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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십오 소년 표류기' 4

십오 소년 표류기’ 4

 

경험의 차원을 넘어가기2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는 아름다움이란 것이 지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철학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철학이 사유와 특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은 파리 쫓듯 치우더라도, 탁월한 철학들이 사유의 탁월한 사례들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철학이 탁월한철학이냐가 문제다.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유하기란 차이를 사유하는 것, 새로움을 사유하는 것, (앞에 나온 말을 빌자면) ‘초과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계로 철학들이 갈린다.

 

들뢰즈는 차이를 사유하려고 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차이와 반복은 바로 이 목적에 본격적으로 바쳐진 저작이다. 이 책의 영어판 서문에서[각주:1] 들뢰즈는 따라서 이제 내가 보기에 가장 필연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장, 그리고 (···) 그 이후의 책들을 도입하는 역할을 하는 장은 바로 3장이다라고 확언하고 있다.[각주:2] 3장은 사유의 이미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사유의 이미지란 들뢰즈 자신의 말로는 우리가 사유하려 할 때 우리의 목표를 결정하는 것으로서[각주:3] 사물과 마주치는 경험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유하는 주체가 사물과 마주치기 이전에 가지고 있는 거대한 상 혹은 틀로서, 이에 준거하면 모든 마주침은 이미 사유된 것을 재()(recognition)하는 데서 그치고, 새로운 사유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유의 이미지는 사유를 가두는 감옥과 같은 것이 되며, 들뢰즈의 경우처럼 차이를 사유하려는 경우에는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유를 그것을 가두는 저 이미지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각주:4]

 

들뢰즈가 드는 사유의 이미지의 사례 가운데 하나가 데카르트의 철학이다. 왜 그런지에 대한 자세한 철학적 분석과 비판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해놓은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로서는 그 이상으로 잘 할 수 없다. 여기서는 데카르트 식의 철학 혹은 사고방식을 다른 식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지금 설명하는 것은 꼭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분명히 요즘 세상에서 매우 강력하게 존재하는 사고방식이다.)

 

사방으로 한계가 없는 거대한 판을 상상해보자. (앞에서 근대적 유형의 총체라고 말한 것의 가장 상위의 형태이다.) 이 판이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지식의 차원이다. 이 판은 사방으로 한계가 없지만 사실상 하나의 차원이다. 하나의 지식에서 다른 지식으로 옮겨가는 것이 다른 차원으로의 열림이 아니라 단순한 양적 확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총 양은 무한하지만 모든 지식은 신에 의해서 모두 미리 정해져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창조하는 새로운 지식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열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은 실제로는 무수히 많겠지만, 개념상으로는 ‘clair’(clear)하고 ‘distinct’(distinct)한 것[각주:5]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뉜다. 인간에게는 ‘clair’하고 ‘distinct’한 것을 획득할 능력이 본래적으로 (생래적으로!) 주어지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편견에 빠지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지식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인간이 본래는 다 똑같이 양식’(le bon sens)을 가진 것으로 전제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clair’하고 ‘distinct’한 지식을 획득한 양에 따라 서열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가 무엇보다 대학입시를 통해 매우 익숙해진 구도이다. 가장 앞서 나간 사람의 능력을 100으로 하면 (다른 숫자로 잡아도 좋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능력이 100점을 만점으로 위계적으로 분포될 수 있다. 그리고 평가를 위한 문제들은 혹여 학부모들이 소송을 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 점의 의혹이 없도록 ‘clair’하고 ‘distinct’해야 한다. 이렇듯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간의 능력을 척도에 종속시키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겸손하게도 모든 사람은 다 똑같다고 하면서! 다시 겸손하게도 지식의 양은 무한하다고 하면서!

 

고딕 예술에 담긴 원리에 따르면 어린아이일지라도 자기 나름으로 특이한 발명을 할 수 있고 바로 이런 능력을 러스킨은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 계급으로서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각주:6]

우리가 육체노동에 종사시키는 모든 사람의 기질과 본성에는 그것이 아무리 거칠고 단순하더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어떤 힘이 있다. 느린 상상력, 둔한 정서적 반응력, 뒤뚱거리는 사유가 심지어는 최악의 상태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힘들이 느리고 둔한 것은 모두 우리의 잘못이다. 그리고 이 힘들은 그것들을 취약한 채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불완전한 채로 최고의 가장 완벽한 육체노동보다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 힘들은 강화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바로 이렇게 대해야 한다. 그들에게서 생각이 깊은 부분을 찾고, 그 부분을 그들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잘못과 오류를 저지르더라도 말이다. 그들에게서 최고의 것은 많은 오류를 동반하고서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걸 잘 이해해보라. 사람에게 직선을 그리고 깎아내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곡선을 그리고 깎아내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몇 개가 되었든 주어진 선들과 형태들을 놀라운 속도와 완벽한 정확성으로 복사하고 깎아내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그 결과물은 나름대로 완벽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 형태들 중 어느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하면,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해낼 수 있는지 물어본다면, 그는 멈춘다. 그리고 그의 실행은 머뭇거리며 진행된다. 그는 생각한다. 십중팔구 잘못 생각한다. 십중팔구 그는 생각하는 존재로서 처음 손을 댈 때 실수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를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이전에는 단지 기계였을 뿐, 움직이는 도구였을 뿐이다.[각주:7]

데카르트는 어떤가?

예를 들어 산수의 기초를 교육받아 그 규칙에 따라 덧셈 문제를 푼 아이는 그 합계에 관한 한 인간의 정신이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각주:8]

이것은 기술이다. 기술이 손하고만 관련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여기서 기술이란 어떤 능력을 일정한 틀(형식) 내에서 완벽하게 만드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하나의 틀(형식)에서 새로운 다른 틀(형식)로 넘어가는 능력이 진정한 의미의 지성이요 사유능력이다. 데카르트는 누구라도 시간을 들이면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사고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일 뿐이며,[각주:9] 고딕 예술은 누구나 언제라도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이다.


 실제로 다음 대목을 보면 데카르트가 러스킨이 노예적 방식이라고 부른 것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나에게 맨 먼저 생각난 것은, 여러 명의 손이 닿은 많은 분리된 부분들로 구성된 작품에는 단 한 명의 대가가 완료한 작품에서만큼 완벽함을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명의 건축가가 계획하고 실행한 건물들은 여러 명이 달려들어 오래된 벽들을 본래의 목적과 다른 목적에 쓰도록 만듦으로써 개선하려고 시도한 건물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우아하고 편리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에는 겨우 촌락이었다가 시간이 가면서 큰 타운이 된 고대 도시들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탁 트인 평원 위에 자유롭게 설계하여 반듯하게 지은 타운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배치가 안 좋다. 그래서 비록 전자에 속하는 몇몇 건물들이 후자에 속하는 건물들보다 아름다움에 있어서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여기엔 큰 것, 저기엔 작은 것 등의 방식으로 무분별하게 병치된 모습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거리들의 구불구불함과 불규칙성을 볼 때, 우리는 이성이 인도하는 인간의 의지보다는 우연이 그러한 배열을 낳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게 되는 것이다.[각주:10]

실로 건전함이 돋보이는, ‘완벽에 기반을 둔 건축방식의 예찬이 아닐 수 없다.[각주:11]


이렇게 보면 데카르트의 철학은 정말이지 탁월한 사유의 이미지요 탁월한 근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탁월한 근대적 유형의 총체를 발명했으며, 모든 사람이 1표라는 사고방식의 토대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고(“양식은 그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가장 균등하게 분포된 것이다”), 동시에 지도자(진리에의 접근을 막는 편견을 완벽하게 제거한 사람)와 대중(편견에 아직 빠진 사람)을 가르는 기준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삶형태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리고 모든 순간은 이 이미 정해진 형태 내에서 완벽하게, 확실하게, 명석하고 판명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순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와 달리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경험의 순간은 새로운 불확실함이 창출되는 순간이다. 알 수 있는데 잘 몰라서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없는 새로운 것의 출현으로 도저히 알 수가 없기에 불확실한 것의 창출이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감각지각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감성의 차원을 기각해버린다. 그러나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감각 능력이 늘 새로워지고 따라서 감성도 늘 새로워진다. 맑스가 1844년 경제철학수고에서 보여준 통찰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오감을 동물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본 것, 인간 스스로가 역사적 과정 전체에 걸쳐서 만들어낸 것으로 본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귀가 무언가를 듣는 것은 동물의 귀가 무언가를 듣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이런 측면을 맑스는 감각이 그 자체로 이론가가 된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맑스의 통찰을 더 일반화하여 표현하자면 세계사의 과정 전체가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 볼 때 삶형태와 인간형태(‘인간형상이라고 말해도 좋다)는 동일한 것의 두 다른 측면이다. 인간이 그 형태를 계속 바꾸어나간다고 보는 것, 이것이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의 휴머니즘이다. 이것은 로렌스, 푸코 등이 거부했던 전통적 휴머니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형태가 이미 주어져 있다고 보고 그것에 맞추는 것으로 인간의 삶을 파악하는 것이 전통적 휴머니즘이며, 인간이 새로운 형태를 창출해내며 그것이 동시에 새로운 삶형태의 창출이라고 보는 것이 삶정치적 지성의 관점에서의 휴머니즘이다.

 

인간형태에 관해서는 다른 절을 하나 마련하여 거기서 더 말해보기로 하고, 우리의 경험에 동원되는 정신의 능력들 전체에서 초과가 가능함을 (데카르트에 대한 명시적 비판과 연관하여) 철학적으로 설명한 들뢰즈의 논의와 그것이 가지는 함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모든 능력들감성, 상상, 기억, 사유이 협동하여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상식이 하는 일이다) 동일한 것을 (재현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는 데카르트와 달리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서는 모든 능력들 각각에서 마치 폭발처럼 문턱을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우선 감성에서 일어나서 마치 도화선에 불붙듯이 다른 능력들에로 옮겨간다. 이 때 감성, 상상, 기억, 사유에서 발생하는 것을 라틴어로는 (순서대로) sentiendum, imginandum, mémorandum, cogitandum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sentiendum’감각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모든 능력이 하나의 대상에 공히 접근하는 보는 데카르트의 상식의 철학에서와 달리) 다른 능력으로는 접근되지 않고 오로지 감각으로만 접근되는 것이다. 다만 경험적 차원에 갇힌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초경험적 발휘가 일어나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sentiendum’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이해하면 된다.


 들뢰즈의 이러한 설명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데카르트는 진리로 가는 그의 길에서 감각을 배제한다. (물론 오류의 가능성을 이유로 논리도 배제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세계사의 과정이 인간의 오감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맑스의 통찰을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 감각을 가졌을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동물이 감각적으로는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뢰즈에게는 모든 감각이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특이하다. 다만 동물들에게는 매번의 감각 지각을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환원시키는, 이 나무와 저 나무를 동일하게 소나무라고 인식하게 하는, ‘경험적 차원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동물에게는 인간이 가진 것과 같은 고도의 사유 능력도 없지만 말이다.

 

사물과 사물이 마주쳤을 때 가장 먼저 형성되는 것이 감각인데, 감각 내용이 다 특이하다면 당연하게도 사유의 출발점은 바로 감각에서이다. 새로운 사유가 감각에서부터 문턱을 넘어가기 시작하여 도화선처럼 사유로 이어져서 사유 자체 내에서 사유의 작용을 발생시키게 되는 것이다.[각주:12] 우리는 모든 디테일에서 들뢰즈를 따를 필요는 없다. 사유는 (마치 기술처럼)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도 아니고 생득적으로 미리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신체와 정신에 일어나는 뜻밖의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주요한 목적은 그동안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켜온 철학들에 맞서서 차이의 철학을 다듬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을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들뢰즈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어떤 대상과 마주칠 때 (즉 어떤 것을 경험할 때) 그 마주침(경험)이 항상 특이한 것이라면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사유의 이미지)을 넘어가는 Δ, 즉 초과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Δ가 바로 새로운 사유의 원천이다.

 

만일 그렇다면 철학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과학이든 모든 마주침 즉 모든 경험이 새로움의 원천이다.[각주:13] 들뢰즈가 철학의 외부를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 원천을 정신의 능력으로 가공하여 일정한 형태를 부여하여 표현하게 되는데, 이 형태의 유형에 따라 (현재로서는) 철학, 문학, 과학, 예술 등으로 나뉘게 된다. 예컨대 철학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개념의 형태로 자신의 사유의 성취를 표현한다.[각주:14]



문학비평


문학이든 철학이든 같은 원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과 관련하여 비평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학교에 있을 때에는 학생들로부터는 (영문학을 공부한다는 생각을 가진 학생들은 극히 소수였으므로) 영어선생님으로 간주되었고, ‘학계에서는 영문학자로 간주되었지만 사회라는 이름의 강호로 나와서는 문학비평가로도 간주되었다. 사실 요즘에는 비평을 자주 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이는 비평에 대한 관심이 줄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일면으로는 다른 방향의 관심이 우선적으로 나를 끌어서이기도 하고 일면으로는 비평을 촉발시킬 만큼 새로운 요소를 가진 작품을 만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각주:15]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작품의 문학성을 학생들의 작문숙제를 평가하듯이 평가하는 것이 비평이며 모든 작문숙제는 평가될 수 있기에 작품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비평이 따른다고 보는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비평관은 비평을 한편으로는 권력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있는 문학이론, 정치적 입장, 세계관 등등의 반복으로 만들기 쉽다. 전자의 경우에는 작문숙제를 학교에서처럼 평가하려면 정해진 척도를 가져다 대어야 하는데 바로 이 척도가 권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척도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대체로 문학이론, 정치적 입장, 세계관 등등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은 작품에 들어있는 Δ에 대한 반응의 표현이다. 따라서 Δ가 부재하다고 판단되면 반응이 일어날 수가 없다. Δ가 미미하다고 생각되면 반응 역시 미미하기에 실제로 비평작업으로 현실화되기 어렵다. 여하튼 Δ에 대한 반응 능력이 비평에서 핵심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Δ에 반응하는 것인가?

 

앞에서 들뢰즈는 감각에서부터 문턱을 넘어가는 일이 발생하여 도화선처럼 사유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 말이 맞는다면 감각에서부터 초과가 일어날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의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조금 변형하여 감각부터 비운다고 말할 수 있다. 감각을 비운다는 말은 감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사로잡고 있는 이미 존재하는 생각들을 치워놓아서 가능한 한 선천적 사유능력이라는 주체적 전제당대의 문화라는 객관적 전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하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각주:16] 스피노자의 말로 하자면, 가능한 한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각주:17] 비평가가 창작가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 영향을 받는 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작품에 존재하는 Δ가 자신에게 흔적을 남기면, 처음에는 무엇이지 모를 이것을 문제로 삼아 탐구하는 과정이 비평을 준비하는 과정인 동시에 온전한 사유의 과정, 생성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비평가는 문학이론도 공부하고 철학공부도 하고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공부도 해야 하지만, 이 공부들이 비평가에게 결코 앞에서 말한 객관적 전제들로 작용해서는 창조적인 비평이 나올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특이한 에서 출발하여 그 다음에 이미 취득한 이론이나 지식과 연결시켜 그 을 다듬고, 마지막으로 그 다듬어진 을 이러저러한 방식과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라고 부른 것이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된 감각과 다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은 사실 들뢰즈·가따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sensation’의 포착에 가깝다. ‘sensation’은 초경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감각이라고 옮겨질 수는 있지만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된 감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들뢰즈·가따리는 감각의 블록’(a bloc of sensation)‘affect’‘percept’로 이루어진다고 한다.[각주:18] 그리고 ‘affect’인간의 비인간으로의 생성이며, ‘percept’인간 앞에 있지만 인간이 부재하는 풍경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신이 어떤 소설을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하고 뭐라고 말도 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 소설의 글씨체가 예뻐서도 아니고 종이에서 향내가 나서도 아니며 작가의 정치적 입장이 마음에 들어서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소설텍스트가 창조한 잠재적 세계의 감각의 블록에 반응한 것이리라. 바로 이 점을 일단 잘 이해하면 된다.

 

사실 에서 출발하는 것은 비평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에게서도 앎은 부적실하고 혼란스러운 유형에서 적실한 앎으로 이행하거니와, 심지어는 맑스도 이와 같은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요강 비판서론에서 사유(Denken) 혹은 개념파악(Begreifen)은 직관(Anschauung)과 표상(Vorstellung)의 외부 혹은 위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관과 표상을 개념들(Begriffe)로 다듬어내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비평의 경우에는 철학에서처럼 개념형태의 결과물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은 잠재적으로 누구에게나 특이하게 형성된다. 따라서 에서 출발하는 비평이란 결코 어떤 전문가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평을 잘 하는 것과 전문가 유형의 비평가가 되는 것은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날 수는 있지만 (‘비평을 잘 하는 전문적 비평가’) 원리상으로는 다르다. 문학비평가든 예술비평가든 영화비평가든 정치비평가든 대부분 전문가 유형의 비평가는 기술의 측면에 집중한다. 대부분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책략에 지나지 않는 정치기술(‘정치공학이라고도 가끔 부르더라)에 대한 해박함을 다투어 자랑하는 정치비평가들의 우스꽝스러운 꼴사나움은 예외적인 것으로 치더라도, ‘기술의 측면에의 집중은 러스킨의 지혜를 빌면 그 자체가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어떤 판의 노예인 것이다.

 

비평에 대한 같은 취지의 내용을 난해한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창작가가 비교적 쉬운 말로 제시한 사례를 하나 보기로 하자

문학비평은 비평의 대상이 되는 책이 비평을 하는 사람에게 불러일으킨 감정을 조리 있게 제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평은 과학이 될 수 없다. 비평은 무엇보다도 매우 개인적이며[각주:19] 둘째로는 과학이 무시하는 가치들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시금석은 정서(emotion)이지 이성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작품을 그것이 우리의 진솔하고도 생생한 정서에 미친 영향만으로 판단한다. 비평이 문체와 형식에 대해 늘어놓는 모든 실없는 소리들, 책들에 대해 식물학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사이비 과학적 분류와 분석은 부적절할 뿐이고 대부분 지루한 전문용어들일 뿐이다.[각주:20]

로렌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로렌스가 모든 작품을 서정시처럼 보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렌스는 들뢰즈·가따리가 아니므로 ‘affect’‘affection’을 구분하는 등의 철학자적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들뢰즈·가따리가 로렌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굳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여기서 로렌스가 하는 말이, 개인이 어떤 작품에서 포착한 특이한 Δ에서 출발하는 것이 비평이라는 취지임은 로렌스의 다른 글들을 수고를 들여 좀 더 읽어보면 금세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덧붙임]

들뢰즈의 철학은 삶정치적 지성의 발현의 탁월한 사례이다. 그런데 그의 삶정치적 지성이 철학이라는 영역에만 국한하여 발현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다룬 저서 두 권과 베이컨의 그림을 다룬 감각의 논리, 그리고 카프카를 다룬 소수 문학을 위하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저서를 낳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예컨대 테니스와 같은 스포츠를 보는 그의 관점은 삶정치적 지성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들뢰즈는 스포츠에서 양적인 크기에서의 증진과 스타일과 관련된 질적인 변형을 구분한다.

모든 새로운 스타일은 새로운 동작보다는 일련의 연결된 자세들에 해당한다. 즉 이전의 스타일에 기반을 두지만 그것과 단절한 새로운 통사구조인 셈이다.[각주:21] 기술상의 진전은 새로운 스타일에 통합됨으로써만 자신의 역할을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스포츠계의 발명가들이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질적인 중개자들이다.[각주:22]

 들뢰즈가 테니스에서 프롤레타리아 스타일(대중 테니스)을 발명한 것으로 보는 플레이어는 비요른 보리(Bjorn Borg)이다. 존 매켄로(John McEnroe)도 들뢰즈가 보기에 발명가 유형에 속한다. 발명가가 아닌 모방자 플레이어가 발명가 플레이어를 이길 수도 있다. 이 모방자들을 들뢰즈는 스포츠의 베스트셀러들이라고 부른다.

 모방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만든 동작에 편승하여 성과를 얻으며, 스포츠 단체들은 자신들을 존속하고 번성하게 하는 발명가들에게 두드러지게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인다. 괜찮다. 스포츠의 역사는 이 발명가들을 관통하며 이어진다. 이들 각각이 무언가 예측하지 못한 것, 새로운 통사구조, 변형에 해당하며, 이들이 없으면 순전히 기술적인 측면의 진전이란 양적일 뿐이고 부적절하며 무의미한 것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각주:23]


[‘십오 소년 표류기’ 5에 계속]

  1. 이 책은 1964년에 나왔고 영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온 것은 1994년이다. [본문으로]
  2.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xvii. [본문으로]
  3. Difference and Repetition, xvi. [본문으로]
  4. Difference and Repetition, xvi-xvii. [본문으로]
  5. 철학자들이 다 동의하는지는 모르지만 ‘clair’를 ‘명석한’으로 옮기고 ’distinct‘를 ’판명한‘으로 옮긴 사례가 있다. 데카르트에게는 초경험적 차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둘이 경험적 차원(현실성이 차원)에서 딱 붙어있으며, 둘 가운데에는 판명한 것이 우선적이다. 들뢰즈는 이 둘을 분리하여 둘로 가른다. 자세한 것은 『차이와 반복』을 참조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6. 노동자들을 어린아이에 명시적으로 비유한 것은 디킨즈이다. “Now, besides very many babies just able to walk, there happened to be in Coketown a considerable population of babies who had been walking against time towards the infinite world, twenty, thirty, forty, fifty years and more. (···)”Charles Dickens, Hard Times, Book I, Chapter 8. 이 대목에서 디킨즈의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러스킨과 동일하다. 어린아이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에게 ‘궁금해 하지 말라’고, ‘상상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공리주의적 풍조를 비판하는 것이다. 공리주의 교육이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하고 있는 짓과 사회가 노동자들에 대해서 하고 있는 짓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진단된다. “공리주의 교육이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하고 있는 짓”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수많은 학부모들에 의해서 아이들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되고 있다. [본문으로]
  7. The Stones of Venice, p. 160-61. [본문으로]
  8. 데카르트, 『방법서설』 2장. [본문으로]
  9. 이미 말했다시피 그 실제적 결과는 거대한 서열화이다. [본문으로]
  10. 데카르트, 『방법서설』 6장. [본문으로]
  11. 데카르트의 이러한 생각에 대한 재미있는 풍자로서 『어려운 시절』에 나오는 공리주의자의 그랫그라인드의 집인 스톤 로지(Stone Lodge)에 대한 디킨즈의 묘사를 보자. “근방에서 대단히 반듯한 집이 스톤 로지였다. 풍경속의 이 엄연한 사실을 바꾸거나 완화해줄 치장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집주인의 짙은 눈썹이 두 눈에 그림자를 드리우듯 육중한 주량현판이 가운데 창들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커다랗고 네모난 집이었다. 정확히 계산하고 합산한 뒤 결산하고 검산까지 마친 집이었다. 창문이 출입구 이쪽으로 여섯 개, 저쪽으로 여섯 개, 도합 열두 개가 건물의 한쪽 날개에 나 있고, 반대쪽 날개에도 도합 열두 개가 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건물 뒤편 양 날개에도 총 스물 네 개의 창문이 나 있었다. 잔디 깔린 정원이나 정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작은 길 모두가 식물로 된 회계장부같이 직선으로 되어 있었다. 가스설비와 통풍장치, 배수장치와 급수시설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완전히 불연성인 거멀쇠와 대들보, 비와 솔을 다니는 하녀들이 사용하는 승강기 등,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집에는 있었다.” 찰스 디킨즈 지음. 장남수 옮김 『어려운 시절』 (창비) 23쪽. [본문으로]
  12.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 114. [본문으로]
  13. 마주침에는 (일반적으로 간접경험이라고 말하는) 책과의 마주침도 포함되지만 이것이 가진 단점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니체가 말한 바와 같고, 그게 아니더라도 책을 정말로 잘 읽는 사람은 현대와 같은 ‘acculturation’의 사회에서는 의외로 드물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저 앞에서 말했듯이 문학이 철학과 만나고, 자연과학이 인문과학과 만나는 일이 실제로 성취된다면 이 ‘형태의 유형’에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15. 이것은 그런 작품들이 실제로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나의 조건상 만나지를 못했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16.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 130. [본문으로]
  17. “몸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외부의 몸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신의 사유능력도 그만큼 더 커진다. 『윤리학』 4부 부록 27.“몸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외부의 몸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신의 사유능력도 그만큼 더 커진다. 『윤리학』 4부 부록 27. [본문으로]
  18. ‘affect’는 ‘정동’이라고 옮기는 것이 상당히 정착되었으나 현재 ‘percept’의 좋은 번역어를 찾지는 못했다. 다만 ‘ affect’가 ‘affection’ 즉 ‘감정’(feeling)과 구분되듯이 ‘percept’는 ‘perception’(지각)과 구분된다. [본문으로]
  19. 개인마다 느끼는 것이 다 다르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20. D. H, Lawrence, “John Galsworthy” Phoenix. p.539. [본문으로]
  21. 지금 들뢰즈는 문학의 ‘문체’(style)에서 실마리를 잡아서 스포츠에 대한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22. Gilles Deleuze, Negotiations, trans. Martin Joughi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P. 131. [본문으로]
  23. Negotiations, p. 1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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