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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

도둑


몇 주 전에 집에 도둑이 들었다. 밤새 후배들과 술을 신나게 마시고 이른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찬바람이 어디선가 훅 불어온다. 보니까 현관 맞은편의 현우 방에 창문이 조금 열려 있다.

현우가 왔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현우 방과 안방의 옷장에서 옷들이 다 끄집어져 나와 있고 방안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찾은 흔적이다. 아마도 현금이나 귀금속을. 현우가 아닌 도둑이!

물론 나의 집에는 그런 것이 없다. 옷장이 아니라 다른 어디에도 없다. 찬장에도 없고, 냉장고에도 없고 신발장에도 없다. 현금은 내 호주머니의 지갑에 든 게 전부이고 내 소유의 귀금속이란 아예 없으므로. 크기 대비 가격으로 보자면 현재 나의 최고의 재산은 거실에 놓여있는 맥북인데 이 도둑은 다행히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는 유효하긴 하지만 안 쓰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지갑에 넣어 양말 서랍에 넣어 놓았었는데 이 카드도 멀쩡하게 그냥 있다.

현우 서랍에는 '딸라'가 조금 든 지갑과 별로 무게가 안 나가는 평범한 반지가 두 개 있었는데 (이는 그 당시 나는 몰랐던 일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멀쩡하다. 이 도둑은 옷장만을 뒤지는, 아마 매우 전문화된 '프로'들인가 보다.

도둑이 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밤새 마신 술을 깨야 하니 일단 잠을 청했다. 오후, 하고도 좀 늦게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일종의 '수사'를 해보니 도둑은 현우 방의 창문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내 집은 아파트 4층이라서 스파이더맨 도둑의 표적인 될 수 있는 높이인데도 창문을 전혀 잠가놓지 않는 나의 습관이 도둑을 초청한 것이다. 도둑은 아마 바깥으로 기어 올라와서 현우 방 창문으로 들어와 아주 짧은 시간에 옷장 두 개를 뒤진 후 현관문으로 재빠르게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무슨 집이 가진 게 이렇게 없느냐고 투덜거렸을까? 아니면 일종의 동정 비슷한 말을 욕에 섞어 뱉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나는 이들에게 아무런 부정적 계열의 느낌―찝찝함, 불쾌함, 두려움 등등―을 느끼지 못했다. 도둑이 들고 나면 기분이 나쁘다는데, 찝찝하다는데, 무섭다는데... 처음에는 술에 취한 상태라서 배짱이 커졌기에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술이 깬 다음에도 여전히 나는 도둑들에게 별다른 부정적 감정을 못 느끼고 있다. 현재까지 그렇다. 개인적으로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미세하게나마 현우 방과 안방에서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지우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지금도 그냥 있다. (미세해서 식구들은 모른다.) 발자국이 찍힌 하얀 색의 셔츠들은 빨아서 다시 입고 있다. 내가 기분이 안 좋다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다.

무슨 현장보존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신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여러 집을 다녀갔는지 며칠 후에 도둑을 조심하라는 전단을 관리실에서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전단에 ‘우리 아파트에 도둑맞은 세대가 있다’는 말은 없지만 말이다. 아마 어느 집에선가는 의외로 큰 피해를 입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쳐도 이 도둑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물론 내가 집에 들어오다 도둑과 맞닥뜨렸으면 큰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나는 한참 동안을 생각했다. 이런 내가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설명인지 새삼스런 발견인지 모를 것에 도달했다. 신자유주의적 풍토가 대한민국에 뿌리를 박아온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주위에 합법의 탈을 쓴 뻔뻔스럽고 지저분하며 잔인하기 짝이 없는 도둑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런 나에게는 그저 어둠 속에 숨어있을 뿐인 스파이더맨 도둑들은 정말로 겁많은 좀도둑으로밖에는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 주위에 즐비한 신자유주의적 유형의 도둑들은 거의 모두가 사회의 이른바 ‘지도층’에 속하거나 돈이 많은 자들이다. 이들은 과거의 군사독재 유형과 다르다. 군사독재자들이 법을 초월하는 무력을 그 권력의 토대로 삼는 반면에 신자유주의적 도둑들은 합법을 형태를 빌어서 모두의 것(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그리고 다른 개인들의 것(사적인 것)을 자신의 재산(사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들이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 ‘변별적 특징’이 어디에 있느냐가 핵심이다.) 이러한 식의 도둑질을 점잖은 용어로 ‘사유화’(privatization)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골프장 건설자가 필요한 땅을 80%(85%인가?) 확보하면 나머지에 해당하는 주위의 땅을 강제로 수용할 수 있게 법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골프장은 공적인 것이 아닌데 공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라나. 그러면 나머지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땅과 집을 강탈당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재개발도 이와 비슷한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용산 참사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또한 (한국에서는 대학들이 심하게 뻥튀기로 선전되어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일이지만) 많은 대학들에서 사회 전체를 위해서 써야 할 자원을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용하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 현상은 또 어떤가?

이러한 ‘사유화’는 고전적인 자본가가 행하는 '착취'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착취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착취의 증대의 과정은 곧 생산력의 증대의 과정이다. 그러나 ‘사유화’를 행하는 이들 신자유주의적 도둑들은 생산력을 증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을 사유화를 통해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을 낮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전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생충들이다.

사실 지금 선진국들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유독 대한민국이 극성스럽게 신자유주의적이다. 보라! '사장님'이 일반적인 호칭이 된 나라, '부자되세요'가 인사인 나라, 무슨 짓을 해도 돈만 벌면 최고인 나라, 이런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는가? 그런 나라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적 유형의 도둑들의 천국에 다름 아니다.

이런데도 내가

이쁘게도 옷장만 뒤지고 가주신 이 도둑들에 대해,

불법을 합법이라 우기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나름대로 떳떳하게

근대식의 '절도기술'로 승부하는

이 시대착오적인 도둑들에 대해

기분 나쁜 느낌을 특별하게 가질 수가 있겠는가.

물론 나는 이들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나누는 것은 덕이지만, 빼앗는 것도 덕이 아니고 빼앗기는 것도 덕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나의 것을 이들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이들과 맞부딪치면 아마도 싸울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싸우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합법적인 신자유주의적 도둑들과 싸우는 일이다.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자들은 스파이더맨 도둑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서 멀쩡하게 사회인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사회를 위해서는 단 한 조각의 덕 있는 행동도 하지 않는 바로 이 자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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