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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발전’이라는 것


‘학교발전’이라는 것


한국의 대학들이 신자유주의화되면서 생긴 현상 중의 하나가 ‘학교발전’이라는 목표의 물신화(物神化)와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한 실제적인 노력들이다. 그리고 이 노력들 중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학교발전기금’의 조성이다.

아마 현재의 한국의 대학들을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대학의 이러한 노력들을 보며 ‘한국의 대학들이 학교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발전’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게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후 한국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듣기 좋은 말들을 그저 말로만 활용하는 것이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의 신자유주의자들이란 사실을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점은 제쳐 놓기로 하자. 우선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대학의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학교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학교발전'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대학의 사회적 기능인 교육 및 연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아니면 있더라도 그 관계가 부차적이거나 주변적이라는 점이다. 학교에 따라서는 교수업적평가의 평가영역에서 ‘학교발전에의 기여’라는 범주가 교육범주 및 연구범주와 나란히 존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발전기금을 내는 것이 ‘학교발전’에 기여한 하나의 사례로 인정되어 일정한 점수를 받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대학도 있다. 그러나 평가영역에 들어있든 아니든, 교육 및 연구와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미미한 ‘학교발전’이라는 것이 많은 대학들에서 학교정책의 중심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예컨대 한 교수가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것을 통해서 ‘학교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 보직을 하는 것? 학교발전을 위한 제안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은 결국 다시 ‘학교발전’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로 환원된다. 학교발전이 교육과 연구의 증진을 의미하는 경우라면 보직을 하는 것이 교육과 연구의 증진을 위한 행정 지원에 자신의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대신 교육과 연구를 어쩔 수 없이 소홀히 했으므로 그만큼 어쩔 수 없이 기여를 덜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교 발전이 교육과 연구의 증진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이것을 위해 열심히 보직을 한 경우라면 교육과 연구의 증진을 위한 행정 지원과는 관계없는 일에 열심히 ‘봉사’한 것이 된다.

그러면 교육 및 연구의 증진과 무관한 학교 발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바탕에서는 이것이 사유화(privatization)의 증진―원래 공적인 성격을 가졌던 대학의 많은 자원들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이는 것―에서 벗어난 것일 수가 없다.

대학에서 사유화가 나타나는 양태는 매우 다양하다.

―각 학문분야들(학과들)이 고르게 발전해야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 되는데 특정 학문분야에 재정지원이 몰리고 다른 분야들은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고사당하여 전체적으로 균형이 상실되는 것. 대학이 특정 분야나 학과의 전유물처럼 된다.

―연구에 들어간 자원이 개인의 것이 아닌 데도 연구의 결실을 사회의 공통적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만드는 것이 용인되고 더 나아가 조장되는 것.

―공적인 통로로 거두어들인 발전기금의 사용에 대해 학교권력을 구성하는 소수만이 의사결정권을 가지는 것.

이 이외에 학교마다 여러 상이한 양태의 사유화가 가능하다. 교수채용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도 일종의 사유화에 해당할 것이며, 행정과정의 민주성이 훼손되는 것도 소수의 대학 운영자들의 권력에 학교 전체의 운명이 맡겨진다는 점에서는 사유화이다. 빗처(Bitzer)[각주:1] 같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한국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풍토에서 이것 말고도 어떤 형태의 사유화가 더 진행되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의 대학들의 사회적 기능(교육 및 연구)을 크게 망가뜨리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선 대학 교수들이 연구할 조건이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일부 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교수들의 연구는 ‘학교발전’과 무관하므로 ‘학교발전’이 강조될수록 그만큼 무시당한다. 또한 ‘학교발전’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비대해지는 학교권력―이는 독재 유형에서 민주공화국 유형까지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이 동반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와 관료주의는 연구에 필수적인 자유로움을 박탈하고 심지어는 잡무의 과도한 부과를 통해 연구할 시간마저도 박탈한다.

교육 또한 무시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유화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들어가야 할 돈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발전기금’은 특히 과도하게 쌓여 있는 경우에는 마땅히 교육에 쓰였어야 할 돈이 쓰이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 또한 ‘학교발전’에 보탬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배척받는 학문영역이나 학과의 학생들은 멀쩡하게 등록금을 내고도 그에 합당한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기 쉽다. 실상 연구영역은 (그 중 일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연구자와 학교측에 사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교육 영역은 ‘돈’이 들기만 할 뿐 나오는 게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대학에서 가장 천대받는 것이 교육이다. 이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에도 마찬가지이며 아마 전 세계적으로 그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회가 대학에 기대하는 바와 다르며, 학생들의 등록금을 대는 학부모들이 기대하는 바와도 다르고, 심지어는 자본이 기대하는 바와도 다르다. 개별 자본가들의 관점은 다를 수 있지만, 자본 전체의 관점에서는 진정으로 실력있는 학생들이 다수 배출되고 증진된 연구의 결실이 모든 기업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재와 같은 대학의 ‘발전’행진이 아무런 제지 없이 계속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1. 빗처는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며 자신의 스승이나 심지어는 어머니와도 오로지 이익의 계산에 근거한 관계를 맺는다. 학교를 나온 후에는 공장주이자 은행가인 바운더비(Bounderby)의 회사 내 밀정 노릇을 하는데, 보수가 짭짤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