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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

‘사실’과 음모







사실과 음모

 

이내 그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음모가 진행 중일 것이다.

장영훈, 천하제일5

 


음모의 신자유주의

 

난 대학교에 재직하던 중 어느 시점에 , 이것 봐라, 악당들이 항상 상황을 앞에서 몰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을 불현듯 갖게 되었다. 여기서 이란 도덕적 개념이 아니다. 대학의 본연의 일인 연구와 교육을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삼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 연구와 교육을 훼손하는 행동이나 사고를 말하며, ‘악당은 그런 행동과 사고를 이러저러한 이유로 적어도 일정한 시기 동안 집중적으로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론상 누구라도 일정한 만큼은 악당이 될 수 있으며, 또 그 반대로 아무리 악당이라도 악을 넘어설 수 있는 면이 잠재해 있다. 얼마나 많은, 개인적으로는 착한교수들이 연구와 교육을 망치는 변화를 묵인하였던가!)

 

그리고 앞에서 몰고 간다는 것은, 이 악당들이 (상당히 많은 경우 개혁의 이름으로!) 무언가 일을 먼저 벌이고 일반 교수들은 그 뒤를 따라 그 일에 자신을 맞추느라고 허덕대는 것을 말한다.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는 일반 교수들로서는 대학의 구조에 무슨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자신과 학생들의 지적·정서적 능력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에 집중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 힘들다. (“자신과 학생들의 지적·정서적 능력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에 대학행정이 더 잘 지원해주도록 만들기 위해서 대학의 구조에 무슨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세상에 그보다 좋은 일이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행정이 연구와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대학이 신자유주의화된 이후 그림자조차 사라졌다.) 그래서 대학의 구조에 무슨 변화가 생기면 연구와 교육에 할당하기에도 부족한 시간 가운에 일부를 덜어내어 그 변화에 적응하는 데 써야하기 때문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악당들의 경우 무엇보다도 보직의 형태로 연구와 교육에서 일정하게 해방되어 있다. 그리고 연구와 교육과는 다른 목적사실상 연구와 교육에 해롭지만, 신자유주의화에 길들여진 사회에 의해 용인되는 목적이다을 위해 학교에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는 일에 주력하도록 명받는다.’ 이들은 열심히 이 다른 목적을 위한 계획들을 만들어낸다. (드물게 창안하고 대체로 베낀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들을 개혁혹은 학교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이것들이 연구와 교육의 증진을 위한 것처럼 꾸며야 한다. 그래서 태스크포스, 위원회, 공청회 등등 모든 그럴 듯한 절차를 다 거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그럴 듯하게 공식적으로 문서화된다. 문서화된 것이 언론을 통해 공식적 사실로서 제시된다. 그러니 문서화되고 사실로서 제시되는 것은 그저 외부를 향한 표면일 뿐 결코 실재(reality)가 아니다이들이 정말로 하는 일은 이러한 표면아래, ‘사실의 뒤에 숨어있다. 다시 말해서 항상 음모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과 음모의 이러한 관계는 이는 특정 대학만이 아니라 중앙 정부를 비롯한 거대한 국가장치들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표면사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일반적인상황은 디킨즈의 리틀 도릿(Little Dorrit, 1855-57)에 등장하는 제너럴 부인(Mrs General)을 생각나게 한다. 모든 보기 싫고 곤란한 것들을 제거하고 남는 현실의 일부를 갈고 닦아 광나는 표면으로 만들어서 그 모든 보기 싫고 곤란한 것들을 안 보이게 하는 것이 그녀가 하는 일이다.

제너럴 부인에게는 충격적인 것을 말하면 안 되었다사고들구두쇠들관리들은 그녀의 앞에서 언급되면 안 되었다열정은 그녀의 면전에서는 잠들어야 했으며 피는 우유와 물로 바뀌어야 했다이 모든 빼내기를 한 후에 세상에 남는 얼마 안 되는 것이 바로 제너럴 부인이 광을 내는 분야였다.[각주:1]

디킨즈의 소설에서 이 표면이 교육을 통해 전달되는 지식의 형태를 띤 것이 바로 사실’(fact)이다. 디킨즈의 또 다른 걸작인 어려운 시절(Hard Times, 1854)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공리주의 교육 비판인데, 아마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최초로 시작되었을 당대 영국의 공리주의 교육은 사실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교육자이면서 나중에 의원이 되는 그랫그라인드(Gradgrind)[각주:2]는 자신의 학교의 선생[각주:3]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오이 학생들에게 사실만을 가르치시오살아가는 데는 사실만이 필요한 거요사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심지 말고 사실 이외의 모든 것을 뽑아 버리시오사실에 기초할 때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거요학생들에겐 사실 이외의 어떤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소이것이 내가 내 자식들을 키우는 원칙이고이것이 내가 이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원칙이오사실만을 고수하시오선생!” 

사실만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가? 아이들의 머리 안에 숨어있는 상상력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모르지아나가 항아리에 숨은 도적을 끓는 기름을 부어죽이듯이 죽이는 것이며, 궁금해 하고 의아해하는 태도를 금지하는 것(“Never wonder”)이다. 디킨즈는 이렇게 키워진 아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를 그래드그라인드가 자랑하는 자식들 가운데 둘감정의 결핍으로 사랑과 관련된 판단의 능력을 상실한 루이자(Louisa)의 경우와 오직 자신만을 위하다가 범죄자가 된 톰(Tom)과 그의 학교의 모범생인 자기이익 추구의 화신 빗처(Bitzer)를 통해 보여준다. (빗처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25 참조.)

 

다른 방식으로도 사실교육의 문제점이 제시된다. 씨시(Sissy)는 곡마단에 속한 아이이며, 따라서 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래드그라인드로부터 말을 정의하라는 요구를 받은 씨시는 혼비백산한다. (씨시는 그날 학교에 처음 왔다.) 그러자 그래드그라인드는 작은 주전자들[각주:4]을 위해 상황을 정리해준다. “20번 여학생은 가장 흔한 동물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아는 사실이 전무하군!” 그리고 빗처에게로 과제를 넘긴다. 빗처는 다음과 같이 우등생답게 말을 유창하게 정의한다.

네발짐승초식동물이빨은 마흔 개로 어금니 스물네 개송곳니 네 개그리고 앞니 열두 개봄철에 털갈이를 하고 습지에서는 발굽갈이도 함발굽은 단단하지만 편자를 대어붙여야 함나이는 입 안쪽의 표시로 알 수 있음.” 

 이러한 극적 아이러니곡마단이 자기 집이니 사실상 말[]에 대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아이가 말을 가장 모르는 열등생이 된 것 는 그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에게는 사실의 인식론적 결점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이러한 교육은 경제학 교육에서 일종의 정점에 이른다. (공리주의나 정치경제학이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수량적 측정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양자는 강력한 공범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공범관계는 이 소설에서 그랫그라인드와 산업자본가이자 은행가인 바운더비Bounderby의 친분으로도 표현된다. 그랫그라인드는 바운더비의 절반 나이밖에 안 되는 자신의 딸을 바운더비에게 시집보낼 정도이다.)[각주:5]

 

경제학 교육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씨시가 속한 학급이 하나의 국가라고 가정하고 그 국가에 오천만 파운드의 돈이 있다면 이 국가는 부유한 나라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씨시에게 던져진다. 씨시는 누가 얼마나 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얼마라도 제 돈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부유한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또한 그 교실이 하나의 도시라고 가정하고 시민이 백만 명인데 1년에 스물다섯 명만이 길에서 굶어죽는다면 이 비율에 대한 견해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씨시는 굶어죽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수가 백만이든 그것의 백배이든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씨시의 대답그녀 자신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대답속에 현기(玄機)가 들어있음을 감지해야 한다. 근대 자본주의와 함께 들어선. 특이성을 말살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항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제너럴 부인의 이름이 제너럴’(general)인 것은 그녀가 바로 특이성을 말살하는 사고방식의 화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특이성의 말살과 (‘표면혹은 사실을 통한) 진실의 은폐는 근본이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랫그라인드식 교육을 통해 어린 세대에게 심어질 뿐만이 아니라 매스미디어를 통해 성인들에게로 전파된다.

 

 

사실과 매스미디어

<계속>

  1. 제너럴 부인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29 참조. 『리틀 도릿』은 최근에 『작은 도릿』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2. 이 인물은 “a man of facts and calculations”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에서 ‘grind’는 ‘갈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여기에 작자가 ‘grad’를 붙여 의미를 더 강하게 만든 듯하다. 그래서 ‘Gradgrind’는 ‘들들 갈아대다’ 정도의 의미를 띤 것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그의 사고방식에 기반을 둔 교육은 아이들의 정신을 들들 갈아대는 교육이다. 이 등장인물의 이름을 가지고 만든 ‘Gradgrindism’은 공리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3. 이 선생의 이름은 ‘M'Choakumchild’이다. 이 이름을 분해하자면, 접두어 ‘M’는 빼고 ‘Choakumchild’는 ‘choke them children’의 축약형이 된다. 즉 아이들을 질식시킨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본문으로]
  4. 사실이 주입될 대상인 학생들. [본문으로]
  5. 보통명사 ‘bounder’에는 ‘졸부’라는 의미가 있다. 모든 자본가들은 전통적인 부자들인 지주들과 비교하면 졸부일 것이다. 졸부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부에 걸맞은 문화의 부재이다. 한국의 재벌들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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