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설명―옮긴이]
아래는 이 블로그에서도 그 글을 소개한 바 있는 존 레스터키스(John Restakis)의 “Civil Power and the Partner State”를 옮긴 것이다. 이 글은 자그레브에서 2015년 3월 19-21일에 열린 <좋은 경제 컨퍼런스>(Good Economy Conference)의 기조발제로서 레스터키스의 블로그에 2015년 3월 25일자로 올려져있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글과 내용이 상당히 중복되지만, 더 확장된 판이다.
그리스에 대해 일반 언론이 자신들의 무지와 비인간성 말고는 거의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글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다. 이 글에서 제시된 입장을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런 관점이 존재하며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신문과 방송이 한 말만을 눈가리개 한 경주마들처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레스터키스는 둘째 날(20일) 발제를 했는데, 컨퍼런스 홈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둘째 날, 캐나다에서 20년 이상을 보낸 후 그리스 경제의 재구조화에 대한 자문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존 레스터키스는 경제체제 및 국가와 관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하여 최면술과도 같은 발제를 했다. 적절하게 지속 가능한 틀과 시민 사회의 힘을 받은 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들의 결합이 그 길이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견도 보였고 깊은 대화도 나누었는데, 그가 제시한 전반적 상을 흠잡을 수는 결코 없었다!”
*********************************
시민의 힘과 파트너 국가
저는 오늘 지난 30년에 걸쳐 유럽에 닥친 위기와 서유럽 민주주의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의 정부들이 시민들의 이익을 보호하지 못한 무능력에서 위기가 왔다고 규정합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침식하고 있는, 정당성의 위기입니다. 이 무능력은 가장 최근에는 긴축 정책과 시민의 민주적 삶의 급속한 파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즉 긴축의 부과, 일국 주권의 종말, 민주적 책무의 파괴는 35년도 더 전에 대처주의와 함께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불가피한 귀결입니다. 신자유주의는 19세기 말에 경제사상을 지배했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귀환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 당시의 경제적 태도들, 사회적 불의들, 불평등들도 돌아왔습니다. 특히 빈자에 대한 계급적 증오가 돌아왔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심부에 놓여있는 것은, 정부가 시장으로부터 손을 떼라는 요구입니다. 정부가 경제를 규제하는 역할에서 손을 떼는 것은 케인즈적 실험의 종말이며 세계대전 이전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로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만일 우리가 시간을 길게 잡아 본다면, 복지국가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기업 자본주의로 가는 길에서 일시적 우회였으며 예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채를 통한 사회 통제―긴축의 부과, 공적 부의 사유화, 민주적 제도들의 파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범죄자화―는 유럽 전역에 퍼졌고 점점 더 세계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새로운 질서의 본질적 측면들입니다.
이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도전들은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요?
저는 지난 여름부터 살고 있는 그리스에서 오늘 여기로 왔는데요,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연대경제’(the social and solidarity economy)를 강화하는 전략을 개발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그리스에 갔습니다.
‘부채정치’(debtocracy)는 그리스에서 일어난 부채위기의 기원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만이 아닙니다.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그리고 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같은 모든 유럽연합의 주변 국가들이 이것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부채정치는 강력한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한 국가가 그 채권자들에게 주권을 잃은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리스가 부채정치의 고전적 사례입니다. 그리스의 부채 위기와 이 부채의 뿌리와 근거에 도전하려는 그리스의 시도는 유럽 무대에서 상연되고 있는 매우 눈에 띄는 한편의 극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전지구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투쟁의 결과들은 정치경제에 대한 대안적 비전들을 창출하는 데서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사회연대경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국가와 시민사회는 공통된 대의(大義)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늘 서로 싸워야 할까요? 오늘날 유럽의 현실로 보아 전자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저는 이 시기에 그리스에 있으면서 유럽의 사회변화에 대해 이 위기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 계속 던져왔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진보적인 사회변화는 가능할까, 이 변화는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이 변화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와 시민사회의 기동(mobilization)이 중심적 위치에 있습니다. 국가를 보는 새로운 관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이 둘은 단일한 과정의 필연적이고도 본질적인 측면들입니다. 이 둘은 또한 좌파 운동이 오늘날 일정한 의미와 적합성을 가지는 데서도 결정적입니다. 저는 그리스를 예로 들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시리자의 집권 후 모든 이가 그리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그 결과가 재난이든 구원이든, 시리자 정부로부터 게임을 변화시키는 반발이 나올 잠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세계 언론은 상투적으로 시리자를 극좌급진당이라로 부릅니다. 이는 틀렸습니다. 경제적·사회적 개혁에 대한 시리자의 대안들은 이전의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온건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그려지는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전 목적의 고의적 왜곡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시리자 당을 불신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정치적 담론이 급격하게 우파 쪽으로 이동했기에 시리자 같은 온건한 중도좌파 당도 급진적인 당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이 협소해진 것입니다. 자유시장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미있는 방식으로 도전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의 다른 좌파 및 우파 정당들처럼, 시리자도 ‘사회연대경제’가 현재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세 및 공공 투자 같은 전통적인 정책들과 자원들이 더 이상 가용하지 않을 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영국의 보수적인 캐머런 정부조차도 사회적 경제를 일자리 창출, 공공 서비스의 증진, 정부 역할의 개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부문으로서 장려한 바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우파 정부의 이해력 혹은 관심이 얼마나 협소한가를 알기 전에는 이런 것들이 다 좋게 들립니다. 캐머런 정부에게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가 공공부문의 사유화를 촉진하는 간판과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자리의 안정성을 취약하게 하고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켰습니다.
공공 부문의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 때문에 가짜 협동조합에 강압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지난 그리스 정권에서도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Social Enterprise Co-operatives)을 통해서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자발적으로 가입해야 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에 복무해서는 안 되고 그 구성원들과 공동체들의 공통의 이익에 복무해야 하는 협동조합의 본령과 취지를 희화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교훈을 이해하는 정부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파에게 사회적 경제는 종종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자들의 피난처로 보입니다. 이것이 우파가 항상 자선을 빈자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선택하는 이유입니다. 유대나 정의를 선택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자선은 의존과 불평등을 영속화합니다. 이에 반해 유대는 시민들에게 힘을 주고 평등을 증진합니다.
더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의 수사가 자본의 장악력을 시민사회의 공간들로 확대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국 등지의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사회적 경제의 원리들이 정치적 기득권을 위해 왜곡되는 행태들을 비판해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사회적 경제의 원리들일까요?
사회적 경제는 시민의 조직들과 네트워크들로 조직됩니다. 이 조직들은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상호성의 원리들에 의해 추동됩니다. 보통은 자본의 사회적 통제에 의해 추동됩니다. 사회적 경제는 (많은 성공적 협동조합들처럼) 시장 안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재화나 서비스들이 제공되는 비시장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광범한 영역에 걸쳐있는 단체들(협동조합들, 비영리 단체들, 재단들, 자원봉사 단체들 등)로 구성됩니다. 여기에는 문화생산, 건강 및 사회적 돌봄의 제공,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 및 기타 필수품들을 제공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사회연대경제’는 본질상 경제가 사회적 목적에 복무하는 공간이며 실천이지, 사회가 경제적 목적에 복무하는 공간 혹은 실천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가 그 사회적 경제의 크기나 다양성에서 전례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이유를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처럼 여기서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이익 기업들(social benefit enterprises)이 경제 불황과 긴축에 대한 사회적 자기방어의 한 형태로서 등장했습니다.
오늘날의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유대를 지향하는 단체들은 자본주의가 공동체들을 종획하고 사람들을 땅에서 쫓아내고 착취하던 산업혁명의 초기에 협동조합과 상호부조조합들이 했던 역할을 그대로 맡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경제의 발생은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종획에 대한 자기방어로서 이루어집니다. 이 새로운 종획에는 공적 재화 및 서비스의 사유화, 땅·물·광물 등 자연자원의 절도가 포함됩니다.
오늘날 지구화의 확산과 함께 18세기에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었던 종획, 축출, 착취의 논리가 기업 자본주의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전역의 사회들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즉 협동조합과 기타 형태의 사회적 유대를 지향하는 경제를 창출하여 종획과정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그리스에서도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교하면 뒤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취약성의 요인들은 많습니다. 그 하나는 제도적 지원의 부재인데, 이 지원에는 사회적 투자, 전문가 계발과 훈련, 단결하고 발전하여 해당 부문에 목소리를 부여할 조직(단체)들이 속합니다. 부적절한 입법도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더 복잡한 셋째 이유는 그리스에서 시민사회와 국가가 발전한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서유럽 국가와는 달리 그리스는 오토만의 지배 아래에 있는 동안 근대적 계몽과 산업혁명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는, 오토만 시대 이후 정치체제를 특징지은 독재적 은고주의(clientelism) 1를 넘어선 정치 문화를 수립하기 위해서 아직도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독재는 위계·개인주의·의존관계를 낳지, 상호성과 사회적 유대를 낳지 않습니다. 건강한 시민사회, 민주적 시민 제도들, 민주적 문화의 출현은 바로 이 사실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에서 은고주의는 치명적이었습니다. 협동조합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그것은 사회적 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엄청난 장애가 되어왔습니다. 우파가 사회적 경제를 자본과 시장의 증진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듯이, 좌파도 줄곧 사회적 경제를 국가의 목적을 진전시키는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은고주의가 지배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면, 이는 대규모 실패를 낳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협동조합의 국가지원 및 보조가 부패를 낳았던 80년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부패는 정당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협동조합이 대중에게 가지는 이미지와 평판을 망쳐버렸습니다.
오늘날 협동조합을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한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서 장려하려면 협동조합이 본래 부패한 것이라는 이러한 잘못된 부정적인 이미지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만 이런 것은 아닙니다. ‘좌파’ 정부들이 협동조합 자체의 목적과 성격을―협동조합은 조합원들과 그들의 공동체에 복무하는 것이 그 주된 역할인 자율적 시민 단체입니다―고려하지 않고 정부의 목적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협동조합 모델을 사용하려고 했던 모든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에서처럼 이전의 소련이나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협동조합 모델은 그 망가진 평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나라들의 정부들이 협동조합들을, 더 넓게는 사회적 경제를, 정부 권력의 도구이자 부속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협동조합 모델을 조작의 차원에서 ‘지원함으로써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을 망치는 데 가장 큰 일을 한 것은 좌파와 ‘사회주의’ 정부들입니다.
이는 좌파가 종종 국가를 사회적·경제적 개혁의 유일하게 정당한 엔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정당성을 시장에서만 보는 우파의 거울 이미지입니다. 두 관점 모두, 대안적 패러다임의 성공에 필요한 발본적인 변화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시민 사회의 재도들을 무시하거나 조작하는 잘못을 동일하게 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권력을 잡은 시리자의 성격을 가늠하는 진정한 척도가 될 것입니다. 시리자는 그리스의 경제와 정치를 재구축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광범한 시민 사회와, 그리고 사회적 경제의 조직들 및 제도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요? 구좌파의 국가주의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시민 사회와 사회적 경제의 제도들을 나라 건설의 의미 있는 동업자로서 가동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좌파 개혁프로그램을 다시 상상하고 확대하려고 할까요?
시리자는 경제와 사회를 다시 건설하는 데서 협동의 사회경제적 원리, 상호성과 공동 이익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할까요? 그리스 정부는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는 데서 시민들이 가진 방대한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것을 가동할까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유럽에서는 최초로 그렇게 한 정부가 될 것입니다.
2부
다른 모든 곳에서처럼 그리스에서도 정당들을 구분하는 한 가지는 사회적 경제와 맺는 관계입니다. 정부가 사회적 경제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이는 좋은 징조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그리스에서 매우 밝은 지점들 몇 개 가운데 하나에 해당합니다. 수백 개의 새로운 단체들이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체들은 종종 조직상의 위계를 거부하며 배제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장려하고 이윤보다 서비스에 초점을 두면서 자신을 새로운 경제적·정치적 질서의 모델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들 중 다수는 정당들이나 국가와 거의 혹은 전혀 관계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에서든 유럽 전역에서든 진보적인 정당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이 단체들은 새로운 정치경제를 위한 비전과 방법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단체들이 국가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진보적 비전을 그려내려 한다면 여기에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정당과 국가 통제를 중심으로 하는 낡은 방식은 불신·거부되어 왔습니다.
많은 사회 활동가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제도권 정당들에서 떠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비극적인 실수요 미망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이익을 볼 사람들은 현재의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세력뿐이며, 만일 사태가 매우 악화된다면 극우 정당들이 이익을 볼 것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파시스트들이 정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스의 황금새벽(Golden Dawn), 프랑스의 국민전선(Le Front Nationale), 영국의 영국독립당(UK Independence Party, UKIP) 등등이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권력을 얻는다면, 이는 탱크와 경찰봉을 통해서가 아니라 투표소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그 경쟁이데올로기와 자유시장과 자본의 우선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응답에 해당하는 정치적 비전과 정치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협동의, 유대의, 상호이익의 정치경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시아와의 경쟁 및 바닥을 향하는 전지구적 경쟁에 직면하여 계속 퇴락하고 있는 유럽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협동과 이익공유의 경제학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유럽 대 세계의 기타 지역’과 같은 식의 지역 간의 대립을 상정하지 않는 비전이어야 합니다. 협동의, 지속 가능성의, 지방자치의, 전지구적 협동과 책임의 경제학이어야 합니다. 인정사정없는 경쟁과 기업의 탐욕이 우리의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면, 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공동운명에 대한 상호 책임감과 협동뿐입니다.
오늘날 진정으로 효력을 발하는 좌파 정당에게는, 사회적 경제가 결정적인 자원이자 동맹군에 해당합니다.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원리들이 여기서 실행됩니다. 가장 혁신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젊은 지도자들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 서비스의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역기능을 개혁할 잠재력을 가진 조직형태들과 실천들이 또한 여기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에서 공동체들은 지난 세월 동안 상실한 것을 되찾기 위해 함께하는 법을 배웁니다. 공동체 진료소, 농민들과 소비자 사이에 형성되는 식량 시장과 상호부조, 주민들이 이웃에 전기와 물 공급이 차단되는 것을 집단적으로 막는 행동 등이 그런 사례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위기의 한가운데에 뜻밖의 불빛이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이 어려운 시대가 공동체의 부활, 사람들 사이의 진정으로 인간적인 관계의 부활에 불을 붙였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바로 사회적 경제에서 번성합니다.
그러면, 진보적 정부는 사회적 경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전통적인 국가주의를 넘어서 권력을 민주화하여 시민들과 나누는 정부의 역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는 새로운 모델에서 정부의 주된 역할이 사회적 가치의 생산―사적 이윤보다 사회적 욕구를 우선시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창출―을 위해 시민 사회에 힘을 실어주고 지원을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활력이 넘치는 활동적인 시민 사회가 이 일에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시민 사회의 급진화 및 가동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였으나 일단 정치권력을 쥐자 시민사회의 지도자들과 조직들을 권력에 충원하고 파괴했을 뿐인, 이른바 진보적 정부들의 경험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는 에콰도르,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일어난 정치 사건들의 친숙한 패턴입니다. 사실 대의 민주주의가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의 패턴을 바꾸기를 시민들이 기대하는 어디서나 그랬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권력을 잡은 당이 어떤 당이든) 사회적 경제와 시민 사회의 발전과 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는 법적·사회적 제도들의 창출이 필요합니다.
이는 협동조합 및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입법의 개혁, 사회적 경제의 조직들을 사회적·윤리적으로 지원하는 재정도구들의 창출, (새로운 정치경제와 사회적 계약의 진전에 근본적인) 협동·상호성 및 공동이익에의 복무에 대한 이론과 그 실천을 연구하기 위한 교육 및 훈련기관들이 수립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이 원리들을 비영리 부문을 넘어서 더 광범한 경제를 지원하고 발전시키는 데로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국민경제들의 기반을 이루는 중소기업들로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원리들은 경제 전체를 회복하고 개혁하는 작업틀이 됩니다.
넷째, 공공서비스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통제권과 의사결정권을 이 서비스의 사용자들인 시민들에게 부여하여 투명하고 책임있는 공공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
우리는 지금 ‘파트너 국가’라는 새로운 생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파트너 국가는 그 본질상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국가입니다. 파트너 국가는 시민사회가 공동의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낼 최대의 공간과 기회를 촉진하고 제공합니다.
이는 사적 이득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의 증진을 그 주된 방향으로 하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파트너 국가는 시민을 공공서비스의 수동적 수취자로서 보지 않고 생산적 존재로 보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필요로 합니다. 명사로서 이해된 시민이 아니라 동사로서 이해된 시민입니다.
필요한 것은 계속 생성되는 민주주의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시민적인 삶을 건설하고 살기 위해서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들의 고안, 생산, 감시, 평가에 들어가는 일상적인 메커니즘들과 결정들을 통해 늘 재창조되는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사회적 경제의 조직모델들―관계들과 결정들의 협동적·상호적·민주적 조직화―이 새로운 정치경제의 원형들이 됩니다.
다른 채무국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그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새로운 접근법들을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시적 수준에서 정부는 채무조정, 무역관계 및 수출정책, 자본에의 과제, 인도주의와 관련된 위기라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사회적 경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 그 자체로는 온전한 회복의 엔진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강점을, 그리고 한계를 이해하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위험한 것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잘못된 기대입니다. 이것이 실패와 실망을 낳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기대들이,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경제가 원래 의도한 바 없는 것을 하지 못했을 때, 그 ‘비효율성’과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탄약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이 비판자들은 협동조합의 생존율이 사기업들의 생존율의 두 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합니다.)
사회적 경제가 제공하는 것은 대안적 패러다임이 건설될 수 있는 아이디어들, 방법들, 모델들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새로운 정치경제의 실험터이며, 그 조직들은 더 인간적인 가능한 미래를 탐지하는 사회적 안테나들입니다. 오늘날 지금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형상을 이렇게 미리 그려보는 것이 아마도 사회적 경제가 그리스 및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여일 것입니다.
‘사회연대경제’의 제도들을 건설하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이는 새 정부가 부채를 재협상하는 데 성공하든 아니든 그러하며, 성공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가 더 인간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성 있는 경제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이루어야 하는 변화들이 현재와 같은 구조를 가진 유럽 내에서 가능한지에 대한 심각한 불신들이 존재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제도적 독단주의가 개혁을 위한 그 어떤 전망도 질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겋더라도 그리스는 사회적 경제가 (특히 위기의 시기에)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추동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다른 나라들에 이미 축적된 풍부한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기에 그리스는 이 분야에서 후발주자이면서도 장점을 누립니다.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지역에서는 바로 협동과 상호부조의 원칙들 덕분에 중소기업들이 전지구적 시장에서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상위 10개의 우수한 경제지역에 속합니다. 이탈리아의 4만 개의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지방자치체들과의 긴밀한 파트너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돌봄을 재편하고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여기에 28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용되어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리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2001년의 경제위기 이후에 300개 이상의 버려진 공장들이 그곳의 노동자들에 의해 인수되어 생산을 재개했습니다. 거의 모든 공장들이 아직 가동 중입니다. 학교들, 어린이집들, 진료소들, 도서관들, 커뮤니티센터들 또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수되어 운영되었습니다. 국가 사회주의의 원형인 쿠바에서도 정부가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의 성장을 지원하여 농업부문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서비스들의 성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정부 개혁이 이 운동에서 중심적 테마입니다. 브라질, 콜롬비아,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세계 전역에 걸친 나라들과 도시들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예산작성, 공유된 정책입안, 시민에 의한 예산 및 공공프로그램 감시가 정부들의 작동방식을 개혁하는 데서 사회적 경제가 맡은 핵심적 역할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정부들을 더 투명하고, 더 책임성 있고, 더 민주적이며, 시민들의 실질적 욕구에 더 잘 반응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다음이 핵심적 요점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자본을 사회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정치경제의 모델입니다.
그리스 채무위기의 기원에 대해 많은 글들이 쓰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진입하면서 싼 돈을 쓸 수 있게 되고 비윤리적인 대여가 발생한 것을 지적합니다. 다른 어떤 이들은 감시의 결여와 느슨한 규제를 지적합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부패와 공적 기금의 엄청난 낭비를 지적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를 절벽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유럽 변방 국가들 등 다른 부채정치 체제들에서도 이와 동일한 패턴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 및 공적 책임성의 근본적 결여를 지적한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의 영역에서 민주적 문화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성하고 확장할 시민 제도들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계몽된 국가가 시민들과 손을 잡고 해야 할 역할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언가를 바로잡는 것은 민감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 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는 과거에 보았던 소홀함과 비행(非行)을 영속화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의 지배자들, 그들에게 봉사하는 정치계급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정책들은 매우 비극적이고 근시안적입니다. 이 정책들은 그리스를 개혁하고 다시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제도들을, 즉 그 공적·시민적 제도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긴축이 남긴 안타까운 상처가 아닙니다. 이러한 파괴가 바로 긴축의 목적입니다.
요점은, 저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적 제도들과 시민의 힘이 파괴되는 것은 우리의 엘리트들에게는 매우 잘 맞는 일입니다. 사회적 가치들이나 민중의 복지를 자본의 이익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저들의 도식에 맞지 않습니다. 저들의 도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자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방대한 수의 시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일부 세력을 위해서 잘 작동하는 체제의 영속화입니다.
오늘날 서양 자본주의의 역기능과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근시안적 성격은 더 이상 자본주의가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제3세계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을 자유롭게 착취할 능력을 잃었기에, 점점 더 경쟁적인 위치로 성장하는 아시아 국가자본주의와 대면해야 하기에, 서양 자본주의는 지금 그 자신의 토대를 먹어치우고 있으며 우리가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시대의 이념과 행동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제3세계가 유럽의 심장부에서 재창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식인 자본주의의 한 형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단기 수익을 갈구하고 싸고 저항 못하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자연자원에의 무제한적 접근에 의존하기에, 공적 이익은―그리고 이 공적 이익을 보호하는 정부의 역할은―파괴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의 민주화를 성취하면서도 경제의 민주화를 승인하기를 꺼려했던 과정의 최종적 결과인 것입니다.
경제에서의 민주주의의 결핍은 항상 정치에서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가, 그리고 근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오늘날 민주적 제도들을 무너뜨리는 과업은 거의 완수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권력에 맞서는 세력의 범죄자화와 국가안보와 반테러로 위장한 전면적 감시(pervasive surveillance)의 도입은 이 과정에 필수적인 도구들입니다. 시장경제가 가져다주는 이익이 쇠퇴하면, 공적 경제의 종획·병합·식민화가 논리적으로 다음 단계입니다. 자본의 보수를 받는 정부들은 이 과정에서 자본의 시녀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멈춰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자연적·사회적·정치적 토대 자체가 소실될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바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사망을 뒤잇는 것은, 인간적인 대안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훨씬 더 나쁜 상황일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실행 가능한 대안을 위한, 즉 자본이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협동적 정치경제를 위한 모델들과 아이디어들이 이미 존재합니다.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치경제를 건설하는 공동의 과제를 중심으로 운동들이 서로 모여 단결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한 운동의 동학이 시리자의 부상(浮上)에서, 포데모스(Podemos)의 성공에서, 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 그리고 네,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점증하는 저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긴축은 새로운 급진주의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긴축과 그것을 추동하는 반(反)사회적 이데올로기는 민주적 제도와 시민으로서의 삶―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아온 자유민주주의입니다―의 파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파괴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의 급진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경제에 대한 비전과 그것을 실행할 새로운 정치운동입니다. 이윤이 아니라 민중과 그 공동체들에 복무할 수 있는 정치경제 이외에, 시민의 힘의 상승이 또한 자본주의를 구출하는 데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희한한 아이러니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제 발제를 끝맺고자 합니다.
민주주의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러나 부채가 민주주의의 발생과 맺는 관계는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기원전 6세기에 많은 아테네의 빈자들이 부채 노예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생존하는 데, 그리고 자신들의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신용에 대한 담보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용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갚을 수 없는 빚의 채권자는 부유한 지주들과 아테네를 지배하는 소수의 독재자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자신의 빚을 갚을 수 없던 소규모 농장의 농민들은 자신들과 자식들을 팔아서 부채 노예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때 민중이 봉기했습니다. 아테네에서 일어난 일련의 채무자 반란들이 혁명으로 시를 위협했습니다. 소수의 독재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이 걱정되어 솔론을 임명하여 아테네를 위해 새로운 정치체제를 고안하도록 했습니다. 솔론은 귀족주의자였지만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첫째, 그는 모든 부채를 탕감했으며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노예가 되는 관행을 폐지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아테네의 가장 가난한 시민들에게 참정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용통제를 통해서, 갚을 수 없는 빚의 창출을 통해서, 그리고 정치권력의 독점을 통해서 다수를 노예화하는 힘을 소수가 가지는 것이 과두제와 금권주의의 영원한 패턴입니다.
6세기 고대 아테네에서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에서처럼 오늘날 민주주의의 재탄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채무자 반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국내에 그리고 해외 자본 중심지들의 회의실과 정부 청사들에 도사리고 있는 소수의 과두제적 지배자들 및 금권주의자들(부호들)에 대항하여, 오늘날 그리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채무자 반란과 민주주의의 봉기가 널리 퍼져 사람을 돈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새로운 정치관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시민의 힘이 정치권력의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일이 오늘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
- '후견주의'라고도 부름. [본문으로]
'커먼즈 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류학자 워커, 아마존 커먼즈의 교훈을 말해주다 (0) | 2015.07.30 |
---|---|
커머너들, 이탈리아의 키에리에서 축제를 벌이다 (0) | 2015.07.27 |
유럽 의회, 커먼즈에 주목하다 (0) | 2015.06.29 |
인간 발견물의 상품화에 대하여 (0) | 2015.05.10 |
삶문화권의 부상 (0) | 2015.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