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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3―‘에돌림청’의 세게

1999년이던가, 내가 재직하던 학교의 재단이 등록금을 유용하여 이사장과 총장이 국정감사를 받을 때 참고인으로 국회에 갔던 적이 있다. 그곳에 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정부 각 부처에서 온 공무원들이 복도의 한편이나 대기실 같은 곳에 컴퓨터를 설치하고는 열심히 국회의원들에게 제출할 문서들을 인쇄해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 공무원들은 아예 국회로 출근한 것이다. 정기 국정감사는 매일 있는 일은 아니므로 그곳에 온 공무원들의 할 일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서류와 실제 현실의 관계는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이것은 그래도 옛날의 일이다. 이명박 정권의 말기인 지금, 공무원들이 하는 일은 이 나라의 삶과 도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들이 하는 일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한국의 행정부에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맑스가 이미 서양 근대 국가의 본질이 바로 현실과 단지 형식적인 관계를 맺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이의 관심사”와 그 관심사에 관계하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며 또한 독점이 모든 이의 진정한 관심사가 되는 현대 국가는 “모든 이의 관심사”를 단지 형식으로서 전유하는 희한한 장치를 발명하였다. 이로써 현대 국가는 그 내용에 상응하는 형식을 발견한 셈인데, 그 내용은 겉으로만 모든 이의 진정한 관심사로 구성된다.(『헤겔 법철학 비판』)


형식(form)은 ‘양식’(form)으로 즉 문서로 구현된다. 그래서 국가의 존재는 문서의 지배를 포함한다. 그런데 ‘법의 지배’(the rule of law)가 신자유주의에 와서 (특히 한국의 신자유주의에서 가장 극성스럽게) 타락했듯이,[각주:1] 문서의 지배 또한 타락할 수 있다. 문서가 현실로부터의 추상에서 한 걸음 더 진전되어 아예 분리되고 그 다음에 분리된 문서가 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기능제너럴 부인의 ‘표면’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과 은폐는 당연히 그로써 이익을 보는 자들에게 봉사한다.

 

이 씨리즈의 앞선 글들에서처럼 다시 한 번 이 문제와 관련된 디킨즈의 통찰력을 소개해보자.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에돌림청(Circumlocution Office)이다. 에돌림청은 『리틀 도릿』에 등장하는 가상의 관청이다.[각주:2] 소설 속에서 에돌림청은 행정부 전체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부서이다. 디킨즈는 1권 10장에서 남자 주인공 아서가 에돌림청을 찾아가서 겪는 경험을 보여주기 전에 이 부서가 어떤 곳인가를 간결하면서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그는 우선 ‘일 안하는 법’(How not to do it)이 에돌림청 주변의 모든 부서들과 전문정치가들의 연구대상이자 목표임을 지적하며, 그 중에서 에돌림청은 이 ‘일 안하는 법’이라는 원리를 가장 탁월하게 통달하고 있는 부서라고 한다.


그런데 ‘일 안하는 법’을 원리로 삼은 것이 에돌림청의 변별적 특성은 아니다. (이 부서의 본질이 관료의 타성적 게으름의 구현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 원리를 실행하는 정도의 차이가 핵심도 아니다. 에돌림청이 다른 부서나 주위의 전문정치인들을 능가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방식의 차이에 기인하며 정도의 차이는 그 결과물이다. 에돌림청은 다른 부서와는 달리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즉 “국가적 효율성의 정신”(spirit of national efficiency)에 입각함으로써 일을 안 한다.


 에돌림청으로 하여금 모든 것에 참견을 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국가적 효율성의 정신이었다. 기계공들, 자연철학자들, 군인들, 선원들, 청원자들, 진정인들, 불만을 가진 사람들, 불만스런 사항을 예방하고 싶은 사람들, 불만스런 사항을 고치고 싶은 사람들, 한 자리 주는 사람들, 한 자리 받는 사람들, 장점이 있어도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 결점이 있어도 처벌받지 않는 사람들--이들 모두가 에돌림청의 대판 양지(大判洋紙) 서류 아래 뒤섞여 접혀 있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이 안되게 하는 것일까? 단순히 처박아놓는 식으로? 그렇지 않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서가 직접 겪는 에돌림청의 메커니즘, 청을 주도하는 바너클들(Barnacles)의 속성이 모두 참조되어야 할 것이다.


아서가 에돌림청을 찾아갔을 때 겪은 것은 이른바 ‘뺑뺑이 돌리기’이다. 아서는 에돌림청의 수장인 타이트 바너클(Tite Barnacle)을 다섯 번 찾아간 끝에 간신히 집으로 찾아 가보라는 말을 듣지만, 그의 집에서 다시 에돌림청으로 되돌려진다. 에돌림청에서 또 두 군데를 거쳐 간 곳에서 당하는 일은 그가 겪은 전(全)과정을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으로 표현해준다. 


1번이 그를 2번으로 돌리고 2번이 3번으로 돌렸으므로, 그들 모두가 그를 4번으로 돌렸을 때 이미 그는 그것을 3번 진술한 상태였는데도, 4번에게 다시 진술해야 했다.


여기서 ‘4번’에 해당하는 퍼디낸드 바나클(Ferdinand Barnacle)은 앞으로도 계속 ‘뺑뺑이’를 돌 터이니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아서에게 솔직하게 충고한다.[각주:3] 아서가 이것은 일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하자 퍼디낸드는 성사는 안되겠지만 원하면 서류를 내보라고 한다. 아서는 결국 서류양식만 잔뜩 호주머니에 넣은 채 물러나고 만다.


아서는 에돌림청 앞에서 발명가 도이스(Doyce)와 그를 후원하는 미글즈(Meagles)를 만나게 되며 여기서 발명가 도이스가 낸 청원 건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것을 디킨즈는 “우리 모두가 외우고 있는 당연한 이야기”(the matter-of-course narrative which we all know by heart)라고 칭한다을 듣는다. 처음에는 도이스가 자신의 돈으로 발명품을 시험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참석하는 위원이 형편없었다. 6명 중 두 나이든 위원은 눈이 거의 멀다시피 해서 서류를 볼 수도 없고 다른 두 나이든 위원은 귀가 거의 멀어서 듣지를 못했으며 다른 한 나이든 위원은 다리를 절어서 근처에 오질 못했으며 마지막 나이든 위원은 너무 고집이 세어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했을 때 한국의 상황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에돌림청에 일이 맡겨진다. 에돌림청은 이전의 결정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판정하는데, 이전에 어떤 결정에 도달한 적이 없으므로 이 일은 보류된다. 마침내 청의 수장과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든지 아니며 영원히 보류하라는 견해를 말한다. 나중에 도이스(Doyce)의 동업자가 된 아서가 발명건을 가지고 다시 도전하지만, 퍼디낸드의 말대로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서류양식에 기재하기, 서신교환, 의사록 쓰기, 각서 쓰기, 서명하기, 교차서명하기, 재교차서명하기, 뒤로 앞으로 보내기, 옆으로 보내기, 열십자로 보내기, 갈지자로 보내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렇듯 에돌림청은 일종의 자체순환 메커니즘을 가동시켜 일이 진행되지 않게 한다. 그런데 에돌림청이  그 “국가적 효율성의 정신”으로 인하여 “모든 일에 어떤 관계를 갖게끔” 되었다는 데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모든 일이 에돌림청을 거쳐”가는데, 그것이 블랙홀과도 같은 기능을 함으로써 빠져나가지 못하는 일의 수가 “군대를 이룰 만큼”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성은 개별 바너클들에게서 개인적 특성으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윌리엄 바너클(William Barnacle)은 자신을 어떤 일을 하도록 촉구하려면 “선례”를 제시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일은 선례가 없는 법이기에 에돌림청은 해오던 일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수상인 로드 데씨머스 바너클(Lord Decimus Tite Barnacle)은 ’일 안하는 법‘을 위하여 ‘이 자유로운 나라의 장관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it behoves a Minister of this free country ~)라는 상투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디킨즈는 <‘마땅히’ 기계>(Behoving Machine)라고 부르며, 이 기계의 발견은 “정치적 영구운동"(political perpetual motion)의 발견이고, “이 기계는 국가의 모든 부서들 안에서 항상 돌고 돌지만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어떤 바너클은이 사람은 스무 군데를 재빨리 연속적으로 뛰어다니며 한 번에 두, 세 군데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의회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다른 주제에 대하여 답을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술로 인하여 큰 공을 세우고 에돌림청에서 높이 존경받게 되었다.


일을 전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함으로써 일을 안 하는 에돌림청의 속성은 국회에서 자신들이 한 일을 보고할 때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의원이 청을 비판할 경우, 의회에서 청을 대표하는 바너클 중의 하나가 그 의원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작살내는 모습에서 에돌림청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그러면 의회에서 에돌림청을 대변하는 의원이 [에돌림청을 비판하는] 그 의원을 치고 쪼갤 것이었는데, 에돌림청이 (일을 막기 위해서) 행하는 일의 양을 진술함으로써 그렇게 할 것이었다. 그때 그 의원 바너클은 손에 몇 개의 숫자가 적힌 종이를 들고 의회의 동의를 얻어 그것에 주목하기를 청할 것이었다. 그러면 조무래기 바너클들은 지시에 따라 ‘옳소, 옳소, 옳소!’를 연발하고 ‘읽으시오!’라고 외칠 것이었다. 그러면 그 의원 바너클은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가장 고집스런 사람도 설득시킬 이 작은 문서로부터 (조무래기 바너클들의 야유와 환호), 회계연도 중 지난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 많은 비방을 받는 에돌림청이 (환호) 1만5천통의 편지를 쓰고 받았으며 (큰 환호) 2만 4천건의 의사록을 작성했고 (큰 환호) 3만2천5백17건의 각서를 작성했다는 (열렬한 환호)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아니, 에돌림청과 연관이 있으며 그 역시 귀중한 공복(公僕)인 한 영리한 의원이 그 시기에 에돌림청에서 소비된 문구의 양을 흥미롭게 계산해주는 호의를 자신에게 베풀었는데, 소비된 문구(文具)의 양도 이 짧은 문서의 내용에 들어있으며, 이로부터 자신은 공공업무에 바쳐진 대판 양지를 깔면 옥스퍼드스트리트 양쪽의 보도를 끝에서 끝까지 다 덮고 공원용으로 쓸 4분의 1쿼터 정도의 길이만 남겨놓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도출했고 (엄청난 환호와 웃음), 에돌림청이 사용한 붉은 테이프를 펼치면 하이드파크코너에서 제너럴포스트오피스까지 우아한 화환 모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도출했다고. 그런 후에 그 의원 바너클은 환호가 터지는 가운데 자리에 앉고 비판한 의원은 사지가 절단된 채 전장에 남겨질 것이었다. 이 모범적인 저격 이후에는 아무도, 에돌림청이 일을 하면 할수록 실제로 행해지는 것은 더 적으며 에돌림청이 불행한 공중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암시할 배포를 가질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이 부서의 목적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아서가 답을 해준다. 


“(...) 에돌림청은 모든 것을 가만히 놔둬달라는 명시적인 의도를 가지고 존재합니다. 그것이 그 부서가 의미하는 바예요. 그것이 그 부서의 목적이고요. 물론 마치 무언가 다른 것이 목적인 양 유지해야 할 형식들이 있지요. 그러나 형식일 뿐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형식들일 뿐이예요! 당신이 얼마나 많은 형식들(서류양식들)을 거쳤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어떤 목적지에든 조금도 더 가까이 간 적인 없지요?”


영국 국민의 관점에서 에돌림청은 기생적 존재일 뿐이다. 이 측면을 더 잘 말해주는 것은 에돌림청만이 아니라 정치 세계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바너클 일족이다. 바너클들이 어떤 족속인지에 대해서는 이 씨리즈의 다음 번 글에서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 ♣







  1. ‘법의 지배’는 원래 왕일지라도 법 위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을 의미했다. 그러나 법은 매우 자주 소수 지배층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주위를 보라. 사적인 이익을 위해 제 마음대로 법을 주무르는 자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이들은 자신들이 ‘법의 지배’의 진정한 정신을 어기고 있는 당사자들이면서도 ‘표면’으로는 ‘법치 질서’를 주장한다. 소극(笑劇)이 아닐 수 없다. [본문으로]
  2. ‘돌려말하기부’는 ‘Circumlocution’을 어원에 따라 직역한 것이다. ‘Circum’이 ‘돌린다, 원을 그린다’는 의미이고 ‘locution’이 ‘말하기’라는 의미이다. ‘돌린다’는 의미만 살려서 ‘에돌림청’이라고 옮길 수도 있고 나 자신도 한때 이것을 선호했다. 순전히 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위자들이 구사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보면 ‘돌려말하기부’라는 옮김이 더 와 닿는 느낌이다. [본문으로]
  3. 퍼디낸드는 바나클 일족의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망한 자이며, 군중심리와 정치 게임의 메커니즘에 정통한 자이다. 그래서 아서에게 하는 그의 묘하게 솔직한 발언들은 돌려말하기부의 속성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