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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What Is an Apparatus? - Giorgio Agamben

 

"What Is an Apparatus?"(이탈리아어2006, 영어2009) in What Is an Apparatus?

by Giorgio Agamben



1.

철학에서 용어문제는 중요하다. 철학자들이 항상 자신들의 전문적 용어를 정의했다는 말은 아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정의한 적이 없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와 같은 이들은 기하학적 방식으로 용어를 정의하기를 선호했다.


‘dispositif’(영어 ‘apparatus’, 여기서는 ‘장치’로 옮김)는 푸꼬의 사유의 전략에서 결정적인 전문적 용어이다. 푸꼬는 ‘통치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70년대 중반부터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완결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1977년의 인터뷰에서 완결된 정의에 가까운 것을 제시한다.


What I’m trying to pick out with this term is, firstly, a thoroughly heterogenous ensemble consisting of discourses, institutions, architectural forms, regulatory decisions, laws, administrative measures, scientific statements, philosophical, moral and philanthropic propositions–in short, the said as much as the unsaid. Such are the elements of the apparatus. The apparatus itself is the system of relations that can be established between these elements...

  ...by the term "apparatus" I mean a kind of formation, so to speak, that at a given historical moment has as its major function the response to an urgency. The apparatus therefore has a dominant strategic function...

  ...I said that the nature of an apparatus is essentially strategic, which means that we are speaking about a certain manipulation of relations of forces, of a rational and concrete intervention in the relations of forces, either so as to develop them in a particular direction, or to block them, to stabilize them, and to utilize them. The apparatus is thus always inscribed into a play of power, but it is also always linked to certain limits of knowledge that arise from it and, to an equal degree, condition it. The apparatus is precisely this: a set of strategies of the relations of forces supporting, and supported by, certain types of knowledge.


이는 세 요점으로 요약된다.


가. 장치는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질적인 집합이다. 담론들, 제도들, 건물들, 법들, 치안조치들, 철학적 명제들 등등. 이 요소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바로 장치이다.

나. 장치는 항상 구체적인 전략적 기능을 가지며, 항상 권력관계에 위치한다.

다. 권력관계들과 지식관계들의 교차점에서 나타난다.



2.

이 용어의 간략한 계보를 추적한다.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푸꼬가 아직은 ‘장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이 ‘positivité’(positivit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어원적으로 ‘dispositif’의 이웃이다.


아감벤은 푸꼬가 ‘positivité’[이하 실증성으로 옮김―정리자]라는 말을 어디서 발견했을까 궁금해 하다가 장 위뽈리뜨(Jean Hyppolite)의 책 『헤겔 역사철학 입문』을 다시 읽으면서 그 장소를 찾아낸다.[각주:1] (푸꼬는 때로 위뽈리뜨를 ‘my master’라고 불렀다고 한다.)


『헤겔 역사철학 입문』의 3부에는 「이성과 역사 : 실증성과 운명」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 부분의 초점은 헤겔의 두 저작―「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 「기독교의 실증성」―을 분석하는 것이다. 위뽈리뜨에 따르면 헤겔의 사상에서 핵심 개념은 ‘운명’과 ‘실증성’이다. 특히 ‘실증성’이란 용어는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와 ‘실증적 종교’(positive religion)의 대립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 종교가 인간의 이성과 신적인 것 사이의 직접적이고 일반적인 관계와 관련되는 반면에 실증적 혹은 역사적 종교는 어떤 사회에서 어떤 역사적 순간에 개인들에게 외적으로 강요되는 일단의 신념들, 규칙들, 의식(儀式)들을 포괄한다. 이는 영혼들에게 가해지는 제한들을 통해 각인되는 감정들을 포함한다. 


위뽈리뜨는 자연과 실증성 사이의 대립이 이성과 역사의 변증법만이 아니라 자유와 의무의 변증법에도 상응함을 보여준다. 아감벤은 푸꼬의 ‘장치’ 개념의 전조가 된다고 볼 수 있는 위뽈리뜨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데, 여기서 위뽈리뜨는 이렇게 말한다 : 헤겔에게 실증성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이성의 순수함)에 장애가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증성이 이성과 화해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그래야만 이성이 추상적이기를 그치고 삶의 풍부함에 맞추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푸꼬는 이 ‘실증성’이란 용어―이것이 나중에 ‘장치’가 된다―를 빌림으로써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개인들과 역사적 요소 사이의 관계라는 자신의 문제와 관련하여 입장을 취하게 된다. 여기서 아감벤이 말하는 ‘역사적 요소’란 “일단의 제도들, 일단의 주체화 과정들, 그리고 권력관계를 구체화하는 일단의 규칙들”이다. 푸꼬의 궁극적인 목적은 헤겔에게서처럼 두 요소의 화해도 아니고 두 요소의 갈등도 아니다. 푸꼬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성들이 관계들, 메커니즘들, 권력의 ‘작용들’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양태의 연구이다.



3.

‘장치’는 권력의 이러저러한 테크놀로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위뽈리뜨에 따르면 ‘실증성’이 헤겔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반적 용어이다. 푸꼬는 일반적으로 <국가>, <주권>, <법>, <권력>과 같은 ‘보편자들’을 다루기를 거부하지만, 그에게 일반적 성격을 가진 작업적 개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치’는 푸꼬의 전략에서 보편자를 대신하는 것이다. ‘장치’는 “이 요소들 사이에 수립될 수 있는 네트워크”이다.


일반적인 프랑스 사전에서의 ‘장치’(dispositif)의 의미

a. 엄밀하게 사법적 의미 : 장치는 판결(judgement)에서 견해(opinion)와 분리된 결정(decision)을 포함하는 부분을 말한다.

b. 공학적 의미 : 기계나 메커니즘의 부분들이, 그리고 더 크게는 메커니즘 자체가 배열되는 방식.

c. 군사적 용법 : 계획에 맞추어 배열된 일단의 수단들.


푸꼬에게는 어느정도 이 세 의미 모두가 존재한다. 사전은 이 용어를 여러 의미들로 나눈다. 그런데 이 단편들은 우리가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원래의 특유한 의미의 역사적 발전과 구체화에 일반적으로 상응한다. 이 특유의 의미란 무엇인가? 이 용어는 물론 긴박한 필요에 대응하고 다소 직접적인 효과를 낼 목적을 가진 일단의 관행들과 메커니즘들(언어적인, 비언어적, 사법적, 기술적, 군사적인 것들 모두 포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현대적 용어의 기원이 되는 관행들 혹은 사유의 전략은 무엇이며, 그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가?



4.

아감벤은 자신의 지난 3년 동안 대략 ‘경제의 신학적 계보학’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를 해왔다고 한다. 이는 교회 역사의 초기(2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그리스 용어 ‘oikonomia’가 결정적인 신학적 기능을 띠게 되는 과정과 연관된다. 그리스에서 ‘oikonomia’는 ‘oikos’(가정)의 운영(administration), 더 일반적으로는 관리(management)를 의미한다. 이는 인식적 패러다임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과 연관된다. 왜 교회는 이런 용어를 신학적 담론에 도입해야 했을까? 왜 ‘신성한 경제’(divine economy)를 말해야 했을까?


삼위일체의 문제가 그 핵심에 있다. 다신론과 이교주의를 재도입한다는 이유로 삼위일체론에 완강하게 반대하는 세력―‘monarchians’라고 불린다―을 설득하게 위하여 Tertullian, Irenaeus, Hippolytus 등의 신학자들은 그리스어 ‘oikonomia’보다 더 좋은 용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식이었다 : 하나님은 그 존재와 실체에 관한 한 하나이지만. 그의 ‘oikonomia’는―그의 집과 삶과 그가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는 방식―에 관해서는 삼위적(triple)이다. 좋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을 할당해도 그 권력과 통일성을 잃지 않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경제’를, 인간 역사의 관리와 통치를 맡긴다.


‘oikonomia’는 따라서 구속(救贖)과 구원의 경제와 함께 성자(the Son)의 육화를 나타내는 용어가 되었다. (이 때문에 그노시스교도들에게서는 예수가 ‘경제의 사람’the man of eoconomy라고 불린다.) 신학자들은 신학의 담론(혹은 로고스)와 ‘경제의 로고스’를 구분하는 데 천천히 익숙해졌다. 그후에 ‘oikonomia’는 삼위일체의 도그마와 신의 섭리에 의한 세계의 통치라는 생각이 기독교신앙에 도입되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oikonomia’의 도그마는 그 유산으로서 존재와 행동, 존재론과 실천의 분리를 서양 문화에 남겼다.



5.

라틴 교부들은 ‘oikonomia’라는 용어를 ‘dispositio’라고 옮겼다. (프랑스어 ‘dispositif’는 여기서 왔다.) 따라서 ‘dispositio’는 ‘oikonomia’가 가진 복합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푸꼬가 말하는 ‘dispositif’는 이 신학적 유산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 신에게서 존재와 실천―한편으로는 본질과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된 세계를 관리하는 작업―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마디결합시키는 파열로 소급될 수 있는 것이다. ‘장치’라는 용어는,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존재에 아무런 토대를 두지 않은 순수한 통치활동을 실현하는 바의 것(that in which, and through which, one realizes a pure activity of governance devoid of any foundation in being)을 지칭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장치들은 항상 주체화의 과정을 함축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주체를 산출해야 하는 것이다.


푸꼬의 장치는 하이데거가 ‘Gestell’이라고 부른 것(독일어 ‘stellen’[놓다]이 라틴어 ‘ponere’에 상응하듯이 ‘Gestell’은 어원적 관점에서 볼 때 ‘dis-positio’, ‘dis-ponere’와 유사하다)과도 교차한다.[각주:2] 하이데거는 「기술에 관한 물음」에서, ‘Ge-stell’은 일상적인 용법에서 장치(Gerät)를 의미하지만, 자신이 의도하는 바로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질서지우는 방식으로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도록 인간에게 촉구하는 것의 집합'[각주:3]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때 이 용어는 푸꼬의 장치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dispositio’와도 유사하다. 이 용어들 모두에 공통적인 것은 ‘oikonomia’로 소급된다는 것이다.



6.

아감벤이 자신의 연구에서 따르는 방법론적 원리: 포이어바하가 말한 ‘발전가능성’(Entwicklungsfähigkeit)의 지점. 이는 해석자가 연구의 과정에서 도달하는, 저자와 해석자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결정불가능성의 지점이다.


따라서 이에 따라 아감벤은 푸꼬의 문헌학의 맥락을 버리고 새로운 맥락 속에 ‘장치’를 놓고자 한다.


존재를 두 집단 혹은 부류(classes)로 구획하기.

살아있는 존재들 혹은 실체들(living beings or substances)

살아있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포획하는 장치들

피조물들의 존재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이끌려 하는 장치들의 경제(oikonomia)

아감벤은 푸꼬의 장치를 확대하여 “포획하거나 방향지우거나 결정하거나 가로채거나 모형에 맞추거나 통제하거나 살아있는 존재들의 제스처들, 행위들, 견해들 혹은 담론들을 확보하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장치라고 부르고자” 한다. 따라서 감옥, 정신병원, 팬옵티콘, 학교들, 고백, 공장, 훈육들, 사법적 조치들 등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휴대폰, 그리고 심지어 언어도 장치들이다.


살아있는 존재들과 장치들, 이 양자 사이에 제3의 부류로서 주체들이 있다.  아감벤은 관계로의 결과로 나오는 것, 즉 살아있는 존재들과 장치들 사이의 무정한 싸움의 결과로 나오는 것을 주체라고 부른다. 실체와 주체는 중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중첩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개인일지라도 여러 다양한 주체화 과정의 장소가 될 수 있다 : 휴대폰 사용자, 웹써퍼, 이야기 작가, 반지구화 활동가 등등. 우리 시대에 장치들의 무한정한 성장은 그 만큼의 주체화과정의 번성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에는 주체성 범주가 동요하고 그 일관성을 잃는 듯한 인상을 이로부터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삭제나 극복이 아니라 이미 모든 개인의 정체성에 동반되었던 가면쓰기(masquerade)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확산이다.



7.

자본주의 시대는 장치들의 대대적인 축적과 번성의 시대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대면하고 어떤 전략을 따라야 하는가? 아감벤은 장치들을 단순히 파괴하거나 아니면 몇몇 사람들이 나이브하게 제안하듯이 장치들을 바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싫다고 해서 시스템을 망가뜨리거나 사용자들을 처벌하는 등의 방식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감벤 자신이 이런 방식을 여러 번 생각했다고 한다^^)


장치들은 인간에게 일어난 단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인간(호모 사피엔스)을 동물로부터 분리해낸 ‘인간화’의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환경과의 직접적 관계로부터 분리시킨 분할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지루함과 <열려 있는 것>(the Open)을 산출한다고 한다. 전자는 환경과의 직접적 관계를 중지하는 능력이며 후자는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존재를 그 자체로 알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들과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은, <열려 있는 것>에는 도구들, 객체들, 잡동사니들, 여러 기술들이 몰려든다는 점이다. 이 장치들을 통해서 인간은 동물적 행위를 폐기하려고 하며, <열려 있는 것>을 그 자체로 향유하려고, 존재를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 향유하려고 한다. 모든 장치의 뿌리에는 행복에 대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을 별도의 영역에서 포획하고 주체화하는 것이 장치의 특수한 힘(권력)을 구성한다.



8.

이 모든 것은 장치들과의 육박전에서 우리가 택해야 할 전략이 단순한 것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장치들에 의하여 포획되고 분리된 것을 가능한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해방시키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아감벤은 자신이 최근에 다듬어낸 개념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한다. 이는 로마 법과 종교의 영역에서 처음 생긴 용어인 ‘세속화’(신성모독, profanation)이다.


로마법에 따르면 신들에게 속한 물건들은 ‘신성한’(sacred)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들은 인간들 사이의 자유로운 사용과 교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이 물건들의 이러한 특별한 사용불가능성을 어기는 행동들은 ‘신성모독적’(sacrilegious)이었다. ‘신성하게 하기’(sercare)란 물건들이 인간의 법의 영역으로부터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반대로 ‘세속화하기’ 혹은 ‘신성모독하기’(to profane)란 사물을 인간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종교를 사물들, 장소들, 동물들 혹은 사람들을 공통의 사용으로부터 떼어내어 별도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분리 없는 종교란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분리는 자체 내에 진정으로 종교적인 핵을 가지고 있다. 분리를 활성화하고 규제하는 장치는 제물로 바치기(sacrifice)이다. 제물로 바치기는 항상 세속적인 것의 영역에서 신성한 것의 영역으로의,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의 이동을 인가한다. 그러나 분리된 것은 다시 복원될 수 있다. 세속화는 제물로 바치기가 분리하고 분할한 것을 공통의 사용으로 복원하는 역-장치(counter-apparatus)이다.



9.

이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및 기타 근대적 형태의 권력들은 종교를 정의하는 분리과정들을 일반화하고 극단화하는 것 같다. 근대적인 장치들은 세속화의 시도를 특히 문제적으로 만드는 면에서 전통적인 것들과 차이가 난다. 실로 모든 장치는 주체화 과정을 함축하는데, 이 과정 없이는 장치가 통치의 장치로서 기능할 수 없고 단순한 폭력의 행사로 환원된다. 이런 토대 위에서 푸꼬는 어떻게 훈육사회에서 장치들이 유순하지만 자유로운 몸들―이들은 바로 자신들의 탈주체화과정(desubjectification)에서 주체들로서의 정체성과 ‘자유’를 가진다―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지를 입증했다. 장치란 무엇보다도 주체화를 산출하는 기계이며, 그러한 기계로서만 또한 통치의 기계이다.


‘고백’의 경우.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고백성사’(회개, penance)의 장치. 주체의 분열이 새로운 주체의 산출을 낳음.


감옥 : 새로운 주체의 구성과 비행(非行)자들의 새로운 환경의 구성을 산출하며, 이들이 새로운 통치기술의 대상이 됨.


자본주의의 현 국면에서 우리가 상대하는 장치들을 정의하는 것은, 이제는 주체의 산출을 통해 작용하지 않고 탈주체화라고 불리는 과정들을 통해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모든 주체화의 과정에는 물론 탈주체화의 계기가 함축되어 있다. (회개하는 자아는 자신의 부정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주체화의 과정과 탈주체화의 과정이 서로 무관하게 되어가는 듯하며, 새로운 주체의 재구성을―유충(幼蟲)적 형태나 유령과도 같은 형태로 말고는―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휴대폰’ 장치에 스스로를 포획되도록 허용하는 사람은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숫자만을 획득한다. 텔레비전 앞에서 오후를 보내는 사람은 자신의 탈주체화에 대한 대가로 ‘couch potato’[각주:4]라는 좌절된 가면을 얻거나 시청률 계산에 포함될 뿐이다.


장치의 문제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로 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을 무시하는 듯하다 : 만일 모든 장치에 주체화(혹은 이 경우에는 탈주체화)의 어떤 과정이 상응한다면, 장치의 주체가 그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비슷한 주장을 계속적으로 조장하는 사람은 그들을 포획하는 미디어 장치의 산물이다.



10.

따라서 현대 사회는 어떤 진정한 주체화를 인정함이 없이 탈주체화의 대대적인 과정을 거쳐 가는 생기 없는 몸들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주체들과 실재적 정체성들의 실존을 전제했던 정치의 쇠퇴가 일어난다. 그리고 ‘oikonomia’―자신의 복제만을 목표로 하는 순수한 통치성의 활동―의 승리가 발생한다. 번갈아 권력을 관리하는 좌파와 우파는 자신들이 발생했던 정치적 영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단지 동일한 통치기계의 두 극들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존재했던 중 가장 유순하고 겁많은 사회적 몸과 대면하고 있는 권력의 독특한 불안함. 탈근대적 민주주의들의 악의 없는 시민들이 권력에 의해서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된다. 권력자의 눈에는 보통 사람보다 더 테러리스트 같이 보이는 사람이 없다. 


장치가 삶의 장에서 그 힘을 더 확산하고 번성시킬수록 통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요소와 더욱 더 대면하게 되어있다. 이 요소는 유순하게 순종할수록 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 요소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주체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통치기계를 멈추거나 위협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통치기계의 목표 없지만 끝없는 움직임을 목격하고 있다. 섭리에 의한 세계의 통치라는 유산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 기계는 세계를 구원하는 대신에 우리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장치들의 세속화의 문제―장치들 속에 포획되고 분리된 것의 공통적인 사용으로의 복원―가 더 긴박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체화과정과 자신들을 포획한 장치들에 개입하고 그 다음으로 <통치될 수 없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제대로 제기될 수 없다. <통치될 수 없는 것>이 모든 정치의 시작인 동시에 소실점(vanishing point)[각주:5]이다. ♠

 

 

  1. Jean Hyppolite (Jonzac 1907 - Paris 1968) was a French philosopher known for championing the work of Hegel, and other German philosophers, and educating some of France's most prominent post-war thinkers. [본문으로]
  2. 접두사 ‘dis-’는 ‘다른 방향으로, 사이에, 별도로’의 의미를 갖는다. [본문으로]
  3. “the gathering together of od the (in)stallation [Stellen] that (in)stalls man, this is to say, challenges him to expose the real in the mode of ordering [Bestellen]” [본문으로]
  4. couch potato : 소파에 앉아 TV만 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 컴퓨터에 앉아 게임만 하는 사람에게는 ‘ one who has no life’(삶 혹은 생활이 없는 사람)이라고 함. ‘Get a life!’라고 하면,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하지 말고 좀 나가서 활동도 하라는 말임. [본문으로]
  5. A vanishing point is a point in a perspective drawing to which parallel lines of objects appear to converge.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