 철학은 그저 사유에 대한 연구가 되었으며 인간 경험의 총체라는 그 진정한 주제를 망각했다. 철학이 다른 종류의 활동에 응할 때에는 그 활동을 포섭하거나 그에 적합한 것을 입법하려고 한다. 비판이론은 지식의 다른 형태들을 지배하려고 시도한다면 위선적 이론이 될 수 있다.(critical·····hypocritical: 운을 사용했음)

 

자본론같은 위대한 저작도 개인 저자의 작품이 아니라 집단적 경험의 산물이다. 저자는 한 계급의 사회적 활동을 코드화하는 사람(codifier)이다. 보그다노프 : “맑스는 그에 앞서서 학계의 사람들과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공히 모아놓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활용했다. 그는 완벽한 처리방법들을 적용했는데, 이 방법들 또한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는 창출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준비되었던 것이었다. 맑스는 당대 사회의 발전 전체의 방향을 표현하는 모든 아이디어들을 통합시키고 한데 묶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맑스에게서 보는 것은, 집단적으로 다듬어진 방법들에 따라서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된 모든 기존의 집단적 경험의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확증이다.”

 

요컨대 맑스의 이름으로 성취된 것은 개인적 천재의 성취가 아니라 집단적 과정의 성취라는 것이다. 광범하게 이해된 바의 ‘()’(cscience)이다.

 

과학은 일정 영역의 집단적 경험의 총체를 당대의 사회적 조직과 기술적 장치 내에서 가능한 만큼 이해한 것이다. 과학적 관점은 한 시대의 발전의 최고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영원한 형식들은 없다.

보편자들은 일정한 경험의 한도를 넘어 세계관(worldview)으로 투사된 것들이며, 이는 문학이나 철학 혹은 종교에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상대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다. 어떤 세계관들은 다른 것을보다 더 일반적이다. 후퇴가 있을 수 있지만, 성공적인 세계관들은 보통 더 일반적이며 총체를 더 많이 파악한다. 세계관은 당대의 과학을 넘어간 것이며, 과학을 잘 이끌 수도 있고 잘못 이끌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성장함에 따라 과학, 철학, 일상적 경험이 합류해야 한다. 보그다노프 : “역사로부터 새로운 장엄한 과제를 떠맡은 강력한 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입장하면 새로운 철학이 불가피하게 출현한다.”

맑스의 작업은 이 방향으로의 발걸음이다. 그러나 한 걸음일 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경험은 전문화된 지식 형식들의 해체를 요구한다. 이는 노동과정에서 과제들을 통합한 것과 같다. 삶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과학적 검토에 맡겨진다.

오늘날 사유의 과제는 당대의 진보적 계급의 경험의 총체를 표현하는 과학들 및 사회과학들의 지식을 통합하는 것이다.

 

보그다노프: “한 계급의 철학은 그 집단적 의식의 최고의 형태이다.” 부르주아 철학은 부르주아지에게 잘 복무했다. 그러나 계급투쟁에서 철학의 역할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철학은 보편적일 수 없다. 특정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한 계급의 철학은 상이한 경험을 가진 다른 계급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가지 않는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사회적 경험의 새로운 형식들에 상응하는 사유 혁명을 후원했듯이, 조직된 노동도 실천만큼이나 사유를 재조직해야 한다.

 

'기본 은유'(basic metaphor)는 자연 속의 관계들을 사회적 관계들에 따라서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세계관의 중심에 놓여있는 인과관계의 이론에서 작동한다.

1) 권위적 인과관계

경험을 질서지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생산에서의 권위적 협력을 강화했다.

권위적 원인들을 전제하는 세계관에서는 따를 원인이 없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의 권위를 원인으로 소환한다. 호레이쇼는 햄릿을 따르고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을 따른다. Horatio obeys Hamlet; Hamlet obeys his father’s ghost. 물질이 정신에 종속된다. Matter is subordinated to spirit. 그리하여 사회적 관계의 노예모델이 존재론 전체가 된다.

 

보그다노프는 종교가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성서들은 다소 임의적으로 배열된 백과사전으로서 농사, 수공업, 성애, 노인 돌보기를 조직하는 방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권위적 노동조직화가 우세한 한에서 타당한 형태의 지식이었다. 그러나 기술과 오직화가 변함에 따라 종교는 노동 체계와의 접촉을 잃고 비속세적성격을 획득했으며 신앙이라는 전문적 영역이 되었다.” 권위가 직접적 생산으로부터 괴리되었다. 이럴 때 종교는 부분적 세계의 객관적 설명이 된다.

 

2) 추상적 인과관계

종교적, 권위적 인과관계를 대체한 철학적 세계관들은 상업적 교환관계가 우세한 상황에서, 즉 그리스인들에게서 생겨났다. 확대된 교환관계는 또 다른 인과 모델 즉 추상적 인과관계를 함축한다. 시장의 판매자들과 구매자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용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힘은 특정 사건의 특정 원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추상적으로 관계들의 체계로서 작동한다.

 

이는 권위적 인과관계보다는 발전한 것이지만, 더 발전된 사회조직 형태들에 비추면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추상적 필연성을 보지만 사람들의 살아있는 경제적 연관을 보지 못한다.

(세번째 것은 '노동 인과관계인데 저 뒤에 나옴--정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권위적 인과모델과 추상적 인과모델의 혼합으로 남아있었다. 혼합물 내에서는 추상적 인과관계가 진보적 발전을 의미했다. 이는 논리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무한한 원인-결과 짝들을 상정했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남아있었다. 이는 종종 은유적으로 법으로 정립되었는데, 마치 자연 자체가 의사봉을 두드리는 판관이라는 식이었다.

 

세계관들을 각 계급의 경험을 정식화한다. 보그다노프의 경험일원론은 노동의 경험에 기반을 두며 교환사회의 한계 너머를 지향한다. 그의 더 흥미로운 주장 가운데 하나는, 관념론이나 유물론이나 모두 노동의 관점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둘다 세계를 사고의 대상으로서 보기 때문이다. 관념론은 사회적 관계들의 조직화를 사유의 모델로 삼고, 유물론은 사회적 관계들을 그냥 지나쳐서 자연적 세계의 관계들을 그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유물론은 적어도 프락시스로서의, 살아있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더 가깝고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새로운 노동과정의 주기적 발전에 의해 탈안정화된다는 장점을 가진다.(*원문이 비문성 문장임정리자) 유물론의 문제는 자연에 대한 순전히 추상적인 설명을 향한다는 점이다. 유물론은 물질을 주된 존재로 만들지만, 이는 별도의 사물로서이다.

 

21세기 유물론들도 마찬가지이다. 지젝 : '다양체의 유일한 '실체'는 진공이다.' 이는 노동의 외부에 있는 제1원리의 형태를 띤 권위적 인과관계이다.

 

맑스처럼 보그다노프는 그런 관조적 유물론보다 능동적 유물론을 원한다. 즉 인간 실존의 사회적 생산에 기반을 둔 설명을 원한다. 보그다노프: "자연은 사람들의 노동경험이 부단히 펼쳐지는 장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자연은 노동의 무대이다. 노동도 자연도 상대가 없으면 개념으로서 파악될 수 없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함께 생산된 개념들이다


열열학의 예

산업화는 탄소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 석탄 --> 탄갱을 더 깊게 팔 것 --> 물을 퍼내야 한다 증기의 최초의 적용은 탄광으로부터 물 퍼내기 위한 것 --> 증기에 의해 추동되는 펌프의 고안이 필요하다 --> 여기서 과학으로서의 열역학의 추상적 원칙들이 나온다. --> 열역학의 인과관계 모델이 인과관계 일반에 대해 사유하는 데 기본 은유가 된다.

 

두 수준의 노동활동

1) 기술적 - 물질 자체의 저항을 극복

2) 조직적 - 노동장치에 편입된 인간들의 정서적 저항을 극복

그 동기화 수단은 이데올로기이다. 보그다노프에게 이데올로기는 긍정적 성격을 가진다. 사람들을 과제를 중심으로 엮는 수단이다.

 

맑스 이전에는 유물론자도 관념론자도 노동 내로 사유를 향하지 않았다. 유물론자들은 관념적인 것을 추상적 물질의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관념론자들은 물질이 추상적 관념의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양자 모두 일종의 추상적 물신주의에 빠진다. 인간 경험의 외부에 있는 본질들이며 그 원인인 절대적 개념들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 추상적 물신주의는 교환사회로부터 나온다. 인관성은 개별적 권위들--lords and The Lord--로부터 멀어지지만 여전히 명령이라는 보편적 원칙을 정립한다.

 

이 때문에 보그다노프는 맑스 이전의 유물론 철학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이 철학에 따르면 물질이 사유를 결정하지만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추상적인 철학에서는 '물질'이든 '진공'이든 기본 은유가 사회적 노동과의 조우를 통해서 사유되기보다는 순전히 명상에 의해서 보편적 원칙으로 고양된다

 

노동의 관점은 자연과의 추상적 교환의 존재론들을 거부한다. 노동은 자연 안에 있으면서 자연에 맞선다.(Labor finds itself in and against nature.) 노동은 저항하는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맞추려는 노력에 의해 생겨난다. 인과관계에 대한 노동의 직관적 이해는 교환가치에서 오지 않고 사용가치에서 온다. 노동은 자연을 가지고 실험하여 새로운 효용을 발견한다. 자연에 대한 노동의 이해는 역사적이어서 항상 진화하며 미지의 것을 놓고 추상적 인과관계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노동의 관점은 일원론이지만, 다수적이고 능동적인 과정들로 구성된다. 자연은 노동이 마주쳐 파악하는. 특정 상황에 특수한 방식으로 파악하는 바이다. 맑스 : “기존의 유물론들의 주된 결함은 ···사물, 감각성이 감각적인 인간의 활동,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관조의 대상으로만 파악된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가운데 하나)


인과관계의 이미지를 정립하는 기본 은유는 더 넓은 사유 실천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모든 철학들은 세계를 은유적 대체(substitution)에 의해서 설명한다. 맑스 자신이 참여한 큰 사례는 물질대사가 여러 장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방식일 것이다. 포유동물들의 호흡에서 농업과학을 거쳐 사회-역사적 물질대사까지. 대체는 자연이나(유물론의 경우) 노동(관념론의 경우)저항(resistance)으로서 경험하는 데서부터 확장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지식의 진보는 한정된다. 그 결과는 물질 없는 활동 혹은 활동 없는 물질에 대한 사유가 되는 경향이 있다.  

 

유물론이 더 많은 경험과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더 진보적이고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의 관점에 못 미친다. 유물론적 사유는 물질적 기반이 전개되는 대로 전개된다. 보그다노프에게 유물론의 역사는 철학의 역사이다. 철학에서 유물론은 일종의 노동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유가 답답하게 폐쇄된 세계에서 탁 트인 야외로 나올 수 있는가? 칸트 이전의 독단적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것의 형이상학을 다양하게 세우는 데 걸리는 것이 없었다. 칸트는 사유를 사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되돌려 놓았으며 물 자체에 대한 직접적 지식으로 가는 길을 막아놓았다. 철학은 이제 존재하는 것(what is)에 대해서 더 이성 언명할 수 없었다. 언명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에 국한되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주체가 알 수 있는 것과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체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철학의 고유한 영역이다. 칸트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철학의 주장을 청산하였으며 그러는 가운데 과학적으로 사유하기의 조건들에 대한 판사로서의 철학이라는 이미지를 대신 세웠다. 이러한 철학은 과학에 특수한 노동의 이미지만을 끌어들였는데, 이는 사유의 대상과 사유하는 주체 사이의 상관관계에 갇힌 노동이었다. (이른바 주객관계를 말하고 있음정리자)


실제 과학은 인간의 규모와 범위를 훌쩍 넘어서 감각을 기록하는 장치를 통해 작동하기 시작했다. 과학은 단지 주체가 감각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감각할 수 없는 것 또한 기록하는 방식이 되었다. 분자보다 훨씬 아래의 규모와 태양계보다 훨씬 위의 규모, 사유보다 빠른 시간, 혹은 인지하는 주체가 존재하기 수십억 년 전의 시기들.

 

마하가 칸트의 입법적 명령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가리킨다고 보그다노프가 본 것은 옳았다마하(Ernst Mach)와 경험비판가들은 지식의 객체와 주체를 융합하여 하나의 실체-감각으로 만들었다.

Quentin Meillassoux: "상응관계가 유일한 진실 자체이다." 보그다노프에게 남은 것은 감각을 다시 노동과, 그 생산의 집단적 및 역사적 과제의 경험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마하의 경험비판론에서 보그다노프의 경험일원론으로의 이행이다.

 

경험일원론은 맑스의 철학과 마하의 철학의 종합으로서 출현하게 된다. 이 철학들을 보그다노프는 각각 산업노동과 과학노동의 관점의 진전된 형태들로 간주했다. 혹은 21세기 용어로 말하자면 노동자들과 해커들(모든 종류의 비상투적인 과학. 기술, 지적 노동자들을 포함한다)의 관점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 목적이 전자의 경우에서처럼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보그다노프가 읽기로, 마하와 경험비판론자들에게 중심적인 범주는 감각이지만, 개별적 감각이 아니다. 감각은 감각 인상들(sense impressions : 오감에 기록되는 인상들정리자)과 물질 형식들의 확정될 수 없는 집합이다. 보그다노프 : “경험비판론자들은 사물과 정신적 사실들 사이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철학적 사유를 리얼리즘을 향하여, 살아있는 경험을 향하여 전진시키려고 한다. 그 동안 철학은 살아있는 경험으로부터 괴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식의 유일한 작업재료는 감각(sensation)이며 지식의 목표는 그 경험 내에서 방향(orientation)을 발견하는 것이다

 

경험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 연속된다. 경험비판은 경험을 요소들로 분해하는 비판 방법과 함께 시작한다. 그 목표는 통합된 전체를 기술하는 것이다. 인과관계의 기본 은유는 '기능적 의존성'(functional dependency)이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저 일이 일어난다. 보그다노프는 마하의 이 기본 은유를 유물론적 인과관계로 보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종류라고 생각한다.

 

마하에게 지식은 경험을 기술하고 질서지운다. 그러나 변화시키려고 의도하지는 않는다. 이 세계관은 그 당시의 연구기관에서의 기술적 과학적 노동의 역할과 막 출현하는, 생산에서의 인지적인 요소의 조직화 역할을 표현한다. 이는 자연의 저항을 직접 경험하는 사회적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지적 노동자들의 세계이다. 이는 사물화된 추상이다. 자연의 저항을 실험실에서 형식적인 관점에서만 상상한 것이다.


노동관계에 대한 과학자의 경험은 여전히 권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유의 이분법들, 관념론의 형식들, 세계를 추상적 도식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속된다. 마하의 사유는 여전히 그의 계급의 것이다. 단순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것은 일면 발전된 자본주의의 교환관계들로부터 끌어온 인과 모델에 갇혀있다. 다른 일면 그것은 실험실에서 저항하는 자연에 더 직접적으로 작업을 하는 노동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권위적 습성들로부터 왔다.

 

레닌이 열렬히 믿었던 변증법적 유물론은 보그다노프가 보기에는 과학 및 기술 노동자들의 자생적 철학에 대한 특별하게 그럴 듯한 대안이 아니다. 변증법은 유물론 내에 남아있는 관념론의 잔재이다. 맑스의 변증법은 비실재적이고 여전히 추상적이었으며 외부로부터 부과되었고 그 어떤 경험의 과정에도 쓰일 수 있는 은유에 못 미쳤다. 변증법은 보편적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직 경험에서, 그것도 좁은 영역의 경험에서 취한 인지모델일 뿐이다.

 

보그다노프 : “관념론은 본성상 진정한 감각적 활동을 알지 못한다,”

독일 관념론 : 이념들의 논리. 살아있는 실천들을 대신함.

헤겔에서 이러한 경험 지대가 체계화는 수준에 도달.

포이어바흐는 철학을 이념의 자기운동에서 떼어내어 인간의 유적 존재의 자연 안에서 자연과 맞선 자기운동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 가족과 정서적 삶(affective life)이라는 소시민적 규모로 후퇴하였다. 그는 개인주의를 넘어섰지만 집단적 노동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는 경험에 대한 그램분자적 인식에서 노동의 관점과 병행하는 분자적 인식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 워크는 들뢰즈, 가따리의 개념 molar, molecular을 사용하고 있음)

 

물질적 자연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자연에 맞선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이 맑스에게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맑스는 물질과 활동을 단순한 상관물이 아니라 동일한 (일원론적) 과정의 두 측면으로 보았다. 그는 헤겔의 관념적 모순들을 넘어서 작동하고 있는 구체적 힘들로 다가간다. 그러나 그의 변증법은 여전히 관념론적이다. 대립물들의 투쟁--이는 모든 다른 관계들에 대해 언어적 관계들의 형식을 사용한다--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보그다노프는 디에츠겐(Joseph Dietzgen)의 영향을 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고유한 사유형태 혹은 프롤레트쿨트(Proletkult)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맑스의 경우처럼 디에츠겐의 성취도 변증법적이지도 않고 유물론적이지도 않은 것, 즉 노동의 관점으로 보았다.

보그다노프는 레닌과 플레하노프의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에 그의 비판을 한정했다. 변유에서는 "인간과 그의 의식이 외적 물질의 수동적 산물로서 정립된다. 이는 모든 옛 유물론들의특징이며 맑스도 반대했던 저 반영 관계이다." 물질의 '물 자체'로서의 인과적 우선성을 독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뭃질을 경험의 외부에 놓는 것이다. 이는 신조가 된다. 권위적 제1 인과원칙이 그저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과학적 세계관과 실천에 반대된다. 과학에서 물질에 대한 지식은 장치를 가지고 하는 실험에 의해 생산되지 명상만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변증법으로는 이러한 과학적 방법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변유의 문제는 그것이 노동과 과학적 경험에 비추어 변증법을 비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변증법은 조직화되는 총체의 일부--노동을 조직하기 위한 아이디어들이 서로 경합하면서 권위있는 위치를 추구하는 그램분자적 차원의 투쟁--만을 서술한다. 변증법은 또한 자연 안에서 자연에 맞선 노동의 경험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보그다노프의 경험일원론은 변증법 비판이다. 이 일에서 보그다노프는 맑스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능동적 세계관과 집단적 경험을 가져왔다. 출발점은 활동과 활동에 저항하는 것을 보는 리얼리스틱한 태도이다. 물질의 감각은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지 물 자체가 아니다. 지식의 실천은 과정의 설명을 찾는 것이며, 그 목표는 '세계를 조직하는 것'(organizing the world)이다. 조직화 과정은 더 낮은 복잡성에서 더 높은 복잡성으로 움직일 수 있으나 반드시 변증법적이지는 않다.

 

보그다노프: "변증법의 요소들이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과 운동은 이 요소들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철학은 가장 넓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그 과제를 파악해야 한다. 즉 세계 과정의 서로 연결시키는 관계들을 연구하여 조직화의 모든 가능한 방식들과 수단들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경험일원론의 기본 개념이다." 이는, 상이한 경험들 사이에서 조직화의 잠재적 형태들을 동지적 방식으로 발견하고 소통시키는 것을 다루는 하위 이론이다.(It is a low theory of the discovery and communication of potential forms of organization between different experiences in a comradely way)

 

변증법적 유물론은 삶과 세계에 대한 노동계급의 관점을 정식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그러나 최후의 시도는 아니다. 근대 과학과 기계 생산의 장치들이 새로운 인과관계의 경험들을 발생시킨다. 현대 화학에서처럼 노동은 인과적 순서들을 방해할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도 있다. 물질은 경험 너머의 물 자체가 아니라, 아직 경험되지 않은 것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이다.

 

보그다노프가 드는 예는 에너지 개념이다. 에너지는 물질도 아니고 관념도 아닌데, 그 발견은 노동장치와 그것에 저항하는 자연의 실천적 관계로부터 출현한다. 에너지는 석탄이나 석유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재료들에 가해지는 노동의 활동의 결과이다. 보그다노프: "노동 인과관계는 인간에게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프로그램과 계획을 부여한다."

 

여기서 보그다노프는 다소 권위적인 세계관을 보이는데, 이는 종속된 계급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부과된다. 저항하는 자연에 개입한 것이 의도치 않은 결과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직관하기는 했지만--이는 붉은 별에서 화성인들의 직면한 에너지 생산 정점(peak energy)과 기후변화 문제에서 엿보인다--이것이 아직은 그에게 개념으로서 다가오지는 않았다. 보그다노프는 그 자신의 활동에서는 권위주의적 경향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는 레닌주의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볼셰비키처럼 생각했다. 그의 사유는 그의 시대의 조직화 수준의 한계에 의해 제한된다. 그러나 훌륭한 보그다노프주의자들로서 우리는 모든 철학들이 자신의 시대에 묶여 있으며 영원한 것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 드보르(Guy Debord) : "이론들은 시간의 전쟁에서 전사하도록 만들어진다."



 

지식과 노동의 '동지적 시학'(comradely poetics)을 위하여

 

보그다노프에게 남아있는 권위주의적 경향을 거부하지만, 그의 조직화 실천은 추천할 만한 면이 있다. 경험의 요소들은 그것에 효과적인 이름을 붙여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새로운 노동 과정을 위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이것이 텍톨로지의 실천이라는 그의 아이디어의 씨앗이다. 이론도 아니요 과학도 아닌 텍톨로지는, 하나의 사물을 다른 사물을 통해 은유적으로 이해하는 '대체'의 행동을 일반화하는 실천이다. 텍톨로지에서 관건은, 하나의 과정에 대한 이해를 매우 다른 다른 과정에 실험적으로 적용하여 그 과정들이 유사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종류의 '하위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점이다. 이는 과거에서 현재로 움직이기 보다는 하나의 장에서 다른 장으로 '옆으로' 움직이는 종류의 전환전유이다.

 

보그다노프에게 노동은 정신적이기보다 우선적으로 육체적이다. 육체노동은 항상 사회적인 반면에 정신노동은 개인들의 독특한 철학들을 다루어야 한다. 객관적인 것은 사회적으로 동의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의 물리적 세계는 그것에 가해지는 우리의 노동에 선행한다고 할 수 없다. 세계는 절대적이거나 영원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유만의 산물이 아니라 또한 온갖 사회적 노동장치들의 산물이다. 보그다노프는 그어떤 '실재'도 사회적 노동을 미리 한계지우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계는 실천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유물론에도 들어있는 신들의 잔재를 청소한다. 진정으로 일관된 유물론이라면 세게 안에서 세계에 맞선 실천보다 앞서서 세계의 성격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노동 노력의 실천상의 조직화가 경험의 요소들의 정신적 조직화보다 선행하며 그 정신적 조직화를 생산한다."

 

기후과학의 진화가 그 실제 사례이다.

세 요소 : 날씨의 예측, 기후의 모델링, 날씨와 기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물리학. 이 셋이 수십년이 걸려서 한데 모였다. 분산된 위치와 고도로부터 그때그때의 날씨 데이터를 얻는 것은 거대한, 전지구적 규모의 장치를 필요로 한다. 물리학의 정확한 모델로 이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에는 방대한 양의 계산능력이 필요하다. 데이터, 통신, 그리고 계산 상의 저항들이 20세기 후반까지 기후 연구를 방해했다. 기후와 그 변화에 대한 현재의 우리의 지식의 밑바탕에는 분산된 분야들과 테크놀로지에서 전지구적 기후지식 기반시설로 발전한 과정이 놓여있다. 여기에는 연계된 전지구적 노동 혹은 보그다노프의 말로 하자면 일종의 텍톨로지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세계관이 항상 부분적이고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 시대의 노동실행에 묶여있지만, 어떤 관점들이 ,다른 것들보다 낫다. 일부는 더 일반적이라는 의미에서 더 진전된 노동활동 형태들에 상응한다. 보그다노프의 시대에는 산업노동계급이 조직호ㅛㅏ 실천의 전워인 듯이 보였다. 우리 시대에 킴 스탠리 로빈슨이 제안하는 바는, 해커들의 과학적, 기술적, 그리고 창조적인 작업이 그 위치를 차지한다. 보그다노프가 요청하는 바는, 가장 진전되고 일반적이고 복합적인 사회활동 형태들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대체(substitution) : 노동의 다양한 경험을 체계화하는 방법. 노동과정 A 를 조직하는 수단이 노동과정 B 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일종의 전환전유이다.

저항하는 자연과의 그 어떤 조우의 개념적 산물도 모두에게 속하며 대체를 경험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더 많은 종류의 조직화를 발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보그다노프 : "대체 일반은 의식 내에서의 더 많은 결합들을 허용하여 더 작은 내용을 더 큰 내용으로 대체하려고 함으로써 가공 대상이 되는 재료가 더 풍부하게 되게 하며, 동시에 단순하고 엄밀하게 조직된 복합체들을 덜 구조화된 복합체들로 대체하여 가공 활동에의 저항을 감소시킨다."

 

그의 텍톨로지는 그 핵심이 하나의 관계를 다른 관계로 실험적으로 대체하는 시학이다. 이 실험은 다시 실천에서 테스트되어야 한다.

 

경험일원론은 우리의 유적 존재를 외부에서 부과되는 선험적 형식들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세계관이다. 철학은 현재의 실재를 코드화할 뿐이다. 철학른 은유의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게끕이해와 경험을 대체한다.

 

이 하위 이론(low theory)이 철학을 대체한다. 이제 신들--권위적 및 추상적 인과관계--이 노동이 만들고 또 다시 만드는 세계의 객관적 실재로부터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철학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지식의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언가를 향한 발걸음이다. 보그다노프: "그 어떤 사유의 노력도 분쇄된 몸체의 부분들을 모아 조직하여 살아있는 전체로 만들 수는 없다. 철학은 기적을 만들 수 없다." 비판이론이 철학을 거치는 일은 종식될 수 있다. 철학의 문제가 풀려서가 아니라 인류세에는 노동과 과학이 다른 문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다른 것 못지 않은 것이 탄소해방전선의 문제이다.

 

현재 필요한 지식 형태는 사회적 노동의 형태들과 그것이 마주치는 저항의 종류들에 의해 결정된다. 자동화는 직접적 경험을 넘어서는 지식을 필요로 한다. 보그다노프는 자동화가 진전될수록 모든 노동자들이 엔지니어 같아지고 예술가 같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붉은 별의 화성인들처럼 말이다. 보그다노프가 보는 미래에서는 노동자가 특정 노동만의 조직자라는 의미에서의 노동자가 되기를 그치며 사회조직 전체의 공동 창조자가 된다. (--> 커머너)

 

보그다노프는 경험일원론을 마지막으로 필요한 철학으로 보고 텍톨로지를 무언가 다른 것의 시작으로 본다. 물질을 조직하는 텍톨로지가 적용되기 전에, 프로레트쿨트(proletkult)가 출현하여 그 내부에서 노동자들이 세계를 조직하는 자신감을 습득해야 한다. 프로레트쿨트는 협력적 노동의 능력들, 한계들, 과제들에 대한 새로운 민속 지식을 다듬어내는, 못지않게 절실한 필요를 미리 나타낸다.

 

붉은 햄릿 -- 셰익스피어에서 맑스로

 

10월 혁명은 무언가가 썩어 있다.("something is rotten"Hamlet에 나오는 Marcellus의 대사임, "Something is rotten in the state of Denmark." )

보그다노프만이 이런 회의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많은 러시아와 유럽의 좌파가 이를 공유한다. 보그다노프는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 안에서 그것에 맞서 작업했다. 사태의 진행에 대한 그의 비판은 매우 정확하다. 비록 그의 행동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보그다노프의 전기작가는 그를 '붉은 햄릿'이라고 부른다. 햄릿처럼 그는 썩은 뿌리를 가진 새로운 세계의 상부구조 를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면서 거쳐가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늙은 두더지'(old mole)는 아래에서 계속 토대를 갉아먹었다.

 

셰익스피어를 다루는 글들에서 보그다노프는 과거의 고전을 프롤레타리아가 현재의 상황에서 행동하는 것을 돕도록 유용하게 읽는 법을 설명한다. 보그다노프의 전환전유 실천의 사례이다. 그것은 소비에트에서의 보그다노프의 운명을 알레고리로 보여주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읽히고자 하는 의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우리는 결코 모를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햄릿은 사랑과 투쟁 사이에서 갈등하는 영혼이다. "그 가장 심오하고 숭고한 욕구와 그의 환경의 적대성이 주는 권위적인 명령 사이의 첨예한 갈등에 의해 찢겨진 영혼을 다시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 프롤레타리아도 이 문제를 안고 있다. 조화와 통일을 원하지만,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단절과 싸워야 한다. "즐거움이 거의 주어진 바 없어서, 즐거움에 대한 갈증이 크다. 그러나 그 조금조차도 항상 사회적 증오와 아나키의 불가피한 요소들에 의해 파괴와 왜곡의 위협을 받는다."

 

햄릿의 상황은 자랄 때는 이와 다르지만,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심미가만이 아니라 활동가가 되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햄릿은 자신의 본성에 적대적인 전술에 호소해야 한다. 계책, 기만, 폭력, 잔인. 그것도 가까운 사람들을 향해서. 그래서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짓눌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the activist-aesthete(활동가이자 심미가), '삶의 조화의 수호자'가 된다. 그는 일상적인 것 내에서 다른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가 된다. “조직화 문제는 풀렸다. 예술적 아이디어에 형식이 입혀졌다.” 그는 짧고 격렬한 음모의 시대에 일상적 문화의 긴 고리들로 맞선다.

 

물론 햄릿은 죽었다. 이는 객관적으로 옳다. 햄릿이 영혼의 힘을 모으는 동안 그들은 햄릿의 파멸을 준비했다.

 

출현하는 소비에트의 스펙터클에서 보그다노프가 구축하는 것은 프로레트쿨트 즉 반스텍터클(anti-spectacle)이다. 이는 햄릿이 연극 배우들에게 하게 한 것처럼, 늘 말해질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것을 거부한다. 책락에 맡겨진 세계에 합류하기를 거부한다. 그가 각본을 쓰지만, 이 각본을 연기하는 법을 생각해내는 주체는 역사적 행위자의 역할을 하는 프롤레타리아이다. 연극으로 양심을 포착한다. 그러나 이제는 왕의 양심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양심이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동일하지 않다. 17년 혁명은 너무 일렀다. 혁명이 퇴보적이 되어 더 많은 복합적 조직화가 아니라 덜한 조직화를 낳을 수 있다. 전시공산주의는 다른 전시 국가들의 편법과 다르지 않으며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아니다. 전시공산주의가 노동자당을 병사당(a soldier's party))으로 만들었다. 노동은 군사화되어서도(트로츠키) 안 되고 테일러화되어서도(레닌) 안 된다. 선진 자본주의 문화로부터 배우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회주의적 형식들은 그 문화 내부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발명되어야 한다.

 

보그다노프는 대항스펙터클(counter-spectacle)의 창출만이 아니라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자기결정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학(pedagogy)을 그려내는 데 새로운 시대에서의 햄릿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과제는 과거의 거부나 추앙이 아니라 전환전유이다. 부르주아 조직화방식들의 극복은 조직화의 형식들에 대한 광범한 파악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조직화 설계의 역사를 스스로 배워야 했다. 이것이 과거의 문화를 읽는 데 핵심적 프로토콜을 제공한다.

 

햄릿의 형식은 이중적이다.

그램분자적 수준 : 군사 작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정당하지 못한 위계와 정당한 위계 사이의 투쟁.

분자적 수준: 왕권에 대한 비판.

On the molar level, the king is to his minions “a massy wheel, fix’d on the summit of the highest mount, to whose huge spokes ten thousand lesser things are mortised and adjoin’d.”(작품으로부터의 인용임--정리자)

분자적 형식은 물질의 매우 상이한 조직에 대한 햄릿의 인식이다. “A man may fish with the worm that hath eat of a king, and eat of the fish that hath fed of that worm.” (작품으로부터의 인용임--)

햄릿의 광기는 궁정의 혼란을 꿰뚫고 관념적 위계를 모르는 다른 조직화 차원을 보는 데 있다.

 

햄릿의 봉건적 측면도 프롤레타리아에게 대한 유산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 세계관에 대한 보그다노프의 독해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것은 봉건적 조직화 방식의 '감정의 구조'(레이먼드 윌리엄스)이다. This is what it feels like to organize the world through authoritarian relations that present themselves as divinely inspired.

 

권위주의 형식도 과거에 속한 것만은 아니기에 현재를 조명할 수 있다.

 

맑스는 노동의 관점에서의 과거의 전환전유를 부르주아 경제학과 포이어바흐에서 푸리에에 이르는 소부르주아 비판가들에서 시작한다.

맑스는 옛 지배계급의 낡은 그램분자적 세계관으로부터 개념들과 증거들의 분자적 흐름들을 추출한다. 그는 아무런 전통도 따르지 않는다. 그 반대다. 그는 기존의 담론들로부터 텍스트들을 전유하여 노동의 관점으로 전환시킨다.

 

맑스는 철학자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며 사회학자도 아니고 신학자는 당연히 아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빠져나온다(detourns). 재산(property), 규범(propriety), 가부장제(paternity)를 무시하면서.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지식의 새로운 실천을 시작한다. 이런 태도를 보그다노프가 이어받는다. 그는 맑스주의 문헌에 충실하지 않으며, 맑스와 근대의 생명과학들을 노동의 관점에서 전환전유한다. 맑스처럼 "property and propriety and paternity"에는 무관심하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적인 것과는 다른 조직화 양태들을 원한다면, 부르주아 양태와는 다른 조직화 형태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위대하고 솜씨 좋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누가 우리를 삶과 사유의 낯선(read 새로운) 조직화의 심층으로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보그다노프는 화성의 조직화를 서술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솜씨를 지닌 예술가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조직화가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공간 즉 프롤레트쿨트를 창출하기에는 충분히 훌륭한 조직가였다.

 

 

<계속>

맑스에서 프롤레트쿨트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텍톨로지로

은유 기계로서의 텍톨로지

교환 수혈

 


  1.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한국의 80년대에 문학이나 예술은 현실을 바꾸는 데 별로 힘이 없는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며 기껏해야 ‘정치 활동’의 뒤에서 도움이나 주는 보조적인 ‘문화활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가령 작가 출신의 혁명가에게 ‘작품이나 써라’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조롱이었다. (물론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듣는 사람이 같은 프레임 내에 있어야 이 말이 ‘조롱’이 된다.) 여기서 보이는 ‘정치의 우선성’(Primat der Politik)은 바로 레닌의 명제이다. 지금은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 활동’이 일종의 연극 활동처럼 된 시대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