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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

사상과 신자유주의



사상과 신자유주의

 

지금 정치 소극의 일시적인 주인공이 된 총리 후보자가 가진 역사의식 혹은 사상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의 총리 후보자 같은 유형의 인간의 이데올로기 혹은 사상을 비판한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을 일반화된 차원에서 말하기 전에 내가 이런 유형의 인간들의 부상(浮上)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를 먼저 말해보기로 하자.

 

대한민국의 상당히 많은 대학들이 그렇듯이 내가 있던 대학도 대학 내의 권력자와 그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학교를 운영했다. 나는 이 충성하는 자들의 유형이 세 번 바뀌는 것을 보았다.

 

첫째 유형은 뛰어난 실질적 능력으로 권력자를 보필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권력자가 원하는 바를 자신의 개인적 능력으로 해결해주면서 권력자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았다. 그것이 교무위원의 수당이든 아니면 그것 이외에 다른 형태의 것을 포함하든 말이다. 최초의 권력자(설립자)는 대학이 곧 자신이 것이요, 대학을 키우는 것을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 수단이 문제가 있더라도 그 결과는 학교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런 특성이 나 같은 교협교수들과 충성파들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학교가 잘 되기를 바란다’)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충성파들과 서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데 좋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들이 가진 능력에는 대화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가졌기에 싸움은 늘 협상의 형태로, 즉 말과 논리를 가지고 밀고 당기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당시가 그래도 학교의 기운이 무럭무럭 자라는 때였던 것 같다. 싸움이 있고 나면 실제로 무언가가 달라지고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자의 뜻밖의 사망으로 인해 재단이 바뀌었다.

 

새로운 권력자는 학교를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재산으로 보는 쪽이었던 것 같다. 양자는 다르다. 전자는 결코 학교를 팔지 않지만, 후자는 언제라도 학교를 팔 수 있다. (사실상 학교를 파는것은 불법이다. 학교재단은 비영리 재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학교의 매매를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곳이다.) 그리고 학교보다는 학교 바깥의 자신의 재산이 주된 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학교는 목표라기보다는 일정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이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 충성파의 대열에 진입하기 쉬웠다. 이 둘째 유형의 충성파들은 이전보다 대화의 능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서로 말로 싸우는 것을 피했다. 그렇지만 말귀는 알아들었다. 그래서 교협 회보에 무슨 글을 써서 어떤 일에 대해서 비판하면 효과가 있었다. 뒤에서 꾸미던 일을 중지하는 등의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아마 이 재단이 더 오래 갔으면 서로 대화를 통해 싸우는 수준을 다시 회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단이 또 바뀌었다.

 

신자유주의의 부상이 점점 더 가시화되는 이 시기부터 심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선 학교가 목표로서의 성격을 다시 띠기는 했지만, 연구와 교육이 목표의 핵심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학교가 학교 외부에 종속되었는데, 이제는 학교 내부에서 연구와 교육이 그와는 다른 것 즉 적립금 축적의 수단이 된 것이다. 적립금이 수단이고 연구와 교육이 목표인 것이 대학의 정상적인 상태일 터인데, 그 반대가 된 것이다. 대략 이 무렵부터 정부의 관련 부처는 (이름이 종종 바뀌므로 그냥 교육부라고 통칭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들이 적립금을 가능한 한 많이 축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는 입시에서 들어온 수익을 입시 이외의 일에 쓰지 못하도록 규제했는데, 이 규제가 풀어졌다. 학교는 수입의 극대화를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실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요즘 대학에서는 2학기 수업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가 힘들다. 교수들이 이른바 수시 1차에서부터 시작되는 긴 입시과정에 수시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충성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 능력의 확연한 결핍이다. 직접 얼굴을 맞대는 대화를 피하는 것은 전 재단의 충성파들과 마찬가지인데, 전 재단과 달리 교협에서 질의서 같은 것을 보내면 뭐라고 답변서를 보내긴 보낸다. 그런데 내용의 가당찮음은 둘째 치고 도대체 우리말의 기본을 제대로 배웠는지가 의심스러운 문장들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충성파의 영역(가장 가시적인 것이 교무위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경쟁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수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컨대 이미 낡아빠진 학생 운동권 계보를 과장되게 정리해서 전체 교수회의에서 발표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 같은 사람은 아예 빼고) 일반적인 교수들도 저게 뭐냐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회의 자리에 참석한 권력자에게는 그게 먹혔던 것이다.

 

그 뒤를 짧게 줄이자면, 대학이 연구와 교육에 무관심하고 적립금에만 관심을 가지듯이, 충성파도 그 실질적 능력 즉 행동과 말의 실질적 내용보다는 권력자가 마음에 들어하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충원되게 되고 경쟁자들은 오로지 이 측면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매진하게 되었으며 이런 식으로 셋째 유형이 점점 뚜렷한 윤곽을 띠게 되었다. (이 셋째 유형의 여러 특징들은 http://minamjah.tistory.com/27에 정리되어 있으니 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권력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협이나 직원노조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연구와 교육에 덧붙여 학교 구성원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도 이제는 관심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그 결과로 학교는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점점 잃고 그저 월급이나 받고 다니는 직장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기업이라면 이런 정도에 이르면 당장 망했을 테지만, 대학은 학생들이 계속 입학하는 한 등록금은 계속 들어오므로 망할 일이 없다.

 

요컨대 우리는 이데올로기와 이념이 주인인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주인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은 돈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원리를 전 대통령이 통 크게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사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 이전부터 그랬다. 한국의 정치적 지배세력은 언제부턴가 계급성예컨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적 속성이 그 근간이었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해왔다. 오히려 자본가계급이 이 세력에 눌려서 정상적인 발전을 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재벌’(‘chaebol’)의 존재이다.

 

이 기회주의 세력은 두 세대로 나뉠 수 있는데, 앞 세대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반공이데올로기를 활용했고, 현 세대는 자신의 무능을 숨기고 더 잘 살기 위해서 종북이데올로기를 활용하고 있다. 이들에게 이데올로기 혹은 사상은 그저 수단이거나 단순한 소유물이다. 소유물은 상황에 따라 팔 거나 처분할 수 있다. ‘변절혹은 전향이란 사고방식은 바로 이렇게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경우에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 혹은 사상은 어떤 개인에게 한 치의 틈도 없이 체화된, 그의 정신적 존재의 총화와 다르다. 이 총화를 일단 영혼이라고 부르자. 기독교 등에서 말하는 종교적 의미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으로서, 어떤 개인의 잠재성(virtuality)의 차원에서의 존재의 총화를 말한다. 개인의 죽음으로 인해 신체가 사라지면 현실성(actuality)의 차원에서의 존재가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적 차원에서의 존재는 사회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다. 이렇게 현재 속에 남기 때문에 몸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는 것으로 되어있는 종교적 의미의 영혼과 다른 것이다. (물론 양자가 대립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영혼에게는 부단한 생성만이 존재하며 변절혹은 전향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의 영혼을 빼면 사람은 부자든 가난뱅이든 한갓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영혼을 결핍한 존재를 양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25 참조.)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은 이들이 영혼을 결핍한 데서 나오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예의 총리 후보자는 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는 무능한 사람이 부에 접근하기 가장 좋은 수단으로서 지배세력의 상위에 진입하고 싶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내가 있었던 곳의 많은 충성파들처럼, 이 기회주의 세력의 정점에 있는 자()의 입맛에 가장 맞는 행위와 발언을 (다소 도에 넘게?) 해왔을 뿐이다. 따라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그가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내던질 수 있는 (친일, 반민족 등의 성격을 가진)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사회 전체에 만연된, 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인 사고의 뿌리를 끊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