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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노동의 관점과 텍톨로지 --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03

노동의 관점과 텍톨로지 --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03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텍톨로지로

 

보그다노프는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그의 시대에 군대가 얼마나 조야한 형태의 조직이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보그다노프 : "세계 대전은 조직화를 가르쳐주는 가장 큰 학교로 판명되었다." 그는 경험일원론1905년 혁명 전후에 썼는데, 그의 두 번쩨 일련의 연구들인 텍톨로지 연구는 1913년에 시작되어 전쟁과 1917년 혁명에서 거대한 추동력을 받았다. 살아있는 경험의 철학(1913)에서 그의 이전의 연구들을 종합했듯이, 텍톨로지 연구들도 Essays in Tektology(1921)로 종합되었다. 전자는 다가올 혁명을 위한 철학적 프로그램이고 후자는 일어난 혁명을 위한 조직 프로그램이다.

 

19172월 혁명이 낳은 교착상태는 당시 러시아가 기초적인 조직 능력만을 가진 사회형성체임을 시사한다고 생각했다. 좌파에서조차도 경합하는 세력들 사이의 차이가 힘으로만 해결되는 교착상태를 창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텍톨로지는 더 상위 수준의 조직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만일 그런 능력이 볼셰비키 국가 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보그다노프는 적어도 언젠가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상위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정식화할 수 있었다. 그는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 '보그다노프주의자들'이 스탈린의 시대 전까지는 경제와 기술 쪽의 핵심 부서들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관'(organ)이란 말은 도구를 가리키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한다. 보그다노프의 사유의 씨앗은 이러한 주된 용어의 은유적 도약에 담겨있었다. 도구는 신체의 외부 기관이며 기관은 신체의 내부 도구이다.(A tool is an external organ of a body; an organ is an internal tool of a body.) 그러면 신체의 정의는? "만일 여러 노동자들이 하나의 기계에서 일하면, 그들의 협동체계에 관한 한 ······ 이 기계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체계의 내적 연관이다. 비록 이것이 공간적으로는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한 관계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체계의 내부 및 외부는 대상 혹은 신체의 내부 및 외부와는 다르다.

 

보그다노프는 조직을 광범하게 파악했다. "모순으로 차 있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삶에서 일어나는 조직의 분열은, 만일 부분적이고 임시적인 분리에는 불가피하게 더 깊고 불가역적인 분리가 숨어있음을 지도자들이 항상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덜 자주 일어날 것이다. "

이는 볼키와 멘키의 분열, 혹은 더 나아가 볼셰비키에서 레닌과 보그다노프 사이의 분열에 적용될 수 있는 발언이다.

 

문화 및 과학 도메인에서 보그다노프는, 주어진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형할 수 있는 용기와 기술을 프롤레타리아에게 갖춰주고자 했다. 10월 혁명 이전에도 그는 힘을 단지 봉기와 국가장악(파괴)의 문제(권력추구--정리자)로만 보지 않았다. 그의 지속적인 관심은 "형식들의 운명", 즉 형식이 출현하고 지속하며 해체하는 과정에 있었다. 보그다노프는 자신의 시대 안에서 자신의 시대에 맞선 작가였다. 그는 10월에 레닌의 권력장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내전 동안 당과 국가가 군사화되는 모습을 경각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이는 보그다노프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와 맺는 관계가 서로 다른 데서 나온다. 만일 고리키가 말한 대로, 레닌과 노동자의 관계가 철강노동자와 철광석의 관계와 같다면, 보그다노프는 집단적 정동(collective affect)의 흐름에 매료되어 있었다. (* 레닌은 노동자들을 전위가 형태를 부여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본 반면에 보그다노프는 노동자들을 분자적 흐름으로 보았다는 말--정리자.) 분자적 흐름은 불안정하고 예측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는 유토피아주의와 모험주의적 색채가 낀 관점과 방법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그다노프는 말한다.(Bogdanov, Essays in Tektology, p. 142.) 이는 부분적으로 보그다노프 자신에 대한 비판일 수 있지만, 레닌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다. 레닌은 1917년 후반에 대중이 볼셰비키를 지지한 것을 상황상의 합류가 아니라 역사적 연대로 보았던 것이다.

 

보그다노프의 사고는 레닌의 '분파 분리 및 정치적 도약'(partisan splits and political leaps)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보그다노프 : "노동계급은 노동을 하면서 사물들의 조직화를 실행하고 사회적 투쟁에서 인간의 힘들의 조직화를 실행한다. 노동계급은 양 분야의 경험을 연결하여 특수한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야 한다. 즉 아이디어(생각)들의 조직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렇듯 삶 자체가 프롤레타리아를 보편적 유형의 조직자로 만들며, 조직의 관점은 자연적이며 필연적이기조차 한 경향이다." 정치적 조직화와 경제적 조직화가 유일하게 다른 점은 후자가 보통 더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Essays in Tektology(일본어위키에 들어가보니 '조직형태학'이라고 옮겼다--정리자)는 혁명 내에서 혁명의 운명을 놓고 벌어진 조용한 투쟁에서 지적 구성요소을 이루는 것이며 형식들에 대한 담론이다.

 

보그다노프의 목표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과학의 사회주의였다. 자신의 경험만이 아니라 당대에 구할 수 있는 전반적인 과학적 문헌들에 대한 광범한 독서에 기반을 둔 Essays in Tektology는 본질적으로 형식들이 출현하고 진화하고 상호작용하다가 쇠멸하는 과정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보그다노프는 형식을 규모와는 전적으로 독립된 범주로 본다. 우주처럼 규모가 큰 것이나 세포처럼 규모가 작은 것에도 동일한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텍톨로지는 먼저 조직의 하나의 규모 혹은 형식에서 다른 규모 혹은 형식으로 은유적 도약을 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대체의 이러한 은유적 작동을 조직화 작용(행동) 그 자체로 본다. 그것은 우주를 조직의 관점에서 보는 것의 원형이다.

 

은유는 일상의 텍톨로지이다. 모든 사물의 연관과 관계를 인식하는 언어의 운동이다. 그러나 확증할 수 있는 실험에 종속되어야 한다. 보그다노프는 마하보다 은유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대체가 그저 은유적일 뿐일 수 있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사유의 낡은 습관은 잘못된 유추를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벌집은 여왕벌이 관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공동노동에서 나오며 이성은 언어에서 나온다. 언어는 이성이 작동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텍톨로지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은유를 그 생산의 과정까지 추적하는 것이다.

 

모든 과학의 방법들은 텍톨로지의 입장에서는 경험이 제공하는 재료를 조직하는 양태들일 뿐이다. 텍톨로지는 철학이 아니라 조직화의 방법이다.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특정의 지식 실천의 보편적 보증자로 보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런데 텍톨로지도 몇몇 작동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자연이 최초의 조직자이며 인간은 그 조직화 산물의 하나일 뿐이다. 모든 것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정도로 조직된다. "완전한 탈조직화disorganization(해체)란 의미 없는 개념이다." 이는 순전한 비존재(non-being)와 동일하다. 일단 우리가 "물신의 막"을 깨면, 우리는 "인류가 조직활동 말고는 다른 활동을 하지 않으며, 조직문제 말고는 다른 문제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을 자기조직화하는 인구(self-organizing population)로서 사유하는 것보다 더 유용한 사고방식은 없다.

 

전체가 부분들보다 클 때 조직화가 존재한다. 그 반대는 탈조직화이다. 보그다노프의 조직화 개념은 미리 목적을 설정하는 것을 배제한다. 이를 그는 물신화라고 정의한다. 실제로 조직화되는 만큼 조직화되는 것이며(Organization is as organization does), 미리 정해진 목표도 없고 신들도 없다. 텍톨로지는 "수학과 거리가 먼 만큼이나 도덕과도 거리가 멀다." 수학은 존재론이 아니고 텍톨로지는 신학이 아니다. 오히려 텍톨로지는 낡은 형태든 새로운 형태든 플라톤주의의 잔재와 투쟁한다.

 

텍톨로지가 조직 형식들과 상황들을 다이어그램으로 만들지만, 실제 존재하는 것은 개별 조직들뿐이다. 미리 정해진 통일성이나 궁극적인 종합은 없고 영원한 조화도 없다. 혁명조차도 분산된 자연적, 사회적 형식들의 통일성을 마치 명령을 내리는 듯한 방식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보그다노프가 그린 붉은 화성에서도 노동과 자연의 조직화 방식은 불완전해서 화석 연료의 소진이나 그에 부수되는 <탄소해방전선>의 효과를 방지하지 못한다. 보그다노프에게 정치 혁명이란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조직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태양과 맞서 이길 수는 없다.

 

맑스는 사유재산과 임금관계가 특정의 구체적 노동을 어떻게 추상적 노동으로 전환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구체적 노동은 자연과 그리고 상호 간에 특정의 방식으로 상호작용하지만, 동일한 상품형식으로 포섭된다. 상품형식이 추상적인 것을 통해 구체적인 것을 조직하는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구체적인 노동들이 연결되는 다른 방식이 있는데, 이는 기술의 이전을 경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증기력은 산업 한 분야(탄광업)에서 생겨나서 다른 데로 이전되었다. (탄갱에서 물 퍼는 데 처음 사용되었다고 함.) 기술 이전이 존재하듯이, 텍톨로지 이전(tektology transfer)도 존재한다. 조직화 형식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다. 텍톨로지는 무엇보다도 임금관계와 상품 형식 외부에서의 이러한 종합의 실천을 위한 교육이다. 텍톨로지의 운동은 조직화 경험의 일원론을 향하여움직인다.

 

보그다노프에 따르면 텍톨로지는 구()계급들의 실존의 분할성과 그들의 경험의 분리성 및 일면성으로 인해서 그들의 정신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일단 부르주아지를 넘어서고 그와 함께 유일한 조직화 원칙으로 인식되는 교환관계 내에서의 시장 경쟁이라는 물신을 극복하면, 텍톨로지는 진지하게 시작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경쟁적 투자에서 나오는 이윤의 관점에서 사고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인접해 있는 노동과정에서 발휘되는 노동과의 연속성에 대해서 사고한다. 이것이 보그다노프에게는 일상생활에 들어있는, 조직적 관점의 기반이다. 외부에서 오는 모든 것은 노동자들이 이미 아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교육이다.

 

보그다노프에게는, 프롤레트쿨트에서 그를 따르른 사람들에게는 종종 볼 수 없는 비관주의가 있다. 완전한 조직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조화로운 결합이란 없다.” 조직화 형식은 의식적 연구와 실천으로 향상될 수는 있으나 완전하게 될 수는 없다. 붉은 화성은 종국적으로 멸종에 처하게 된다. 보그다노프의 글에는 그가 마치 그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요소가 어디에나 있다. “긴밀한 협력자들 사이에 혹은 배우자들 사이에 점차적으로 펼쳐지는 다툼의 경우처럼, 동일한 체계에서 상위의 조직화에서 가장 심한 탈조직화로 가는 모든 이행단계들을 사실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때로는 가능하다.”

 

텍톨로지의 기본 의의는 문제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진술을 하는 데 있다.” 이런 태도는 21세기 서양에서 레닌주의의 부활이 암시하는 암묵적인 요구이는 마오의 슬로건 ‘put politics in command’(政治挂帅)[정치를 사령관으로 삼자는 말정리자]를 반복하지만, 이로써 의미하는 것은 ‘put philosophy in command’이며 철학을 이상적 국가의 언어로 삼자는 말이다를 거부한다. “텍톨로지는 ··· 인지의 조건과 양태를 다른 과정들 사이에 있는 활력적인 조직화 과정으로 보지 않고 추상적으로 실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과정으로 보는 식의 연구를 목표로 하는 철학적 인지이론···을 무용한 스콜라주의로 보고 거부한다.” 유물론적 철학이란 형용 모순이다. 유물론이 철학이라면 관조적인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텍톨로지는 지식에 대한 일원론적 접근으로서 지식을 조직한다. 유물론 철학은 낡은 병에 담은 새 술이다. 텍톨로지는 병 공장을 장악하여 그것을 협동조합으로 만든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 아니라 특정 양태의 조직화에 대한 참된그러나 제한된 의식이다. 예를 들어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믿음들은 권위주의적 권력의 조직도들로서 지도자를 피지도대중으로부터 분리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원자화된 단위들의 주관적 평가에 기반을 둔 한계효용론은 시장 경제와 사유재산이 떠받치는 소유주체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의 다이어그램이다. (Essays in Tektoplogy에는 ()조직적’(anti-organizational)이라고 되어있다. 분리된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욕구와 맺는 관계를 기반을 삼기 때문이다정리자).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보그다노프는 역사의 이름으로 행하는 희생에 대한 볼셰비키적 믿음을

대적인 농민층, 소진된 노동계급 그리고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이라는 맥락에서 일종의 시초적 축적기에 들어서고 있는 권위주의적 국가로 가는 정확한 이데올로기적 지도

로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텍톨로지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한계효용은 틀렸는데 노동가치론은 맞다는 식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은 한계효용이 전제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조직화를 전제한다. 잉여가치, 사용가치, 노동력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심지어는 진보적인 학자인 경우에도 불필요하다고 보는 모든 이러한 범주들은 다루기 힘든 외부성을 가리키며, 모든 경제적 조직은 이 외부성 내에서 그것에 맞선다.

 

이 외부성을 자연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특정의 조직화 형식들과 과정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자연이다. “텍톨로지의 관점에서 보면 경험의 통일성이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화 수단에 의해 능동적으로 창출된다.” 이데올로기는 특정 생산양식에 특수한 대체의 양식이다. 보그다노프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러한 조직화 접근법의 뿌리를 맑스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맑스는 문제를 일반적 형태로 정립하지 않았다.”

 

맑스는 세 가지 연관된 것을 상정한다.

집단노동의 조직화 문제

사회적 욕구의 문제

자연이란 마음대로 다루기가 힘들다는 문제.

맑스의 사유는 매우 환유적(metonymic)이어서(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다룬다는 말이다정리자) 부분들이 어떻게 전체로부터 출현한 후 다시 변형된 전체의 부분으로 돌아가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사유는 수평적인 동시에 역사적이다.

보그다노프의 사유는 매우 수직적이며 은유적이어서(‘metaphor’는 그 어원상의 의미가 다른 곳으로 옮겨감이다정리자) 하나의 전체에서 다른 전체로 도약하며 하나의 전체가 다른 전체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결합(conjunction)은 한 유기체를 지탱하는 영양분의 흡수나 그 유기체를 파괴하는 독소의 흡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연인들의 부드러운 포옹, 적과의 맹렬한 육박전, 동일한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모임, 적대적인 분리의 긴박한 싸움이 그 사례이다.”

많은 면에서 나쁜 맑스주의자인 보그다노프는 맑스의 사상에 종속된 방식으로 잠재했던 차원 전체를 열어주는 특이한 장점을 가진다. 그의 맑스주의는

맑스주의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형태가 아닌 것으로서 더 큰 도메인 안에 품고 있었다고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던 요소들을 포함하는 일련의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표준적인 맑스주의이다.

 

맑스 : “자본주의적 생산은 ······ 모든 부의 원래의 원천인 토양과 노동자를 동시에 손상시킴으로써만 기술과 사회적 생산과정의 결합의 정도를 발전시킨다.”129Karl Marx, Capital, Vol. 1, New York: Vintage Books, 1977, p. 638, 강조는 워크의 것) 보그다노프는 여기에 두 가지를 덧붙일 것이다. 토양의 손상은 한동안 노동자의 손상에 의해 가려진다. 토양의 고갈<()해방전선>(Phosphorous Liberation Front)은 나중에서야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문제로서 출현한다. 처음에는 구아노 제국주의가 해결책이었다. (페루로 바닷새의 배설물인 구아노를 가져다가 영국의 힘 잃은 땅에 비료로 주었다정리자) 그다음에는 화학산업의 발전이 해결책이었다(화학비료). 토양으로부터 추출된 분자들이 적어도 한동안은 다른 곳으로부터 충전된 것이다. 그러나 물질대사의 단절’(metabolic rift)(물질의 순환의 흐름이 끊기는 것을 가리킨다. 물을 예로 들자면 비가 내리고 내린 비가 강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소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에서 다시 비로 바뀌어 내려오고 하는 이러한 순환의 흐름에 단절이 생기는 것이다. 그 결과는 누구나 예상 할 수 있다. 정리자)은 계속된다.

 

이러한 손상시키는 힘들에 대한 보그다노프의 생각은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나의 조직은 그 가장 약한 구성요소가 지속되는 만큼 지속된다. 분자적 차원에서 탈조직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사람들은 ······ 모든 살아있는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요새를 집단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지질학적 위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며 우주적 위기로부터는 더욱 지키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상대적 해결책의 한계 내에서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만일 사회 조직이 한때 <인해방전선>의 공격을 받는다면 다른 때에는 <탄소해방전선>, 혹은 <질소해방전선>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요점은 이러저러한 제한이 아니라 그러한 제한의 관점에서 조직을 더 일반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 : “다른 한편 대규모 토지소유는 농업인구를 점감(漸減)하는 최소치로 감소시키며 이들을 큰 도시들에 몰려있는 점증하는 산업인구와 대면시킨다. 이런 식으로 대규모 토지소유는 삶 자체의 자연적 법칙에 의해 미리 정해진 사회적인 물질대사에 치유할 수 없는 단절을 가져오는 조건들을 산출한다.”[각주:1]”(Karl Marx, Capital, Vol. 3, New York: Vintage Books, 1981, p. 949, 워크의 강조)

 

보그다노프 시대의 러시아에서 인구를 농업에서 산업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마음대로 하기 힘든 문제처럼 보였다. 지구상의 도시 인구가 이제 농촌 인구를 최초로 넘어설 21세기에는 슬럼 행성보다 큰 도시들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Planet of Slums”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제목이다정리자.)

 

여하튼 보그다노프는 붉은 별이 잘 보여주듯이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조직화로서의 경제와 환경으로서의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단절문제를 파악했다. 텍톨로지는 희소성과 탈조직화가 절감되는 조건에서 조직화를 조직하는 설계작업으로서 의도되었다. 조화로운 장밋빛 미래가 앞에 놓여있다는 환상 아래에서 이루어진 작업이 아니었다. 인류세는 보그다노프를 우리 시대의 사람으로 만들며 텍톨로지를 더 자세하게 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계속>

은유 기계로서의 텍톨로지

교환 수혈


 

  1. 독일어 원문 : “es erzeugt dadurch Bedingungen, die einen unheilbaren Riß hervorrufen in dem Zusammenhang des gesellschaftlichen und durch die Naturgesetze des Lebens vorgeschriebnen Stoffwechsel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