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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운동

동의 이전에 무엇이 있나?

* 아래는 P2P 재단의 블로그에 실린 리처드 D. 바틀렛(Richard D. Bartlett)의 글 “What comes before consent?”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바틀렛은 오큐파이 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한 의사 결정 소프트웨어인 루미오(Loomio)의 공동 설립자이며 오픈소스 하드웨어의 열렬한 팬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를 따른다.

 

 

 

동의 이전에 무엇이 있나?

 

옮긴이 : 부엉이

 

폭력의 복잡성을 선형의 연속체로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그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공격(assault) 살인 대량 학살 생태계 파괴.

 

이 폭력의 스펙트럼에서 더 왼쪽, 즉 공격 이전, 괴롭힘 이전, 위협 이전에 무엇이 있는지 난 줄곧 궁금했다. 신체 사이의 물리적 접촉이 있기 전에 행해지는, 우리가 잘 간파할 수 있는 조그만 폭력 행위들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이러한 조그만 부당한 행동들을 알아채고 변화시킴으로써 더 큰 부당한 행위들을 더 잘 다룰 수 있으리라.

 

많은 급진적 단체에서, ‘동의는 신체들의 상호 작용, 특히 성적 상호작용을 제어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당신이 내 몸을 만지기 이전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하고, 내 답변을 존중하라. 동의는 공격에 대한 해독제이다.

 

만약에 우리가 사람들의 접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황에서, 동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당신은 당신의 음향 시스템이 나의 공기층을 채우기 전에 동의를 얻고자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동의를 인간 상호작용의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까? 내가 바비큐 요리를 하는 데 대한 동의를 암소에게 구한다면 소는 무어라 말할까?

 

심지어 동의를 구하는 것이 괴롭힘인 경우가 많이 있다. 원치 않는 성적인 접근으로 인해 한 집단에 참여하려는 나의 자유가 심히 제한받을 수 있는데, 특히 접근하는 측이 나보다 신체적·사회적 힘이 더 셀 때 그렇다.

 

만약 동의가 신체적 상호작용을 제어한다면, 강렬한 다른 상호작용을 어떤 메커니즘으로 규제할 수 있을까? 말할 때 어떻게 당신의 주관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의 자세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나는 어떻게 귀기울일 수 있나? 나는 당신의 신체 언어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나?

 

내가 나의 고유한 주관성을 가지면서 어떻게 당신의 주관성을 축하할 수 있을까?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작은 미시 행위들, 표현들이 존재하는가?

 

당신은 해야 한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매력적이다.” 나는 당신에게 끌린다.”

삶은 이러저러하다.” 나의 경험은 이러저러하다.”

 

만약에 우리가 많은 사람을 동시에 포함하도록 동의를 확장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의견 일치의 섬을 더 많은 사람에게 맞게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우리가 섬들의 지도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섬들 사이에 다리를 건설할 수 있을까? 내가 가부장적인 착한젊은이였을 때, 나는 항상 나의 주관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하려고 노력했다. 여러분은 객관성은 남성의 주관성이다라는 페미니스트 플래카드를 보았을 것이다.

 

오큐파이 운동기간 동안 내가 참가한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은, 타인의 경험이 틀렸음을 입증하지 않으면서 내 경험을 가지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을 배운 훈련 장소였다. 사람들은 이러저러하다 대신에 나의 경험은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

 

많은 정치활동 공간에서, 우리는 객관성을 조건으로 논쟁을 시도한다. ‘여기에 사실들이 있다, 이것들이 정의(定義)들이다, 내가 그들의 정당성을 당신에게 설득하마.’ 이것은 실질적인 결과 없이 토론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헝클어진 주관성 위로 떠오르려는 노력을 멈추고 그것을 껴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집단적 의사결정에서 나를 흥분하게 만든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이 순전히 객관적/분석적 방식에서 정서적인/관계적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과 씨름하는 대신 느낌으로 탐구한다. 물론 사실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일 때 내가 사실들에 귀기울이기가 훨씬 더 쉽다.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의 주관성을 붕괴시키려 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주관성을 가질 때, 그때 나는 여러 관점들의 스펙트럼 안에서 나의 위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해력은 당신이 나에게 무언가를 설득해야할 필요 없이 성장하게 된다.

 

추신. 이 작은 글이 당신의 욕구를 자극했다면, 훨씬 더 상세한 방식으로 동의와 힘(권력)을 탐구한 에미 베벤시(Emmi Bevensee)가 쓴 이 에세이를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