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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2―제너럴 부인들의 세계

제너럴 부인(Mrs. General)은 디킨즈의 걸작 소설 리틀 도릿)(Little Dorrit, 1855-57)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자 주인공 에이미 도릿(Amy Dorrit)과 그녀의 언니인 패니(Fanny)에게 상류사회의 예절과 일반적 교양을 가르치는 (“정신을 형성하는”) 가정교사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은 가정교사가 아니니 친구 혹은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해 달라고 하고, 에이미의 아버지 도릿 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제너럴 부인은 고위 성직자의 딸로서 거의 45세까지 노처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에서 상류사회를 주도하며 예의범절이라는 4두마차를 몰고 다닌다. (물론 비유다.) 그러던 중 병참을 담당하는 60세의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4두마차에 오른다.[각주:1] (역시 비유다.) 이 남편이 사망하고 그녀는 그의 유산을 기대했으나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그는 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녀를 속이고 결혼했다.)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상황에서 그녀는 가정교사가 될 생각을 한다. 한 홀아비의 딸을 맡게 되어 약 7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는데, 그 사이에 외국을 여행하면서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예의범절이라는 무기에 내 눈으로 안 보고 남의 눈으로 보기라는 무기를 추가한다. “7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할 잡다하게 많은 사물들을 대부분 보았다.자신이 가르친 딸과 홀아비인 그녀의 아버지가 모두 결혼을 하게 되어 제너럴 부인은 일을 그만두게 된다.

 

제너럴 부인은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상황에서 도릿 씨를 만나게 되며 1년에 400 파운드를 받고 도릿 씨의 두 딸 에이미와 패니를 가르치게 된다. 제너럴 부인을 처음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22장에서 작가는 제너럴 부인에 대하여 이렇게 알려준다.

 

그녀의 용모와 머리카락이 (마치 그녀가 어떤 빼어나게 품위 있는 방앗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 듯) 밀가루를 좀 바른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그녀가 보랏빛 분을 발라서기 때문이거나 백발이 되어서라기보다는 그녀가 전적으로 백악질의 피조물(chalky creation)이기 때문이었다.[각주:2] 만일 그녀의 눈에 표정이 없다면 이는 필시 표현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에게 주름살이 거의 없다면 이는 그녀의 정신이 그녀의 얼굴에 그 이름을 쓰거나 아니면 다른 것을 새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너럴 부인에게는 견해가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형성하는 방식은 정신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신적인 홈들 혹은 레일들로 이루어진 작은 순환궤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궤도 위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실은 작은 열차들을 출발시켰으며, 이 열차들은 결코 서로 따라잡지도 않았고 특별히 도달하는 목적지도 없었다. 그녀의 예의바름조차도 세상에 예의없음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너럴 부인이 그것을 제거하는 방식은 안 보이게 하는 것이며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정신을 형성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즉 모든 어려운 물건들을 벽장 안에 쑤셔 넣어 잠그고 나서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으며,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예의에 맞는 방식이었다.

  제너럴 부인에게는 충격적인 것을 말하면 안 되었다. 사고들, 구두쇠들, 관리들은 그녀의 앞에서 언급되면 안 되었다. 열정은 그녀의 면전에서는 잠들어야 했으며 피는 우유와 물로 바뀌어야 했다. 이 모든 빼내기를 한 후에 세상에 남는 얼마 안 되는 것이 바로 제너럴 부인이 광을 내는 분야였다. 이렇게 표면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가장 작은 붓을 가장 큰 통에 담갔다가 고려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의 표면에 광을 냈다. 그 대상이 깨져있으면 깨져있을수록 제너럴 부인은 더욱 광을 냈다.

 

요컨대 제너럴 부인을 특징짓는 어구는 표면을 형성하여 광내기이다. 이는 처음에는 한 개인의 처세하는 수단으로서 시작한다. 그러나 교육의 원리가 되고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특이성이 말살된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차원으로 상승한다. 그리고 현실을 그 풍요로움을 거세하고 표면만이 지배하는 차원으로 환원하는 메커니즘이 된다. 실제로 제너럴 부인은 도릿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면서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제너럴 부인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 놀라운 규모로 표면의 형성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표면에는 용기 혹은 거리낌 없이 나오는 정직한 말이라는 결함은 하나도 없었다.(27)

 

제너럴 부인의 표면아래에 정신은 없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녀는 보수로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 물어보는 도릿 씨의 물음에 가격을 직접 언급하기가 그렇다고 (예의에 어긋난다고) 피하면서도 이전에 자신이 얼마를 받았는지 보수를 준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방법을 슬쩍 가르쳐 준 다음에, 가르치는 학생이 두 명이니 1명에 대한 보수(300파운드)3분의 1을 더 얹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400파운드이다.) 물론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로 받는 보수를 늘리려는 것은 실상 그 자체만으로는 비난받을 일이라고 하기 어렵다. 문제는 그녀의 빛나는 표면아래에 있는 의도란 보수의 형태이든 남편의 재산의 형태이든 돈과 관련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첫 남편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그녀는 재산을 노리고 도릿 씨와 결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로서는 불행하게도 도릿 씨가 사망함으로써 이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를 말하면서 제너럴 부인과 그녀의 표면 광내기를 왜 이렇게 (이런 글로서는) 비교적 길게 이야기한 것인가? 제너럴 부인은 소설의 주인공도 아니고, 플롯상으로도 결혼에 성공하지 못한 채 해고당하고 마는, 별로 주목할 것 없는 인물 아닌가?

 

그렇지 않다. 최근 약 10~20년 동안 한국에서 성장한 신자유주의 문화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표면의 형성혹은 표면 광내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선 인물형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경험한 사람들 중에 제너럴 부인과 같은 행태를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상당수 있었다. 속을 항상 숨기고 입을 열면 유체이탈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 남이 확인하기 힘든 거짓말을 마음대로 활용하며, 앞에서의 행동(표면)과 뒤에서의 행동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앞에는 그럴듯한 가짜 표면을 내세우고 실제 자신은 그 뒤에서 암중에 움직이는 사람들......예전에는 이런 인물들이 권력에 발탁되지 못했다. 권력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시점부터 이들이 권력의 근처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소수지만 최상층 집단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형 차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너럴 부인의 특성은, 연장선을 잘 그어보면 철학과 정치의 중요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사실 내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다만 현재 집중해야 할 다른 일로 인해서 긴 글을 쓰기 힘들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수는 없다. 그래서 다음에 (신자유주의 문화 씨리즈가 아니라 별도의 글에서) 이 문제를 ‘서두 없이 바로’(ins medias res) 살펴보기 위해서 그 앞부분이라고 할 이 글을 오늘 빨리 일단락 짓고자 한다. 다만 정치의 문제와 관련하여 조그만 실마리만 남겨 놓기로 한다.

 

현대의 제도권 정치는 대의정치이고 대의정치는 제너럴 부인의 표면’에 입각한 정치이다. 정치인들은 열심히 '표면'(이미지)을 형성하고 광을 내며, '표면'이 빛나는 정도에 비례하여 표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이것은 사실이다. 최근의 한국은 그 중에서도 독특하다. '표면 광내기'보다 남의 '표면'에 흠집내기가 더 우세한 것도 그렇고, 대부분의 언론이 특정 당파를 위해서만 '표면 광내기 및 흠집내기' 작업을 하는 것도 그렇다. (보수언론들이 공들이는 이른바 '프레임설정'이란 것이 '표면'의 형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판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표면'이 가지는 가치에 휘둘린다는 점에서 똑같이 보인다. 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를 주장하고 싶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시 살아난 제너럴 부인을 영원히 과거로 돌려보내는 정치 말이다.

 

대의정치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니냐고? 무엇이든 시작은 있을 것이니, 세상에 시기상조란 없다. 성패에 관계없이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투표를 하지 말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표면이라는 근본적인 적을 알자는 것이다. 근본적인 적을 아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그 방향을 온전히 구현하는 어떤 가시적 선택지가 눈앞에 있으니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면 현재 존재하는 선택지들의 한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대상의 한계를 아는 것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서이다. 투표를 하자! 다만 돌파를 위해서!

 

 

 

 

  1. 영국에서는 1869년까지 민간인이 제복을 입고 병참일을 했다고 한다. 이는 이 소설이 출판되기 이전이다. [본문으로]
  2. 그녀가 분을 발랐거나 머리가 백발이 된 것이 사실의 차원에서는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디킨즈는 이보다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마치 분(백악질)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측면을 슬쩍 더 앞세운다. 그리고 이어서 제너럴 부인에게는 하얀 표면(face, 얼굴) 말고는 정신적 내용이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