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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시에서의 혼돈 (D. H. Lawrence)

―해리 크로스비의 시집 태양 마차』에 붙이는 서문

시는 단어의 문제라고들 말한다. 이는 그림이 물감의 문제이고 프레스코가 물과 수성페인트의 문제이다라는 말만큼 맞다. 이는 온전한 진실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라서 만일 이 말을 대단한 진실인 것처럼 말한다면 이는 약간 지각없는 일이다.

시는 단어들의 문제이다. 시는 단어들을 한데 엮어서 찰랑대고 딸랑대는 색깔들의 흐름으로 만드는 것이다. 시는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이다. 시는 생각을 무지개 빛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시는 이 모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다른 어떤 것이다. 앞의 모든 요소들이 주어진다면, 무언가 시와 매우 유사한 것, 옛 낭만적 이름인 포에지(poesy)를 빌어다 붙일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포에지는 골동품처럼 항상 인기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시란 여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시의 본질적 성질은 그것이 새로운 주목의 노력을 한다는 것, 그리고 알려진 세계 내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과 꽃은 모두 늘 물결치는 기묘한 혼돈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익숙해진 혼돈을 우리는 우주(cosmos)라고 부른다. 우리를 구성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 혼돈을 우리는 의식, 정신 그리고 심지어는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혼돈이다. 비전(vision)에 의하여 밝아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마치 무지개가 폭풍을 밝게 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듯이. 그런데 무지개처럼 비전도 사라진다.

인간은 혼돈 속에서 살 수 없다. 동물은 그럴 수 있다. 동물에게는 모든 것이 혼돈이다. 다만 혼돈의 물결 내에서 반복되는 몇몇의 움직임과 양상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동물들은 만족해한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을 비전으로 감싸야하며, 외면적인 형태와 안정성과 고정성의 집을 지어야 한다. 혼돈에 대한 공포로 인간은 처음에는 자신과 영원한 소용돌이 사이에 우산을 펴 세운다. 그런 다음에 인간은 우산의 안 쪽을 창공처럼 색칠한다. 그리고 우산 아래서 돌아다니고 살다가 죽는다. 우산은 후손에게 전해져서 둥근 천장이 되고, 인간은 마침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신과 거친 혼돈 사이에 자신이 만든 놀라운 어떤 것을 세워 고정시키며, 점점 그의 우산 밑에서 표백되고 질식해간다. 그러다가 관습의 적(敵)인 시인이 등장하여 우산을 찢는다. 그리고 보라! 힐끗 보이는 혼돈은 비전이요, 태양으로 낸 창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평범한 인간은 비전에 익숙해지고 혼돈으로부터 불어오는 진짜 바람이 싫어서 혼돈으로 난 창문과 유사한 것을 그려놓고, 그 가짜 창문으로 우산을 깁는다. 즉, 비전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는 그의 집안 장식의 일부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산은 여러 측면을 가진, 이글거리는 열린 창공처럼 보인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는 모두가 누덕누덕 기워진 가짜이며, 주석이 달리고 용어해설이 달린 호머요 키쯔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시의 역사이다. 어떤 사람은 혼돈의 거친 허공에서 타이탄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들--정리자]을 보는데, 타이탄은 이어지는 세대들과 그들이 물려받아야 하는 혼돈 사이에 세워진 벽이 된다. 거친 하늘은 움직이며 노래했다. 이것조차도 인간과 신선한 공기의 하늘 사이에 쳐진 거대한 우산이 되었다. 그런 다음에 색칠한 둥근 천장이 되었으며, 둥근 지붕에 그린 프레스코가 되었고, 그 아래에서 인간은 표백되고 불만스러워진다. 다른 시인이 열려진 바람찬 혼돈으로 향하는 구멍을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마침내 지붕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그것은 색칠한 회반죽이다. 인간이 그동안 보여준 모든 솜씨도 우리를 속이지는 못할 것이다. 단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든 베토벤이든 휘트먼이든. 보라! 천장의 회반죽에 칠해져있다. 아시시(Assissi)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시스처럼. 놀랍게도 허공처럼, 새들이 나르는 공간처럼, 많은 사물의 혼돈처럼. 부분적으로는 프레스코가 퇴색하였기에.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 교회를 나와서 자연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서 기쁘다.

인류는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때 우리는 혼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산이 역할을 하는 한, 시인이 거기에 구멍을 내는 한, 대중이 점차적으로 구멍에서 보이는 비전을 이해하도록 교육받는 한(이는 구멍의 비전과 똑같아 보이는 것으로 깁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될 수 있고, 인류가 교육을 받아서 현실 속에 내장될 수 있는 한, 문명은 다소 행복하게 지속될 것이고, 자신의 색칠한 감옥을 완성할 것이다. 이는 의식의 완성이라 불린다.

예를 들어 워즈워스가 구멍을 내어서 앵초를 보았을 때 사람들이 가졌던 즐거움! 그때까지 사람들은 단지 희미하게만, 우산의 그림자 아래서만 앵초를 보았던 것이었다. 워즈워스를 통해서 사람들은 혼돈의 온전한 섬광 속에서 앵초를 보았다. 그 이후로 점차 우리는 앵초만을 보게 되었다. 즉 구멍을 기웠던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관습적 사고를 넘어서, 중세에 세워진, 도덕적인 이미지들과 쇠로 된 옷을 입은 기사들로 색칠된 우산을 크게 찢어서 바깥의 혼돈 속에 있는 감성적이고 동경하는 인간을 보았을 때는 더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제 우리의 지붕들은 햄리트들과 맥베스들로 빽빽하게 색칠되어 있을 뿐이고, 벽들도 그렇다. 질서는 고정되어 있고 완결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 혼돈은 다 몰아내져 있다.

우산은 너무 커져서 기운 부분들과 회반죽은 너무 단단해지고 딱딱해졌다. 더 이상 찢을 수가 없다. 찢겨진다해도 그것은 더 이상 비전이 아닐 것이며, 난폭함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부분과 맞추기 위해서 즉시 발라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산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혼돈에 대한 갈망은 향수(鄕愁)가 된다. 이는 어떤 끔찍한 바람이 우산을 조각조각 찢고 인류의 상당수를 망각에 빠지게 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나머지는 혼돈의 가운데서 떨고 있을 것이다. 혼돈은 우리가 비전의 우산을 펼치든 아니든 항상 있었고 또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중대한 때에 시인은 어떠한가? 시인은 인류의 내적 욕구를 드러낸다. 무엇을 드러내는가? 혼돈에 대한 욕구와 혼돈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혼돈에 대한 욕구가 시의 숨(breath)이다. 혼돈에 대한 공포는 다채롭게 펼쳐지는 형식과 기법들에 들어있다. 시는 단어들로 만들어진다고들 말한다. 시인은 소리와 이미지의 방울들을 불어서 만드는데, 이 방울들은 곧 그것들을 채우고 있는 혼돈에 대한 갈망의 숨으로 터진다. 그런데 엉터리 시인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기 좋은 예쁘고 반짝거리는 방울들을 만들 수 있다. 이 방울들은 그 안에 시의 숨이 없기 때문에 터지지 않고, 우리가 떨어뜨릴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