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로렌스(D. H. Lawrence)의 글 민주주의(“Democracy”)3절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로렌스에게서도 민주주의의 문제는 활력 있는 삶의 문제이고 푸꼬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로렌스에게서도 활력 있는 삶의 문제는 주체의 변형을 핵심으로 한다. 고픈 배를 해결해줄 지도자를 눈이 지게 기다리는 태도에서 벗어나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자율적이고 자기계몽적인 개인들이 모여서 함께 자기변형하는 다중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달성과정이다. 로렌스가 말하는 주체의 변형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를 찾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이 포함된다. 그런데 불교에서 소승이든 대승이든 이 문제를 민주주의의 문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키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III 인격

 

사람의 자아를 나는 노래한다, 단순한 분리된 인격체를,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말한다, ‘집단으로라는 단어를.

 

풀잎의 시작부분이다. 이것이 휘트먼(Walt Whitman)의 주제 전부이자 그의 민주주의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전체적으로 그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위대한 자부심을 노래한다. 전체적으로 그는 인격을 노래하는 자(Chanter of Personality)이다. 인격이 아니라면 일체성[각주:1]이다. 일체성이 아니라면 개인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민주주의와 집단을 노래한다.

 

휘트먼에게서는 항상 진정한 것과 허위적인 것이 서로 매우 가까이, 서로 바꿔 넣을 수 있게 존재해서, 우리는 거의 불가피하게 분열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의 가장 큰 우상인 평균인’(the Average)을 숭배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각주:2] 또한 우리가 정체성에 진정으로 존중심을 표하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저 거대한 신비인 고유한 자아, 즉 모든 분리된 사람에게서 뚜렷하고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고유한 개인적 자아를 향해 모자를 벗어 존중심을 표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과거의 낡은 거대한 우상인, 모든 진정한 정체성을 집어삼키는 지고의 일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인격에 대해서는 이렇다. ‘인격체’(person)란 실제로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인격체는 사전에는 개별적 인간 존재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분명 인격체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는 매우 다른 의미를 풍긴다. 개성(개인성)을 가지는 것과 인격을 가지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 차이를 규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렇다. 그리고 한 인격체와 한 인간은 훨씬 더 뚜렷하게 구분될 것이다. 어떤 인격체들은 거의 인간 같지 않게 보인다.

 

어원이 이 경우에 도움이 된다.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는 배우가 쓰는 가면 혹은 극의 등장인물이다. 아마 이 단어는 ‘sonare’ 소리 내다/소리 나다’(sound)와 같은 어원을 가진 듯하다. 개인(individual)은 나뉘지 않는 혹은 나눌 수 없는 존재이다.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존재이다.

 

원래 배우의 가면이었던 것 혹은 전송되는 소리였던 것과 나뉘지 않는을 의미하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인격체에는 옛 의미가 배어있고 인격에서는 그것이 거의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격체란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바의 인간이다. 인격은 인격체에게서 그의 청중에게 전송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전송 가능한 효과이다.

 

훌륭한 배우가 인격을 띨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개성을 띨 수는 없다. 그 자신의 개성을 가지고 있거나 아무 개성도 없거나이다. 그래서 인격이 개성보다 훨씬 더 피상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더 휘발적인 것이다. 이 휘발성이 바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이다.

 

어떤 미국 소설의 한 문장을 보자. “나의 에고가 나에게 장난을 쳐서 내가 아기를 원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지. 난 남자를 원할 뿐인데 말이야.” 이는 완전히 곧바르고 명쾌한 진술이다. 그런데 저자의 에고와 저자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고는 분명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제2의 자아이다. 그것은 받아들여진 의식으로 구성된 몸체로서 그녀는 이 에고를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기성품으로 물려받았다. 이 둘째 자아는 매우 해로우며 그녀의 심층에 있는 진정한 창발적(spontaneous) 자아, 즉 그녀의 창조적 정체성에 어긋나는 매우 잘못된 것들을 그녀에게 지시한다.

 

에고 혹은 허위적 자아모든 개인에게 안장처럼 채워져 있는 의식적 존재는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해롭다. 개인은 이것을 이전 세대로부터 거의 통째로 물려받으며 이 끔찍한 몽마(夢魔) 아래 눌려 있는 창발적 자아를 끌고 다니느라고 생애를 다 보낸다. 이 몽마의 가장 치명적 부분은 물려받은 이상들(관념상들)[각주:3]이라는 죽은 납덩어리들이다. 모든 사람은 이상들로 된 맷돌을 목에 달고 태어나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목줄을 가지고 씨름하는 야수처럼 맷돌을 떼어내려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자신의 맷돌을 환상적인 색깔들로 치장하면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훌륭하게 혹은 환상적으로 치장된 맷돌이 인격이라고 불린다. 틀림없는 인격을 가진 사람을 한순간이라도 믿지 말라. 그는 분명히 삶의 반역자이다. 그의 인격은 배우의 가면과도 같은 것일 뿐이다. 그의 자의식적 에고, 그의 관념적인 자아가 가장하며 우쭐우쭐 돌아다니는 것일 뿐이다. 그 자신은 모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는 노린재이다.

 

관념적 자아, 이것이 인격이다. 관념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자아, 이것이 관념적 자아이다. 허위적이고 혐오스러운 산물이다. 이는 인간 자신의 로고스에서 창조된 인간이다. 인간의 머리에서 태어난 인간이다. 이는 자의식적 에고이며 고정된 관념들과 이상들로 구성된 존재이고 배우처럼 과시하면서 돌아다니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격이다. 이것이 예의 미국 여성 작가로 하여금 아기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 쏟아냄이 그녀의 독특한 형태의 인격이며 이것이 그녀를 미국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미국 남성들은 실제적 존재보다 인격들 및 에고들과 관계하기를 더 좋아하는데, 이는 인격들과 에고들이 어쨌든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즉 인과 법칙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격들과 에고들은 안전하며 계산 가능하다. 물질주의자들이고 ’(Force)물질’(Matter)로 구성되는 물질세계의 단위들이다.

 

관념은 빼고 관념론자들만 보면 이들은 완전한 물질주의자들이다. 이는 역설이 아니다. 관념 혹은 이상이란 결국 무엇인가? 삶의 살아있는 몸체로부터 추출된 것, 추상된 것, 고정되고 정태적인 존재일 뿐이다. 창조적 삶은 창발적 변이 가능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창조적 삶은 미리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소산물들을 산출한다. 그러나 이상은 그저 구축 중인 기계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엔진을 위해서 관념을 획득하며 그것을 강철과 동으로 만들어내는 데로 나아간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은 인간에 대한 어떤 이상들을 획득하여 살과 피로 고정된 정태적 존재로 만들어내는 데로 나아간다. 기계가 정태적 존재이듯이, 이상화된 인류도 정태적 존재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 진정한 적을 발견하고 싶으면 바로 여기에 있다. 관념론이다. 만일 이 적이 육화된 것을 발견하고 싶으면 여기에 있다. 인격이다. 만일 이 기계적인 작은 화신을 추동하는 증기(蒸氣)를 알고 싶으면 여기에 있다. 인류에 대한 사랑, 공익이다.

 

우리의 것과는 다른 이상들, 다른 형태의 인격들, 다른 종류의 증기도 존재해 왔다. 우리는 람세스 2세가 어떤 인격을 가졌는지, 어떤 종류의 증기가 피라미드들을 지었는지 모른다. 내 생각에는 무엇보다 지구상에는 매우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일 듯하다.

 

인류에 대한 사랑이 실제적이고 따뜻하며 개인적인 사랑과 동일한가? 말도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따뜻한 태양을 반사한 달빛이다. 증오스러운 반사이다. 인격은 개인적인 존재와 동일한가?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가면임을 안다. 관념론이 창조와 같은 것인가? 허튼소리이다. 관념론은 과거의 거대한 설계자들이 그린, 놀라운 인간 기계의 설계도에 불과하다. 신에게 컴퍼스 하나를 주고 측정해서 설계해보라고 한다? 참을 수 없는 허튼소리이다. 마치 창조가 컴퍼스에서 나왔다는 듯이. 차라리 칼라일처럼 인간은 끝이 갈라진 무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컴퍼스가 어쩌고 하는 말보다는 과녁에서 덜 벗어난 말이다.

 

삶을 두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정신에서 시작해서 하향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창조적인 활력원(the creative quick)[각주:4]에서 시작되어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데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대한 정신, 우주혼(Anima Mundi), 대령(大靈, Oversoul)[각주:5]이 공간을 떠다니면서 컴퍼스로 도안하고 모든 것을, 심지어 정서와 자기의식적 표현까지도, 비율에 맞게 만들었다고 보거나, 아니면 창조가 살아있는 존재들·사람들·동물들·식물들의 영원히 불가해한 활력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거나이다. 실제적인 살아있는 활력원 자체가 유일하게 창조적인 실재이다. 당신이 일단 이로부터 추상되면, 일단 보편자들을 일반화하여 정립하면, 당신은 창조적 실재를 떠난 것이며 정태적 고정성, 기계론적 메커니즘, 물질주의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이제 저 매력적인 인격이라는 교활한 늙은 새의 꼬리에 소금을 뿌려 잡아보자.[각주:6] 사실 새가 아니다. 자의식적이고 잰체하며 깃털이 달린 달팽이이다. 소금은 달팽이에게도 쓸모가 있다. 우리의 꽃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것이 달팽이이다. 이제 깃털에 더 이상 속을 필요가 없다. 어쨌든 이놈의 꼬리에 소금을 뿌리자.

 

우리의 민주주의에는 인격들이 필요 없다. 이상들도 필요 없다. 더 많은 인격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예쁜 이상들을 팔고 다닌다면, 우리는 그 손수레를 뒤집어엎을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인간의 자아는 그 자체에게 법이라고 말한다. 조심하라. 나는 그 자신에게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 자신의 관념적인 자아에 대해서, 그의 두뇌 속에서 자신이 잉태한 저 환상적인 작은 난쟁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의식할 때 그는 자신의 인격을 팔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에 대해서는 관념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아는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하늘에 감사하자. 불가해한, 발견할 수 없는 생생한 활력원이 우리를 삶의 분출로서 세상에 나오게 했다. 이는 정신(spirit)이 아니다. 정신은 단지 우리의 두뇌적 의식일 뿐이다. 포도주의 주정(酒精, spirits)이 살아있는 포도로부터 추출한 확정된 진액(essence)이듯이, 정신도 삶의 존재로부터 추출한 확정된 진수(essence)이다. 살아있는 자아는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정립의 대상이 아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가? 차라리 달이 하늘에서 태양을 정립하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이 낫다. 아니면 엄마의 스커트에 매달린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존재를 정립하는 긴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바로 2천년 동안 인간이 바쁘게 해온 일이다. 놀랍도록 어리석은 일이다!

 

자아의 활력원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 뒤로 돌아가 보려고 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태양의 뒤로 돌아가 보려고 하는 것이 낫다. 그것을 이상화할 필요도 없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꼬리가 온통 깃털투성이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에고와 인격이라는, 깃털이 달린 화려한 달팽이가 될 뿐인 것이다. 그것을 이웃에게 과시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이웃이 당신의 꼬리에 소금을 뿌릴 것이다. 당신은 이웃의 살아있는 영혼을 구제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극락의 전능한 신이라는 새이기에 당신의 이웃이 가진 거위 깃들이 당신의 그 사랑스런 참새 날개에 돋아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새는 자신의 깃털을 키워야 한다. 당신은 전능한 도도새가 아니다. 당신에게 돋아날 깃털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것 말고는 없다.



  1. 휘트먼의 ‘identity’는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의 ‘One Identity’이다. 그래서 ‘일체성’이라고 옮겼다. 로렌스는 여기에 개인마다 고유한 ‘정체성’을 대립시킨다. 로렌스가 말하는 ‘정체성’은 들뢰즈·가따리, 네그리가 말하는 ‘특이성’(singularity)에 가깝다. [본문으로]
  2. [옮긴이] 로렌스는 이 글의 1절에서 ‘평균인’을 비판한다. [본문으로]
  3. [옮긴이] 로렌스는 이 글에서 ‘idea’(관념)와 ‘ideal’(이상)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양자가 차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차이가 이 글의 취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ideal’(이상)이 특정의 ‘idea’(관념)가 추구의 대상으로서 상의 형태로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면, 결국 ‘ideal’은 ‘idea’로 소급된다. 영어로는 ‘idea’와 ‘ideal’의 친족관계가 시각적으로 금세 다가오지만, 우리말 ‘관념’과 ‘이상’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ideal’을 전체적으로 ‘이상’으로 옮기면서 (지금 이 주석이 달려있는) 맨 처음 나온 경우에 한해 ‘관념상’이라는, 친족관계를 드러내는 제2의 번역어를 괄호로 병기해주었다. 이 병기는 글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형용사 ‘ideal’은 맥락에 따라 ‘관념적(인)’ 혹은 ‘이상적(인)’으로 옮겨질 수 있고, ‘idealism’도 맥락에 따라 ‘관념론’ 혹은 ‘이상주의’로 옮겨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이 가운데 어느 쪽인지가 맥락상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옮긴이로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선택한 결과가 독자와 판단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양자는 사실상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읽는다면 이런 판단의 차이가 크게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4. [옮긴이] 대승불교에서 이 ‘the creative quick’에 해당하는 것이 ‘참나’[眞我]이다. 참나는 오온(五蘊)에 속하는 ‘에고’와 구분되며 그 자체로는 공(空)하고 청정하면서도 장차 오온으로 펼쳐질 수 있는 만법(萬法)을 담고 있다. 참나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넘어서 있으며 오온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따라 현실화된다. 참나의 다른 이름은 불성이며 기독교 용어로는 성령이다. 스피노자의 경우 ‘the creative quick’에 해당하는 것은 신(실체)에 담겨있는 것으로 본, 즉 영원의 상 아래에서 본, 활력의 관점에서 본 사물들이다. 이는 일정한 시간 및 공간과 관계되는 것으로 본 사물들(양태들)과 개념적으로 다르다. 사물들의 이 두 측면의 공존은 참나와 오온의 공존과 유사하다. 이 유사함을 시간의 측면에서 잘 설명해주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시계의 시간)과 ‘아이온의 시간’의 관계이다. 들뢰즈의 ‘분화’(differenciation) 개념은 잠재성의 차원에 존재하는 무한한 만법이 현실성의 차원으로 현실화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차이와 반복』의 4장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5. [옮긴이] ‘oversoul’은 미국 초절주의자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개념이다. [본문으로]
  6. [옮긴이] 아이들에게 새의 꼬리에 소금을 뿌려서 잡을 것을 농담처럼 권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도도 minamj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