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브라이언 마쑤미(Brian Massumi)의 , 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의 99개의 테제 가운데 테제1부터 테제20까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원문은 https://manifold.umn.edu/read/a9a025ba-dd4f-46ac-a149-f6bdd7b07399/section/5a143d0f-7f69-4b07-8a20-44e5eac69f0f#toc에서 볼 수 있다
브라이언 마쑤미
테제1
가치를 되찾을 때이다. 많은 이들에게 가치는 오랫동안 완전히 변질된 개념으로, 규범적 제한에 젖고 자본주의적 권력에의 연루(complicity)에 물들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이는 규범의 제공자들과 경제적 억압의 변호론자들에게 가치를 내주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가치는 그들의 손에 두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다.
테제2
강력한 대안적 가치 이해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규범적 몸짓들이 슬쩍 침투하기가 쉽다. 살아가면서 판단은 하게 마련이고 판단의 기준들은 보통 암묵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규범성이 숨어드는 것이다. 이것도 억압적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테제3
가치를 되찾는 것은 규범을 제공하는 판단기준을 다시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테제4
가치를 되찾는 것은 가치를 규범과 표준적 판단 너머에서 재가치화하는 것이다.
테제5
가치의 재가치화의 첫 과제는 가치를 수량화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가치는 근본적으로 질적이다.
테제6
가치의 재가치화는 초월적이지 않고 속세적/이승적이다. 초월적 가치들은 규범성의 제한을 절대화할 뿐이다.
보조정리a
가치의 재가치화는 도덕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다.
주석
윤리에서는 선/악 혹은 정상적/병리적이라는 짝이 “실존의 양태들의 질적 차이”(들뢰즈)에 의해 대체된다. 윤리는 한 과정이 질적으로 할 수 있는 바, 그리고 이것이 취하는 방향과 관련된다. 가치의 재가치화라는 기획은 과정적 윤리의 경로를 취한다. 과정적 윤리는 철저하게 관계적이다. 이는 넓은 의미의 생태학이다.
보조정리b
가치의 재가치화는 협소한 경제적 도메인을 흘러넘쳐서 힘들의 생태학이 된다.
테제7
그래서 가치를 수량화로부터 분리함은 시장의 경제적 논리와 정면으로 씨름함을 의미한다. 가치는 자본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테제8
우리 시대에 가치에 대한 주된 관념은 경제적 관념이다. 경제적 가치의 도메인이 시장이다. 시장 기반의 사유는 화폐에 대한 합의된 정의를 활용한다. 이 정의는 3중적이다. ① 회계의 단위 ② 교환의 매체 ③ 가치의 저장.
주석
이 정의는 가치의 문제를 우회한다. ‘가치의 저장’이란 회계단위들의 축적이 보존되어 교환에 들어설 준비가 된 것이므로, 이 정의는 순환적이다. 순환성이 가치에 대한 양적 이해를 세 역할을 가로질러 퍼뜨린다. 그리하여 가치를 화폐와 동일시한다. 그 결과 가치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실질적 기능에 대해서도 흐리게 하고 재가치화된 탈자본주의적 미래에 가치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흐리게 한다.
테제9
예의 3중 정의는, 가치는 본성상 수량화 가능하다는 전제를 수립하며 화폐를 가치의 척도로서 정립한다. 가치의 재가치화는 바로 이것을 문제 삼아야 한다.
테제10
고전적 시장 개념의 또 하나의 전제는 평등한 교환이라는 신화이다. 화폐와 교환하여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이 신화가 자본주의 시장을 움직이는 발동기이다.
주석a
이는 가치척도로서의 화폐라는 관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로서 사용되기 때문에 가치척도로 취급된다. 이 잣대를 대면, 하나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던 것들도 하나의 척도로 측정할 수 있게 된다. 공정한 가치는 사용가치가 상품의 가격과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성립된다. 가격은 질적으로 상이한 상품들이 서로 비교될 수 있게 하는 제3항이다. 이는 이론상으로 ‘합리적’ 소비자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화폐의 현재의 특정 액수의 가치가 미래의 어떤 액수와 비교될 수 있다. 이는 ‘합리적’ 삶의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공정한 교환의 신화는 그와 병행하는 ‘많이’ 얻음이라는 시장 논리에 의해 무너진다. 소비자 행동에서, 지불한 화폐에 대해 많은 가치를 얻음이라는 유혹이 실제로 등가교환보다 더 강한 발동기이다. 만일 시장 이념의 빛나는 표면에 흠을 내면 부등가교환의 유령이 즉시 등장한다. 그러면 가치에 대한 질적 이해가 귀환하여 가치에 대한 양적 이해의 토대를 흔들게 된다. 예의 ‘더 많은 가치’는 주체적 요인들에 의해 굴절된다. 사용가치는 상대적이다.(T91 Schol. b) 위신가치(prestige-value) 같은 주관적인 가치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주관적인 요인들은 소비자들마다 다르므로 하나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다. 각 경우마다 특이하게 질적으로 계산된다. 소비(혹은 구매)는 가치의 가소성에 대한 실물교육이 된다.
주석b.
현재의 돈의 액수와 미래의 돈의 액수도 하나의 척도로 측정될 수 있다는 신화 또한 무너지는데, 이번에는 시장 자체가 가치의 가소성의 모범적 사례가 되는 경향에 의해 무너진다. 이것이 휘발성(volatility)이라고 불린다. 휘발성은 두 측면을 가진다. 한편으로 경기순환 같은 시장 내적인 요인들에서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 외부성(전쟁, 자연재해, 날씨, 더 근본적으로는 기후변화 등)에서 발생한다. 외부성은 시장 외부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질적 변화가 시장에서의 가격 변화에 반영된 것이다.(Hardt and Negri 2009, 155) 또한 정확하게 시장 외부는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로 계산되지 않는 가치평가와 연결된 가격운동이 포함된다. 고전적인 사례는 부동산 가격에 반영되는, 위치의 부가가치이다. 위치가 삶의 질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삶의 질은 그 자체로는 측정 불가능하다. 바람직한 동네에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측정 불가능한 것에 숫자를 매기는 한 방식이다. 측정 불가능한 것을 가격이 표현한다. 이는 가치와 삶의 활력(vitality)—가격에는 반영되지만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질적이기에 양적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삶의 활력—사이의 연관을 암시한다.
보조정리a
실질적 시장 동학은 부등가교환을 전제한다. 시장이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측정가능하게 만들기보다 초과(excess)에 더 의존한다. 1 ‘~보다 더 많이’가 ‘~과 동등한’보다 더 평등하다 (More-than is more equal than equal-to).
보조정리b
‘더 많이’라는 불균형 교환은 질적 요인들로 인해 일어난다. 질적 요인들은 가격에 반영되기는 하지만 시장에 대해 외부성으로서 남아있다. 이 외부성들은 비(非)숫자적 초과를 낳는다. 이들은 주관적이며 활력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경험의 질에 해당하며, 삶의 질에 속한다.
보조정리c
가치의 재가치화는 가치와 활력 사이의 이러한 연관을 발전시켜야 한다. 가치의 재가치화는 (등가교환, 시장의 공정성이라는 신화 그리고 측정의 수사를 넘어서) 질적 초과를 탈자본주의적 덕으로 만들어야 한다.
테제11
내생적 요인들과 외부성 사이의 구분은 궁극적으로는 유지 될 수 없다. 이를 이해하려면 ‘내부’ 혹은 ‘외부’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체계와 과정을 구분해야 한다.
주석a
시장의 변동은 근본적으로 비경제적인 요인인 정동(affect)에 따라 일어난다. 시장들은 공포와 희망, 확신과 불안정 위에서 돌아간다. 정동은 언제나 외부성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정동이 말 그대로 경제의 범위 외부에 있는 요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면 시장의 동학에서 정동의 구성적 힘을 과소평가하고 정동이 처음부터 경제학에 드리운 긴 그림자를 부인하는 게 된다. 케인즈는 자신의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순전한 의심, 불안정성. 희망과 공포라는 숨은 요인들에 대한 과소평가”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Keynes 1973, 122) 그렇게 숨겨져 있지는 않지만 공식적으로 부인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정동은 말 그대로 시장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 체계 내에 있다고 인정되는 공식적인 시장 메커니즘도 아니다. 정동은 경제적 작동자 자체가 아니다. 정동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과 작동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질적이다. 정동은 질적으로 경제를 요동시키면서 또한 경제를 흘러넘쳐 많은 비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된다. 정동은 경제적 계산을 하도록 스스로를 강요하지만 그 자체는 계산이 아니다. 시장 기능들은 정동의 힘을 느낀다. 정동은 본성이 경제와는 다른 것, 경제를 초과하는 것으로 남아있으면서 경제에 표시를 남긴다. 우리는 외부성이라 불리는 주체적, 활력적 요인들을 ‘정동’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정동은 시장 동학을 흘러넘치면서도 시장에 표시를 남기는 요인들을, 경제에 속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논리를 조절하는 요인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정동을 외부성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시장의 내재적 외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겠다. 이 용어는 자본주의적 장에 속하지만 그 체계에는 속하지 않는 요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Massumi 2017a, ch. 1). 가치의 재가치화가 탈자본주의적 미래로 성장할 질적 과정들의 맹아적 형태를 포착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외부이다. 정동의 문제는 내연성(intensity) 2 개념과 긴밀하게 연관된다(T31, T42, T43). 내연성은 경제적 관점에서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보조정리a
경제적 체계와 더 넓은 과정(이는 내재적 외부를 구성하는 질적 요인들에 속한다) 사이의 대조가 가치를 재가치화하는 기획에 필요한 도구이다.
주석b
이는 내부/외부의 논리를 확대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한 체계는 다른 체계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고 그러면서 그 내부를 외부와 가른다. 예를 들어 경제는 서로 맞물리는 작동들에 의해 체계로서 정의된다. 이 작동들은 기술 체계에서 서로 맞물리는 작동들과 구분된다. 그런데 이 내/외 구분 말고 나름의 고유한 범주인 내재적 외부가 있다. 증기기관의 경제와 테크놀로지 체계들은 서로 외적이다. 그러나 내재적 외부는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증기기관은 19세기에 경제를 추동했다. 그리고 경제가 증기기관의 발명과 번성을 추동했다. 각자가 상대방을 역동적으로 껴안고 생성했다. 둘은 그 체계로서의 차이를 가로질러 두 얼굴을 가진 하나의 생성운동에 포함되었다. 이 이중적 생성운동은 두 체계들 사이의 과정적 결합(a processual coupling)이다. 과정적 결합은 그 어느 쪽 체계에도 본격적으로 속하지 않지만 양자의 생성에 형성력으로서 진입한다. 과정적 결합이 그 체계들의 내재적 외부를 구성한다. 과정은 체계들의 사이(in-between)로 이루어지는 내재적 외부이다. 과정은 그 어떤 주어진 체계(들)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저 내재적 외부는 체계성(systematicity) 그 자체를 흘러넘친다. 그 자체로 보면 이 사이는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장’(a wide-open)이다. 그것은 체계들의 생성이 현재의 장소와 현재의 상태를 넘어갈 수 있는 확대된 장이다. 과정은 본성상 체계들을 초과한다. 과정은 모든 체계를 열린 체계로 만든다. 내적/외적 체계(환경)과 내재적 외부(과정적 생태) 사이의 이 구분은 자본주의에의 연루와 저항을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해진다.(T34 Schol. c, T60, T76 Schol. b).
보조정리b.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위해 되찾아 재가치화해야 할 초과는 과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주석c
자본주의의 체계적 작동에 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소비자 시장, 노동 시장, 투자, 금융 시장) 그러나 체계 분석으로 충분하지 않다. 분석은 과정의 확대된 장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장이라는 말은 체계와 과정의 구분을 고수하는 간편한 방법이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외부가 범위에 포함될 때에는 ‘자본주의적 장’이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다. ‘체계’라는 말은, 전통적 경제학이 정식화한 바의 제한된 의미에서의 경제의 작동에 대해서만 사용한다.
보조정리c
자본주의적 과정은 자본주의적 체계가 자신의 내재적 외부에 몸을 담그어 그 생성을 위해 혹은 계속적인 자기구성을 위해 새로운 잠재력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보조정리d
초과의 문제는 이차적으로만 파괴와 연관된 ‘지출’의 문제이다.(Bataille 1988) 더 근본적으로 초과의 문제는 잠재력에 속한다. 이는 적극적으로 생성을 촉진하는 정도로만 파괴와 관련된다.
테제12
등가교환(equal exchange)의 신화는 특히 노동시장과 관련하여 터무니없다.
주석
봉급이 삶의 시간과 육체 활동의 양을 화폐의 양과 공정하게 교환한 것이라는 생각은 맑스에 의해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신화로서 포착되었다. 만일 이것이 등가교환이라면 ‘이윤’은 무엇인가? 이윤은 봉급에 들어간 화폐가치 이상으로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분이다.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여전히 양적 관점에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만) 자본가들의 등가교환 주장이 허위임을 드러내준다. 자본가들은 노동비용을 줄이자고 말한다. 이는 교환의 불평등을 보존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테제13
초과는 바로 자본의 정의 안에 각인되어 있으며, 즉 자본이 측정 단위, 교환매체, 가치저장수단으로서의 화폐와 다르다는 데에 각인되어 있으며, 투자화폐로서의 역할과 관련된다.
주석
자본은 화폐의 현재의 양으로부터 미래에 더 많은 양을 도출할 잠재력으로서 정의된다. 자본은 이윤이 아니다. 이윤은 도출된 더 많은 양의 화폐이다. 자본은 그 양을 도출할 잠재력이다. 그 잠재력이 경제 체계의 효율적인 발동기이다. 그것은 체계에 내재하는 과정적 외부에서 창발적으로 움직인다.
테제14
자본주의 경제는 그 계산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실제적 양보다는 잠재력에 더 근본적으로 관여한다.
주석a
잠재력은 변형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질적 개념이다. 잠재력의 운동으로서의 자본은 변형력, 즉 체계의 생성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화폐의 성질이다. 변형은 통계에 기록될 때에만 경제적으로 중요하다. 숫자들은 질적 변화(생산성의 변화, 증가하는 생산성과 관련된 노동과 관리 관행의 변화, 노동과 관리 관행에서의 변화와 연관된 삶의 변화, 부의 증가하는 축적, 또한 사회적 불평등의 증가, 파열, 그리고 혁신의 기회들, 그에 수반되는 문화적 변형들, 이 변형들에 수반되는 새로운 욕망들의 등장, 이 욕망들을 구체화한 새로운 성향들, 개인적 특이성들의 우발성 등)의 양적 기호들이다. 경제적 지표들이 가리키는 것은 삶의 변화들이다. 이 지표들은 삶의 위장된 기호들이다. 맑스는 ‘사회적 물질대사’와 ‘변신’의 관점에서 자본에 대해 말한다. 삶의 기호들이 가리키는 변화들은 엄밀한 의미의 경제 영역을 흘러넘친다. 경제의 잠재력은 궁극적으로 삶의 잠재력이다. 가치의 문제는 삶의 문제이다. 자본은 삶의 맥박에 보이지 않는 손을 얹고 있다.
주석b.
이단적인 경제이론가들(고전적·신고전적·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의 시장 근본주의와 합리적 계산이라는 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화폐는 투명한 도구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화폐는 삶의 관계의 작동자이다. 경제의 내재적 외부와 연결된 과정을 통해서 잠재력을 수확하고 분배한다. 숫자는 부단히 수확과 분배를 세고 또 세지만, 관계와 삶의 잠재력을 암시하는 일은 등한히 한다.
테제15
초과(excess)의 문제는 잠재력과 연관된 자본의 정의와 관련하여 잉여가치의 문제에서 다시 돌아온다.
주석
잉여가치는 화폐의 성질로서의 자본에 붙여진 또 하나의 이름이다. ‘잉여’가치는 현재의 양을 초과하는 것을 미래에 도출할 항상적인 잠재력으로서의 자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등한 교환이니 화폐의 공정한 가치니 하는 것이 경제의 발동기가 아니라 잉여가치가 바로 경제의 발동기이다.
테제16
잉여가치가 화폐에 대한 시장적 정의의 관점에서, 측정 가능한 양의 관점에서 이해된 바의 가치와의 관계에서 우선적이다.
주석a
잉여가치는 전환(turnover)의 효과이다. 그것은 경제적 과정을 추동하는 잠재력의 여분이다. 이윤은 잉여가치가 경제를 추동하는 과정에서 정기적으로 도출한 숫자화된 수확이다. 이윤이 다시 투자되면 잉여가치에 의한 경제의 추동으로 되돌려진다. 잉여가치와 이윤은 이렇게 서로 전환되며, 항상 여분을 남긴다. 잉여가치 가운데 흡수되지 않은 초과분이 미래 세대에게 더 큰 이윤의 낳는 것이다. 잉여가치는 ‘항상 더 많은 이윤’이다.
보조정리a
잉여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주석b
잉여가치는 그 자체로는 측정될 수 없다.(Negri 1996, 151–154; Bryan and Rafferty 2013, 137, 145, 147). 본성상 그 어떤 양의 이윤보다 항상 더 많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초숫자적(supernumerary)인데, 숫자에 있어서 능가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숫자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불확정성은 화폐의 공급 자체의 수량화 불가능성에 반영되어 있다. 화폐를 구성하는 부채가 부단히 창출·소멸되고 있기 때문에 화폐량은 항상 변동한다.(Schmitt 1980, 64–78; Ingham 2004, 142).
주석c.
여기서 말하는 잉여가치의 전환은 단순히 상품이나 화폐의 형태변화를 넘어선다. 그것은 경제의 불확정적 총체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 자신의 체계성을 흘러넘쳐 과정적 외부에 몸을 담근 후 거기서 발견되는 잠재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통의 규칙적인 주기적 패턴들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변이적 흐름들”(mutant flows, Schmitt 1980, 234–35)과 관계가 있다. 변이적 흐름들은 항상 존재하는 초과인 잉여가치의 여지를 체계 내에 만들기 위한 화폐의 연속적 창출과 연관된다. 변이적 흐름들은 알려진 것에서 알려진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변신(metamorphosis)에서 변신으로 움직인다. 파생금융상품들이 자본주의적인 변이적 흐름의 전형적 사례이다. (T33 Schol. d, T34 Schol. d, T46 Schol. b–c, T49 Schol. b, T50–T52).
주석d.
성장과 축적이 자본주의의 과정적 욕망이요 자본을 구성하는 경향이다. (니체라면 힘에의 의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잉여가치라는 발동기가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에 놓여있다. 이윤이 심장의 수축이라면 잉여가치는 심장의 확장이다. 잉여가치가 자본주의 체제에 과정적 성질을 부여하고 수량화에 그 역동적 성질을 부여한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의 과정적 주체성이다. 자본주의는 심장확장의 과정에서 내재적 외부의 확장된 장에 뛰어들며, 수축의 과정에서는 거기서 발견한 잠재력의 운동을 이윤을 창출하는 체계의 흐름 안으로 끌어들인다.
보조정리b.
자본주의의 추동력은 이윤과 잉여가치 사이의 격차이다. 그 체계적/과정적, 수축/확장의 비대칭적 관계이다.
주석e
여기서 말하는 과정적 잉여가치는 맑스가 말한 상대적 잉여가치(생산성 증가를 통해 획득)나 절대적 잉여가치(노동일 증가를 통해 획득)로 환원되지 않는다. 과정적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두 형태와 달리 순전히 질적이며 잠재력의 내연성과 관련된다. 그것은 삶의 잉여가치(surplus-value of life)이다(T22–T23, T28–T32).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와 과정적 잉여가치는 물론 연관되어 있다. 전자가 후자를 포획한다. 이들의 차이가 체계에 의해 내화되어 추동력으로 작동한다. ‘삶의 잉여가치’론은 노동가치론의 재고와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형태들의 증식을 필요로 한다(T33, T34).
테제17
‘더 많이’를 지향하는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투기적이다.
테제18
자본은 투기적이기에 그 나름으로 권력형성체가 된다.
주석a.
자본은 시간함수이다. 이 시간적 요소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시간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며, 현재 속에 있는 미래에 다름 아닌 잠재력 주위를 선회한다. 자본은 이차적으로만 시간의 측정에 관심을 가진다. 일차적인 관심은 잠재력의 현실화에 마중물 역할을 하는 질적 간격으로서의 시간에 있다. 투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왜곡이 아니라 그 본질에 속한다. 투기가 자본의 권력 기능이다. 자본은 활력의 미래를, 삶의 잠재력을 포획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곧바로 권력 메커니즘으로서 작동한다. 그 경제적 기능은 권력 기능과 분리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삶을 지배하는 권력이다’라는 말은 더 구체화되어야 할 말이다. 자본주의는 삶의 형성과정을, 바로 그 생성을 포획한다.(자본주의는 “존재권력”ontopower이다 T55). 자본은 삶의 활동을 경제화한다. 그 과정에서 권력형성체를 구성한다. 삶의 활동은 이윤의 생성에 유리한 양태들을 향하게 된다.
보조정리
권력형성체들이 포획의 장치이다.
주석b
화폐가 투명한 교환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구성한다는 이단적 경제사상가들의 주장은 나름대로 정확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화폐는 사회적 관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화폐는, 사회를 구성하는, 더 나아가 삶을 구성하는 요인인 권력관계의 작동자이다. 자본은 삶의 힘을 사취한다(Cooper 2008).
테제19
자본주의의 발동기가 초과(잉여가치)라는 사실은 가격이 희소성을 반영한다는 통상적인 관념을 반박한다.
주석
화폐가 잉여가치 면에서 가장 강렬하게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곳이 금융시장이다. 자명하게도 금융시장에서 잉여는 희소성이 아니라 과정적 풍요를 전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앞으로 부단하게 번성하고 증식하는 능력을 전제한다.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생각은, ‘덜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할까’가 아니라 덜한 것으로부터 ‘항상 더 많은 것’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이다. 잉여가치 충동은 금융시장의 투기적 메커니즘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거기서는 잉여가치의 흐름의 연속적인 파도타기가 이윤의 노다지보다 더 높게 평가된다. 이윤은 영속적인 투기의 파도에 휩쓸린다.
테제20
통화로서의 화폐보다 금융시장이 탈자본주의적 대안경제 사유를 위해 더 나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주석
이미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은 고전적인 등가교환의 관점에서 정의된 화폐기능만 참조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경제의 과정적 발동기가 그 진정한 과정적 성질을 보이는 곳은 금융시장의 투기적 영역이다. 탈자본주의적이고자 하는 대안들은 화폐와 시장교환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부터 자본에 당할 위험이 있다. 이 대안들은 3중적으로 정의되는 화폐보다는 잉여가치와 더 유사한 개념들을 생성해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대안들은 자본주의적 과정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에 시장이데올로기보다 더 충실해야 한다. 다만, 이번에는 인간이 좀비가 되는 식이 아니라 좀비가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는 식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스스로 추동되는 과정에 대한 대안적 가치평가가 필요하다. 역동적 성격에 대한 긍정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질적인 것을 수량화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보조정리
잉여가치를 점령하라.
♣
<계속>
- ‘초과’(excess)는 네그리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리라고 추측된다. 네그리에게서 초과([이탈리아어] eccedenza)는 탈측정([이탈리아어] dismisura, 측정불가능한 것)과 연관된다. 네그리의 이 개념에 대해서는 Antonio Negri, The Porcelain Workshop : For a New Grammar of Politics, trans. Noura Wedell (Los Angeles : Semiotexte(e), 2008 참조. [본문으로]
- ‘intensity’가 스스로 뻗어가는 혹은 달라지는/갈라지는 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내연성’ 혹은 ‘내연력’으로 옮기기로 한다. 들뢰즈(『차이와 반복』)에 따르면 내연력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① 내연적 양은 그 자체에 불균등한 것을 포함한다. ② 내연력은 차이를 긍정한다. ③ 내연력은 함축되고 감싸인, 혹은 ‘태아(胎兒)화된’ 양이다. 마쑤미가 이 들뢰즈·가따리의 ‘내연성(력)’ 개념을 빌려서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내연력은 ‘(성)질’(quality)이 발생하기 이전의 차원―‘spatium’―에 속하는 힘이지만, 이 텍스트에서 마쑤미가 말하는 내연성은 (성)질과 연관된다. 또한 들뢰즈가 말하는 내연력의 양은 가격과 같은 ‘연장’(extensity) 차원의 수량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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