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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Molecular Red, 서문 정리

Molecular Red:

Theory for the Anthropocene

 

by McKenzie Wark

 

서문

 

시대마다 다른 방법이 요구된다지구가 모든 것이 상품화된 (늘 확대되는) 세상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는 이 순간을 선사(pre-history)의 끝이라고 말해보자. 이는 몇몇 사람들이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는, 세계관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시대이다. 우리의 유적 존재(species-being)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가속화 가운데 몇몇이 유례없는 규모로 일어난 것이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질학적 시기를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파울 크뤼천(Paul Jozef Crutzen)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이 제안한 것이다. 크뤼천에 따르면 현재 지구 표면의 30-50%를 인간이 차지하고 있으면 담수의 반 이상을 인간이 사용하고, 어장은 대양에서 영양염이 많은 심해수 지역의 주된 생산의 25% 이상을 잡아치운다. 에너지 사용은 20세기에 16배 증가했다. 모든 토양 생태계에 자연적으로 고정된 것보다 더 많은 질소 비료가 농업에 투여된다.

 

이는 세상의 끝은 아니다. 그러나 선사의 끝이다. 생태는 스스로 교정하고 스스로 균형을 맞추며 스스로 치유한다고 본 세계관에 숨어있는 신은 이제 죽었다고 소셜 미디어의 시장에서 선언해야 할 때이다. “인류세는 지구의 역사에서 자연력과 인간력이 서로 엮여서 하나의 운명이 다른 하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새로운 국면을 나타낸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이는 지구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Jan Zalasiewicz, Mark Williams, Will Steffen, and Paul Crutzen, “‘ The New World of the Anthropocene,” Environmental Science and Technology Viewpoint, Vol. 44, No. 7, 2010, pp. 222831) 인간은 이제, 어떤 총체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주기를 가진 배경, 인간이 동요시킬 수 있지만 그저 과도함을 조금 삼가면 다시 균형과 조화의 관계에 놓일 수 있는 배경에 맞서서 자신의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전면에 부각된 형상이 더 이상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사의 끝은 비판이론의 주된 조류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의 그 선사[각주:1]의 끝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비판이론을, 아니 더 정확하게는 새로우면서 오래된 비판이론을 필요로 한다선사를 끝내려는 이전의 실패한 시도에 거의 생명이 꺼진 강력하고도 독창적인 사상의 조류가 있었기 때문에 '오래된'을 포함시킨 것이다. 이 조류는 단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책의 1부인 노동과 자연에서 내가 소개하려는 사상은 두 러시아 맑스주의 작가들인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Alexander Bogdanov)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Andrey Platonov)와  연관된다.

 

2부 과학과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춥고 배고픈 초기 소련에서 햇볕 따스하고 풍요로운 20세기 말의 캘리포니아로 이동한다이 선사시대의 종말에 사유하기와 글쓰기에 대한 두 접근법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과학 연구자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와 과학소설 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Kim Stanley Robinson)을 다룰 것이다. 이들은 보그다노프와 플라토노프의 메아리인 동시에 인류세를 위한 업데이트이다.

 

냉전이 끝났으며 소련은 졌고 미국은 이겼다는 것이 상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 소련에서 겨울잠을 자고 싶어 하지만, 지배적인 분위기는 미국 스타일의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쪽이다. 이 책이 그리는 역사의 호()는 이와 다르다. 소련 체제의 붕괴는 미국 체제의 붕괴를 미리 구현할 뿐이다전자의 폐허가 리얼하고 통절한 반면에 후자의 폐허는 아직 무엇인지 별로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다.

 

[다음 단락에서 워크는 아랄해의 난파된 배의 모습을 셸리Shelley의 시 “Ozymandias”에 나오는 단어들을 이용하여 묘사함으로써 그 유사성을 환기한다. 워크가 사용한, 시에 나오는 단어들은 'traveller, sand, half sunk, shattered, nothing beside remains, round the decay, colossal wreck, boundless and bare'이며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라는 시행은 그대로 인용한다.--정리자]

 

이 녹슬어가는 선체 너머에 수많은 다른 선체들이 있다. 이것이 대량으로 존재하는 현대의 폐허이다. 멸망을 야기한 것은 모래나 시간이 아니다. 화성에서 볼 것 같은  풍경은 세계의 일곱 개의 부정적인 경이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배들이 한때 열심히 다녔을 방대한, 그러나 이제는 물이 사라진 곳은 아랄해(the Aral Sea)이다. 아랄해는 예전 크기의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여기에도 예전에는 파라오 크기의 입상들이 있었다. 아랄해는 한때 소련의 영토였으니 그 입상은 아마도 레닌의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배 자체는 다른 종류의 힘, 즉 자연 세계의 변덕스런 고집을 상기시킨다.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러시아로의 면화공급이 끊겼을 때 이 지역에서 면화재배가 시작되었다. 혁명 후에 소련 엔지니어들이 아랄해로 흐르는 아무다리아강(the Amu Darya River)의 물을 면화 산업을 위해 따왔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면화생산을 수출작물로서 크게 확대했으며 이 목적으로 방대한 관개 프로젝트들을 구축했다. 엄청난 양의 물이 토양, 씨앗, 비료와 함께 투입되어 면화를 키웠다. 엔지니어들은 아랄해가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고기잡이배들이 부수적 피해를 입었다. 이제는 이곳에서 화석이 되고 있는 많은 종의 식물과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우리가 맑스를 따라서 물질대사의 단절’(metabolic rift)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의 사례이다. (John Bellamy Foster,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참조) 노동은 바위와 토양을, 식물과 동물을 때리고 유혹하여 분자적 흐름을 추출하고 그것으로 우리의 공유된 삶을 만들고 또 만든다. 그런데 이 분자적 흐름들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랄해로부터 면화밭으로 따온 물은 돌아가지 않았다. 맑스가 알았듯이, 농업이 사막을 만드는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맑스가 알았던 19세기 영국 농업에서의 물질대사의 단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일어난다. 질산염 같은 영양분이 토양으로부터 추출되어 자라는 작물들이 이를 흡수하고, 이 작물을 농부들이 수확하여 도시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보내며, 노동자들은 이 작물을 먹어 노동력 재생산의 연료로 사용하고, 그런 다음에 개인적 물질대사로서 그 폐기물이 배설된다. 질산염을 포함하는 이 폐기물은 하수구를 통해 흘러나가 바다로 간다. 이 단절을 보완하기 위해서 인공비료를 만드는 산업들이 생겨나며, 이 산업들이 다시 또 다른 물질대사의 단절을 다른 곳에서 야기한다.

 

인류세는 일련의 물질대사의 단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을 위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분자들이 하나하나 추출되지만, 폐기물은 돌아가지 않으며 따라서 순환회로가 재개되지 않는다. 토양은 고갈되고 바다는 축소되며 기후는 변한다. 그 정도가 점점 더 높아진다. 세상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 , 공기맑스가 지적한 농업의 사례에서처럼 마디에서 풀려나간(out of joint) 분자들이 질산칼륨인 경우에 혹은 아랄 해처럼 H2O인 경우에, 혹은 현재의 기후변화 시나리오에서처럼 이산화탄소인 경우에 물질대사의 단절이 일어난다.

[정리자 주석]

“out of joint”는 셰익스피어의 Hamlet에 나오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time is out of joint”)의 일부이다. 물론 작품에서와는 맥락이 다르다. 들뢰즈가 이 대사를 가지고 칸트의 시간관을 설명하는 대목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해석은 작품에서의 의미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 “time”은 작품에서는 철학적 의미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앞의 셸리의 시에서도 보았지만) 좋은 문학작품의 표현들은 1장에서 워크가 설명하는/설명한 기본 은유’(basic metaphor)처럼 작동하며 대체’(substitution)를 발생시키는 힘을 가진다.

[/주석]


예전에는 토양을 고갈시키거나 물을 다른 곳으로 빼는 것이 국지적 문제인 듯이 보였다. 인류세는 물질대사의 단절 가운데에는 규모가 전지구적인 것도 존재함을 인식한 시기이다. 질소와 탄소가 원래 있던 곳에서 멀리 휴가를 간 것이다. 기후변화는 이미 지구상의 물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련 시대의 아랄해 경험은 현재 우리의 지구에서 벌어지는 물질대사의 단절 실험의 축도이다. 아랄해의 사례는 지구처럼 만들기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즉 화성을 새로운 지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화성의 사막으로 만드는 것이다.

 

맑스는 모든 견고한 것은 녹아서 사라진다고 말했다. 이제 이 말은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18, 19, 20세기의 해방운동 가운데 오직 하나만 무한정하게 성공했다. 민족해방도 아니요 계급해방도 아니며 식민지 해방도 아니고 성 해방도 아니다. 심지어는 동물해방도 아니고 사이보그 해방도 아니다. 바로 탄소가 해방되었다. 그래서 인류세의 주된 테마는 바로 <탄소해방전선>이다.

 

<탄소해방전선>은 화석화된 탄소의 형태를 취한 과거의 모든 삶을 찾아 파헤쳐서 그 에너지를 방출하기 위해 태운다. 인류세는 탄소로 운영된다. , 권력, 인식의 재분배가 아니라 분자들의 재분배이다. 이산화탄소로서 대기에 방출된 이 분자들은 열을 가두며 기후를 변화시킨다. 땅 속에 갇힌 탄소가 희소해지고 해방된 탄소가 기후를 위험 수준으로 밀어붙이면서 선사의 종말이 지평선에 모습을 나타낸다.


권력을 쥔 세력은 계속 <탄소해방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 이 물질대사의 단절을 보여주는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는 당국은 보통 그 효과를 경감시키는 네 가지 방법을 상상한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탄소 발자국을 개인적으로 측량하고 제한하는 식으로 책임을 지는 사회로 변해야 한다.

현대로부터, 기술로부터 떠나야한다는 낭만주의적 주장. (마치 특권을 가진 소수가 농민 직판 시장에서 장인이 만든 치즈를 사면 물질대사의 단절이 메워진다는 듯이.)

이 넷 가운데 효력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비판의 과제

1) 위 해결책들의 빈약함을 지적해야 한다.

2) 매우 상이한 종류의 지식과 실천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문제의 일부는 경제·기술·정치·문화 영역들의 상호관계이다. 탄소의 해방은 사유와 존재의 이 특수한 양태들을 포괄하는 총체를 변형시킨다. 그래서 특수한 영역들을 가로질러 지식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들이 필요하다.

 

지식을 거대하게 체계화한 헤겔은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잘못 생각했다. 더 일반적인 의의를 가진 세계사적 사건은, 인간 활동이 그 물질적 바탕우리가 현재 생물권(biosphere)이라고 부르는 것에 미치는 효과들의 총체성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노동의 모든 산물은 생물권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어떤 지도자나 거대한 계획을 넘어서는 과제이며 시장(market)의 마법이나 컴퓨터 모델링을 넘어서는 과제이다. 그러한 단절을 경감시키는 그때그때의 실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이 책은 그러한 문제로 우리의 사유를 재정향하는 데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버려진 기억의 단편, 무시된 개념들, 사소한 이야기들 몇 개를 주워 모으는 일을 그 과제로 설정했다.

 

10월 혁명의 운명이라든가 아니면 소련의 소멸 이후 도전자가 사라진 자본주의의 위대한 시기에 대한 큰 그림 이야기들이 있다. 여기서 좌파는 우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는 그램분자적(molar)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건들의 드라마이다. 여기서는 큰 몸체를 가진 사물들이 서로 충돌한다. 다른 한편, 흥미로운 과정들은 더 섬세하고 지각 불가능할 수 있다. 바로 분자적(molecular) 차원이다. 펠릭스 가따리 : “흐름, 지층, 배치의 상태에 있는 동일한 요소들이 그램분자적 양태로 조직될 수도 있고 분자적 양태로 조직될 수도 있다. 그램분자적 질서는 객체들, 주체들, 재현들, 그리고 그들의 지시 관계들을 제한하는 기호작용에 상응한다. 이에 반해 분자적 질서는 흐름들, 생성들, 상전이(相轉移, phase transition), 내력(intensities)의 질서이다.”(Félix Guattari, The Anti-Oedipus Papers, Los Angeles: Semiotext( e), 2006, p. 418.)

[정리자 주석]

워크는 원주에서 들뢰즈·가따리가 분자적/그램분자적 개념을 시몽동(Gilbert Simondoin)에서 따왔다고 덧붙이고 있다. ‘intensity’는 흔히 강도혹은 강렬도라고 옮기는데, 정리자는 내력이라고 옮겨봤다. ‘intensity’‘extensity’ 연장’(extension)=현실성(actuality)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물질성과는 달리 크게 보아 잠재성(virtuality)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힘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제시된 정밀한 서술에 따르면 ‘intensity’이데idée’(=잠재성)와 연장’(=현실성)의 중간 지대에 해당한다. 언어의 예를 들자면, 구체적 표현에 집중된 의미의 차원이 바로 ‘intensity’의 차원이다. 셰익스피어의 언어사용을 예로 들어보겠다.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어떤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게 되는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된다. 이때 상대적으로 심층적인 의미가 있고 상대적으로 표면적인 의미가 있다. 후자는 마치 포도껍질이 포도 알맹이를 품고 있듯이 전자를 안으로 말아서(implicate)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intensity’가 존재하는 한 양태이다. ‘연장’(=현실성)의 차원은 단어가 가진 물질적 측면에 해당한다. 이는 3차원 공간 안에 펼쳐져(explicated) 있다. 그리고 이데’(=잠재성)의 차원은 특정의 단어에서 분리된 의미들 전체의 우주에 해당한다. 이 우주는 3차원 공간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모든 의미가 서로 중첩되어 존재한다. 이를 들뢰즈는 perplication이라고 부른다.

  ‘intensity’는 이러한 양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unclouded’와 같은 단어를 보자. 표면에 뜨는 이 단어의 의미는 구름이 제거된 맑은 상태이지만, 이것이 ‘clouded’의 존재로 인해서 암암리에 구름의 존재를 함축하고(implicate), 즉 감싸고 있다. 그리고 구름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천둥, 번개, , 바람 등등을 감싼다.

  또 다른 양태를 들어보자.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 한 잎의 꽃잎 같고 / 혁명 같고이는 김수영의 꽃잎132-4행이다. 여기서 바위꽃잎혁명하나하나의 의미는 누구라도 명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3행으로 하나의 문장 안에 같이 들어있으니 이 세 단어의 관계가 갑자기 불명료해진다. 이때 아까는 명료하다고 생각했던 그 의미는 그저 감싸는 포도껍질의 역할을 할 뿐이고 이 시행들에서 형성되는 뭐라고 딱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이 껍질 안에 함축되고 감싸인다. 뭐라고 딱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어떤 의미는 읽는 사람의 해석에 의해서만 펼쳐치게(explicated) 된다. (그런데 이 해석이 가령 또 하나의 시인 경우에는 이 펼쳐짐에 함축이 병행한다.)

  단어를 의미를 일대일로 재현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경우우리의 언어생활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에는 함축되는 것, 즉 안으로 말린 것이 없거나 미미하다.

  물론 지금까지의 설명은 워크의 이 책을 읽기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치게 까다롭게 ‘intensity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일 수 있다

[/주석]

 

분자적인 것은 그램분자적인 것보다 덜 명료하지만 더 실재적이다(실재로서 가지는 힘이 더 크다). 계급과 당, 민족과 역사의 저 방대한 드라마들의 숨구멍들에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탄소해방전선>과 물질대사의 단절이라는 이야기이다관건은 그램분자적 드라마와 분자적 몸짓을 함께 인식할 수 있는 것이며, 구현된 사상들이 그램분자적으로 충돌하는 역사의 무대에 지나치게 한눈을 팔지 않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삶을 추출하는 바로 그 과정이 자연 자체의 계속되는 삶을 무너뜨리는 이차적 효과를 산출할 때 지식과 노동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가? <탄소해방전선>을 감당하는 것은 여러 종류의 행동들만이 아니라 그 통합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협동적 기반 위에서 통합된 해결책들을 설계할 하위 이론(low theory)이다. 이는 분자적인 것에 대한 여러 종류의 노동경험을 포함한다.

 

기후 변화에 대한 비밀은 누구도 그것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울적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에 대해 읽고 있으면 때로 어떤 끔찍한 열차 탈선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는 듯하다. 차라리 이 세계사적 순간을, 노동하는 모두의 집단적 노력이 이 세계를 재료로 하여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다시 상상하는 순간으로 삼기로 하자. [이런 대목에서 워크의 생각이 새로운 삶형태의 창출에 집중하는 네그리·하트의 삶정치와 강력하게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정리자]

 

이 책의 이야기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에게서 시작한다. 한때 볼셰비키 지도부에서 레닌의 경쟁자였던 그는 지식의 급진적 실천을 다듬어냈고 때로는 그 실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맑스주의의 핵심이 노동의 관점(labor point of view)에 있다고 보았다. 만일 노동이 세계를 조직한다면, 지식을 조직하는 노동 고유의 방식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으며이것을 텍톨로지(tektology)라고 불렀다[‘tectology’라고 쓰기도 한다정리자]문화적 발전의 고유한 수단 혹은 프롤레트쿨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보그다노프는 이데올로기가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데올로기는 집단적 노동의 인간 측면[다른 측면은 각종 장치들이다정리자]을 조직하는 데 대한 정동적 저항을 극복하는 세계관으로 보았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를 원천으로 삼은 보그다노프 자신의 세계관은 경험일원론이었는데, 이는 과학을 비롯한 진전된 노동 실천들에서 은유들을 취했으며 모든 이 세계의 정신적인 재현물들[예를 들면 헤겔에서 절대 정신같은 것정리자]을 거부했다. 그는 정신적인 것의 정서적 호소력은 이해했으며, 유토피아를 노동의 욕구와 필요를 추동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보그다노프는 자연이라는 범주를 유용한 방식으로 한정했다. 그에게 자연이란 노동이 마주치는 대상이었다. 이는 그토록 쉽게 손을 빠져나가는 용어를 집중적으로 그러나 개방적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그러나 보그다노프는 여전히 자연에 대한 노동의 지배라는 관점으로 사유했다. 여기서 우리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Andrey Platonov)에게로 옮겨간다. 그는 아마도 프롤레트쿨트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일 터이지만, 러시아 내전의 가장 혹심한 시기에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 글쓰기를 포기했다. 플라토노프에게서 자연은 비정하고 가차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는 노동이 자연을 압박하고 자연은 훨씬 더 세게 노동을 압박함을 일찍이 파악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창작가로 간주되지만, 워크는 그를 노동의 관점만이 아니라 동지의 관점에 대한 이론가로 본다.

 

플라토노프가 보기에 우리는 동일한 위험에 직면할 때에만 동지이다. 이 위험은 기근과 함께 그리고 소련 초기의 거대한 프로젝트들을 아래로부터 받쳐주는 기반시설을 만들어내는 투쟁과 함께 시작한다. 플라토노프는 노동에 의한 그리고 노동을 위한 지식의 조직화라는 생각을 그의 문학공장(a factory of literature)이라는 비전까지 확대한다. 문학공장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협동적으로 걸러서 집단적 노동과 그 과제에 대한 이해로 다듬어낼 수 있다.

 

보그다노프는 대체로 잊혔고 플라토노프는 전후 여러 형태의 맑스주의를 비판이론으로서 창출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맑스주의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은 철학, 문화비판, 혹은 규범적 정치사상에 집중한다. 이 책의 II부에서는 보그다노프나 플라토노프와는 다른 공통점이 거의 없지만 이 둘처럼 문화와 과학 사이의 경계에서 그리고 비판적 글쓰기와 창작 글쓰기를 가로질러 활동했던 작가들인 해러웨이(Donna Haraway)와 로빈슨(Stanley Robinson)을 다룬다. 우리의 테마도 노동과 자연에서 과학과 유토피아로 바뀐다.

 

보그다노프가 시도한 마하와 맑스의 종합을 이어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은 II부를 마하의 옹호자들 가운데 하나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에서 시작하는데, 파이어아벤트가 보기에 마하는 단순한 경험주의자가 아니라 발견술의 발휘자이다. 그의 발견술에서는 상위 이론을 향하는 철학의 경향은 삭감되며 개념들의 경로를 한 종류의 과학 노동에서 다른 종류의 과학 노동으로 실험적으로 재설정하는 다다(dada) 식의 방법이 사용된다.

 

파이어아벤트를 비롯하여 II부에 나오는 사람들이 접목하는 중심 마디는 해러웨이이다. 해러웨이는 (텍톨로지에서의 보그다노프처럼) 언어의 은유적 잠재력이 더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한다. 해러웨이는 세계관을 세계를 조직하는 수단이자 한계로 본 보그다노프의 생각을 유용하게 업데이트하는데, 보그다노프의 노동의 관점이라는 개념을 페미니즘적 입장과 대면시킬 뿐만이 아니라 또한 다른 유기체들과의 구멍이 나있는 경계들과 그리고 테크놀로지와 대면시킨다. 그녀의 유명한 사이보그 개념이 그 사례 중 하나이다사이보그 형상은 테크노-사이언스와 긴밀하게 엮여있는 이 시대에 비판적 사유만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사유를 상상할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다.

 

해러웨이에게 다양하게 영향을 받은 다른 두 작가가 사이보그의 관점에 살을 붙이는 것을 돕는다. 카란 바라드(Jaran Barad)는 과학적 지식을 사유하는 마하의 전술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장치(apparatus)이는 지식을 생산할 때 노동과 자연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를 노동의 관점에, 더 정확히는 사이보그의 관점에 도입한다.

 

폴 에드워즈(Paul Edwards)는 이 장치 개념을 지식 기반시설’(knowledge infrastructure) 개념으로 끌어올린다. 이는 <탄소해방전선>과 그 기후변화 효과에 대한 과학을 협동적으로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자들의 협동적 노동과 기술적 노동이 새로운 세계관을 산출하여 기술적 및 이데올로기적 저항을 전지구적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탄소해방전선>의 시대에는 햇빛 따스한 캘리포니아에서조차도 미리 그 폐허의 비전을 보는 듯하다. 비판이론가들이 이제 (예를 들어 로마가 불에 탈 때에는 신의 도시를 1일여행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듯이 사도 바울을 읽든가 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책은 결론 삼아서 킴 스탠리 로빈슨에 관심을 돌린다. 그의 장엄한 화성 삼부작은 보그다노프가 행했던 유토피아적 사유를 테크노-사이언스의 시대에 행한다. 워크는 이 책들을 이론서들로 본다.로빈슨의 글쓰기는 유토피아적 사유를 부활시킴으로써 이 물질대사의 단절의 시대와 맞선다여기서 묘하게도 공상과학소설은 일종의 가능한 것의 리얼리즘(realism of the possible)인 것으로 드러난다.

 

해러웨이처럼 로빈슨은 늘 우리를 사이보그적 존재로 본다. 바라드처럼 그는 어떻게 상이한 장치들이 지식의 상이한 객체들과 주체들을 만들어내는지에 주의를 기울인다. 플라토노프처럼 로빈슨은 객체들의 세계 내에서 그 세계에 맞서 상이한 투쟁들에 관여하고 있는 그러한 상이한 주체들이 그 싱이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동지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보그다노프처럼 로빈슨은 특권적인 상위 이론(high theory)을 거부하고 상이한 세계관들 사이를 협상하는 하위 이론을 택한다.

 

로빈슨이 제시하는 것은 메타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지속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상이한 비전들을 작가로서 통합하는 문제이다결국 보그다노프와 플라토노프, 해러웨이와 로빈슨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유적 존재가 지속되어야만 실재를 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삶의 방식들을 과거로부터 선택하여 미래로 보내는 일

에 비판적이며 창조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단서가 붙어있다. 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학의 언어들에 대한 아마추어적 논의들이다. 논쟁을 해결한다거나 지배적인 철학을 제공한다거나 하는 의도는 없으며, 다른 양태의 앎에 대한 인문주의적 판단을 제시하려는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없다. 과학에 대해 쓰면서 이론가가 되는 것은 어떤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틀릴 수 있는 허락을 얻는 것일 뿐이다. 과학에 대한 이 논의들이 틀린 곳에서는, 유용하게 틀렸느냐 아니냐가 시금석이 될 것이다. 유용함의 여부는 다른 분야에서 시험할 은유들과 다이어그램들을 제공했느냐 아니냐에 있다.

 

인류세를 위한 이론은 이 책에서 다루는 우울한 측면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플라토노프가 이차적 생각’(secondary ideas)라고 부른 것이 들어설 자리도 있다. 큰 프로젝트들이 사람 힘 빠지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특정의 개별 도매인에서 유용한 그러한 지식 실천을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주제인 이차적 생각은 기록보관소로부터 인류세가 (그 이름 말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이미 사유와 행동의 대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을 포착한 맑스주의 이론의 조류들을 선택하는 것과 연관된다.

 

인류세를 다루는 것은 권력 당국에 무언가를 맡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지배계급은 이 선사의 종말을, 우리 모두가 진전된 물질대사 단절의 상태에 있는 생물권에서 살고 있다는 이 과학적이고도 문화적인 발견을 얼마나 심하게 잘못 다루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시대의 역사적 과제에 대해 노동의 관점을 구축하는 것이다. 역사적 과제를 모든 종류의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일상적인 경험, 기술적 해킹, 그리고 심지어는 유토피아적 사색이 하나의 대의 아래 결합될 수 있는가?

 

기술적 지식은 조화와 나비들의 세상이라는 순전히 낭만적인 비전들을마치 70억 인구에게 이런 계획이 가능하기나 하다는 듯이향하는 대중의 감성을 견제할 수 있다. 일상 경험에서 온 민속 지식(folk knowledge)은 기술적 지식이 가진 특정 경향, (아랄 해의 물을 빼온 것처럼) 그 결과에 대한 생각 없이 계획들을 마구 밀어붙이는 경향을 견제할 수 있다. 유토피아적 사색은 행동과 발명이 태양을 향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향일성(向日性)이다. 다른 세계는 없으나, 이 세계일 수는 없다(There is no other world, but it can’t be this one.

[원주]

다른 세계가 있다, 바로 이 세계이다”(There is another world, and it is this one)라는 슬로건이 반()지구화 운동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이 슬로건은 필시 1939년에 출판된 Paul Éluard, Donner à voir에서 왔다. 이는 그의 Oeuvres completes, Vol. 1, Paris: Gallimard, 1968, p. 986에서 찾을 수 있다

[/원].

 

기후변화를 개선하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역사적 사상은 다음의 두 큰 그림 내러티브 가운데 하나를 취한다

1) 자본주의적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다. 이는 대안이 없으니 그저 기존의 프로그램을 고수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이 행성이 망하면 그냥 그렇게 되는 거라고

2) 낭만주의. 내러티브는 종종 전자본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이미지들을 가져오는 일종의 비()기술적, 총체론적, 영적인 대안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미 맑스에게 분명했듯이, 이는 자본주의적 낭만이며 자본주의 자체에 그 동력의 부산물 가운데 하나로 내장된 이야기이다.[아래 주석 참조] 이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의 음각판으로서, 여기서는 우리 모두가 대나무 프레임으로 된 자전거를 타는데,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을 넘어서 모험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정리자 주석]

워크는 원주에서 Amy Wending, Karl Marx on Technology and Alienation,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11를 참조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전의 이전 단계[자본주의 이전을 가리킨다인용자]에서 개별 개인의 삶은 더 충만했던 것처럼 보인다. 개인이 아직은 자신의 관계들을, 그 관계들이 자신으로부터 독립한 사회적 힘과 관계로서 자신과 대립하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한껏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래의 충만함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또한 저 완전한 공동화(空洞化)[자본주의에서의 일이다인용자]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믿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부르주아적 관점은 저 낭만적 관점과의 대립을 넘어선 적이 없으며 따라서 낭만적 관점은 그 축복받는 종말까지 정당한 대립물로서 부르주아적 관점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주석]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안적 리얼리즘이다. 이는 앎과 함(knowing and doing)의 협동적 노동을 단단히 고수하는 리얼리즘이다. 어떻게 역사가 다른 식으로 풀릴 수 있는가에 대한 다수의 내러티브들을 향해 열리는 리얼리즘이다. 과거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것에 국한되지 않는 리얼리즘이다. 여기에서는 비판적 사유가 특정의 우세한 경향들로부터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철학에서의 사변적 리얼리즘이 되기보다는, 절대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상 세계를 대변하는 모델이 되기를 결코 주장하지 않는 사색적 허구(fiction)가 되어야 한다. 강력무쌍한 자본과 그로부터 우리를 순수하게 구원해주는 코뮤니즘의 환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노동과 자연이 서로 대면하고 서로 혼융되는 방식들에 대한 가설적이면서 유효한 지식이 되어야 한다. 서양 형이상학의 정점으로서 기술에 대한 총체화하는 비판이 되기보다는 우리의 사이보그 신체들이 기술과 얽혀있음에 대한 솔직한 인정이 되어야 한다.

 

<탄소해방전선>이 우리에게 창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직은 또 다른 철학이 아니라 지식의 조직화를 위한 시학(poetics)이요 기술학(technics)이다. 바로 보그다노프가 창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노력의 가닥을 잡아 이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니 보그다노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도록 하자. 폐허 속에 무언가 산 것이 아직 남아있으니.

<서문 끝>



  1. 이는 역사 시대 이전, 즉 문자가 없었던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철폐될 때까지를 가리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