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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로렌스의 세잔론에 대하여


로렌스의 세잔론에 대하여

(로렌스의 "Introduction to these Paintings"에서)

 

로렌스는

① 재현을 말한다. 그러나 이 재현은

② 삶에 충실한(true-to-life) 것이며

③ 상투형들(cliches)과의 싸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④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로렌스는 시각적 비전은 곧 상투형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정남영] 시각은 잠재성을 가장 짙게 가린다. ) 더군다나 이는

⑤ 인간의 ‘사과되기’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⑥ 이로써 로렌스가 말하는 것이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님은 명백하다. 사실이란 무엇인가? 상투형들이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상투형들의 새로운 모음, 습관화된 기억들의 새로운 배열”이 아닌가? (
“상투형은 정서적이고 직관적인 뿌리를 잃어서 습관이 된, 닳아빠진 기억이다. 한편, '참신함'은 상투형들의 새로운 모음, 습관화된 기억들의 새로운 배열일 뿐이다.) 로렌스가 말하는 것은 이전에 있었던 것의 현이 아니라 이전에는 없었던 것의 창조로서의 재이다. 세잔의 모델(그의 아내)의 ‘사과스러움’(appleyness)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그녀의 몸도, 심지어는 그녀의 성(sex)도 이미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알려진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오늘날 기성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고 이미 알려진 상투형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바로 사과스런 부분(appley part)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과스러움을 파악ㆍ표현하는 데 동원되는 직관적 인식(상상력, 접촉의 앎)은 앞면만이 아니라 모든 면을 본다. 진정한 상상력은 항상 반대편으로, 제시된 모습의 뒷면으로 돌아간다. 

⑦ 인물화에서 “그가 사과스러움을 그릴 때 그는 또한 의도적으로 이른바 인간스러움, 인격, ‘닮음,’ 육체적 상투형들을 제거하며 그린다.” 이렇듯 그가 말하는 재현(representation)은 “알려진, 이미 만들어진 상투형 대상”을 재현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⑧ 진정한 사과스러움은 흉내 낼 수 없고, 모두가 각자 자기로부터 새롭게 그리고 다르게 만들어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반복이지만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이다. 그리고 영원한 회귀로서의 시간이다. (특이성)

  그를 흉내내는 사람들은 양철처럼 접힌 식탁보 같은 부속물들―그의 그림에서 비현실적인 부분들―을 흉내낸다. 그러나 꽃병들과 사과들을 흉내내지는 못한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과스러움이다. 사과스러움을 흉내낼 수는 없다. 각자 자기로부터 새로이 그리고 다르게 창조해야 한다. 새로이 그리고 다르게. 세잔“처럼” 보이는 순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⑨ 상투형은 ‘정태적인 휴지’(static rest)이다. 이에 반해 사과스러움은 ‘동적인 휴지’(mobile rest)이다.

⑩ 사과스러움이란 모든 인간에게 (그리고 아마도 모든 사물들에) 있는 잠재적 활력에 다름 아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상투형을 사랑한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그 자신이 상투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심지어는 나체의 여성에게도, 세잔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사과스러움이 있을 것이다.”

⑪ 빈 화폭 위에 가해진 몇 번의 붓질로 구성된, 세잔의 후기의 수채 풍경화는 전적으로 풍경에 대한 풍자이다. ‘많은 것을 상상에 맡긴다!’라는 불멸의 유행어는 상투형을 끌어내는 단서를 주고 그리하여 상투형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이란 수천 개의 정말로 낡고 가치없는 스케치들, 이미지들 등등, 즉 상투형들을 저장하고 있는 뒤범벅 기억일 뿐이다.

⑫ 상투형들은 우리와 삶 사이에 완벽한 차단막처럼 끼어든다. 


결국 세잔의 창작활동은 둘로 구성된다.

① 상투형들과의 싸움

② 새로움(사과스러움)의 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