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지난 글 「'도시를 구축하라’―예술, 문화, 커머닝의 중대한 역할」(http://minamjah.tistory.com/111)에서 소개한 글모음집 『도시를 구축하라―커먼즈와 문화를 보는 관점들』(Build the City: Perspectives on Commons and Culture)에서 이자벨 프레모(Isabelle Fremeaux)와 존 조단(John Jordan)의 롭 홉킨스(Rob Hopkins)와의 대담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대담은 원래 https://www.transitionnetwork.org/blogs/rob-hopkins/2015-04/isabelle-fr-meaux-john-jordan-and-rise-insurrectionary-imagination에 올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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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적 상상력의 부상
롭 홉킨스는 활동가이자 작가이며 트랜지션 타운즈 네트워크의 창립자이다. 이자벨 프레모와 존 조단은 반란적 상상력 실험실의 공동창립자이다. 이 실험실은 이자벨에 따르면 “현실적 혹은 잠재적 공간들을 열고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한데 모아 작업하여 더 창조적인 형태의 저항과 시민불복종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
이자벨 프레모
우리가 하는 일은 여러 차원으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많은 실험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실험기획들 혹은 실험꼭지들이라고 즐겨 부릅니다. 집단적으로 실험한다는 생각, 때로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의 능력을 수용함으로써 더 창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나는 학자(an academic)로, 훈련가로 훈련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가진 훈련의 차원으로 더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가들 및 활동가들과 하루에서 2주일까지 많은 워크숍들과 훈련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예술과 행동주의 그리고 종종은 퍼머컬처(permaculture) 원칙 사이의 상승효과를 보고자하며 이 세 도메인이 융합할 때 우리가 어떻게 더 창조적이고 더 효과적이며 더 생산적이고 더 탄력 있는 기획들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기획들을 저항과 시민불복종의 형식들을 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존 조단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예술’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예술이라는 생각을 매우 비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예술은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예술을 말합니다. 우리는 때로 영화도 만들고 책도 냅니다만, 이를 우리는 ‘재현으로의 휴가’(holidays in representation)라고 부릅니다. 우리 작업의 대부분은 영화나 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재현―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기후 변화에 대해서 공연을 하고 생물다양성의 상실에 대해 조각상을 설치하거나 기후 정의에 관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진정으로 비판하는 실험들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명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생각에 매우 중요한 것은 실제로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며, 세상에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세상을 직접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치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세계와 함께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술가들은 풍부한 창조성, 고정된 틀 외부에서 사유를 하는 많은 능력, 사물을 시학으로 변형시키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종 에고가 강하고 사회참여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
반면에 활동가들은―물론 이는 일반화입니다―사회비판을 많이 하고 집단적으로 작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상상력에서 실패하는 일이 잦습니다. 똑같은 행사를 치르고, 똑같은 종류의 시위를 하며, 똑같은 사회변형 도구를 사용하는 일이 흔합니다. 이 두 세계를 한데 모음으로써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실제로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항상 사회운동 내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캠프>(the Climate Camp) 내에서 조직가로서 5년을 보냈으며 그 캠프를 조직하는 동시에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모으는 워크숍들과 행동들을 조직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반란 뗏목경주’(the Great Rebel Raft Regatta)라고 불린 것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우리는 <기후캠프>가 켄트의 킹스노스(Kingsnorth)에서 열리기 일주일 전에 한 숲에 보트들을 잔뜩 숨겨놓았습니다.
<기후캠프>는 기후재난에 대한 교육과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 구성된, 자주관리되는 캠프였습니다. 그런데 캠프의 마지막에는 늘 행동을 했습니다. 킹스노스에서의 이 캠프는 실제로 이미 존재하는 발전소에 추가될 새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중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1. 우리가 한 프로젝트인 ‘대반란 뗏목경주’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친연그룹들로 모았습니다. 숲에 배를 숨겨놓으면서 럼 주 한 병도 숨겨놓았으며, 보물지도도 함께 놓았습니다.
사람들을 친연그룹별로 보물지도가 있는 숨겨놓은 보트를 찾으러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보트를 찾아내고 숲에서 하룻밤을 자고는 오전 7시에 숲을 빠져나와 보트를 강에 띄우고 발전소를 찾아 봉쇄하러 갑니다. 우리는 모두 약 150명인데 보트 하나가 어찌어찌해서 발전소의 3분의 1을 봉쇄하고 약 3분의 1을 폐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 우리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실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면서 재미있고 모험적인 행동 형태들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물지도와 럼주 병, 그리고 해적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의 미학 전체가 행동주의에 유희의 요소를 도입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롭 홉킨스
당신들은 ‘반란적 상상력’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조금 더 말해주실 수 있나요?
프레모
상상력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반란의 근본적 성분입니다. 우리는 예술에 종종 결여된 공격과 저항의 요소를 되찾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실험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력이라는 단어에 대한 매우 부드러운 이해와 그 단어의 부드러운 함축과 무관하게 상상력을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됩니다. 상상력은 매우 예쁘고 창조적이고 아이 같은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매우 잦잖아요. 우리의 요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인 저항의 실존을 실질적으로 되찾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반란적’이라는 단어를 우리 단체의 이름 안에 넣은 것입니다.
조단
우리의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반란적 상상력 실험실>(ii랩)은 예술과 삶, 창조성과 저항, 제안과 반대를 융합합니다. 우리는 광대반란군(a rebel clown army)을 모집하며 영국을 돌아다니고 탈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강좌들을 운영하며 은행가들에게 눈뭉치를 던지고 수백 개의 버려진 자전거들을 불복종의 기계들로 바꾸며 석탄을 사용하는 발전소를 폐쇄시키기 위해서 반란 뗏목경주를 주최한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우리는 반란을 예술로 보며, 예술을 다가오는 반란을 위한 준비의 수단으로 봅니다. <ii랩>은 지금 브리트니(Brittany)에 있는 퍼머컬처 농장에 국제적인 유토피아적 예술/삶 학교를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의 분리를 믿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두 용어를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 예술을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행동으로 보는 것은 서양 전통에서 매우 최근의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문화들에는 예술과 일상생활의 분리가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행동주의, 즉 활동가들이 사회 변화를 독점한다는 생각은 예술이 창조를 독점한다는 생각과 똑같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세상을 언제나 나름의 방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두 생각을 모두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반란을 창조하거나 아니면 특정 종류의 혁명적 변화를 창조하려면 (이는 우리 생각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와 기후재난에 대안을 제시하고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변형의 DNA가 두 가닥인 것을 압니다. <트랜지션 타운즈>처럼 대안들의 창조라는 가닥이 있고, 저항, 즉 화석연료 산업과 거기에 돈을 대는 은행들 등에의 저항이라는 가닥이 있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이 누구인지를 잊을 것이고 우리의 기획들이 그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인 녹색 자본주의를 위한 실험들이 되는 데 그치는 위험이 생길 것입니다. 한편 대안들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저항의 문화만이, 그리고 항상 ‘아니오’라고 말하는 문화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런 문화는 정신적 건강과 개인적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타서 없어지듯이 소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두 운동들의 분리가 확연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1970년대가 고전적 사례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획들에서 우리는 대안적인 삶형태의 모델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비행기를 타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인생을 보내는 국제적 예술계의 이력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생태적으로 삽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유기농 농장의 이동식 원형 텐트에서 삽니다. 그 농장에서 우리는 땅을 생산에 투입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통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항 작업은 항상 위계 없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획들의 초기에 합의를 가르치며 일이 성사되게 만들기 위해서 퍼머컬처 원칙들을 사용합니다.
한 사례를 예로 들죠. 이 사례는 우리의 가장 최근의 기획이 이산화탄소 방출과 기후변화에의 적응 등에 개한 보편적 동의를 이루기 위해서 2015년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COP 21’ 컨퍼런스(유엔 기후 정상회담)에 맞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적절합니다. 2009년에 우리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COP 15’ 무렵 두 미술관으로부터 프로젝트들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브리스틀의 <아놀피니 화랑>(the Arnolfini Gallery)과 코펜하겐의 <현대예술센터>(the Centre for Contemporary Art)입니다.
우리는 이미 코펜하겐에서 얼마 동안을 보낸 후였습니다. 우리는 대안들에 관해 쓴『유토피아를 통과하는 경로들』(Paths Through Utopias)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불행하게도 프랑스어, 한국어, 독일어로 말고는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코펜하겐의 자주관리 공동체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에서 얼마 동안을 보냈습니다. 그때 우리는 코펜하겐 전역에 버려진 수천 개의 자전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저걸 재료로 쓰자고요. ‘쓰레기를 만들지 말라’라는 퍼머컬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전거들을 이용하여 코펜하겐의 쓰레기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들을 시민 불복종의 도구들로 바꿔놓자고요,
전통적으로 간디, 소로우(Thoreau)의 전통에서 시민 불복종은 몸을 통한 것이며, 우리는 몸과 자전거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미술관에 제안했고, 둘 다 동의 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기후캠프>와 함께 작업을 했으며, <아놀피니 화랑>에서 모형을 만들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었습니다. 이 화랑에서 우리는 50명의 사람들을 자유롭게 개방된 워크숍으로 모아서 퍼머컬처 원칙들의 기초 등을 가르치곤 했는데, 모형을 거기서 디자인한 다음에 코펜하겐으로 가져와 크기를 키우자는 것이었죠.
두 미술관 모두가 “미술관에서 용접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을 때가 재미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 바깥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그 안에 모형을 넣을 수 있으며 그곳이 어쨌든 더 공적일 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바로 해결책인 것이었죠, 그런 후 코펜하겐의 큐레이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이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컨테이너가 있는데, 다만 작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덴마크의 경찰하고 이야기를 막 했는데, 자전거의 정의에 관해서 일정한 규칙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전거는 바퀴를 세 개 이상 가질 수 없다, 3미터를 넘으면 안 된다 등등. 만일 이 규칙에서 벗어나면 경찰에 알려야 하고, 디자인을 보여주어야 하며, 경찰이 다시 와서 도로에 나갈 권리가 있다고 말할 때까지 3주일이 걸릴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습니다. “그거 매우 흥미롭군요. 그런데 우리는 시민 불복종을 실행합니다. 우리는 자전거들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별로 개의치 않아요.” 여기서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큐레이터는 마치 “그래서 당신들은 정말로 그 일을 하려는 거군요······”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우리는 예술 세계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술 세계의 많은 부분이 정치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매우 급진적인 텍스트들과 급진적인 제안들을 합니다. 아마 그 큐레이터는 우리가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서 미술관에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실제로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다음에 미술관은 몸을 뺐지만, 우리는 코펜하겐에서 예전 스퀏 점유지였던 곳을 찾았습니다. 캔디 공장(the Candy Factory)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예술 및 문화 센터로서 우리는 거기서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습니다. 마지막에는 약 200명의 사람들이 동참하여 유엔 기후회담을 기업이 좌우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우리가 이른바 지금 유행을 크게 타고 있는 정치적 예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정치적’, ‘급진적’, ‘사회참여적인’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2년 주기의 행사들, 미술관 전시회들, 극장 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생각에는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정치를 재현한 그림들”(pictures of politics)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홉킨스
당신들은 “좌파는 욕망과 신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자본주의와 우파는 그것을 매우 잘 한다”라고 썼습니다. 이 말이 함축하는 것을, ‘트랜지션’(이행)에 대해 함축하는 바를 포함하여, 이야기해 주실 수 있죠?
프레모
좌파에는 어떤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크게 일반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태를 모르는 것이 문제이고 따라서 더 많은 사실들, 숫자들, 정보, 보고서들을 산출하여 사람들이 무엇이 진행되는지를 알게 하면 된다고 느끼는 경향입니다. 수치를 보여줄 수 있으면, 멸종되고 있는 몇몇 종에 대한, 혹은 영향을 받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 대한 더 좋은 그림을 보여줄 수 있으면, 실업률 등의 수치를 보여줄 수 있으면, 그러면 사람들이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 생각에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가 매우 자주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삶의 구조였던 사물들과 가치들을 고수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욕망과 있을 수 있는 일에 대한 환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미국 작가인 스티븐 던컨(Stephen Duncan)의 멋진 말이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꿈”에 관해 아주 아름답게 한 말이지요.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꿈은 좌뇌에 있다기보다 정서에, 신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양자를 결합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내다버리는 식으로 “모든 보고서를 멈추어라, 모든 연구를 멈추어라, 모든 과학을 멈추어라”라고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숫자는 뒷받침으로서, 목발로서 사용되어야 하며, 우리들 대부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더 정의롭고 건강하고 편하며 즐거운 삶을 정서와 신체를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합리적이기만 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풀기에 매우 복잡한 매듭들 가운데 하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더 많으면 반드시 더 좋은 삶이 온다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큰 거짓말이 바로 이 매듭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이는 풀기가 어려운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가치를 말하고 그것에 호소해서 그 매듭을 풀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트랜지션 타운즈’ 같은 프로젝트에 새로운 가르침이 될 수 있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 정서들은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 정서들이지만, 또한 우리가 알기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의 잘못된 점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균형을 찾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먹이면서도 그 다른 사람을 압도하지는 않는 것이 관건입니다. 때로 불의와 파괴가 낳는 분노와 좌절을 부정하고 가리고 싶은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서들은 인정되어야 하며 저항의 연료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한편 있을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정서들은 대안을 향해 움직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두 정서들의 결합이 바로 사회운동들을 매혹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매우 종종 운동들은 이 정서들 가운데 하나에 호소할 때에만 파괴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말한 ‘네’와 ‘아니오’의 DNA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만, 내 생각에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호소하는 종류의 정서와 관련하여 매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홉킨스
퍼머컬처가 당신들의 작업의 큰 부분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 이야기해주실 수 없나요? 왜 퍼머컬처는 당신들이 하는 일에 왜 중요한가요?
프레모
퍼머컬처는 매우 고무적이고 안정적인 틀을, 매우 안정된 가치틀을 제공해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생각한 것은, 퍼머컬처의 세 주된 기둥이 사정이 실제로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만드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 원칙들은 그 시스템을 향하여 작업해나아가는 정말로 좋은 로드맵이며 생산적이고 탄력적이며 자연을 존중하는 디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을 선생으로 삼는다는 생각, 그럴수록 자연을 외부에 있는 사물로 덜 보게 된다는 생각에 매우 감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퍼머컬처를, 우리가 줄곧 사물로 보도록 배웠던 자연에 우리 자신을 통합하는 도구로 점점 더 보게 됩니다······ 우리가 환경에 대해서 매우 자주 말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명백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의 일부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퍼머컬처는 우리의 유일하게 실질적으로 일관적인 존재인 자연에 우리 자신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원칙들을 우리의 실험들의 틀로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퍼머컬처의 정신이 우리의 영감(靈感)입니다.
조단
우리에게는 ‘숲처럼 생각하라’라고 불리는 10일 훈련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네다섯 번 했습니다. 이는 매우 영감에 찬 훈련입니다. 이는 예술, 행동주의, 퍼머컬처의 훈련입니다. 예술이 행동주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행동주의가 예술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예술이 퍼머컬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퍼머컬처가 예술과 행동주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등등을 보는 훈련, 세 세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시스템을 보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실제로 아나코-페미니스트 마녀인 스타호크(Starhawk)가 행한 훈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80년대에 평화운동과 대안지구화 운동에 깊게 관여했으며 우리 모두가 거친 ‘땅 활동가 훈련 코스’(Earth Activist Training Course)라 불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이 일이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퍼머컬처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그 코스를 우리의 훈련코스의 모델로 삼았다고 할 수 있지만, 마법의 요소는 예술로 대체했습니다. 스타호크의 것이 땅에 기반을 둔 정신성, 행동주의, 그리고 퍼머컬처였다면, 우리 것은 예술, 행동주의, 그리고 퍼머컬처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마법입니다. 마법의 한 형태입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믿을 때 그 믿는 것이 실현된다는 것, 그것이 그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술은 우리가 이 순간 필요로 하는 마법을 엮어내는 일을 매우 잘 합니다. ♣
광대반란군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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