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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매끄러운 글과 서걱거리는 글


해는 淸敎徒가 大陸 東部에 상륙한 날보다 밝다

우리의 재(灰), 우리의 서걱거리는 말이여

人生의 말의 간결―우리는 그것을 戰鬪의

소리라고 부른다

(김수영, 「미역국」)


넓어져 가는 소란

(김수영, 「꽃잎(二)」)


이 無言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偶然의 빛이요 偶然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김수영, 「말」)


단순한 전달과 노예의 언어

(김수영, 「히프레스 문학론」)



번역을 하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어주다 보면 글의 매끄러움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된다. 이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매끄러움에 대한 지향이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글의 가장 중심적인 덕으로 끌어올려진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매끄러움에 우리의 시야가 갇힌다면 언어의 창조성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글의 매끄러움은 무엇보다도 익숙함에서 온다. 그리고 익숙함은 동일한 것의 반복에서 온다. 사람마다 매끄러움에 대한 감각이 조금 다른 것은 이 반복의 경험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매끄러움은 ‘자연스러운 우리말’과 연관되는데, ‘자연스러운 우리말’이란 과거에 가장 많은 반복이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 국가가 부과하는 ‘표준말’은 이와는 좀 다르다. 이는 인위적으로 부과되는 자연스러움이다.)

우리가 이미 확연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내용을 전달하려고 할 때, 특히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배려하며 전달하려고 할 때, 예의 익숙함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전달과정에서 유실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독자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연한 형태로 이미 존재하는 어떤 내용”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런 것이 과연 있기는 하는가? 없다. 이런 것이 있다는 생각이 존재할 뿐 (들뢰즈․가따리의 말을 빌면 표현의 ‘지층화’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내용이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러한 생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므로, “확연한 형태로 이미 존재하는 어떤 내용”이 존재한다고 일단 전제되면 그 다음에는 이 내용을 유실 없이 전달하는 것(‘투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 된다. 이는 마치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를 가능한 한 유실 없이 실현하는 것이 자본의 유통과정의 최대의 미덕인 것과 같다.

자본이 명령이듯이 ‘유실 없는 전달’도 명령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전달받는 사람이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결국 수동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위와 대중의 지도-피지도 관계가 바로 이러한 식으로 기능했다. 예전 어느 운동조직의 지도자는 하부로 전달하는 지침의 내용(?)이 풍부할 수 있도록 예증적 사례를 많이 들 것을 항상 강조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례란 이미 정해져 있는 방침이나 입장을 뇌에 새기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지 그 방침이나 입장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유실 없는 전달’은 세련됨과 공존할 수 있다. (실제로 예의 지도자는 그 자신이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장의 세련됨은, 아니 더 일반적으로 예술적 표현의 세련됨은 사유의 섬세함과는 다르다. 문장의 세련됨은 이미 정해진 내용의 고정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과연 세련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반해서 사유의 섬세함은 아주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사유가 섬세할수록 변화를 많이 느끼고 그러면 그 변화를 표현할 단어나 어구를 찾기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으며 이런 경우에는 세련과정을 겪을 틈이 없으며 따라서 매끄러움보다는 서걱거림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리비스(F. R. Leavis)는 “확연한 형태로 이미 존재하는 어떤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식으로 언어가 사용되는 것을 산문적 언어사용이라고 부르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언어가 사용되는 것을 시적 언어사용이라고 불렀다. 그가 시적 언어사용의 최고의 대표자로 제시하는 작가는 셰익스피어이다. 셰익스피어와 자주 비교․대조되는 벤 존슨(Ben Jonson)의 영어는 세련되었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셰익스피어의 영어는 화려한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영어는 줄줄 흘러넘침, 돌발, 상충, 도약, 마치 전기에너지로 충전된 듯한 지직거림 등등으로 가득 차 있다.

리비스가 말하는 시적 언어사용을 구사하는 글은 결코 매끄럽거나 익숙하지 않다. 전례없는 의미를 창출하는 특이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상투적 표현조차도 맥락 속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이른바 자연스러움이란 이러한 특이함을 제거한 것이기 쉽다.

변화는 불가피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흠정역 성서(Authorized Version)[각주:1]를 현대화한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한 아이언 로빈슨의 검토가 우리로 하여금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듯이 변화가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그 지식, 교양, 확신에 찬 진지함의 측면에서 현대 세계에 속한다. 이것이 그들이 담당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었는데, 그들이 담당한 일이란 성서 및 기도언어에서 비현대적이고 낯선 요소를 제거해 버린 것, 즉 ‘보통’ 사람들에게 자연스럽지 않게 다가오는 (보통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말하거나, 편지에서 사용하거나, 아니면 계몽인 연설이나 교육에서 들으리라고 예상하는 영어와 어긋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런 의미의 현대 영어는 근본적인 궁핍화를 나타낸다. 거기에 함축된 전제들은 사유로부터, 그리고 사유에서 극히 본질적인 역할을 하는 가치평가와 (시험을 거친) 판단으로부터 인간 경험의 매우 중요한 요소들을 제거한다. (리비스, 『살아있는 원리』)

들뢰즈․가따리도 언어의 창조적 핵심을 매끄러움 즉 익숙함에서 보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는 데서 본다. 그에게 언어의 감옥은 다수화 즉 표준화이다. 이러한 표준화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들은 ‘더듬거림’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어떤 통사구조를 만들어서 그 구조가 단어를 감각으로 변하게 하고 그 감각이 다시 표준 언어를 더듬거리고 떨고 소리치며 심지어는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체이고 ‘어조’이며 감각의 언어 혹은 미래의 사람들을 부르는, 언어 속의 외국어이다. (들뢰즈·가따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들뢰즈․가따리는 소수화된 언어가 보이는 두 가지 (표면적으로는 상이한 듯한) 경향―이는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한다―을 지적한다. 하나는 빈곤화[각주:2]로서 이는 표준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벗어버리는 것(혹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상수常數들의 제한)을 말한다.(“말의 간결,” “죽음에 섬기는 말”) 다른 하나는 과적(過積)으로서 이는 특이한 효과들의 번성을 말한다.(“넓어져 가는 소란”) 빈곤은 생략을 포함하기에 이른바 비문에 가까운 문장들을 낳으며(실제로 들뢰즈․가따리가 소수화된 언어의 대표적 사례로 드는 카프카에게는 비문성 문장들이 많다), 과적은 표준말의 전도사인 전형적인 글짓기 선생의 관점에서라면 글의 매끄러움을 위해서 쳐내야할 ‘군더더기’ 요소들을 양산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세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첫째, 그러면 매끄러움 혹은 자연스러움이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둘째, 매끄러움 혹은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조건 긍정적인 것인가? 셋째, 소수화된 언어를 추천하는 것은 자칫 모든 사람이 셰익스피어나 카프카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뜻은 좋지만 실제로는 비현실적인 요구가 아닌가?

우선 첫째 물음부터 생각해보자.

앞에서 나는 매끄러움은 익숙함에서 오고 익숙함은 규칙적 반복에서 온다고 했다. 그런데 모든 반복되는 것은 맨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상투적 표현(이는 익숙한 표현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은 원래는 신선하고 특이한 표현이었다. 이는 매끄러움과 서걱거림이 원래부터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 사이에 절대적 경계가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경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 경계는 결코 두부를 자른 것처럼 확연하지는 않으며 또한 새로운 의미와 표현들이 널리 쓰여 익숙한 표현이 됨에 따라 늘 변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계가 익숙한 표현의 영역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는 것이 언어적 삶의 성장의 한 표시일 것이다.

비록 그 경계가 확연하지는 않지만 언어의 자연스러움, 또는 이미 익숙해진 표현들을 잘 아는 것은 언어의 변이, 새로운 표현을 가늠하는 기본적 조건이다. 또한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자연스러움과 매끄러움을 마스터하는 것이 새로운 표현을 향한 모험의 여정을 떠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습작과정이 바로 이러한 조건의 획득과정일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무슨 작업을 하려면 작업대가 필요한데, 변이의 작업에서는 상수적 요소들의 통달이 바로 이러한 작업대 역할을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글을 쓰는 입장에서든 읽는 입장에서든 자연스러움과 매끄러움을 잘 아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매끄러움을 알아야 서걱거림을 알 수 있다. 마치 문법을 정확히 알면 문법을 벗어나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문법을 초과하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다만 작업대를 자신의 지향할 바로 삼거나 아니면 감옥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둘째 물음에 대해서는 ‘무조건 긍정적이지는 않다’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자연스러움, 또는 이미 익숙해진 표현들에서 벗어나는 것에는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각주:3] 하나는 초과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한 이탈이다. 전자는 새로운 의미(혹은 감각)의 창출에 성공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이다. 들뢰즈․가따리는 이 후자의 경우를 단순한 ‘뒤범벅’, ‘뒤섞임’, 혹은 ‘휘갈김’ 등으로 부르며 이런 경우에는 창조의 기계가 되지 못하고 “재생산의 기계”로 떨어진다고 한다. 실제로 예컨대 낯선 표현들이 많아서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시(난해한 시)를 평할 때에 과연 이것이 전자의 경우에 속하는지 아니면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지를 가리는 것이 평가의 관건이 된다. 김수영은 전자를 ‘진정한 난해시’라고, 후자를 ‘가짜 난해시’ 혹은 ‘불가해한 시’라고 부른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시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서술이나 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현실이 담겨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生活現實과 詩」)

셋째 물음은 다중지성의 문제와 연관된다. 초점은 모든 사람이 셰익스피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나름의 능동적인 사유를 할 수 있으며, 이 사유들이 서로 협동의 네트워크를 이루어 계속적으로 혁신과 변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예의 “단순한 전달과 노예의 언어”(김수영)는 최소한도로 (그저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도로만) 축소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창조적 협동의 네트워크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로 실제로 존재했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는 결코 개인의 독자적인 ‘천재성’만으로 대가가 된 것이 아니다. 리비스가 자주 지적하듯이, 셰익스피어에게는 당시의 활발하게 살아있는 영국 민중의 언어문화가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영어에 측정 불가능하리만큼 거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가 모국어를 풍요롭고 탄력 있으며 대단히 활력 있는 언어로 계승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리비스, 『우리 시대의 영문학과 대학』)

러스킨의 고딕건축론(『베네치아의 돌들』에 들어있다)은 창조적 상호협동의 또 하나의 사례를 감동적으로 제시해준다. 그가 제시하는 고딕 건축은 불완전함이 가득하며 모든 손길마다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단편들이 한데 모여 이룬 “장중하고도 나무랄 데 없는 전체”이다. 이러한 고딕 건축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리스 건축과 대조된다. 러스킨이 보기에는 (뜻밖에도?) 완전함(완벽함, 정확함, 기술적 세련됨)에 대한 요구는 항상 예술의 목적에 대한 몰이해의 표시이다. 예술이란 계속 새로워지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데 완전함 혹은 완벽함이란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지성이 멈춘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화가의 지성이 새로운 형상을 창안하려고 끙끙대고 있다면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그 형상을 어떻게 완벽하고 정확하게 그릴 수 있겠는가? 새로움의 창안을 멈춘 상태를 러스킨은 노예의 상태로 본다. 따라서 완벽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급 장인에게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들―구(球) 모양, 용마루 모양, 완전히 대칭되는 나뭇잎 모양―만 맡기는 그리스 건축은 러스킨의 관점에서는 ‘노예적’ 건축이다. 이와 반대로 고딕 건축을 러스킨은 ‘혁명적’ 건축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적’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러스킨이 소개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고대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가 있다. 고대 베네치아의 장인은 가장자리가 날카로운지 아닌지를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모든 유리 공예품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창안했다. 손잡이나 주둥이를 주조할 때마다 새로운 상상을 불어넣었다.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품은 만든 이의 능력에 따라 추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다. 그러나 공예품마다 형태가 다 다르다. 완결된 마무리(finish)는 형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러스킨은 말한다. 가장자리(edge)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디자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반대로 디자인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는 가장자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러스킨은 “어른의 정신이 아이의 손으로 표현되는 건축”을 최고의 건축으로 규정한다.

러스킨은 건축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건축 너머로 확대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완전함]은 유한한 육신에 들어있는 삶의 활력의 표시이다. 다시 말해서 전진과 변화의 상태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경직된 완전함의 상태에 있지 않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 일부는 부패하고 있고 일부는 태어나고 있다. 3분의 1은 꽃눈이고 3분의 1은 만개해 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과거가 된 디기탈리스 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전형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어떤 불규칙성들과 부족함들이 있는데, 이는 삶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변화를 함축하는 것은 불규칙성을 허용한다. 불완전함을 추방하는 것은 표현을 파괴하는 것이며 능력의 발휘를 억제하는 것이고 활력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모든 사물은 말 그대로 더 좋고 더 예쁘고 더 사랑스럽다. 그래서 인간의 삶의 법칙은 <노력>일 것이며, 인간의 판단의 법칙은 <자비>일 것이다.

이것을 글에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서걱거림, 더듬거림, 소수화가 바로 언어에서 드러난 삶의 활력의 표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루어야 할 혁명의 문제이기도 하다. 혁명이란 단어들이 기존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의 출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혁명은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을 벗어던지기 전에는 시작할 수 없다. 이전의 혁명들은 그 자신의 내용에 스스로 둔감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과거의 세계역사에 대한 회상을 필요로 하였다. 19세기의 혁명은 자신의 내용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묻도록 해야 한다. 이전에는 단어들이 내용을 넘어섰다. 이제는 내용이 단어들을 넘어선다. (맑스,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어 18일」)

덧붙임 : 글에서 매끄러움과 흐름은 구별되어야 한다. 매끄러움의 문제가 바다의 표면이 잔잔하냐 아니냐의 문제라면 흐름의 문제는 바다의 조류 혹은 해류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리를 바꾸어서 생각해보자.

 

  1. [인용자] 1611년 영국왕 James 1세의 재가(裁可)에 의하여 편집된 영역 성서. [본문으로]
  2. 이는 앞의 인용문에서 리비스가 말한 ‘궁핍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본문으로]
  3. 물론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를 로렌스는 “상투형들의 새로운 모음, 습관화된 기억들의 새로운 배열”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