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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현재’의 시 - D. H. 로렌스


‘현재’의 시

- 『새 시들』(New Poems, 1918)의 미국판 해설


D. H. 로렌스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매우 빠르게 아무런 고려도 없이 곧바로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팅게일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정지를 그리고 기억의 풍요롭고 꿰뚫는 리듬을, 완성된 과거를 듣는다. 종달새는 슬프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예쁜 일시적인 슬픔이라서 거의 희망의 황홀이다. 나이팅게일의 개가(凱歌)는 찬가이지만 죽음의 찬가이다. [각주:1]


시도 그렇다. 시는 보통 먼 미래의 절미(絶美)한 천상의 목소리이거나 풍요롭고 장엄한 과거의 목소리이다. 그리스인들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과거가 심장 속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내륙 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때로 바다 소리를 듣고 강력하고 놀라운 아쉬움과 향수(鄕愁)로 힘이 빠지듯이 말이다. 아니면 그 이타카인[각주:2]의 고통스럽고도 매혹적인 역정(歷程)을 좇을 때 그들[각주:3] 자신의 미래가 그들의 피 속에 맥박처럼 물결쳤다. 그리스인들에게 호머는 이랬다. 승리한 전투와 성취한 죽음으로 장대한 그들의 <과거>였으며, 또한 그들의 <미래>, 미지의 세계를 거쳐가는 오디세우스의 마법적인 방랑이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새들은 지평선에서 노래한다. 새들은 뜻밖의 곳에서, 우리 너머에서, 혹은 숨죽인 밤으로부터 노래한다. 새들은 새벽녘과 해질녘에 노래한다. 초라하고 날카로우며 길들여진 카나리아만이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 휘파람 소리로 운다. 야생의 새들은 우리가 깨기 전에 시작하거나 깬 상태에서 혼몽한 상태로 들어갈 때에 시작한다. 우리의 시인들은 문 옆에 앉아있다. 어떤 이들은 서쪽에, 어떤 이들은 동쪽에. 우리가 드나들 때에 우리의 심장은 반응으로 물결친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중간에 있는 한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시작의 시와 끝남의 시는 모든 멀리 있는 것에 속하는 저 절미한 합목적성, 완결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완결된 것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완료되어 있고 완성된 것의 성격을 가진다. 이 완료되어 있음, 완성되어 있음, 확정성과 완결성이 절미한 형식으로 전달된다. 완전한 대칭성이며, 지고한 끝남의 순간을 위하여 손들을 잡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잡는 춤처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리듬이다. 완결된 지나간 순간들, 희미하게 빛나는 미래 속에서 완결된 순간들―이것들이 셸리와 키츠의 소중한 보석 같은 서정시들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시가 있다. 가까이에 있는 것[각주:4]의 시, 즉각적인 현재의 시이다. 즉각적인 현재에는 완결이 없고 완성이 없으며 확정되는 것이 없다. 가닥들은 모두 날아다니고 떨고 섞여서 직물이 되며, 물줄기들은 달을 흔든다. 흐르는 물의 표면에도 완료되지 않은 조류(潮流)의 표면에도 둥글고 완성된 달은 없다. 살아있는 원형질이 보석을 이루는 일은 없다.[각주:5] 살아있는 원형질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동하며 미래를 들이쉬고 과거를 내쉰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 모두의 활기(the quick)이지만, 양자 어느 것도 아니다. 원형질에 확정성이란 없으며 결정(結晶)도 영속적인 것[각주:6]도 없다. 만일 우리가 살아있는 조직을 생물학자들이 포르말린으로 하듯이 고정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딱딱해진 과거의 조각만을, 지나간 삶만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항상 현재로서 존재하는 삶은 확정성을 모르며, 확정된 결정(結晶)화를 모른다. 완전한 장미란 출현해서 흘러가 사라지는, 달리는 불꽃(running flame)[각주:7]이며, 어떤 의미에서도 멈춰있고 정적이며 확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 그 뛰어난 아름다움이 있다. 모든 삶과 모든 시간의 흐름 전체는 갑자기 일어 우리 앞에 뜻밖의 것으로서, 계시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막 시작되는 창조의 하얀 활기를 본다. 수련(垂蓮)은 흐름으로부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 주위를 둘러보고는 하얗게 빛났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육화(incarnation)를, 항상 소용돌이치는 흐름의 활기를 본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다. 우리는 창조적 변화의, 창조적 변이의 물질(substance)을 보고 만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연꽃에 대해 말한다면, 변화없고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소진되지 않는 항상 펼쳐지는 창조적 불꽃의 신비에 대해서 말하라. 흐름의 육화된 드러남에 대하여, 만개한 변이에 대하여, 이행하는 가운데 완전히 열려있으며 우리 앞에서 움직이는 가운데 그대로 드러나는 웃음과 쇠퇴에 대하여 말하라.


나로 하여금 나의 연꽃 안에서 진흙과 천국을 느끼게 해달라. 무겁고 침적(沈積)하고 흡수하는[각주:8] 진흙을, 하늘의 바람의 회전을 느끼게 해달라. 둘 모두가 가장 순수하게 접촉하는 것을, 흡수하는 무게의 벌거벗음을, 벌거벗은 채 지나가는 광휘를 느끼게 해달라. 고정되고 정해지고 정태적인 것을 나에게 주지 말라. 무한한 것 혹은 영원한 것을 나에게 주지 말라. 조금도 주지 말라. 고요하고 하얀 끓어오름을, 육화된 순간의 백열(白熱)과 서늘함을 달라. 모든 변화와 신속(迅速)과 대립의 순간, 그 활기를. 순간, 즉각적인 현재, <지금>. 즉각적인 순간은 하류로 흘러가는 한 방울의 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천이고 분출이며 흐름이 일어오르는 것이다. 여기, 바로 이 즉각적인 순간에 미래성의 우물로부터 시간의 흐름이 일어올라 과거의 대양으로 흘러간다. 원천, 분출, 창조적인 활기.


무한한 과거의 시 그리고 무한한 미래의 시와 함께 이러한 즉각적인 현재의 시, 즉각적인 시가 존재한다. 육화된 <지금>의 끓어오르는 시는 지고의 것으로서, 이전과 이후의 영원히 지속되는 보석들조차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 그 떨리는 순간성은 결정(結晶)화된, 진주처럼 단단한 보석들을, 영원의 시들을 능가한다. 바래지 않는 영원한 보석들의 성질을 구하지 말라. 진흙의 끓어오름인 순백을 구하라, 추락하는 하늘인 저 시작되는 부패를 구하라, 멈추지 않고 그치지 않는 삶 자체를 구하라. 진주빛의 변화보다 빠른 변이가, 신속이, 정지가 아닌 것이, 오고 감이, 고정성이 아닌 것이, 결론이 안 난 것이, 즉각성이, 결말이나 종말이 없는 삶 자체의 질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서로 만나서 영원히 계산될 수 없는 창조의 여정(旅程)에 오르는 사물들의 신속한 순간적인 연합이 존재하게 마련이다.[각주:9] 여기서 모든 것은 다른 사물들과 신속하고도 유동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쉬지 않는 그리고 파악될 수도 없는, 순전한 현재의 시, 그 영원함이 바람같은 이행에 있는 시이다. 휘트먼의 시는 이런 종류 중 최고의 시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토대도 박공벽(牔栱壁)도 없는 그의 시는 항상 이동하며 속박되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휩쓸고 지나간다. 휘트먼은 정말로 이전과 이후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며 한탄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발화를 이해하는 단서는 즉각적인 순간을, 삶의 활력이 그 수원에서 일어올라 발화가 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다. 영원은 단지 실질적인 현재로부터의 추상일 뿐이다.[각주:10] 무한은 기억의 거대한 저장고 혹은 염원의 저장고일 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현재의 떨리는 민첩한 때, 이것이 바로 <시간>의 활기이다. 이것이 내재성이다. 우주의 활기는 신비하고 손에 그 맥박이 만져질 수 있는 고동치는 육화된 자아이다. 항상 그렇다.


휘트먼이 이것을 그의 시에 담았기에 우리는 그토록 깊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존중한다. 그가 단지 “먼 옛날의 불행한 일들” 혹은 “아침의 날개들”에 대해 노래했다면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심장이 밀려오는 긴박한 <지금>―우리 모두에게도 밀려오는―과 함께 고동쳤기 때문이다. 그는 활기에 그토록 가까이 가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즉각적인 현재의 시가 이전의 시 혹은 이후의 시와 동일한 신체 혹은 동일한 움직임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 시는 결코 동일한 조건에 굴복할 수 없다. 결코 확정되지 않는다.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리듬이 없으며, 꼬리를 입에 문 영원의 뱀도 없다.[각주:11] 정태적인 완결이란 없으며, 우리가 매우 겁이 많기 때문에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게 되는 확정성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자유시에 대해서 많은 글들이 쓰였다. 그러나 자유시란 순간으로부터의, 총체적 인간으로부터의 직접적 발화이거나 그러한 발화이어야 한다는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그것은 영혼과 정신(mind)과 신체가 즉시 일어오르는 것이며 아무 것도 배제되지 않는 것이다. 이 셋이 함께 말한다. 혼란과 불협화음이 일정 정도 존재한다. 그러나 소음이 물의 돌진에 속하듯이 혼란과 불협화음도 실재에 속할 따름이다. 자유시에 대하여 멋진 법칙들을 창안하는 것도 소용없고, 모든 음보들(feet)[각주:12]이 발끝을 맞추어야 할 멜로디의 선을 그리는 것도 소용없다. 자유시는 어떤 교련담당하사관이 되었든 멜로디의 선에 발끝을 맞추지 않는다. 휘트먼은 그의 상투형들을 쳐냈다. 아마도 상투어구들만이 아니라 리듬의 상투형들도. 이것이 대략 우리가 자유시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우리는 소리 혹은 의미의 상투화된 움직임들과 낡은 진부한 연관들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발화를 강제하기 위해서 그토록 사랑하는, 저 인공적 도관(導管)들과 운하들을 부숴야한다. 우리는 습관의 딱딱한 목을 부러뜨릴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은 불꽃처럼 자연발로적이고 유연할 수 있다. 우리는 인공적인 거품이나 인공적인 부드러움 없이 발화가 돌진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움직임도, 어떤 리듬도 미리 어떻다고 정할 수 없다. 우리가 창안하거나 발견하는 모든 법칙들은―마찬가지 말이지만―자유시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특정 형태의 제한되고 한정된 자유롭지 못한 시에만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유시는 제한된 시와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자유시가 우리의 손에서 완성되었을 때 거기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완벽한 미래의 결정(結晶)도 아니다. 자유시의 흐름은 가득 밀어닥친 염원의 열망하는 밀물도 아니고, 기억과 아쉬움의 감미롭고 얼얼한 썰물도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인간의 정서의 두 거대한 영역들, 인간의 날들의 두 거대한 고향들, 두 영원들이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결론적이고 최종적(확정적)이다. 그 아름다움은 확정되고 완결된 목표의 아름다움이다. 확정된 아름다움과 정확히 재어진 대칭은 고정되고 변화없는 영원들에 속한다.


그러나 자유시에서 우리는 즉각적인 순간의 일어오르는 벌거벗은 맥박을 찾는다. 보격을 맞춘 시의 예쁜 형식을 부수는 것, 그리고 그 파편들을 모아서 ‘자유시’라 불리는 새로운 물질로 만드는 것―이는 자유시를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취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시가 그 나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별이나 진주가 아니라 원형질처럼 즉각적임을 모른다. 자유시는 어느 쪽 영원에도 목표를 두지 않는다. 자유시는 완성이 없다. 만족스러운,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안정성이 없다. 하나도 없다. 자유시는 즉각적인 것이다. 활기이다. 모든 ‘~일 것이다’와 ‘~였다’의 분출하는 원천이다. 발화는 원형질과 같다. 모든 영향력들과 벌거벗은 채로 즉시 접촉한다. 어떤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일어나는 것이다.[각주:13]


그러한 발화에게는 어떤 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은 단순히 족쇄이자 죽음일 것이다. 법칙은 매번 새롭게 안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새들은 바람을 타고 날며, 모든 숨결에 유연하게 반응하고 폭풍 속에서도 살아있는 불꽃이며 그 깜박임은 그 지고의 변이성과 변화의 힘에 의존한다. 그리로부터[각주:14] 그러한 새가 왔고 그리로 간다. 어떤 견고한 땅으로부터 날아올랐고 어떤 견고한 땅에 그 날개를 접고 내릴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이전과 이후의 문제이다. 지금, 지금, 새는 바람을 타고 날고 있다.



희귀한 새로운 종류의 시는 이러하다. 우리가 정복하지 못한 하나의 영역, 순수한 현재의 영역이다. 시간의 하나의 거대한 신비는 우리에게 미지의 땅인 즉각적 순간이다.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했던 가장 장려(壯麗)한 신비,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자아이다. 모든 시간의 활기는 순간이다. 모든 우주의, 모든 창조의 활기는 육화된 신체적 자아이다. 시가 우리에게 단서를 준다. 자유시가. 휘트먼이. 이제 우리는 안다.


이상적인 것―이상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허구이다. 추상물이다. 정태적 추상, 삶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다. 그것은 이전 혹은 이후의 단편이다. 그것은 결정(結晶)화된 염원 혹은 결정화된 기억이다. 결정화되고, 정해지고, 확정된. 그것은 거대한 영원의 저장고에, 확정된 사물들의 저장고에 따로 떼어둔 것이다.


우리는 결정화되고 따로 떼어진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자아에 대하여, 다름 아닌 자아의 원형질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또한 자유시에 대하여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보라! 우리는 해냈다!』(Look! We Have Come Through!)의 서론으로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원래 속한 책이 나온 지 한참 후에 서론을 펴내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독자가 혼자서 이 책을 읽을 기회를 잘 가지고 난 후일 것이기 때문이다.


팽번, 1919.






 

★ 일러두기

1. 밑줄은 번역자의 강조이고 굵은체는 원저자의 강조.

2. 주석은 번역자의 주석.

3. <>는 대문자로 쓴 명사에 씌웠음.

4. 핵심적인 용어인 ‘the quick’을 ‘활기’로 옮겼으나 불만족.


★ 이 글의 특징

1.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 등에서 말하는 ‘중간’.


그것[뿌리줄기]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항상 중간(milieu)을 가지고 있어서 그로부터 자라나서 흘러넘친다. (『천 개의 고원』 서론 부분에서)

고원은 시작에 있지도 끝에 있지도 않고 항상 중간에 있다. 뿌리줄기는 고원들로 이루어진다. (『천 개의 고원』 서론 부분에서)

사물들의 중간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 사물들과 단어들에서 풀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각주:15] (『천 개의 고원』 서론 부분에서)

뿌리줄기는 시작도 끝도 없다. 항상 중간에, 사물들 사이에 존재한다. 사이존재, 막간극이다. (...) 여행하고 움직이는 또 다른 방식 : 중간에서 중간을 통해 시작하기, 시작하고 끝내기보다 오고 가기. 미국 문학은, 그리고 이미 영국 문학도, 이러한 뿌리줄기적 방향성을 훨씬 더 높은 정도로 드러낸다. 그들은 사물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법을, ‘그리고’의 논리를 수립하는 법을, 존재론을 전복하는 법을, 토대를 제거하는 법을, 끝들과 시작들을 폐기하는 법을 알았다. 중간은 결코 평균이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얻는 지점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갔다 다시 돌아오는, 장소를 확정할 수 있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하나 다른 것을 휩쓸어가는 가로지르는 움직임, 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얻는 시작이나 끝이 없는 흐름이다. (『천 개의 고원』 서론 부분에서)

실상, 공고화(consolidation)[각주:16]에 의하여 진행되는 공재(consistency)는 필연적으로 중간에서, 중간에 의하여 행동하며, 모든 원리 혹은 최종성(확정성)의 평면들에 대립된다.(『천 개의 고원』 결론 부분에서)

2.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하는 ‘비신체적 변형’의 시간


비신체적 변형은 그 순간성, 직접성에 의해서, 즉 변형을 표현하는 진술과 변형이 낳는 효과의 동시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명령어들은 시간, 분, 초까지 정확하게 날짜가 부여되어 있으며, 지정된 시점부터 효과를 발하는 것이다. (4장)

명령어는 그 순간성, 그 즉각성으로 인하여 변형이 귀속되는 신체들과 관련된 변이의 힘을 부여받는다.

명령어의 순간성은 참으로 희한하다.[각주:17] 예를 들어 루소에게는 자연 상태로부터 사회적 상태로의 이행이란 마치 제자리에서 일어난 도약과 같았다.[각주:18] 즉 영시(零時, zero hour)에 일어나는 비신체적 변형과 같다.[각주:19]

즉각적 변형이라는 날실은 항상 지속적 양태변화라는 씨실에 삽입된다.

3. “네그리에게서 영원은 카이로스의 힘에 의하여 매 순간 혁신되는 현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새로 생성(생산)된 것은 곧 영원한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혁신되고 새로 생성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혁명의 시간』 역자 해설) 다음은 『혁명의 시간』에서 발췌한 부분들이다.


영원은 현재 존재하는 존재(the being that is)의 공통된 이름이다. 모든 카이로스는 이 영원 속에 자리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즉 카이로스는 영원한 것(the eternal) 속에 즉 ‘이전’에 오는 시간 속에 자리한다는 것―은 카이로스를 과거로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현재를 카이로스의 현재로 만든다.

영원한 것 속에 있다는 것은 ‘생산’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의 영원성은 시간적 강렬성으로서, 혁신적 현존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영원한 시간의 온전한 현재는 특이성이다. ‘특이한’과 ‘영원한’이란 형용어는 바꾸어 쓸 수 있다. 그 관계는 동어반복적이다. 일어난 모든 것은 영원하다. 지금 여기서 영원하다. 영원한 것은 특이한 현재이다.

영원은 현재로서 경험되며 공통적인 것은 전부 존재론의 발전 속으로 되돌려진다.

이제 왜 영원한 것이 무한한 것과 같지 않은지 분명해진다. 실로 사랑은 무한하지 않고 영원하다. 척도가 아니라 측정불가능한 것이며,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특이한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된 것이며, 시간성을 채우는 물질이 아니라 시간의 화살 그 자체이다.



 


  1. 나이팅게일은 밤에 우는 새이고 종달새는 새벽에 우는 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줄리엣의 집에 숨어들어가 하룻밤을 지낸 로미오가 도망나오기 전에 둘이 새울음 소리를 놓고 '예쁘게' 옥신각신하는 대목이 있다.(3막 5장) 어떤 새울음 소리가 들리자 로미오는 종달새이니 가려고 하고 줄리엣은 나이팅게일이니 더 있다 가라고 한다. 줄리엣의 만류에 로미오는 가려는 마음을 접고 죽어도 좋으니 더 있겠다고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줄리엣이 (아마 진짜 종달새 소리가 들렸는지) 종달새이니 빨리 가라고 재촉한다. 로미오는 잡히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오디세우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3. 그리스인들. [본문으로]
  4. 푸코. “역사적 감각은 또한 전통적 역사서술이 형이상학에 의존하는 가운데 가까움과 멂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다. 전통적 역사서술은 멂(거리)과 높이에 대한 숙고에 바쳐진다. 가장 고결한 시기들, 최고의 형식들, 가장 추상적인 이념들, 가장 순수한 개체성들. 가능한 한 가까이 감으로써, 유명한 개구리의 관점을 택할 위험을 무릅쓰고 산기슭에 위치함으로써 이것을 성취한다. 반면에 실질적 역사(Wirkliche Historie)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게로 그 시야를 좁힌다. 신체, 신경체계, 섭생, 소화, 에너지. 실질적 역사는 데카당스를 밝혀내며, 우연히 고상한 시기들을 만나면 야만적이고도 부끄러운 혼란을 발견하지나 않을까하는 마음―원한에 찬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을 갖는다. 실질적 역사는 내려다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다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하강하여 다양한 관점들을 포착하고 분산과 차이들을 드러내며 사물들을 사물들 나름의 차원과 강도에서 교란되지 않은 상태로 둔다. 실질적 역사는 역사가들의 간교한 관행을, 자신들로부터 가장 먼 사물들을 검토한다는 주장을, 이러한 유망한 거리(distance)에 접근하는 비굴한 태도(이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저승의 존재를 자신들의 보상의 약속으로서 선언하는 형이상학가들처럼)를 전복한다. 실질적 역사는 가장 가까운 것을 연구한다. 그러나 (...) 그것을 멀리서 파악한다.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뛰어들어서 진단하고 그 차이를 진술하는 의사의 접근법과 유사한 접근법이다.) 역사적 감각은 철학보다는 의학과 더 공통점을 갖는다.” “Nietzsche, Genealogy, History” [본문으로]
  5. 로렌스가 말하는 ‘원형질’은 『다중』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살’과도 같다. 고정된 형태―‘보석’―를 띨 수 없는 활력의 구성요소이다. [본문으로]
  6. 스피노자가 말하는 시간의 지속(duration)을 기준으로 한 영속성을 말한다. [본문으로]
  7. 번역으로는 잘 전달이 안된다. 수돗물(running water)처럼 삶의 활력이 장미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물론 장미가 시들면 흐름은 중지된다. 그래서 ‘흘러가 사라진다’(flow off)라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8. 진흙을 손으로 잡았을 때 손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갯벌에서 게 등을 잡기 위해 땅을 파보면 이런 느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9. 들뢰즈·가따리가 말하는 공재의 평면의 형성이다. [본문으로]
  10. 이런 경우 ‘영원’은 네그리가 말하는 ‘영원’과 다른 의미이다. [본문으로]
  11. 동일한 것의 반복이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12. 몇 개의 음절로 구성되는 시행의 단위. [본문으로]
  13. 들뢰즈·가따리는 『천 개의 고원』 등에서 생성(되기)은 장소의 이동이 아님을 말한다. [본문으로]
  14. 즉 “지고의 변이성과 변화의 힘”으로부터. [본문으로]
  15. “나무는 풀의 반대이다. 풀은 사물들의 중간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중간을 통하여 자란다. 이것이 영국 혹은 미국의 문제이다. 풀은 자신의 탈주선을 가지고 있으며,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우리는 머리에 풀을 가지고 있다. 사유가 의미하는 것은 두뇌의 존재 즉 풀의 ‘독특한 신경체계’이다.” (들뢰즈, 「영미문학의 우월성에 대하여」) [본문으로]
  16. 탈영토화의 점들이 뿌리줄기 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일정한 관계를 이룬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17.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에 가장 근접하는 개념인 ‘영토’가 ‘층’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비신체적 변형’의 존재이다. [본문으로]
  18. 도약을 하면 공간의 이동이 발생해야 하는데, 공간의 이동 없이 도약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19. zero hour : 원래 어떤 중요한 작전 등이 개시되는 시간을 뜻하는 군사적 용어이다. 여기서는 그냥 비신체적 변형이 일어나는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불어로는 ‘l'instant Zero’이다. 비신체적 변형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시간의 경과를 포함할 수가 없다. [참고] 이러한 시간을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는 ‘아이온Aion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아이온의 시간은 무한하지는 않지만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what is this time which need not be infinite but only "infinitely subdivisible"? It is the Aion.”(6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