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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보그다노프의 1911년 글

* 아래는 보그다노프가 1911년에 쓴 짧은 글 “Socialism in the Present Da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폴란드어판을 영어로 옮긴 텍스트를 옮겼다.[각주:1]) 1917년 혁명이 일어나기 6년 전, 1909년 볼셰비끼에서 추방된 지 2년 후에 쓴 이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1917년의 10월 혁명에 대한 보그다노프의 태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정치의 우선성을 내세우는 레닌과 달리 보그다노프는 새로운 삶형태의 조직화에서 문화가 가진 중요성을 내세운다. 보그다노프는 10월 혁명의 부족함을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구축함으로써 보완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보그다노프는 1909년에 볼셰비끼에서 축출되었기 때문에 10월 혁명의 방향에 대한 견해와 무관하게 혁명과정에 아예 참여할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구축할 목적으로 구성된 단체인 <프롤레트쿨트>1922년에 해체된다. // 이 글은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역사 속에 자리잡고 사람들의 뇌리에 사회주의라는 이름과 결합되어 새겨지기 전의 글이다. 이 글을 유익하게 읽으려면 이렇게 우리 머릿속에 새겨진 사회주의라는 생각은 일단 내려놓고 보그다노프가 사회주의라는 말로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그 내용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사회주의자본과 국가 너머의 새로운 사회로 읽으며 프롤레타리아다중혹은 커머너로 읽는다. 시간의 격차로 인한 생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유리한 점도 있다. 그동안 보그다노프가 묻혀 있던 이유는 레닌과 레닌에 의해 대표되는 소련 사회주의가 강력한 가리개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 이 가리개만 제거된다면 서구 맑스주의이후 푸꼬, 들뢰즈·가따리, 네그리 등에 의해서 풍요로워진 철학적 사유와 카오스론이라는 말로 넓게 지칭되는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이 자리잡은 현대의 상황이 보그다노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독해의 한 모범을 보려면 이 블로그에 있는 맥켄지 워크의 글들(http://minamjah.tistory.com/127 이하)을 읽으면 된다. 어느 글에 대해서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글의 모든 측면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영감을 주거나 유용한 것은 아니다. 먹은 음식에서 몸에 좋은 부분을 잘 흡수하는 것이 몸의 능력에 달려있듯이, 읽은 글에서 우리에게 유용한 정신적 자원을 잘 흡수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의 능력에 달려있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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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사회주의

 

알렉산더 보그다노프

 

사회주의 사회는 모든 사회적 생산이 의식적으로 동지적인 원칙들에 기반을 두어 조직되는 사회이다. 사회주의의 모든 다른 특징들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계급의 철폐, 모두가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자신의 능력에 따라 완전히 사용하도록 해주는 부의 분배은 이 사실에서 나온다. 이 조건들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바탕인 모든 생산의 동지적 조직화가 있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즉 노동계급이 승리를 얻어 사회를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조직할 능력을 얻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 순간까지 계급의 점차적 사멸,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향한 점진적인 이동, 사회적 생산물의 계획된 분배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소유관계에서의 사회주의는 노동관계가 완전히 사회적 관계로 되기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다.

 

사회주의적 경제의 기원을 노동조합, 협동조합에서, 민주적 국가와 자치체의 사업들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자들은 틀렸다. 노동조합에 의해 자본가들에게 강압적으로 부과되는 노동자 임금의 증가는 사회주의적 분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임금을 벌 수 있는 보장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협동조합의 재산은 매매에 종속되어 있고 화폐의 형태를 띠며 은행에 저축되고 경제순환과 변동하는 가격에 의존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자본주의적 재산으로 남아있다. 가장 민주적인 국가 혹은 마찬가지로 민주적인 자치체의 사업들도 (사회주의자들이 거기서 다수를 점한다고 해도) 자본주의적 사업이 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고용에 기반을 두어 조직되어있기 때문이며 노동시장, 도구 및 노동대상의 시장, 화폐 및 신용 시장의 조건들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세계 생산의 주인인 화폐와 자본의 힘이 유지되는 한, 사회주의 경제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미래의 일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이기도 하다. 이념일 뿐만 아니라 현실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성장하고 발전하며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 다만 기회주의적 동지들이 그것을 추구하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더 심층에 놓여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동지적 유대이고 노동자들의 노동과 사회투쟁의 의식적인 조직화이다. 우리는 노동자 조직들, 노동조합들, 당들 등의 경제적 활동에서 사회주의를 찾아서는 안 되고 실질적인 계급 내 협력에서 사회주의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원형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의 동지적 유대를 본령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현실적 토대가 된다. 이 협력이 성장하고 발전할수록 낡은 사회의 틀에 가해지는 압박이 더 팽팽해지고 양자 사이의 모순은 더 명확해진다. 이 틀이 새로운 형식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힘의 강력한 압박으로 인해서 붕괴할 때가 멀지 않았다.[각주:2] 어디를 보아도 일련의 위험한 혁명들이 우리 눈앞에서 시작되리라는 조짐이 보인다. 이 마지막 투쟁의 시기는 분명 엄청나게 어려운, 엄청나게 잔인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썩은 껍데기는 벗겨질 것이다.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내 협력에 불과한 것이 되기를 그칠 것이며 생산 전체를 포괄하게 될 것이다. 재산과 분배의 새로운 조직화, 새로운 사회적 경제가 현실이 될 것이다.

 

언젠가 사회주의가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지금 이미 강력한 경향이 되어 있으며 현실 속에서 다른 사회 세력과 맞서는 구체적인 사회적 힘으로, 사람들을 조직하는 특수한 방법으로 그 길을 닦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의식적인 사회주의적 투사는 미래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영웅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창조에 참여하는 노동자이다.[각주:3] 크고 강력한 사회 계급이 옛 사회가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살고자 원하는 것,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형태들을 새롭게 발전시켜서 그 나름의 사회적 이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만한 당연한 일이다. 이 이상은 순전한 형제애의 꿈이나 잔인한 사회적 질서에 대한 항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정신에서 나온다. 그것은 기존의 체제와 깊은 모순 상태에 있는 노동계급 내에서의 노동관계의 실제적 발전을 반영한다.[각주:4] 오늘날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동지적 조직화, 그리고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 전체의 사회주의적 조직화이 둘은 동일한 과정의 상이한 국면들일 뿐이며 동일한 현상의 상이한 발전단계일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와의 전쟁으로만, 그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의 축적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이 투쟁은 그와 동시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이다. 늘 새로운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프롤레타리아 내에, 그 내적 관계들에, 일상생활의 조건 아래 구축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건설이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장은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다. 프롤레타리아를 조직들에 통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제적·정치적 투쟁의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이는 병사를 모아 군대를 만들고 군사작전을 고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과 같다. 군대의 주된 강점은 사기(士氣)’라고들 부르는 것, 즉 내적 유대와 상호관계, 사유와 감정의 통일에 좌우되며, 이것이 군대를 관통하고 변형하여 살아있는 통합된 유기체로 만든다. 노동계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과제가 일반적인 군대의 과제에 비해서 헤아릴 수 없이 더 광범하고 복잡할 뿐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내적 유대, 그 단결 정신이 더 단단해지고 깊어질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실천에서 진정으로 동지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조직들에서도 사회주의와 관계없는, 잔존하는 옛 관계들을 대량으로 볼 수 있다. 야망의 갈등, 권위주의로 기울어지는 여러 지도자들’,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자들의 무의식적인 종속, 아나키즘 성향을 가진 개인들이 동지적 기율에 보이는 증오, 개인적 이해(利害)와 동기가 집단적 대의에 개입되는 일 등. 이 모든 문제들을 불가피하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미 완성된 계급의 형태로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몰락한 시민들과 농민들부터, 자신의 개인적 이해에 따라 그리고 영향력 있는 당국에 종속되어 사는 데 익숙해진 소()소유자들로부터 나왔다. 과거에 속한 계급들의 쓸모없는 정신적 특징들을 빠르고 쉽게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것과 별도로, 노동자 조직들은 혁명적인 지식인들로부터, 그리고 점점 더 가난해지는 소시민들로부터 일정한 비()프롤레타리아적 요소들을 끌어온다. 이는 동지적 협동의 정신과 감각을 취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요소들이다. 개인주의의 발현, 이데올로기적 예속, 이데올로기적 지배와 항상 부단히 싸워야 하며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와 양립될 수 없음을, 그리고 화해가 전적으로 불가능함을 설명해야 한다.

 

특히 가족생활에서 옛 습성이 완고하게 오래 지속된다. 남편이 아내에게 명령하는 관계, 맹목적으로 부모에게 복종하도록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이것이 현재의 가족의 토대이다. 자본주의는 이 습성을 파괴하고 여성들, 청년들, 심지어는 아이들마저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제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벌이 덕분에 이들은 부분적인 경제적 독립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 상황에서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옛 관계가 유지된다면 가장이 종종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의 착취자가 된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예속은 노동계급이 강하게 되는 것을 막으며 동지적 대오를 축소시키고 여성들을 노동자의 혁명적 노력에 제동기와 짐이 되게 만든다. 반면에 아이들의 예속은 미래의 투사들의 사회주의적 양육을 해친다. 바로 이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가족의 예속의 그 어떤 잔재와도 열심히 싸워야 하며, 그 예속을 개인적인 일이라거나 사소한 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작업장에서 선전활동을 하는 노동자가 가정에서는 자신의 아내의 후진성을 둘러대면서 선전활동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매우 잦다. 오늘날에도 야만성의 사례들이 노동계급 가정에서 일어난다. 노동계급 가정에는 이미 사회주의 정신이 속속들이 배어있어야 하며, 노동의 동지적 관계가 가진 힘에 의해 변형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또한 새로운 과학과 새로운 철학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의 본령이 인간의 경험 전체를 통합하고 이 경험을 조화로운 질서로 조직화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경험은 구()계급들의 경험과 다르다. 바로 이 때문에 이전의 학습형태들이 불충분한 것이다. 맑스는 새로운 사회과학과 새로운 역사철학을 창시했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 전체가 프롤레타리아의 손에서 새로운 특징을 띠게 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조건이 달라지면 자연에 대한 지각과 이해의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과 철학은 개별적 성격을 띤다. 학식이 분리된 전문적 영역들로 나뉘어 있으며 각 영역은 대량의 사소하고 난해한 세부들을 무겁게 안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생애 거의 전체가 소요된다. 학자들조차도 서로 이해하는 바가 미미하다. 자신의 전문화된 영역 너머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살고 투쟁하려면 과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각들만 이용 가능하며 상호몰이해를 낳는 그런 과학은 필요 없다. 의식적인 동지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호 이해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지식의 창조는 과학의 단순화와 통합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다양한 전문적인 영역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고 그 영역을 신속히 익히게 해주는 일반적 연구방법들의 복원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는 기계제 생산에서 노동자가 테크놀로지의 일반적 특징들과 방법들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하나의 전문화된 영역에서 다른 전문화된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상이한 과학들과 철학들을 이런 상태로 가져오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과학들과 철학들이 대중에게 스며들어갈 것이며 비교할 수 없이 더 강하고 광범한 발전의 토대를 맞게 될 것이다. 노동과정의 강력한 도구인 과학은 (사회주의가 모든 노동의 도구들과의 관계에서 필요로 하는 바대로) 그런 식으로 사회화될 것이다.

 

과학의 경우와 유사하게 예술도 인간의 경험을 하나의 총체로 통합하는 데 복무한다. 다만 예술은 추상적 개념의 형태로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미지의 형태로 조직한다. 이런 성격 때문에, 예술이 과학보다 더 민주적이며 대중에게 더 가깝고 대중 안에서 더 광범하게 퍼진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감정, 포부, 이상이 스며들어있는 고유한 사회주의 예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런 예술의 형성에 이르는 첫 걸음들이 이미 존재함을 보여줄 수 있다. 물론 이는 첫 걸음들일 뿐이지만 극히 어려운 걸음들이다. 프롤레타리아 출신이 아닌 일부 예술가들과 시인들이 사회주의와 연대하고 그들의 재능으로 큰 대의에 복무하고 싶어한다. 다른 한편, 노동계급에서 초심자 작가들이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으며 이들은 예술의 힘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전자의 예술가들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취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눈을 통해 삶을 바라보고 프롤레타리아의 심장으로 느끼는 것이 대체로 불가능하다. 후자의 예술가들은 예술 관련 교육, 경험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솜씨, 이미지로 깊게 사유하고 느끼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들은 시간이 가면 자신들의 작업과 재능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성취할 것이다. 그때에는 새로운 예술이 갑자기 대중 사이에 확산될 것이며 투쟁하고 가르치도록 촉발할 것이고 밝은 미래를 향해 도약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벌써 자신의 사회주의 문화를 정식화할 수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거대한 과제여서 그렇게 빨리 성취될 수 없다. 그 길에 놓인 장애물들도 너무나 크다. 다른 계급들에 맞서 투쟁할 필요가 늘 존재하는 상황은 출현하는 새로운 문화에 특수한 흔적을 남기고 사회적 삶의 모순을 성찰하도록 강제하며,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통합된 사회에 사회주의가 존재하게 될 때에만 가능한 배치와 조화를 획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물론 문화가 최종적으로 형성되어 그 발전을 멈출 수 있는 그런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과 늘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에 있는 것이다.

 

이 목적은 이전의 혹은 현재의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프롤레타리아에게 가깝다. 프롤레타리아는 낡은 사회와 유례없는 투쟁하면서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일상의 노동에서, 사회적 활동에서, 가족 내에서, 과학 및 철학 지식에서, 예술에서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창조함으로써 점점 더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사회주의적으로 변형할 것이며 그런 다음에 인류 전체를 사회주의적으로 변형할 것이다.

  1. 폴란드어판 Aleksandr Bogdanow, ‘Socjalizm w dniu dzisiejszym’, trans. Włodzimierz Marciniak and Cezary Sikorski, Colloquia Communia, 5-6 : 16-17 (1984), pp. 263-267 [본문으로]
  2. [옮긴이] 보그다노프는 일반적인 계급투쟁론처럼 계급과 계급 사이의 모순에 집중하지 않고 새로운 계급과 낡은 사회의 틀 사이의 모순에 집중한다. 이는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탈피’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자본주의 너머를 말한 것과 같은 식이다. “어느 지점을 넘으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장벽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에 장벽이 된다. 자본은, 즉 임금노동은 이 지점에 도달하면 사회적 부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길드제도, 농노제, 노예제가 과거에 그랬던 것과 동일한 관계에 들어서게 되며, 필연적으로 족쇄가 되어 벗겨내어진다. 인간의 활동이 취하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상태―한편으로는 임금노동,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는 따라서 이렇게 피부처럼 벗겨지며 이러한 탈피는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방식의 결과이다. 그 자체가 이미 자유롭지 못한 사회적 생산의 이전 형태들의 부정인 임금노동과 자본의 부정의 물질적, 정신적 조건들은 그 자체가 그 생산과정의 결과들이다.”(Marx, Karl,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Penguin Books, 1993, p. 749) 보그다노프 시대에는 맑스의 이 저작,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는 『1844년 경제철학 수고』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본문으로]
  3. [옮긴이] 모든 밑줄 강조는 옮긴이의 것이다. [본문으로]
  4. [옮긴이] 그의 『살아있는 경험의 철학』(1913)에서 보그다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맑스에 따르면, 역사의 변증법적 측면은 인류의 자연과의 투쟁과 사회 내에서의 계급들의 투쟁이다. 이는 논리적인 과정들이 아니라 그의 부정확한 표현으로는 ‘물질적인’ 투쟁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첫째 것인 자연과의 투쟁만이 역사의 기본적이고 항상적인 동력이며, 둘째 것인 계급투쟁은 파생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계급투쟁은 원시부족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중의 사회형성체에서 발생하고 점점 더 심화되었으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계급들과 함께 필연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