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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가따리, 무술을 말하다

내공과 외공을 다룬 김에 철학과 무술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선행 사례로 들뢰즈와 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12장 「1227 : 유목학에 관하여―전쟁기계」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불어본을 기준으로 영어본을 참조하며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전쟁기계의 체제는 이와 달리 정동의 체제이다. 이는 움직이는 것 자체하고만, 속도들하고만, 구성요소들의 속도의 합성하고만 연관된다. 정동은 정서(l'émotion)의 급격한 발출이며 이에 반해 감정(le sentiment)은 항상 전위되고 지체되고 반항한다.[각주:1] 정동은 무기처럼 투사되고, 감정은 도구처럼 안으로 잡아둔다. 신화만이 아니라 옛 무훈시와 기사 소설 혹은 궁정풍 소설 역시 보여주듯이, 무기와의 관계는 정동적이다. 무기가 정동이고 정동이 무기다.[각주:2]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절대적인 부동(不動), 즉 순수한 카타토니아[각주:3]는 속도 벡터의 일부로서 속도 벡터에 의해 이끌어지며, 속도 벡터가 행동이 돌처럼 굳어지는 상태를 급속한 움직임으로 연결시킨다. 기사들은 말 위에서 자다가, 화살처럼 몸을 날린다. (...) 무술은 항상 무기를 속도에, 무엇보다도 정신적(절대적) 속도에 종속시켰다.[각주:4]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술은 또한 정지와 부동의 기예이다. 정동이 양쪽 극단을 거쳐간다. 그래서 무술은 국가의 일과 달리 코드에 집착하지 않으며, 을 따른다. 길은 정동의 경로들이다. 이 길을 따라서 무인은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만큼이나 ‘사용을 버리는 법’(se desservir)을 배운다. 마치 정동의 활력과 정동의 단련이 배치(agencement)의 진정한 목표이고 무기는 단지 임시적인 수단인 듯이 말이다. 대상과 관련하여 행함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는(défaire et se défaire)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전쟁기계의 특성이다. 전사(戰士)가 행하지 않는 것(ne-pas-faire), 그리고 주체의 해체. 탈코드화의 움직임이 전쟁기계를 가로지른다. 이와 달리 덧코드화가 도구를 노동의 조직화에, 국가의 조직화에 결합시킨다. (도구는 그 사용법을 잊는désapprend 대상이 아니다. 그 부재를 보충할 수 있을 뿐이다.) 무술이 무게 중심과 그 전위의 규칙들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이 규칙들이 궁극적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길이 어디에 이르든, <존재>(l'Etre)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며 이와는 다른 성격의 절대적 움직임들을 보통의 공간 안에 옮겨놓을 뿐이다. 절대적 움직임들은 <공>(空)(le Vide)에서 발현된다. 무(無)(le néant)가 아니라 목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공(空)의 매끄러운 공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공격, 반격, 맹렬한 낙하.

 

 

무기

도구

방향

투사

수용

벡터

속도

중력

모델

자유로운 활동

노동

표현

보석

기호

열정, 혹은 욕구

정동

감정

 

 

  1. 기운이 방출되는 경우(태극권의 발경)와 근육 속에 단단한 힘으로 남아있는 경우를 비교해보라. [본문으로]
  2. 공력을 무기에 주입하여 무기와 내가 일체가 된다. [본문으로]
  3. ‘catatonia’는 병의 일종(긴장병, 마비상태)을 부르는 말이지만, 어원은 ‘아래로 뻗음’의 의미이다. 바로 천근추이다. 즉 공력을 땅으로 보내서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이다. [본문으로]
  4. 무공이 높아질수록 정신적 깨달음이 무공의 증진에 중요해진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