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마씨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책 Omnia Sunt Communia : On the Commons and the Transformation to Postcapitalism의 서설(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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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 모든 것이 공통적이다(Omnia Sunt Communia)
우리 시대
우리 시대는 파괴적인 위기들이 결합하여 기존의 많은 슬픔에 새로운 슬픔을 더하는 시대이다. 개인들로서 우리는 엄청난 힘들이 사물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안다. 다른 한편, 그 힘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우리의 불안정한 상태에 정비례하여 두려움과 걱정이 형성되며 이는 종종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로 투사된다. 이런 상황에서 따는 자가 있고 잃는 자가 있다.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도 소수는 이윤을 얻어내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재)생산하는 방식에 발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고통을 받을 것이다.
침묵과 환상이 짝으로 진보라 불린다. 저들은 놀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언제고 엔지니어들을 고용하여 거대한 진공청소기를 만들어서 잉여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옛 유전에 가두고 큰 벽을 지어서 부유한 도시들을 방어하면 된다고 한다. 물론 저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다. 후쿠시마의 핵발전소가 처음에는 안전하다고 공언되었듯이. 어떤 과학자들은 나쁜 소식들을 전해서 소셜 네트워크들에 증폭시키고, 또 다른 과학자들은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시기로 진입했다고 하면서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인간을 비난한다. 사실 우리 시기는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려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계(생물다양성에서 어족자원량까지, 숲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후 및 수자원까지)를 심히 파괴하는 것은 자본이고 많은 인간들은 투쟁과 대안적 실천을 통해서 지구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옹호자들은 바이오테크놀로지 연구개발에 적절한 규모의 투자를 하면 지구상의 생명이 공학적으로 재생될 수 있다는 우화를 말한다. 자본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환경 위기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일정한 수익을 올리며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한 지속 가능성 접근법’(weak sustainability approach)이 만든 신화에서는 인간이 만든 자본이 자연 자본을 수익을 남기면서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 슘페터가 이미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라고 정의한 바 있으며, 이제 자본은 새 생명을, 축적의 욕구와 더 양립 가능한 인공적 생명을 실험실에서 창조할 계획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위기 요소는 2007-8년의 위기와 그 뒤를 이은 영속적인 긴축이 미친 영향이다. 복지, 임금이 대폭 삭감되고 불평등이 크게 심화되었으며 중산층이 내파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토지강탈과 같은 새로운 종획의 파도가 일었으며 신자유주의 정부들이 전지구적 금융체계를 붕괴로부터 막아주었다. 은행들은 이런 혜택에 대해 보답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정부들이 은행에 진 빚을 상환할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긴축이 영속적인 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책을, 전쟁이 강타한 지역들로부터의 대대적인 엑서더스가 일어나는 와중에 썼다. 시리아의 갈등, 가자에서의 반복된 민간인 폭격, 종종 관으로 바뀌고 마는 지중해의 난민보트들. 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주자들이 안전과 희망을 찾아 이 보트를 타고 여행을 시도하지만, 많은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유치장, 외국인혐오, 가장 낮은 임금이다. 이주자들과 난민들의 흐름을 규제하기 위해서, 혹은 아예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유럽에 벽들이 세워졌다. 이들은 과거는 파괴되었고 미래는 없으며 현재는 불안전한 실존의 변방에 방치되어 있다. 사회적 재생산의 어느 차원을 보든―삶의 수단(일용노동계약, 낮은 임금, 온갖 형태의 부채), 식품, 주거조건 및 주거권, 점증하는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불안정성이 만연해있다. 신자유주의적 계획은 우리처럼 사회적 관심사들과 사회적 재생산을 집단적 관여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들을 위한 계획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플랜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경쟁을 유지하는 데 바쳐야 한다. 자원은 점점 더 제한되고 목적은 부패한 상황에서 말이다. 신자유주의적 계획은 삶의 모든 측면의 불안정의 증가에 바쳐진다. 자본에게 이윤을 남겨주면서.
이 위기 현상들의 심화는 지배세력과 그 제도들의 적어도 일부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된다. 현재의 불안정한 조건과 다면적인 위기들로부터 빠져나갈 출구를 찾을 가능성의 부재는 그들에게 ‘리스크 평가’의 문제가 된다. 이는 조건들이 이윤체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해서 군사나 금융 기관들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회계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미국 국방부는 기후변화가 가져올 리스크를 ‘긴급하고 점증하는’ 것으로 본다. 미 국방부는 기후 관련 안보 리스크에 이주와 전쟁 같은 사회적 귀결도 포함됨을 인식하고 있다.
기후변화를 ‘현존하는 안보 위협’이자 ‘엄밀하게 보아서 장기적이지 않은 안보 리스크’로 인식하는 미국의 군사기관들은 금융 및 증권 붕괴도 원인과 관계없이 고려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기관들은 전지구적 봉기와 급진화의 위협에도 맞추어진 새로운 감시 및 안보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2007년과 2013년 사이에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이메일, 채팅, 비디오, 사진, 저장된 데이터, VoIP 통신, 파일전송, 화상회의, 로그인기록,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들에의 접근권을 얻었다. NSA는 또한 표적으로 설정된 통신에 서비스 제공자에게 요청하지 않고 직접 접근할 수 있다. 이럴게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과거의 그리고 새로 출현하는 사회운동들과 급진화의 파도들이 ‘미네르바 이니셔티브’―국방부의 한 부서가 후원하는 사회과학 연구프로그램으로서 2008년에 시작되었으며 ‘미국 국가안보정책에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지역들에 초점을 둔’다―와 같은 수백만 달러의 프로젝트들에서 연구되고 있다. 여기에 남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유라시아에서의 사회적 동원에 관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국방부와 코넬 대학이 행하는 한 프로젝트는 예를 들어 2011년 이집트 혁명, 2011년 러시아 듀마 선거, 2012년 나이제리아 연료보조금 위기, 2013년 터키의 가지파크(Gazi Park) 시위의 ‘디지털 흔적들’을 연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의 ‘임계 질량(임계점)을 규정하기를 희망한다. 국방부와 여러 대학들이 행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누가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으며 왜 그런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또 다른 한 프로젝트는 급진적 대의들에 공감하는 NGO 회원들의 개인이력을 연구하여 ‘급진화의 사회적 생태학’에 초점을 맞추고 범죄학의 지식과 방법을 이용하여 급진화를 촉진하는 장소들과 과정들을 연구한다.
위기들이 특정 종류의 동원 및 사회적 갈등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conomist Intelligence Unit)에 따르면 2014년에 150개국 가운데 65개국이 사회 불안의 리스크가 높음 혹은 매우 높음이었다. 이는 5년 전의 보고와 비교하면 높음의 범주에 19개국이 증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된 사회운동의 효과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미디어의 발언의 대부분의 벤처 자본가 심층에 깔린 공포였다. 벤처 자본가 해노어(Nick Hanauer)는 자신의 1% 계급에게 ‘쇠스랑들이 오고 있다’고, ‘혁명이란 조금씩 오다가 그 다음에는 갑자기 온다’고 경고한다. 런던의 더 텔레그래프(The Telegraph)는 한 ‘신용평가사가 미래의 세금인상과 지출 삭감이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불안을 점화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고 보도한다. 사회불안은 기성 지배세력에게는 정말로 종말을 맞을 가능성과 같다. 그래서 그것을 억압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시건의 경찰력이 미국에서 첫째로 군대처럼 장비를 갖춘 최초의 사레인 한편, 2014년 8월 미주리의 퍼거슨(Ferguson)에서는 중무장한 경찰과 무장트럭이 마이클 브라운의 총격 사건으로 시위대와 충돌했다.
이렇게 의심을 받고 있는 민중의 에너지가 지배세력에 새로운 공간을 열고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사회적 규범 그리고 새로운 가치의 체제를 수립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세력이 새로운 이 에너지를 제한하고 흡수할 충분한 수단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지배세력 혹은 오늘날 부르는 식으로 하자면 전지구의 1%―구학파의 용어인 ‘부르주아지’를 회계기호로 대체한 것이다―는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며 그 힘은 위기의 시기에 더욱 커지고 있다. 옥스팜(2016)에 따르면 세계에서 최고 부자 62명이 세계 인구의 아래쪽 절반(35억 명)이 소유한 부의 총량과 동일한 양의 부를 소유하고 있다. 이는 388명의 최고 부자가 필요했던 2010년 이래 전지구의 불평등이 놀라운 속도로 증가했음을 말해준다. 부의 이러한 집중은 신자유주의 국가의 ‘면허받은 절도’―종획, 강탈, 약탈, 금융을 통한 추출, 조세회피―를 통해 일어났다. 1%의 손에 집중된 부의 규모는 이들이 99%의 분열을 강화하고 새로운 분열을 창출하면서 자신들을 오랫동안 보호할 금융자원을 가동하는 엄청난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진정한 문제는 축적과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이 부패한 체제, 생태문제, 생물다양성,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자원의 양과 질, 노동의 조건에 관심이 거의 없는 이 체제에 우리가 물질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 긴 신자유주의 시기의 현재적 국면에 상응하는 우리 시대다. 이것이 재분배와 공생공락(共生共樂)을 ‘불로소득’으로 범죄시함으로써 가장 파괴적인 자본 세력을 발전시키려는 자본주의의 체제의 플랜A이다. 이보다 훨씬 더 나쁠 수도 있었다. 투쟁이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았더라면, 플랜A는 계속 전진하여 민중의 남은 권리를 폐지하고, 자본의 경비를 삭감하기 위해 환경 관련 규제들을 더 말소하며, 점점 더 디스토피아적이 되는 억압수단을 개발하기 위해 감시를 강화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래쪽에 속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투쟁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라. 그들은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의 계획에 마모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점증하는 사회운동이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니면 더욱 밀어붙여서 탈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탱크들, 최루가스, 경찰봉에 의해 진압당할 가능성이 더 큰 것인가? 물론 자본주의 체제의 플랜B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지배 세력의 일부가 존재한다. 이들은 기후변화를 다루는 데 더 강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과 함께 재분배의 전도, 빈부격차 해소, 은행 및 금융부문 규제 회복 및 강화를 제안한다. 기본소득 같은 효과적인 재분배 정책이 대안이 될 것이지만, 자본이 발생시킨 문제를 자본가적 관점에서 다루기에는 이것으로써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플랜B는 경제적 위기, (세계 대전과 같은) 파괴와 대학살이 선행하여 자본과 임금을 대대적으로 평가절하하지 않고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재투자를 하기에 충분히 높은 이윤율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지금 역사상 가장 낮다.)
플랜B에 대해 기억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 지난 번(1945-1970년대)에는 사회적 임금의 증가가 생산성의 증가를 동반했다. 이는 생산에 대한 통제를 노동자들이 관리자들에게 맡김으로써 일어났다. 이른바 “생산성 딜”(productivity deals)이다. 이것이 성장하는 경제 내에서 동일한 몫의 임금/이윤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나누어 갖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예전의 뉴딜은 또한 특정의 젠더와 인종을 배제하여 노동에 임금과 비임금(예를 들어 여성의 가사노동)의 분할을 산출함으로서만 일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플랜B도 배제하고 위계를 재생산하고, 훈육과 통제를 촉진하고 보안을 심화할 필요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플랜B가 자본을 위해 작동하기 위해서는 딜이 사회적 임금만이 아니라 수익성에도 긍정적 효과를 미쳐야 한다. 사회적 임금율의 성장(시간 당 임금)과 생산성의 성장(시간 당 산출) 사이에 상응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시간 당 이윤이 같은 수준으로 중가하고 전반적인 임금/이윤 비율이 다소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보장될 것이다.
오늘날 딜은 이런 것일 수 있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지고 일부 핵심 서비스와 권리(건강, 교육 등)가 부여된다. 그 대신에 노동의 완전한 쌍방향 유연성이 들어선다. 만일 자본과의 이런 딜이 강력한 경제성장(자본의 궁극적 욕망)을 허용할지라도, 엄청난 환경측면의 귀결들―생물다양성에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이르는―을 다루는 일이 남아있다. 자본축적이 최우선사항인 체제를 탄소를 비롯한 자원추출을 대폭 줄이고 생물다양성을 증가시키면서 유지한다는 것은 원을 네모나게 만드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전지구적인 중산층의 증가라는 경제인(homo oeconomicus)의 꿈은 우리에게는 집단적 악몽이다.
자본과 국가가 우리의 시간과 공통의 부를 그토록 많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의 맥락 내에서 대안적 체계 구축의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플랜C
자본주의적 생산과 권위주의적이며 부패한 국가시스템으로부터 체제변화(system change)를 통해 퇴장하기 위한 집단적 경로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나(마씨모 데 안젤리스)는 나의 책 The Beginning of History(2007)에서부터 커먼즈―자본의 가치실천(value practices)에 대한 대안이며 커먼즈 네트워크들에 의해 서로 연결된 가치실천―의 관점에서 대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커먼즈는 다수의 사람들(공동체)이 자원을 공유하고 다스리는 것, 그들의 관계 및 커머닝을 통한 (재)생산 과정을 의미한다. 비록 커먼즈는 인류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제도로서, 얼핏 보기에는 사회운동과는 구분되지만, 지난 몇 년 동안에 우리는 사회운동이 커먼즈와 하나로 이어지는 몇몇 경우들을 목격했다. 이는 거대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이다. 우리는 몇몇 사회운동들이 커먼즈의 방어(예를 들어 2013년 5월 이스탄불의 게지 파크Gezi Park 시위), 그리스 위기와 대면할 새로운 커먼즈의 창출(위기는 2010년에 시작되었으며 연대solidarity는 그리스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커먼즈를 투쟁의 조직모델로 사용하기(2011년 5월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2011년 9월에 시작된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와 직접 연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몇 개의 사례들만 예로 든 것이다. 정치적 원리로서의 커먼즈는 바야흐로 확대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물 사유화에 맞선 투쟁에서 도시행정의 원칙들(바르셀로나, 나폴리)까지, 오래된 성당의 점거(로마의 테아트로 발레)에서 세계 전역의 다국적기업들에 의한 토지와 어장의 종획에 맞선 풀뿌리 운동 및 투쟁, 그리고 동남 멕시코의 사빠띠스따가 장악한 지역에서의 토착민 자치까지.
이 운동들이 가진 일반적 의미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액체적 근대’(liquid modernity)라고 부른 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심층적으로 재구성적인 어떤 것, 아나키즘, 코뮤니즘, 사회주의 같은 고전적 이데올로기들로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는 사회 혁명이 진행 중인데, 이는 만일 널리 인식되어 더 많은 에너지를 사람들로부터 끌어올 수 있다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향한 변형과정에 착수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나의 혁명관은, 사회혁명(즉 대안적 생산양식의 성장)을 정치적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서 보는 맑스의 혁명관과 상응한다. “우리 세계의 발본적 변형이란, 사람들이 모여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한 대안을 발전시키고 이 대안들을 증식시키고 서로 연결하는 공동체들을 이루는 것을 함축한다. 나는 커먼즈가 그러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커먼즈는 단지 공동으로 유지하는 자원이나 공통의 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부, 커머너들의 공동체, 커머닝―이는 지속적인 상호작용들, 의사결정의 국면들, 그리고 공통적인 노동과정들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는 사회 체계이다. 다른 사회 체계들처럼 커먼즈도 힘의 장소이며, 이 책에서 나의 주장은, 이 사회적 힘들은 만일 그것이 발전되고 확대되어 커먼즈 생태환경(commons ecologies)이라는 더 큰 영역들의 창출로 나아간다면 자본주의적 과정과 국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의미 있는 도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커먼즈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커먼즈들이 이미 사회에 잠재해 있으며, 우리의 삶과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도움과 자원의 많은 부분을 공급하는 수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커먼즈 안에 태어난다. 비록 그것이 부모들 혹은 보호자들, 형제들, 친구들과의 상호작용만으로 구성된 것일지라도 그렇다. 사회화 과정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사회적 협동을 통해 주체성을 정신과 육체 모두에서 재생산한다. 사회적 협동을 통해 우리는 이윤에 종속된 삶에 대해 진정한 대안이 되는 가치실천들과 측정들을 발전시킬 필요를 만나게 된다. 우정, 공생공락, 상호부조, 도움, 돌봄, 투쟁 같은 가치실천들이 커먼즈 안에서 발전된다. 이러한 사회적 협동의 네트워크들이 근린연합들, 협동조합들, 사회센터들, 식품 네트워크들, 사회운동들에서 체계적 패턴으로 발전하자마자 이 커먼즈 기반의 사회협동 형태들은 그 경계를 확대하고 재형성하며 그 사회적 구성을 갱신하고 수평성의 다문화를 발전시키며 공식적인 과학(official science)―특히 산업적 농업이나 핵공학이 증진하는 공식적 과학―을 무력화시키고 커먼즈 생태환경을 발생시킬 잠재력을 가진다. 커먼즈 생태환경이란 다수의 협동하는 커먼즈들이 지금은 예측할 수 없는 제도들을 갖추고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배열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커먼즈는 경험적 발견이나 커먼즈 이론의 해석으로 축소될 수 없다. 커먼즈는 사회적으로 정당한 체제에 대한 그 어떤 낭만적이거나 급진적인 모델에도 맞지 않는다. 커먼즈가 자본 및 국가 체계들을 포함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제한을 만나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고유한 정치를 개발하여 이러한 제한을 밀어내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씨앗공유금지법과의 투쟁이든 기본소득 권리이든, 고속철로나 도로나 댐이 특정 영토 내에 건설되지 못하게 결정할 공동체들의 권리이든 말이다.
커먼즈의 더 나아간 발전과 상호교직은 자본 및 하향식 국가 논리와의 관계에서 커먼즈의 자율을 증폭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한 자본의 위기와 기후재난에 대응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광범한 커먼즈 활동이 있는데,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삶을 재생산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활동들이다. 이 재생산 커먼즈들은 이미 세계 전역에서 많은 커머너들에 의해서 건강한 식품, 주택, 물, 사회적 돌봄 및 교육에 접근하려느 ㄴ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창발적으로 수립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 충족 이외에도 이런 커먼즈들의 발전은 여러 영역에서의 새로운 커먼즈 르네상스의 물적 토대를 형성하리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전략적 자산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공동체들, 새로운 문화, 새로운 복지수립방법들, 안전과 신뢰를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금융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의 착취를 거부할 힘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안적 재생산 수단을 가질수록 자본의 논리를 거부할 힘이 커진다.
이 책에서 나는 커먼즈를 생태계들만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 같은 사회 체계들도 작동하는 환경 안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사회체계들로 보는 접근법을 다듬어낸다. 나는 커먼즈 이론을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유용한 요소들 몇 개를 추출한다. 나는 커먼즈의 체계로서의 특징들, 더 큰 규모로 체계들을 형성할 상호작용, 커먼즈 생태환경의 발전, 커먼즈를 다루는 자본의 전략, 사회운동과의 관계, 커먼즈가 우리를 탈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 데려갈 헤게모니적 힘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책의 제목 ‘Omnia Sunt Communia’(‘모든 것을 공동으로’)는 독일의 개신교 개혁자인 뮌쩌(Thomas Müntzer)의 전투표어일 수 있다. 또한 뮌쩌를 잡아 고문한 사람들이 얻어낸 ‘고백’에서 밝힌 그의 목적―‘모든 것을 공동으로 관리하며 분배는 각자의 욕구에 따라 이루어진다’(all things are to be held in common and distribution should be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일 수도 있다.[이는 뮌쩌의 실제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를 잡은 자들이 두려워한 바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 정리자] 여기에 ‘각자는 그 능력에 따라’를 추가하면 고타 강령에서 맑스가 말한 근대 코뮤니즘의 정의가 된다 : ‘각자는 그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 욕구에 따라.’ 그러나 이 책은 코뮤니즘 교리에 관한 책이 아니다. 코뮤니즘의 지평을 밝힐 뿐이다. ‘Omnia Sunt Communia’라는 지평이다. 그리고 여정에 오를 준비가 가장 잘 되어있는 사회세력을 논의할 뿐이다. 민중도 아니고 개인적 주체들의 다중도 아니라 커먼즈의 다양한 다중이며, 이들 내에서 개인적 주체들은 커먼즈로 사회화된 주체들 즉 커머너들이다.
나는 커머너다
나는 커머너이며 따라서 나의 작업을 공통의 대의에의 기여로 본다. 공생공락하는 집단이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는 것이 삶의 공통의 대의에의 기여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작물을 키우는 기술과 행동에 이르는 집단적 결정을 논의할 수 있듯이, 나의 작업은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너머로의 사회적·경제적 변형에 대한 논의이다. 그 탈자본주의 사회의 형태는 지금 말할 수 없다. 이는 힘의 장들(power fields)에서의 수십억 개의 상호작용들의 결과일 것이고, 이것을 우리가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힘의 장들을 구축하고 가장 적절한 길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 길은, 커먼즈를 강화하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커먼즈의 자율을 극대화하는 한편, 필요하면 국가 및 자본과 상호작용하고 심지어는 그 변형을 시도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에밀리아 아펜니노 산맥의 내가 속한 단체에 고대 품종의 밀을 생산하고 그 밀로 빵을 만들 지역공급망을 구축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기계화된 다국적 산업적 농업에서 재빨리 빵, 파스타, 피자 반죽, 비스킷 등으로 변형하기에 필요한 높은 글루텐 수준을 가진 현대의 밀이 우리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논의가 1년 동안 이루어졌다. 우리는 현대의 제분방식은 밀겨를 버리고 밀의 가장 영양가 있는 부분인 밀눈을 파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산업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공급되는 밀가루에 기반을 둔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은 거의 씹는 껌을 먹는 것과 같으며, 배의 질병, 알레르기, 글루텐 민감성을 증가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역의 대안을 창출하는 계획이 논의되었고 비판되었고 결국에는 지지되었다. 우리가 그 계획을 버리기로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의 나의 기여를 같은 방식으로 본다. 이 책의 내용은 계획이라고 말할 만큼 상세한 것은 아니다. 사회 변형의 복잡성은 밀을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복잡성을 높은 추상 수준에서 다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초점을 두는 대안들의 경로와 자본주의적 생산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동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의 작은 단체의 밀 복원 계획에 내재하는 깊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예의 계획은 미래의 우연한 일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강력한 폭풍, 야생 곰, 혹은 배고픈 사슴이 작물을 망칠 수 있다. 이는 더 심화되거나 확대된 억압과 규제가 더 많은 커먼즈를 지하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극심한 기후변화와 전쟁은 작물만이 아니라 커먼즈를 유지하는 사회적 관계들도 파괴할 수 있다. 정치적 억압은 커먼즈로부터의 피난자들을 증가시킬 수 있으며, 이는 시간이 걸려서야 새로운 형태로 재구축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시나리오 구축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내가 다루는 것은 오직 탈자본주의를 향한 커먼즈 기반의 사회변형의 토대를 이룰 원칙들이다.
더욱이 이 책의 독자는 이탈리아의 나의 동료들보다 수가 훨씬 많을 것이며, 현재의 작업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대할 통찰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책을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는 유토피안, 조건들 및 힘의 장에의 관심을 버리지 않는 관념론자, 어려운 일과 억압을 낭만화하지 않으며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 하지 않고 다만 옛 것이 새로운 용어로 우리에게 말하도록 할 뿐인 낭만주의자의 저작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나의 태도는 일상생활에 초점을 둘 뿐만 아니라 광범한 사회의 회로들 내에서 커먼즈 대안들의 경계를 확대하는 데도 집중하는 유형의 커머너들의 태도이다. 이 책을 추류판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우리의 공통의 부의 일부로서 간주해달라고 호소할 따름이다. 모든 것이 공통적인 세상을 향하는 우리의 집단적임 움직임에서 그저 작은 하나의 기여로서.
각 장의 내용
모든 것이 공통적인 지평을 말하는 데는 예언도 신화도 없다. 움직이는 원리만이, 사회적 힘을 특수한 맥락에 작용할 때의 메타방향성에 대한 인식만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 이 운동의 주체들은 개별적 주체들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체계적인 주체들systemic subjects이며, 개별 주체는 이 체계적 주체들 내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미 공통적인 삶에 사회화되어 있다.
1장
바로 이 때문에 나의 1장 서두는 맑스의 『자본론』의 1장 서두와 공명한다. 다만 아래로부터 읽은 것이다. 맑스에게 상품이 자본주의적 부의 기본적 형태라면, 나에게는 공통재(common goods)가 탈자본주의 세계의 부의 기본적 형태이다. 그런데 상품이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로 이루어진 모순적 형태이듯이, 나도 공통재를 이중적 형태를 띠는 것으로, 체계로서의 커먼즈라는 논의에 열린 것으로 설정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른 현재의 커먼즈 이해들과는 대조되는 견해를 제시한다.
나는 계속해서 1장에서 공통재에 대한 고전적 및 현대적 이해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며 그것들이 가진 의미를 사회 체계로서의 커먼즈라는 개념 내에서 다룬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나는 커먼즈(commons)와 공통재(common goods, commonwealth)를 구분한다는 점이다. 두 개념을 융합하는 입장이 널리 퍼져있는데, 나는 확연히 이로부터 거리를 둔다. 공통재는 커먼즈의 한 요소일 뿐이며, 커먼즈는 공통재에 더하여 커머너들과 커머닝도 포함하는 특수한 사회 체계들이다. 또한 나에게는 ‘commonwealth’(공통의 부, 공통체)라는 말이 일반적인 정치적 진술과 무관하다. 이는 개별 커먼즈들의 실존조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른 조건들은 커머너들, 공동체, 커머닝이다.) 따라서 나는 ‘commonwealth’라는 용어를 하트와 네그리가 사용한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생산된 모든 것을 ‘commonwealth’의 일부로 본다. 공통적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작에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많은 투쟁들을 해석하는 정치적 원리이다. 나의 접근법은 다르다. 비록 나는 지구상에 생산된 모든 것은 사회적 노동에 의해 생산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commonwealth’로서 주장할 수 있다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지만, 사실상 이 주장은 국가와 자본이 강제하는 소유권의 장벽과 마주친다. 이 장벽을 우리는 사회적 운동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러한 장벽은 또한 현재적 생산양식들의 실제적 구조와 주체성들 안에 존재하며, 이는 우리가 아직은 모든 사회적 협동에 의해 생산된 부를 ‘commonwealth’로서 주장할 수 있는 시점에 와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 시점에 도달하는 것이 대안들과 투쟁을 구축하는 데 실제 힘을 발하는 사회적 힘으로서의 커먼즈의 과제이다. 커먼즈 체계들의 확대와 커먼즈들의 커먼즈 생태환경으로의 통합이 사회운동과 함께 미래의 어느 시점에 그러한 ‘commonwealth’ 주장에 효과적인 힘을 부여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공통적인 것을 커먼즈 운동의 인식 지평(a sense horizon)으로서만 사용할 것이다. ‘omnia sunt communia’에 대한 나의 이해에서처럼. 그러나 전략적 사고는 맥락에 토대를 두어야 하며, 커먼즈의 확대는 커먼즈 외부에서 생산된 요소들을 내부로 포획하여 그 형태를 발전시키고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2장
커먼즈를 체계로 설정하였기에, 2장에서는 체계와 관련된 기초적인 개념적 도구들을 살펴본다. 개념도구들이 중요한 것은, 구멍을 뚫을 때에는 부삽을 사용하지 않고 주머니칼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과 같다. 예를 들어 권력(power)을 정의할 때, 나는 통상적인 급진주의자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정식화―커트 루인(Kurt Lewin)의 것―에 준거한다. 베버, 푸꼬, 만, 룩스(Lukes) 같은 권력 연구자들에도 별로 준거하지 않는다. 그들의 권력 연구가 커먼즈 이해에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의 많은 단상들과 발표된 글들에서 그들은 명백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커먼즈가 사회적 힘으로 전환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나의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 효과적이며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이 필요했다. 루인의 힘의 장(force field)이라는 생각은 나의 선생님이자 친구인 해리 클리버가 내가 대학원생이었던 1980년대에 『자본론』의 모든 범주는 계급투쟁의 범주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에게 말한 것과 비슷하다. 뉴턴 물리학자인 그는 종이타월 위에 상이한 방향을 향하는 두 화살표를 그려서 갈등하는 사회세력을 나타냈는데, 화살표의 길이는 그 힘을 나타내고 화살표의 방향은 지향 혹은 목적 혹은 욕망이나 야망을 나타낸다. 루인의 힘의 장이 가진 장점은 또한 가치, 권력, 목표 개념을 힘의 장과 연관시켜서 동일한 질료(substance)에 변이, 변조, 일탈을 준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나는 이 ‘질료’를 노동의 관점으로 옮겨놓는다. 커먼즈를 위한 커머닝이라는 사회적 형태로든 자본을 위해 착취되는 추상적 노동의 형태로든. 나는 루인의 개념화를 가능한 한 느슨하게 사용하여 자본과 커먼즈 모두를 질적으로 대립하는 사회적 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세계를 상이한 방식으로 구축할 수 있는, 종종 대립하고 상충하며 또 다른 때에는 서로 타협을 하는 사회적 힘으로 본다.
3장
3장에서 나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세 요소 가운데 둘, 즉 공통재와 공동체(커머너들과 그들의 관계들의 다원성)의 일반적 특징들을 논의한다. 결정적 요소인 커머닝에 대한 더 본격적인 논의는 6장과 7장으로 넘긴다. 즉 커먼즈의 다른 체계적 속성들을 풀어낸 다음으로 넘긴다.
4, 5장
4장과 5장에서는 두 중요하지만 서로 연관되지는 않은 저자들로부터 온 커먼즈에 대한 통찰들을 논의한다. 4장에서는 오스트롬(Elinor Ostrom)을 논의하고, 5장에서는 맑스의 자본 연구를 논의한다. 나의 분석은 커먼즈를 자본 및 국가(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본의 이익의 옹호자일 뿐이다)와 대면하면서 힘의 관계의 장들 안에 삽입된 체계로서 정립하기 때문에 오스트롬과 맑스를 논의함으로써 두 저자가 자신의 저작에서 배제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오스트롬은 자본과 국가를 포함하는, 위협적이기 일쑤인 환경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결하고 있고, 커먼즈를 발생시키는 커머너들의 능력에 대한 입장을 결하고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도 커먼즈가 구성하는 (재)생산적 힘을 배제한다.
커먼즈 이론을 창립한 오스트롬의 위대한 작업은 자본주의 경제이론을 창립한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의 작업과 같다. 4장에서 나는 또한 개념적 도구들을 더 발전시켜서 오스트롬의 자원 개념을 수정하고 공유재(common resources) 개념을 확대하여 전통적인 경제학이 ‘사유재’(private goods)라고 부른 것을 포함도록 한다.
5장에서 나는 커먼즈의 공식을 도출한다. 맑스의 자본의 회로를 모델로 한, 체계의 성격을 가진 비축과 흐름의 회로이다. 여기서 나는 맑스가 노동력의 재생산 회로를 무시했다고 비판한 1970년대 페미니즘 논쟁들에 기반을 둔다. 나는 이 노동력 재생산 회로를 재생산하여 그것이 더 광범한 회로 즉 커먼즈의 (재)생산의 한 계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5장에서 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체계들과 결합된 우리의 일상생활로부터 커먼즈가 생겨나오는 것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나는 경제 체계를 맑스가 『자본론』 1권에서 도입한 두 회로 사이의 마디결합으로서 논의한다. ① 커머너들의 사기 위해 파는 체계와 ② 자본의 이윤 논리의 팔기 위해 사는 체계이다. 이를 통해 나는 커머너들과 자본가들의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키는 행동 및 소통 고리들의 행위자들을 도입한다. 그 다음에 두 회로를 분해하여 그 뒤의 생산 현실을 드러낸다. 자본 회로의 분석적 분해는 맑스가 가르친 것(착취) 이상을 별로 드러내지 않지만 첫째 회로를 분해하면서는 커먼즈의 다양한 세계를 발견한다. 이 사기 위해 파는 회로는 커먼즈와 자본주의 체계들 사이의 교류의 막에 다름 아니다. 커먼즈를 자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경계이다. 더 큰 커먼즈 회로의 부분집합인 이 사기 위해 파는 회로는 우연적으로만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며, 자본의 화폐 회로에 의존하는 정도에 따라 상이한 커먼즈들이 구분된다.
6, 7장
커먼즈 거버넌스의 문제는 자주관리 수평성 및 참여의 문제이며, 이는 커머닝의 한 계기이다. 나는 6, 7장을 커머닝에 할애한다. 나는 6장의 대부분을 2010년 안식년으로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의 여러 지역을 4개월 동안 돌고난 직후에 썼다. 이 장은 사회적 노동을 커머닝에 가동하는 기술들을 서술한다. 이 지역에서 나는 사회적 노동을 커먼즈를 위해 가동하는 두 주된 방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① 상호성의 네트워크의 한 계기로서 (상호 노동) ② 모든 공동체가 참여하는 네트워크로부터의 요구(공동체 노동). 각 경우마다 밀도 있는 문화적·사회적·정동적 격자가 활동에의 참여 혹은 불참의 경비와 혜택을 규정한다. 그런데 나에게 주목할 만했던 것은 표면상으로는 이 가동의 양태들이 유럽과 북미 문화들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볼 때 토착성은 먼 사회의 이국적 현상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커먼즈 현상이다. 상이한 문화적 형태로 표현될 뿐.
나는 또한 인지 사회학자인 존 피스케(John Fiske)의 범주들 가운데 몇 개를 사용하여 측정 및 평가 과정을 논의한다. 여기서 나는 자본주의가 추상적 노동을 자본주의적 가치의 질료로서 부과하는 데 반하여 커머닝은 가치들의 춤(dance)의 생산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다양한 가운데 합의를 찾는 커머너들이 상이한 맥락과 조건에서 상이한 유형의 사회적 협력을 서로 협상하기 때문에 춤이다.
7장에서 나는 자율과 관련하여 아래로부터의 커먼즈 역사를 검토하며 자기창조적 체계들에 대한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작업을 커먼즈 체계에 통찰을 주는 관점에서 원용한다. 또한 나는 자율과 자기창조라는 이 커먼즈 속성들을 경계와 감각(sense, 인식)의 생산과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커머닝은 커먼즈의 힘을 창립하는 원천이 된다. 자율과 자기창조에 형태를 부여하며 커먼즈 체계들의 경계들의 유형을 형성하고 커머너들의 ‘감각’을 형성한다.
8장
8장에서 커머닝은 커먼즈들을 연결하여 더 큰 체계를 창출하는 사회적 힘이 된다. 나는 이것을 ‘경계 커머닝’(boundary commoning)이라고 부른다. 커먼즈 체계들의 경계에서 일어나서 어떤 규모를 가지든 사회적 형태들을 창출하고 경계를 열며 연관을 수립하고 커먼즈 생태환경을 유지하는 커머닝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제도를 공통화(commonalization)를 통해 토대로부터 다시 형성할 수도 있고 새로운 제도들을 수립하기도 한다. 나는 게누이도 클란데스티노(Genuino Clandestino)의 경우를 논의하는데, 이는 이탈리아에 있는 소농장주들과 소비자들의 네트워크로서 식품 주권의 조직화를 발전시켰다. 나는 어떻게 대안들이 경계 커머닝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지 입증한다. 경계 커머닝의 발전은 커먼즈 체계들의 확대와 커먼즈 생태환경의 창출을, 상이한 커먼즈들 사이의 교환과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 장에서 나는 또한 사회 혁명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개진한다. 내 생각에 사회 혁명은 커먼즈 체계들의 확대에 의존하고 그것을 정치 혁명과 탈자본주의적 변형으로 연결시킨다.
9장
9장에서 나는 커먼즈 운동, 커먼즈 포섭, 커먼즈와 공적인 것의 문제를 논의한다. 마투라나·바렐라와 루만 같은 체계 이론가들은 체계들 사이의 구조적 결합(structural coupling)이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들의 복합체에 접근하여 그것을 활용하게 한다고 본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자본이 커먼즈를 자기편으로 포섭할 수 있지만, 그 반대도 맞다. 커먼즈도 자신의 발전을 위해 자본 체계들의 복합체에 접근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나는 사회 운동의 체계와 커먼즈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각자 나름의 과제를 가진 양자가 선순환 형태로 교직될 때 사회 변화에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사회 운동의 경우에는 국가와 자본이 가하는 주체적·객체적 제한들을 밀어내는 것이 과제이고, 커먼즈의 경우에는 그렇게 해서 새로 생긴 공간에서 새로운 커먼즈 기반 생산양식으로 확대되는 것이 과제이다. 또한 나는 경계 커머닝이 공적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 공통화의 정도는 지역 조건들 및 커먼즈에 의해 가동되는 사회세력에 의존하지만 말이다.
10장
10장에서는 탈자본주의를 향한 사회 변형의 문제틀의 복잡성을 검토한다. 이 변형은 진공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커먼즈 발전의 성공은 가동되는 사회적 힘들에 의존한다. 나는 현대 사회 운동의 커먼즈로의 변이의 일반화를 상정한다. 여기서 나는 이 커먼즈 운동들이 성공적으로 사회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반적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소박한 질문은 우리가 그것을 복잡성 이론과 애쉬비(Ashby)의 ‘필수 다양성의 법칙’(The Law of Requisite Variety)―안정된 체계에서는 통제하는 요소들의 수가 통제받는 요소들의 수보다 많다는 법칙―의 맥락에서 제기한다면 더 근거 있는 질문이 된다. 이 법칙이 말해주는 바는, 규제자들(가령 자본과 국가)이 커먼즈도 들어있는 사회를 규제할 수 있으려면 사회의 복잡성에 맞먹는 복잡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이 날로 커지는 사회의 복잡성에 대응하는 수단은 두 가지이다. 억압을 통해 사회의 복잡성을 죽이거나 국가와 자본에 이미 들어있는 복잡성과 양립 가능한 형태의 복잡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에 복잡성의 요소들은 사회 혁명이 정치 혁명의 선결 조건이라는 맑스의 제안과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운동과 커먼즈의 동기화를 통해서 자본과 국가가 단기적으로는 관리할 수 없이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새로운 커먼즈 생태환경에서 이 새로운 복잡성의 자치를 이루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이론적인 제안이지만,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이론적 제안이면서 자본가들로 하여금 봉건적 특권들을 대체할 때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던가.
나는 사회과학 및 정치과학의 기획들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개념들에 의존한다. 어려움은 이 개념들과 이론들을 잇는 데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대안들을 실제로 창출하고 확대하는 데 있다. 사회적 변화의 경로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편법들’로 발라져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 서로와 언제나 되찾기를 주장해야 하는 공통의 부와 공생공락적 커머닝의 삶 밖에는 없다.
서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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