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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운동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커먼즈


* Think Like A Commoner의 10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


10장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커먼즈

 

생물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커먼즈라는 생각은 자연과 사회/문화의 대립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용해하는 통합적 원리를 제공한다. 이 생각은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를 말소한다.”

Weber에 따르면 커먼즈는 우주와 우주 내에서의 우리의 역할을 다시 상상하는 수단을 제공환다.

 

Weber가 주장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경제적·정치적 체제를 변형하려면 우리는 그와 동시에 그 체제들에 깊이 심어 넣어진,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은 어떤 전제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상 우리는 실재 자체의 성격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정치 패러다임과 다윈의 진화의 원칙들에 몰입되어 있는 우리 대부분은 은연중에 삶을 맹렬한 경쟁으로 보며, 경제를 수많은 개인들이 개인적 부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종의 기계로 본다. 경쟁에서의 승리가 모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은연중에 거대한 추상적 힘들이 자연의 무생물적 입자들과 부딪치는 뉴턴의 우주를 전제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의 의식과 의미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연관이 없지는 않지만 사소하다.

 

Weber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암묵적인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 바로 우리의 자유 시장에 기반을 둔 경제적·정치적 구조들의 토대이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과학자들이 자연 세계와 진화를 전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프리즘을 통해서 보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은 삶을 협동적 행위자들이 의미있는 관계들을 구축하고 선문들을 교환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체계로 보는 것이다. 물론 경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는 심층적이고 안정화하는 협동형태들과 서로 엮이어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이론적 구도에서는 유기체에 대한 주체의 경험이 중요하다. 새로 출현하는 생물학에서는 모든 유기체들이 의미를 만드는살아있는 체계들이기 때문이다. 삶은 구현된 주체들이 환경 및 다른 살아있는 유기체들과 상호작용하여 의미있는 관계들을 창출하는 진화적 과정으로 간주된다. 주체성은 기존의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대로 환상이거나 중요치 않은 곁가지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공허한 우주에서의 일시적이고 사소한 감정들의 거품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성은, 객체들만이 아니라 주체들이 주된 관심사인 새로운 실존적 생태학의 중심축이다. 인간은 방대하고 무정한 우주에서 고립무원으로 표류하는 원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 주체성은 낯설고 잴 수 없는 타자로서 존재하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다.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은 서로 경계가 흐려지면 중첩된다. 바로 커먼즈에서처럼!

 

Weber는 자신의 새로운 이론을 바이오시학’(biopoetics)라고 부른다. 이는 형이상학인 동시에 생물학 이론으로서, “몸으로 느낀 경험과 생물학적 원칙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Weber, 전통적으로 연구되던 생명과학’(science of life)은 더 이상 살아있는 것들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방법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전통적 과학은 의식과 주체성을 다루는 데 실패한다. 실상 이 주제들은 연구의 장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Weber에 따르면 우리가 유기체들을 감정을 가진,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체계들로, 자신들의 환경을 해석하며 노예처럼 자극에 복종하지 않는 체계들로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삶의 거대한 수수께끼들에 대한 대답들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비전에서 커먼즈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커머닝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연과 재통합하기 시작할 수 있다. Weber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과제는 새로운 활기부여”(Enlivenment)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유형의 부활로서, 300년 된 계몽(Enlightenment)을 계승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우리가 의미를 생물학적 필연성으로서 필요로 한다는 점을 존중하는 우주관을 실현하는 것이다. Weber : “바로 이 점에서 커먼즈의 실천은 삶의 실천에 다름 아닌 것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Weber의 이론이 비주류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커먼즈 패러다임이 속 깊숙이 미치는 호소력을 설명하는 것을 돕는다. 그 이론은 커먼즈가 PR 책략이나 ‘messaging’(알리기) 전략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보기 위한 프리즘이라는 점, 더 심오하게는 세상을 그 모든 다양성 속에서도 총체의 차원에서 보게 해주는 프리즘이라는 점을 확인해준다. 베버의 분석은 개인을 의식적으로 주체적인 행위자로서 위치짓는다. 그의 분석에서는 실제 역사, 지역의 상황, 문화 및 개인들이 인간의 진화를 이루고 커먼즈를 창조하는 데서 가지는 역할이 인정된다.

 

커먼즈를 정말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장 기반의 경제학과 문화의 극히 환원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협력의 논리가 제도들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제대로 된 사회구조와 규범들로써 이 인간주의적인 윤리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장문화는 은밀하게 우리의 상상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사유재산, 자본 및 시장의 이익이 특권화됨으로써, 우리의 언어 자체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한다는 생각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있다.

 

커먼즈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생각 깊숙이 파고들며 우리의 사고에 다른 방향을 부여하도록 한다. 커먼즈는 새로운 인식과 관점들이 부각되도록 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들을 연다.

물론 재래의 관점에서 커먼즈에 대해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경제학자들이 늘 그렇게 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커먼즈를 공공재’(public goods)와 혼동하며 마치 그것이 사물인 듯이 취급하고 그 사물을 활성화하는 사회적 실천들과 관계들을 무시한다. NATO는 우주공간과 바다를 전지구적 커먼즈라고 말하지만, 이는 자원들의 집합을 의미할 뿐이어서 커먼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짜인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커먼즈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방식들 일부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고용인, 소비자, 기업가 혹은 투자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선택들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커머너로서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어 우리자신의 재능과 야심과 책임을 실제 삶의 문제들에 적용하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에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자원을 관리하는 데 참여할 인간적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할 수 있다.

 

커먼즈의 형이상학

 

서양의 근대적·과학적 세계관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커먼즈의 형이상학이라는 문제가 신비에 쌓여있는 측면이 있다. 서양인들의 문화와 언어는 커먼즈의 인간주의적·정신적 뿌리를 보기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행동하고 세계 속에 존재하는 매우 상이한 방식들 일부를 힐긋 볼 수는 있다.

 

커먼즈의 형이상학은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들을 흔드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인간은 정말로 합리적으로, 독립적으로, 그리고 시장과 정치영역에서 정보에 기반을 두고 행해지는 합의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가? 인간이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것, 그리하여 역사와 사회 외부의 어떤 지대에서 사는 것이 가능한가? 자유주의적 보편주의가 암시하듯이 말이다.

 

커먼즈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근대의 핵심에 놓여있는 신화 가운데 일부에 도전한다. 기술혁신, 경제성장 그리고 소비주의가 우리의 삶을 개선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정상적인 경제활동은 부(wealth)를 산출하는 만큼이나 악폐(illth)를 산출한다.

커먼즈는 가격을 가치의 지고의 중개인으로 모시고 물질적 진보를 모든 진보의 요체로 보는 상품논리에 과감히 도전한다.

 

커먼즈 학자 James Quilligan :

전통적인 경제학에서의 재화와 서비스라는 생각은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그리고 개인들 자체를 상품화될 수 있고 상호 교체될 수 있는 사물들로 환원한다. 그러나 커먼즈 기반의 경제는 가치를 개인들, 세계의 자원들 사이에서 발생하며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적 관계들을 통해 경험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커먼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공동생산을 건설적이고 만족스러운 활동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힘은 실제적 사회적 실천들에서 온다. 그런데 이 실천들은 모두가 극히 특수하고 향토적이며 맥락 속에 넣어져 있다. 규범들은 쉽게 일반화되거나 보편화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의 과실들을 커먼즈를 해치치 않고 상품화하기가 그토록 힘든 것이다. 그 가치는 사회적으로 끼워 넣어져 있으며 쉽게 현금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커먼즈에서 자원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것은 커먼즈를 한데 묶어주는 사회적 관계를 부식시킬 위험이 있다.

 

9장에서 보았듯이 토착민들은 재산에 대해서 매우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초국적 기업이 전통 지식이나 유전자 물질을 특허 내려고 할 때 토착민들은 그러한 재산화를 어리석은 동시에 무도하다고 본다. 집단적 자원의 유일한 저자라고 주장할 개인은 아무도 없다. 이 자원이 발전되고 정련되는 데에는 수 세대에 걸쳐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고 물려받은 혁신 및 문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커먼즈에 위탁된 어떤 것을 그 누구도 사적 이득을 위해서 전유하여 팔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약탈’(biopiracy)이라는 말이 생겼다.

 

토착 공동체들도 화폐와 권력의 유혹에 다른 누구만큼이나 끌리기 쉽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 토착민 지도자들이 그 전통적 지식이나 자원을 푼돈을 받고 팔거나 서양의 제약기업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를 맺었다가 배반당하거나 그 문화가 망가지는 일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의 산(San) 부족은 전통적으로 그들이 식욕감퇴제로 사용하던 선인장인 Hoodia gordonii로 만든 새로운 다이어트 약품의 이윤의 8%를 받기로 합의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래를 시장규범들과 거대한 큰 액수의 돈을 전통 문화에 주입하여 문제를 낳은 생물약탈의 사례로 보고 비판했다.

 

토착민들은 일반적으로 개인들을 더 큰 집단의 네트워크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으로 본다. ‘자수성가한사람이라는 생각은 우스꽝스럽거나 심지어는 망상이다. 사유재산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무의미함은 당연하다. 재산이란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서양 법에서의 재산 개념처럼 어떤 자원에 대한 유일하고도 전적인 지배‘(sole and despotic dominion)라는 생각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불가피한 의존과 우리의 상호의존을 부정한다.

 

토착민들은 그들의 자원과 지식이 상호 돌봄과 집단 지킴이 공동체 안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근대 산업 사회는 이것이 낡았고 불필요하다고 본다. 시장이 우리가 욕구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자원을 화폐로 바꾸고 소득을 나누어라. 이보다 더 공정한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기후변화, 석유 생산 정점(Peak Oil), 및 다른 많은 환경 위기들은 시장 유형의 사고와 그 존재론적 전제들의 실제적 한계를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새로 등장하는 디지털 커먼즈의 우주 또한 인류학자 Marianne Maeckelburgh가 말한 ‘20세기 지식의 일모작 풍토’(monoculture of knowledge of the 20th century)의 부적합성을 드러낸다. 거대한 중앙집중식 제도들과 전문분야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너무 허약하고 단색(單色)적이며 진짜 사람들이 사는 다양한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우리 시대의 지배적 사상체계들, 특히 관료제, 전통적 경제 및 과학 탐구의 체계들은 토착문화(vernacular culture) 실천에 기반을 둔 앎과 존재의 방식(the practice-based ways of knowing and being)의 정당성을 파괴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생태적·사회적 문제들을 극복하려면 우리 자신을 신체를 가진, 특정의 상황과 연관된 인간들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이 유실된 것은 인간 외부의 세상과 접하려는 인류의 노력에서 큰 좌절을 나타낸다. 호주의 250개 토착어들 가운데 대부분이 사라졌다. 지금 캘리포니아에 해당하는 곳에서는 100개의 토착어가 사라졌다. Daniel NettleSuzanne Romaine이 지적하듯이, “언어의 절멸은 세계 생태계의 거의 총체적인 데 가까운 붕괴라는 더 큰 상의 일부이다.” 토착어들은 특수한 지식, 특히 특수한 생태계에 대한 특수한 지식의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저장고이다. 민족식물학자 Wade Davis : “모든 언어는 정신의 원시림이다.”

 

커먼즈는 커머너들 자신에 의해서 특수한 상황에서 집단적으로 구축되는 새롭고 다양한 유형의 지식을 존중한다. 이 지식은 야생 생물의 계절에 따른 습관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동체들의 관행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헌혈에 대해 보상해주는 공동체 전통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Maeckelburgh는 자기조직된 공동체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대안적 앎의 방식들을 밝혀내기 위해서 일련의 네트워크된 활동가 공동체들을 연구했다. 지식은 집단적으로 구축되며” “특수한 맥락에 들어있고 부분적이며 잠정적이다.” “무언가를 아는 것과 더 잘 아는 것을 구분한다.

그렇다면 자결(自決)을 향한 투쟁의 중심에는 인류학자 Arturo Escobar향토적 지식의 생산을 위한 미시정치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 미시정치는 지식과 정보의 혼합, 재사용, 재결합의 실행들로 구성된다.”

커머너들은 권위를 존중해야 하는 일단의 고정된 정통 지식이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커머너들은 자신이 고유한 유형의 지식을 다른 이들 및 공통의 자원과의 관계를 통해 창조한다. 향토적 전문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통이 더 신뢰성 있고 대응력이 있으며 실용적인데, 왜 추상적이고 이기적인 관료제적 혹은 경제적 틀이 우세해야 하는가!

 

지방주의(Localism)의 야금장(冶金場)으로서의 커먼즈

커먼즈의 큰 매력은 바로 이것, 즉 지방의 자결을 약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커먼즈에 끌리는 것은 그것을 자신들의 특수한 향토적 환경을 경축하고 보호하는 길로 보기 때문이다. 한 공동체의 정체성은 불가피하게 그 지리와 건물들, 그 역사 및 지도자들과 맞물려 있다.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인류와 생태에 대한 더 큰 책임감을 배우고 발전시킨다. 시인이자 생태주의자인 Wendell Berry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속에서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정신 속에서 온전하게 살아있는 응집력 있는 공동체라는 목적만이 우리를 단편화, 모순, 부정성 너머로 데려갈 수 있으며, 우리에게 대립이 아니라 긍정과 애정의 방식으로 우리가 기쁘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보존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다.” 다른 곳에서 BerryAlexander Pope(영국 18세기 시인)을 인용한다. “만사에 고장의 신령에게 자문하라.”(Consult the genius of the place in all)

 

전지구적 상업은 개별 고장들이 가진 변별성과 비옥함을 감소시켰다. 방콕의 쇼핑몰은 카타르, 독일, 미국의 쇼핑몰과 같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대 기업들이 선전이 많이 되고 브랜드명이 있는 식품을 공급하는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구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식품이 한때 집에서 키운 풍요로운 다양한 품종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예전에는 네브래스카에 가면 특유의 구운 통을 먹을 수 있었다. 조지아에 가면 ‘possum and tater’(주머니쥐와 감자를 이용한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앨라배마의 주방에서는 굴구이를 내놓곤 했다. 몬태나 사람들은 볶은 비버꼬리가 진미라고 생각했다. 음식의 식물학적 기원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계는 거의 상실되었다.

 

Slow Food 운동은 음식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지역의 통제권을 일정 정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지역에서 사는 사회적 만족감과 안정성을 일부 회복하려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들을 다시 주장하고 다시 회복하는 것을 돕는 방식으로서 커먼즈가 자주 거론된다. 이른바 Slow Money 운동도 이와 마찬가지의 취지에서 추동된다. 금융의 흐름이 장기적인 공동체의 욕구에 더 응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석유 생산 정점이나 지구온난화에서 나오는 재난을 예측하는 Transition Town 운동 또한 지역의 협력과 시민들의 혁신성을 움직여서 시장도 국가도 할 수 없는 조치를 취하게 만들려고 한다.

 

지방을 강화하는 것은 광범한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Wendell Berry : “자유의 거대한 적은 정치권력이 부와 결탁하는 것이다. 이 결탁이 공통의 부(commonwealth)를 파괴한다. 즉 각 지방의 자연적 부와 가구, 마을, 공동체로 구성된 지방경제를 파괴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공통의 부는 민주주의의 토대이자 실천적 수단이다.”

 

그러나 지방이 전지구적 시장이 야기한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줄 듯이 지방을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책임있는 하향식 구조의 필요가 남아있다. 어떤 집단행동 문제들은 적절한 고수준 정책들이나 기반 시설이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 기회 및 자원의 대략적인 균등을 보장하거나 부의 분배를 감독하기 위해서 중앙집중화된 기관들이 종종 필요하다. 국가 차원에서 하면 되고 모든 공동체에서 반복될 필요가 없는 기능들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일정한 중복과 비효율이 체계의 장기적 탄력에 필수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대규모 커먼즈 기반 시설의 유형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구축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한 기능은 보통 정부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제 커머너들 자신이 기반 시설과 대규모 거버넌스 프로토콜들을 설계·구축하는 법을 상상할 때가 되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 정부들은 자신들의 주도권을 지키려고 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커먼즈를 이해하거나 지원하는 성향이 아니다. 네트워크에 의해 추동되는 아래로부터의 결정들(decisions)이 출현하여 우세하게 되도록 한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통제제도들에게는 위협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커머너들의 에너지, 상상력 및 사회적 정당성이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게 되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생태적·사회적 위기들에서 현재 존재하는 바대로의 국가와 시장이 이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자.

 

발전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서의 커먼즈

커머닝을 통해 향토적인 것을 존중하는 능력이 암시하는 것은, ‘발전을 달성하는 방식으로서 경제성장을 통한 것보다 더 나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커먼즈는 인간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이 비전에서는 종래의 경제발전 전략의 실패가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이 장기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커먼즈 기반 체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현재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먼즈를 둘러싸고 많은 혁신과 지적 발효가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 농민들을 휘발성이 강한 전지구적 시장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돕는 데서 종자공유(seed-sharing)가 하는 역할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또 하나의 사례는 System for Rice Intensification이다. 이는 농민들의 국제적인 공동체로서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은 벼 종자의 수확에 대해 서로 조언을 나눈다. 이미 언급한 페루의 Potato Park도 주목할 만하다. 멕시코의 Oaxaca Commune도 이에 속하는데, 이곳은 인구 60만 명의 도시에서 토지 및 기타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일어나는 사파티스타들에 의한 자치 혁신도 있다.

 

에티오피아의 Guassa Community-Based Conservation Area, Menz 토착민들에 관리되는데, 400년 이상 동안이나 방목 커먼즈로서 역할을 해왔다. 멘즈 부족은 여전히 풀을 모아서 지붕을 이고 장작을 피워 요리를 한다. 그 지역은 형식적으로 보호를 받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멘즈 공동체는 그 생계자급의 필요를 야생의 삶과의 겸손한 공존과 성공적으로 결합시켜왔다. 그 야생동물 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육식동물인 에티오피아 늑대가 있다.

 

이런 사례들은 커먼즈가 이제는 실패한 신자유주의적 발전관에 대한 리얼리스틱한 대안들을 탐구하는 데 발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커먼즈 기반 모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에 삽입되는 단순한 정책 메커니즘들이 아니다. 이 모델들이 구현하는 삶에 대한 관점은 일반적으로 서양의 산업주의 및 소비주의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에서는 ‘buen vivir’(good living)가 그들의 발전관 및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부엔 비비르는 공동체의 자율성, 사회적 상호성, 자연 생태계의 존중, 우주적 도덕성(cosmic morality)을 중시한다.

시장체계 속에 사로잡힌 토착민들, 전통 문화들, 그리고 커머너들은 시장 자본주의의 합리적 도구주의 및 경제지향적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세계관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커먼즈는 단지 자원관리가 그 핵심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이며 내적 감수성이다.”

 

이러한 내적 확신이 궁극적으로 지구의 자원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고 지킴(stewardship)의 감각의 양성하게 한다. 사람들은 커먼즈에 참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신나고 문화적으로 건강한데 그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그것은 시장에 지속 가능한 한계를 부과하도록 사람들을 장려하는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커머닝은 세계은행이 팔아먹는, 성장과 소비에 기반을 둔 발전관에 믿을 만한 대안들을 제공한다. 주변화된 나라들에서의 불평등과 불안정을 줄이고 지역 생태계와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국가와 커먼즈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찾기

커먼즈 기반 발전 전략은 물론 국가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더 연구해야 할 복잡한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커먼즈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방관해주었거나 아니면 시장 행위자들(기업들, 투자자들, 산업체들)과 함께 종획에 참가했다. 기본적인 문제는, 국가가 공공자원의 사유화와 상품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시장력과 연합할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획 + 경제성장 = 권력과 조세수입>

이러한 논리를 깨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의 역할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커먼즈 기반의 활동을 승인하고 돕도록 말이다.

 

Burns Weston 교수와 내가 우리의 책 Green Governance에서 말했듯이, 국가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여 커먼즈를 지원할 거시적 원칙들과 정책들을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인정되어야 할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한다.

국가와 시장에 대한 실제적 대안으로서 커먼즈와 권리에 기반을 둔 생태 거버넌스

지구는 모두에게 속한다는 원칙

커먼즈 자원의 종획을 막을 국가의 의무

대규모 공유재를 보호할 방법으로서의 국가수탁 커먼즈

국가가 커먼즈를 승인하기

생태계의 장기적 지속능력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서, 사유재산에 법적 한계를 부과하기

생태적 커먼즈를 수립하고 유지할 인간 권리

 

국가, 시장, 커먼즈 사이의 관계를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재정렬하는,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삼두체제[커먼즈-국가-시장]’라는 생각은 필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아마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많은 나라들에서 집단적 이익이라는 생각은 정부와 크게 동일시되고 있어서 독립적이고, 비정부적인 부문인 커먼즈가 그 목적에 복무한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커먼즈는 그것이 어떻게든 고찰되는 한에서는 종종 시민혹은 공적인 것과 동일시되며 커머너들(commoners)의 뚜렷한 공동체들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커먼즈가 국가로부터 분리된, 고유한 도덕과 정치적 정체성을 가진 독립적인 부문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데에는 문화적 상상력이 좀 필요할 수 있다.

 

어떻게 중앙정부들 혹은 지역 정부들이 법의 형식으로 커먼즈를 인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 국가가 자신의 개입이 없어도 지역 커먼즈가 모든 측면에서 잘 하도록 보장할 수 있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이는 진중히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지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국가는 상당한 권한을 기업에게 주지 않았는가. 만일 국가가 기업을 공적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서 승인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마찬가지의 권한이 커먼즈에 부여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커먼즈들이 명백하게도 공적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

제대로 된 구조를 갖춘 커먼즈는 일반적으로 입법부나 국가 관료체제보다 더 대응력이 높다(more responsive). 국가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일반인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우며 돈과 관련된 특수한 이해세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경향이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주의 정체(正體)와 커먼즈 사이의 깊은 철학적 길항관계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헌법과 정부 권력의 제한을 통해 이론상으로는 법적으로 평등한 시민들의 개인적 권리에 기반을 두고 최대의 이익을 증진한다. 자유주의 정체는 개인을 넘어서 존재하는 집단적 권리는 일반적으로 등한히 한다. 물론 다양한 유엔의 협약들과 프로그램들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인권에 주의를 집중하고 이것이 실제적으로 집단적 이익에 대한 일종의 법적 보호물로서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진정한 집단적 권리들이 아니며 반드시 커먼즈를 보호하란 법도 없다. 전 세계의 토착민들은 다음을 계속해서 깨달아왔다. 집단적 이익을 보호한다고 되어 있는 법적 범주들은 자유주의의 세계관에서는 미미한 법적·철학적 지위만을 가진다는 것을.

그래서 커먼즈는 종래의 정책입안자들에게는 불가해한 경우가 많다. 전적으로 양립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국가법의 보호를 구한 소수의 커먼즈 기반 혁신들CC 라이선스, GPL, 공동체 토지신탁, 토착민 보호 법적 해킹에 호소해야 했다. 국가는 공적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서의 커먼즈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관여수준을 재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국가가 커먼즈를 감독하기 위해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친 관여는 스스로 관리하는 커머너들의 의지를 위축시킨다. 이것이 요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의 존재를 사용하여, 그 법·행정·재정적 지원을 물리는 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피해서는 안 된다. 영국 수상 David Cameron“Big Society” 정책 작전에 바로 이런 비판이 가해졌다. 이 정책은 공동체의 자기통제를 찬양하는 동시에 그것을 돕는 공적 재정지원을 삭감했다.

 

[볼리어] 생각에 커먼즈에 대한 국가 지원의 적적한 모델은 커먼즈 형성과 지킴에 봉사하는 국가 정책이어야 한다. 국가는 자기조직된 커먼즈가 어떤 기능들을 국가나 시장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더 정당하고 공정하며 더 많은 참여가 이루어진 형태로 수행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는 복잡한 문제이다. 악마는 세부에 있으며 세부는 커먼즈마다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커머너들이 거대한 중앙집중화된 관료체제들보다 더 신속하고 신뢰할 만하게 지식을 모으고 조직하고 실천에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이 지극히 명확하다. (위키의 사용, 재해구호를 위한 연대, 사회적 네트워크들을 통한 보고, 연구의 크라우드소싱 등 그 사례들이 매우 많다.)” 진짜 과제는 관료적 제도들과 디지털 커먼즈가 협동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찾는 것이다.

생태계 자원들도 종종 지역 커머너들에 의해 더 효과적이고 책임감 있게 관리된다.

 

모든 커먼즈가 다 공정하고 자애로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국가는 최소의 기본 규칙들과 수행 매개변수들을 설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커머너들의 분산된 창조성이 가장 적절한 지역적 해결책들을 발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모델은 잘 알려진 바대로 인터넷에서 작동해왔다. TCP/IP 프로토콜이 바로 그것이다. 인터넷을 기술적으로 구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통제하거나 이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소통이 어떻게 포맷되고 전송되고 돌려지고(routed) 수신되는지에 대한 최소의 공통적 표준인 TCP/IP를 수립했을 뿐이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기본적 매개변수들 내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혁신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이 자유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 WWW을 위한 기술적 프로토콜들이 출현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디지털 공간이 아닌 곳에서 자율적 커먼즈가 기본적 매개변수들을 몇 개 정해준다고 해서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예산과 자원이 필요하다. 국가가 이 과정을 법적·재정적으로 도울 필요가 있다. 아니면 적어도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재정을 조달하는 커먼즈가 스스로 수립되도록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정부들이 기업이 형성되고 번성하는 것을 돕기 위해 관료제, 법적 특권들, 국가보조금을 창출했음을 기억하자. 기업을 도와준 국가가 왜 커먼즈는 못 도와주는가?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면밀한 정치적 감독을 필요로 한다. 많은 정부들이 커먼즈를 도와주는 짐을 벗어던지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국가들은 중앙집중화된 관료제에 의한 통제라는 20세기적 사고방식에 묶여 있으며 그래서 자기조직된 커먼즈의 가치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크라우드소싱에 기반을 둔 인터넷 혁신이 폭발하자 국민국가들이 붙들고 씨름하게 된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어떻게 (집중되지 않고) 분산된 권위, 참여적 혁신 및 자기조직된 거버넌스가 효과적이고 신뢰할 만한 결과를 낳는지를 국민국가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극복해야 할 문제는 결국 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거버넌스의 바람직한 구조를 우리가 어떻게 파악하는가이다. 이탈리아의 커먼즈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우고 맛테이(Ugo Mattei)는 만일 우리가 커먼즈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주객의 대립(이것이 주체와 객체의 상품화를 낳았다)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적재 및 공공재와 달리 커먼즈는 상품이 아니며 소유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다. 커먼즈는 질적 관계를 표현한다. 우리가 공통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환원적인 발언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환경, 도시 혹은 농촌의 생태계의 일부인 한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커먼즈 자체인지를 보아야 한다. 여기서 주체는 객체의 일부이다. 이런 이유로 커먼즈들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개인들, 공동체들, 그리고 생태계 자체를 연결시킨다.

 

맛테이의 분석은 거버넌스의 미래와 현대 자유주의적 국가에 대해 심오한 함축을 가진다. 국가의 권력이 점점 더 정당하지 못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고전적인 현대 정치 제도들의 권위와 효율성이 감소하고 있다고 네덜란드 학자 Maarten Hajer은 말한다. 정치가 관료제의 실행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으며 중립적인 과학적 전문지식과 중앙집중화된 체계들이 복잡성을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믿을 만한 게 아니다.

 

Hajer는 우리가 현재 제도적 진공상태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정치가 수행되고 정책들이 합의될 명확한 규칙도 규범도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책입안과 정치가 수행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칙들과 규범들이 없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의 주창자들은 거버넌스를 위한 규칙들과 규범들이 전적으로 명확하며 일반적으로 효율적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만트라(mantra)는 일반적으로 인사를 더 잘 하는데, 혹은 반사회적 행동을 막고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줄 개혁을 실행할 신뢰할 만한 과학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세계 전역에서의 정치적 소외 및 반란의 번성은 신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맹목적 신념을 문제 삼는다. 더 정확하게는 신자유주의 제도들의 심층적인 구조적 결함들을 문제 삼는다. “전 세계의 많은 시민들은 종래의 정부들이 해결책을 제공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정부가 민주적 숙의의 공정한 주재자로서 그리고 정치적 이익의 중재자로서 행동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많은 각성한 시민들이 그들의 정치적 상상력과 에너지를 자신들 고유의 자립적(DIY) 대안들 쪽으로 돌리고 있으며 국가와의 상호작용은 필요한 경우에 국한하고 있다.”

 

인터넷의 여파로 시민사회가 매우 튼실해지고 초국적이 되어서 정부들이 이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종류의 영토적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 지금 커머너들의 초국적 네트워크들이, 그리고 정보와 소통의 거대한 흐름들이 너무나도 많이 정부의 통제 너머에 존재한다. 혁신의 엄청난 원천들이 아래로부터, 열려진 네트워크들에서 출현하고 있으며, 반면에 국가는 이를 따라잡기 위해서 온힘을 다해 기를 쓰고 있다. 실제로 현재 출현 중인 커먼즈는 당장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지구적 금융자본과 시장 세력은 여전히 지극히 강하며 심지어 무적으로 보이는 세력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국가들을 (더 일반적으로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괴롭히는, 정당성·효율성·신뢰성의 만연된 부식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다. 어떤 지점에서든, 결산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시민/국가라는 낡은 짝이 그대로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는가? 국가가 우리의 수많은 사회적·생태적 과제들을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는 기후변화 문제를) 스스로를 재편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가?

 

이 분석이 시사하듯이,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국가 주권의 본성을 반드시 변형시킬 새로운 형태의 거버넌스를 고안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규칙들과 전제들이 제한적으로만 적절성을 가지는, 법제화되지 않은 영토이다. 정당하고 효율적인 것으로 경험에 의해 검증된 방식으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거버넌스, 자원관리 및 의미창출의 극히 다능다재한 체계인 커먼즈가 새로운 질서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내[볼리어]가 보기에 명확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