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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에 관하여


증명에 관하여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철학에 관한 Antonie Vos라는 사람의 설명을 읽다보니 새삼 형식논리의 협소함이 느껴졌다. 플라톤을 분석철학의 기호논리학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스코투스의 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스코투스의 중요 개념인 ‘synchronic contingency’에 관하여 ‘M (ptk & –- ptl)’와 같은 기호를 동원하여 왈가왈부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얼음은 물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은 수증기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자신을 ‘과학적’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실상은 대상에 대해서 어떤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발언능력을 논리의 형태로 능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 논리체계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다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발언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형식논리 혹은 기호논리란 수증기도 아니고 물도 아니며 얼음, 그것도 일정하게 표준화된 모양으로 깎아놓은 얼음들의 체계에 불과하다. 아무리 복잡해도 그렇다. 이걸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지극히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된 몇 개의 공식으로 환원하겠다는 어이없는 오만에 불과하다.

내가 보기에 스코투스의 ‘synchronic contingency’(‘공시적 우연’이라고 옮겨야 할까?)는 들뢰즈의 잠재성, 푸꼬의 삶의 활력과 통하는 중요한 통찰이다. 가능성들의 공존, 혹은 힘(potency)이 가진, 실재를 바꾸는 능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겨우 논리적으로 맞고 틀림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다니!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만일 그렇게 수학을 닮고 싶으면 『윤리학의 스피노자에게 배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