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개비들
따개비들은 서양 근대가 시작되는 시기, 그러니까 대략 17-18세기에 지구 위에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는 해방 이후 서양의 국가기구가 이식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생물 ‘따개비’―바위, 배 밑 등에 달라붙어서 생활하며 따개비과에 속하는 생물로서 학명은 Balanidae이다―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 따개비란 근대와 더불어 출현한 공적 영역―이는 사적 영역과 짝을 이룬다―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어서 오로지 사심(私心)으로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공적인 것의 사유화가 존재양태인 기생충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따개비들의 후원자인 언론은 이들을 ‘사회 지도층’이라고 부른다.
‘따개비’를 이런 집단을 부르는 말로 쓴 것은 나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라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디킨스는 자신의 걸작 소설 『작은 도릿』(Little Dorrit, 1855-57)에서 바너클 가(the Barnacles)라는 가상의 가문을 등장시킨다. 이 가문은 영국 내의 실제 존재하는 어떤 대단한 가문을 이름만 바꿔 가리킨다기보다 세력 있는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 집단을 보이지 않는 화살표로 가리킨다. (공직자들과 정치인들 전부는 결코 아니다. 바너클에 속하지 않는 공무원들이나 정치인들이 소설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군소 의원들은 바너클들의 본부인 에돌림청을 찬양하는 집단과 비판하는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Barnacle’을 보통명사 ‘barnacle’로 바꾸면 ‘따개비’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바너클 가 가운데에서도 타이트 바너클(Tite Barnacle) 계가 특히 뛰어난데, “Tite”는 ‘tight’와 발음이 같다. ‘tight barnacle’은 ‘찰싹 달라붙어 있는 따개비’라는 말이다.
당시 영국의 따개비들과 지금 대한민국의 따개비들이 꼭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영국이 원조일 터이니 디킨스가 보여주는 이들의 속성을 따라가 보면 한국의 따개비들의 근본적 속성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기생(奇生)하는 존재이다
바너클들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이름이 시사하는 바로 그것 즉 ‘기생성’이다.
만일 그 쾌활하고 젊은 바너클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에돌림청이 임무를 완수했다고 아마 솔직하게 말했을 것이다. 바너클 일족이 해야 하는 일은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국민이라는 배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배를 손질하는 것, 배를 가볍게 하는 것, 배를 청소하는 것은 자신들을 떨구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자신들이 언제고 한 번은 떨구어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배가 자신들이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채로 가라앉는다면 그건 배가 조심할 일이지 자신들이 조심할 일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1
작가인 디킨스는 알 수가 없었겠지만 “배가 자신들이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채로 가라앉는다면”이라는 대목은 세월호 경험을 한 한국 주권자들에게는 단지 있을 수 있는 일에 대한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2) 유능하게 무능하다
이런 기생적 존재들이 에돌림청(Circumlocution Office)을 주도한다. 에돌림청 역시 가상의 정부 부서이다. 이 부서는 ‘일 안 하는 법’을 가장 잘 실천하기 때문에 행정부에서 가장 막강한―따라서 아마도 실제 존재하는 행정부의 가장 본질적인 경향을 구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한―부서로 군림한다.
요컨대, 나라의 모든 일이 에돌림청을 빠져나가지 못한 것 말고는 에돌림청을 거쳐 갔다. 그런데 빠져나가지 못한 일이 무수히 많았다.(1, 207)
에돌림청과의 이러한 관계는 바너클들의 기생성의 핵심을 보여준다. 이들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매우 열심히 하면서 기생한다. 이런 ‘열심’이 바로 나라의 숨통을 조인다. “바너클 씨는 나라의 목에 끈과 서류를 둘둘 감아놓은 것처럼, 자신의 목에 하얀 넥타이를 둘둘 감고 있었다.”(1, 217) [에돌림청에 대해서 더 자세한 것은 http://minamjah.tistory.com/38 참조]
3) 반(反)대중적이다
최근에 대한민국 주권자들이 생생하게 겪고 있는 일이지만, 이런 따개비들이 대중을 존중하거나, 대중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대중을 위하려는 생각을 가질리 없다. 에돌림청의 고위 관리인 타이트 바너클에게 대중은 “천적(天敵)”이기에 언급하기조차 꺼리는 대상이다.(1, 239) 2 넓게 보아 바너클 일족에 속하고 상류사회의 문화를 이끄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가원 부인(Mrs Gowan)에게 대중은 “돼지 같다.” 물론 대한민국의 따개비들이 그렇듯이, 바너클들도 ‘나라’(the country)를 걱정한다. 그런데 이때 ‘나라’는 자기들만으로 구성된 좁은 세계이다.
자신의 아들이 인정 받은 바너클가의 일원으로서 타고난 권리를 주장하고 대중의 코에 고리를 꿰기는커녕, 천한 예술의 추종자로서 돼지 같은 대중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는 사정 때문에 우울증을 살짝 앓고 있는 가원 부인이, 흉악한 시절이라는 화제로 식사 중의 대화를 이끌었다. 클레넘이 이 커다란 세상이 얼마나 작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지를 처음 알게 된 것이 그때였다.(2, 178. 인용자의 강조)
나라―이는 바너클들과 스틸츠토킹들 3의 다른 표현이었다―가 보존될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를 했지만 어떻게 보존될 필요가 있는지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다. 문제는 전부 다 존 바너클, 오거스터스 스틸츠토킹, 윌리엄 바너클과 튜더 스틸츠토킹, 톰, 딕 또는 해리 바너클 또는 스틸츠토킹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만 명확했을 따름이었다. 천한 군중을 빼면 이들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2, 179)
그러니까 바너클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바로 나라요 국가다. 자신들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주권자들을 ‘개·돼지’로 보는 한국의 따개비들하고 매우 유사하다.
4) 반(反)예술적이다.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따개비들은 예술이라는 것이 무언지 기본적으로 알지 못한다. 아마 이데올로기적 도구나 그저 장식 정도로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이 또한 영국의 따개비들과 매우 통한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앞의 인용문(2, 178면)에 이미 나온 “천한 예술”이라는 말로 영국 따개비들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짐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술성은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따개비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창조적인 삶의 원리를 탁월하게 구현하는 영역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서 예술성을 구현하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감옥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막내로서 아버지, 오빠, 언니 3명을 줄곧 부양해온 평범한 젊은 여성인 에이미(Amy Dorrit)―일상적 삶에서의 창조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인 도이스(Daniel Doyce)―사회적 삶에서의 창조성―이다. 이러한 배치는 사실 흥미로움을 넘어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예술성을 삶의 특수한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고 바로 실제적 삶의 한 가운데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 예술성의 주제는 여러 다른 식으로도 드러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에 예술가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가 바너클 일족에 속하는 가원(Henry Gowan)이라는 점이다. 물론 사이비 예술가이다. 그는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한― 즉 ‘한 자리’ 주지 않은―바너클 가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들이 ‘천한’ 것으로 보는 예술가가 되었다.
5) 자신들이 사기꾼임을 안다.
바너클들 가운데 비교적 솔직하게 말하는 퍼디낸드 바너클(Ferdinand Barnacle)이 있다. 이 글의 첫 인용문(1, 235면)에 나오는 “그 쾌활하고 젊은 바너클”이 그이다. 이 인물로 인해서 바너클 일족이 자신들이 사기꾼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 매력적인 바너클은 부서와 부서 간에 맴도는 일의 모습을 남자 주인공 아서(Arthur Clennam)에게 설명해주는데, 아서가 이것은 일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하자 이렇게 반응한다.
쾌활하고 젊은 이 바너클은 그것이 필요한 일을 하는 방법이라고 잠시라도 생각했던 상대방의 순진함에 상당히 즐거워했다. 이 손놀림 좋은 젊은 바너클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손 빠른 젊은 바너클은 손에 들어오는 아무리 작은 떡고물이라도 즉시 차지하기 위해 비서관으로서 에돌림청을 ‘매만져서’, 에돌림청이 군중의 접근을 막으면서 상류층을 돕는 정치외교적인 속임수 기구(a politico-diplomatic hocus pocus piece of machinery)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 멋있는 젊은 바너클은 앞으로 정치가가 되어 두각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1, 226. 인용자의 강조)
사이비예술가 가원에게도 솔직한 면이 있다. 도이스와 자신을 ‘진국’(“genuine”)이라고 칭찬해 준 가원에게 아서가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고 묻자 가원은 일정 정도는 그렇다고 한다. 자기는 큰 사기꾼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기꾼 화가들은 그림값을 비싸게 받지만 자신은 그림을 비싸게 팔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아서가 모든 화가가 그러냐고 묻자 가원은 화가들을 포함하여 “작가들, 애국자들,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한다.(2, 173) 아서가 “주로” 바너클들이 그런 원리를 실행하는지 알았다고 하자 가원은 바너클 가의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에돌림청이 결국에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난파시킬지 모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 시대에 일어날 일은 아닐 거예요―그리고 에돌림청이야말로 신사들을 위한 학교잖아요.”(2, 174)
여기서도 ‘난파’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거니와, 가원은 이대로라면 파멸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이겠지 하면서, 그리고 에돌림청은 신사들의 학교라는 이데올로기적 옹호의 발언을 해가면서 난파를 막는 일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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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표면’ 활용의 대가들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바너클들에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바너클 일족은 일반적인 경우 자신들의 목적, 속마음, 의도를 가리고 숨긴다. ‘표면’이 바로 이 가리고 숨기는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다른 글(http://minamjah.tistory.com/29)에서 이미 말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거기서 다루지 않은 점들을 몇 개 보기로 한다.
‘표면’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현대인에게 익숙한, 그러나 사실은 태곳적부터 ‘우상’의 형태로 인류의 정신에 작용해온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가 실재를 가리거나 혼동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사는 블리딩 하트 야드(Bleeding Heart Yard)라는 곳의 소유주는 ‘마지막 가부장’이라고 불리는 캐스비(Christopher Casby)인데 사람들은 이 사람의 외모를 바로 그의 덕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그의 매끈한 얼굴에는 작 익은 월프룻처럼 분(粉)이 덮여있었다. 분이 덮인 얼굴에, 저런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으니, 진귀한 지혜와 미덕이 넘치는 생각을 피력하는 것 같이 보였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의 골상학적 표정도 인자함으로 충만한 것 같았다. 누구도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미덕이 어디에 있는지, 또는 인자함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모두가 그의 몸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1, 280)
이 대목―특히 마지막 문장―은 파고들기로 마음먹으면 엄청난 철학적 문제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의 경우 『정치신학론』에서 진리(신의 뜻)와 이미지(상)의 분리(혹은 이접)의 문제의식, 『정치론』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의식, 『윤리학』에서 ‘정동’(affectus)과 적실한 앎의 관계라는 문제의식이 이와 연관되며, 이 문제의식은 들뢰즈에게로 이어진다. 동양 사상에서는 ‘상’에 의존하지 않는 태도가 항상 정도(正道)로 추천된다. 이 자리는 철학 논의를 위한 자리가 아니므로 철학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그치자.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미지가 대중으로부터 어떤 개인 혹은 집단의 실체를 가리는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그 연장선상에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 따개비들이 채택하는 ‘이미지 메이킹’ 전술이 놓여있다.
팽스(Pancks)는 블리딩 하트 야드에서 캐스비 소유의 집의 집세를 걷는 사람, 즉 마름인데, 이렇게 생겼다.
옷은 검정색이 바랜 철회색이었고 두 눈은 새까만 구슬 같았으며 턱에는 수염이 짧게 나서 약간 거무스름할 지경이었다. 철사 같은 검정색 머리카락이 포크나 헤어핀 모양으로 머리에서 갈라져 뻗쳐있었고, 안색은 날 때부터 아주 거무죽죽했거나 인공적으로 아주 칙칙해졌거나 아니면 둘이 뒤섞인 것이었다. 두 손은 더러웠고 부서진 손톱도 더러웠으며, 마치 석탄더미 속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또한 땀을 흘리고 있었으며, 열심히 움직이는 작은 증기기관처럼 드르렁, 킁킁, 훅훅, 푸푸거렸다. (1, 282-83)
겉을 곧 속으로 간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팽스를 어떻게 볼지 쉽게 이해가 간다. 그곳에 사는 세입자들의 원성은 모두 팽스에게 집중된다. 사실 우리 현실에서도 대체로 그렇듯이 진짜 나쁜 놈은 캐스비이다. 그는 집세를 악착같이 받아오도록 늘 채근하고 세입자들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다. 디킨스는 미리부터 이것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다 이미지에 속는 바보는 아니어서, 캐스비의 정체를 의심하는 말들이 이미 떠돈다. 이에 따르면 캐스비는 “여관이 없는 여관푯말”이며 “숙박할 장소도 없고 고맙게 여길 하등의 거리도 없는데, 와서 쉬고 난 다음에 고맙게 여기라는 초대장”이었다. 심지어 떠도는 의심은 캐스비를 “‘저런 머리’에 음모를 숨기고 있을 수 있는 인물로, 교활한 사기꾼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1, 283)
캐스비는 바너클 일족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한때 바나클 일족의 두목인 데시머스 경의 런던 소재 부동산 대리인이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대리인이 된 이유다. (이것도 소문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소문은 플롯을 통해 그려주기 어려운 어떤 측면을 제시하는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대리인이 된 것은 캐스비가 “최소한의 실무역량을 지녀서가 아니라, 지극히 자비롭게 보여서 누구도 그 부동산이 그런 사람의 감독 하에 사기나 비리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 284)
여기서 디킨스는 사회적 지위가 다른 캐스비와 데시머스 경(바너클 일족)이 ‘표면’의 관점에서 상통함을 보여준다. (‘표면’ 광내는 법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인 제너럴 부인Mrs. General도 바너클 일족에 속하지 않는다. 제너럴 부인과 ‘표면’ 광내기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29 참조.)
바너클 일족은 자신들의 속내 혹은 정체를 가릴 뿐만 아니라 상대를 문화적으로 압도하는 장치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화술과 언변이다. 우리의 경우라면 주류 언론이 해줄 일―이른바 ‘프레임’ 만들기―을 여기서는 상류층의 언어문화가 행한다. 이들의 화술과 언변은 진심·진정성·정직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들의 문화에서는 “용기라든가 정직하고 진솔한 말”이 바로 “결점”이다.(3. 156) 그러나 그 언어문화의 세련됨만은 대한민국의 저급한 주류 언론이 백번 죽었다 살아나도 못 따라올 정도이며 이 세련됨을 문화적 우위의 징표로 삼는다. 이것을 더 자세히 말하려면 세심한 텍스트 분석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는 여기서는 부적절하니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른 글을 통해서 하기로 한다.
7) 재능 있는 사람을 싫어하고 진지한 사람을 싫어한다.
“지배세력은”―즉 바너클 일족은―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사람을 “범죄자들”로 간주하고 이들을 방해하는 “온갖 기죽이는 조치들”을 가한다. 이는 당연하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일 하는 법이 일 안 하는 법의 천적이자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이상 3, 160) 물론 이렇게 방해하는 것은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합리적인 자기 방어일 따름이었다. 모든 재능 있는 영국민에게 재능을 가질 거면 위험을 각오하라고 경고하는 현명한 체계, 즉 재능 있는 영국민을 괴롭히고 방해하고 (일을 불확실하고 어렵고 돈이 많이 들게 만듦으로써) 강도를 불러들여 그를 약탈하며, 잘 해준다고 해봐야 잠시 즐기게 한 다음에 마치 발명이 흉악범죄라는 듯이 재산을 압수해버리는 체계―에돌림청이 전력을 다해 지탱하는 이 체계의 기초가 그 점에 있었다. 바너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그 체계를 좋아했는데 이 역시 합리적일 따름이었다. 훌륭한 발명을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진지할 터인데, 그것만큼 바너클들이 질색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매우 합리적이었다. 엄청난 양의 진지성 때문에 고통받는 나라라면 바너클들이 순식간에 하나도 남김없이 자리에서 떨어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3, 160-61)
무능을 합리화하는 이러한 저급한 합리성이 받아들여질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한 바 있고 또 계속 목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 따개비들은 자신의 무능을 가리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상대를 ‘종북’ 혹은 ‘좌빨’ 등으로 부른다. ‘난 너희들이 싫어’라는 것 말고는 하등의 내용이 없는 말이다. 영국 따개비들도 비슷했다. 에돌림청의 타이트 바너클의 아들 클레런스 바너클(Clarence Barnacle)은 단지 무언가를 알아보고자 에돌림청을 찾아온 아서를 알려고 한다는―즉 진지하다는―이유만으로 “아주 지독한 과격분자”라고 불렀다.(1, 393) ‘첩자’라고 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인가? 4
8) 편협한 민족주의를 고취한다.
추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안위일 뿐인 바너클들에게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은 민족주의를 자신들의 신조가 아니라 국민 훈육 장치로 사용한다.
블리딩 하트 야드에는 이탈리아인 존 밥티스트(John Baptist, 이탈리아 이름으로는 Giovanni Baptista Cavalletto)가 있다. 외국인이 이곳의 사람들 속에서 살기는 힘이 드는데, 이는 이 사람들이 ① 외국인은 모두 칼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② 외국인은 모두 자기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원리가 일반적으로 적용되면 외국의 영국인들도 얼마나 많이 귀국해야 하는지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영국인의 입장에서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디킨스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③ 외국인이 영국인이 되지못한 것을 무슨 하늘의 재앙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심어 “훈육”시킨 것(2권 159)이 바로 바너클 가와 스틸츠토킹 가이다. 이들은
그들 두 거대한 가문에 복종하지 않는 나라는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항상 공식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선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와 같은 말을 믿자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최고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은밀하게 폄하했다. (2, 159)
블리딩 하트 야드의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대해 가진 편견들은 이 이외에도 더 이어지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를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밥티스트의 경우 이 편견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제대로 발휘되는 삶의 힘을 결코 넘지 못한다. 블리딩 하트 야드 사람들의 친절한 마음씨와 밥티스트의 미덕이 작용하여,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밥티스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는 일에 나설 정도로 양자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우애의 관계로 변하게 된다.
9) 바너클들의 목적
바너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는 결코 어렵지 않다. 이들은 공적 공간에 붙어사는 존재들이므로 개인들로서는 ‘자리’(공적 직위)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 개인이 아니라 가문 규모로 이루어지려면 자기들 사이에서 ‘자리’를 나눠가질 수 있어야 한다. ‘jobbery’라는 말이 쓰이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이용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고, 여기서 파생되는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기에) 줄 수 있는 자리를 이용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다. ‘자기 사람들’에게 자리를 분배하는 것은 후자에 포함된다. 사이비예술가 가원이 가문에 원망을 가진 이유는 가문이 자신에게 ‘한 자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원에게 “자신이 바너클 가의 일원”(3, 111)이라는 것은 “자신이 부자여야 한다”(같은 면)는 것과 동의어이다.) 대자본가 머들과 바너클 일족의 두목인 데시머스 경 사이의 거래(2부 12장)―머들이 바너클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대신에 데시머스 경이 머들의 아들 에드먼드에게 에돌림청의 ‘한 자리’를 주기로 한 거래―도 후자에 포함된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바너클 가의 존재에 어떤 영속성과도 같은 것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것을 부여하는 것은 근대 국가가 가진 에돌림청적 성격이다. 바너클들이 행정부에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의회를 비롯한 사회 상층부 전체에 분산되어 있지만, 그 중심지는 에돌림청이다. 근대 국가의 에돌림청적 성격을 맑스는 ‘국가 형식주의’(state formalism)라고 불렀다. 관료체제가 바로 이 ‘국가 형식주의’의 구현체이다.
관료체제는 스스로를 국가의 궁극적 목적으로 여긴다. 관료체제는 그 “형식적” 목적들을 내용으로 바꾸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실질적” 목적들과 충돌하게 된다. 따라서 관료체제는 내용이 형식인 체하고 형식이 내용인 체하는 수밖에 없다. 국가의 목적들은 부서의 목적들로 변환되고 부서의 목적들은 국가의 목적들로 전환된다. 관료체제는 아무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원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5
10) 바너클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바너클 가는 어디까지나 영국의 가문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제국주의 국가이고, 태양이 지는 곳이 없다고 자랑할 만큼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 관리는 우선적으로 공직자들의 일이다. 그런데 “공직을 임용할 수 있는 한 뙈기의 땅덩어리라도 태양이나 달 아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에 바너클 중 한명이 이미 그 자리에 달라붙어” 있다.(2, 330) 그 결과 “바너클 가의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게 되었다.”(같은 면)
우리는 “바너클 가의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게 되었다”는 말을 대영제국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 어디에나 공적이 영역이 있는 곳이면 그 영역을 사유화하는 따개비 같은 자들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자본이 간 곳에 자본주의가 전파되듯이 따개비들이 간 곳에 따개비 짓이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곳의 따개비들은 혈통과 상류문화에 기반을 둔 영국 바너클들과는 다른 토대를 가질 수 있다. 한반도의 경우, 일본 제국주의 따개비는 무력에 기본적으로 기반을 두었으며, 이들이 후퇴한 자리에 미국·소련 따개비들과 각각 내통하여 나라를 나눠 제각각 국가(공적 영역)를 세운 두 친미·친소 따개비 집단(이승만과 김일성이 그 두목들이다)은 주로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었다. 이 기본적 성격은 그 두목들이 사라진 지금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고 있다.
11) 따개비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사실 따개비들을 하나하나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속 새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따개비들을 모두 떼어내는 것―은 ‘공적인 것’ 자체를, 관료제를 사회적 삶에서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따개비로 바뀌는 일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료제를 없애고 정말로 일을 하는,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행정조직(살림조직)을 새로 구축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생각할 일이긴 하지만 당장 실현하기는 힘든 과제이다. 그러면서도 따개비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 빨리 제거할수록 나라에 이익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 세월호 침몰과 같은 재난들을 여럿 경험했고 또 앞으로도 그와 같은 재난들이 무수히 예상되는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모든 일에서 필수적인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 개개인이 자율적인 주권자로서 각성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무모하면서도 사악한 따개비들이 주권자들에게 가한 짓 덕분인지 이러한 각성이 2008년 이후 놀라울 정도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박근혜의 탄핵도 이루어졌으며 이제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탄핵을 전후하여 주권자들의 각성이 높아지면서 자신들이 달라붙을 자리가 없어질까 애가 달은 따개비들이 열심히 연막을 치면서 새로운 따개비밭을 만들 궁리를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연막에 속아 넘어가는 유권자들이 제법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가 과연 따개비 제거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주권자들에게 시험으로 던져져 있다. ♣
- 찰스 디킨스 지음, 장남수 옮김, 『작은 도릿』 1 (한국문화사 2014), 235면. 번역은 약간 손을 보았다. (이는 이 글의 다른 인용문에도 해당된다). 앞으로 이 작품에서의 인용은 한국어본 권수와 면수만 본문에 표기한다. 한국어본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본문으로]
- 한국어본에는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옮겨져 있다. [본문으로]
- 스틸츠토킹 가(the Stiltstalking)는 결혼을 통해 바너클 가와 연결되어 있는 귀족 가문이다. ‘stilt’는 명사로 ‘죽마’이고 동사로는 ‘죽마에 태우다’ →‘인위적으로 고양시키다’의 의미가 있다. 그러면 ‘stilts+talking’은 ‘인위적으로 거창하게 말하기’의 의미가 된다. [본문으로]
-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나중에는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몇 개월 동안 따라다닌 전담 염탐꾼이 있었다. 이 사람은 워즈워스가 ‘노자라는 스파이’(Spy Noza)를 거론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철학자 스피노자를 거론하는 것을 잘못 들은 것이었다. 직업이 사람을 만든다. [본문으로]
- Karl Marx,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Law", Collected Works vol. 3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6), 46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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