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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운동

공동체적 생산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한 대목

[커머니즘 연구]

 

다음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맑스가 화폐(교환가치)를 분석하다가 화폐(교환가치)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공동체를 철학적으로 분석해내는 부분입니다. (펭귄 영어본으로 171-73에 해당.) 생산의 사회화를 더 밀고 나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맑스가 말하는 바는 실상 현대 자본주의 속에 특히 삶정치적 생산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를 그에 합당한 제도들로 현실화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겁니다. 기본소득 같은 것이 이 제도들 가운데 하나겠죠. 

자본론』은 자본의 논리를 분석해내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본의존재를 익숙한 것으로,자연스러운 것으로, 불변의 법칙으로 다가오게 하는 뜻밖의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실제로 가치법칙을 마치 맑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인 양 옹호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 과학적 타당성은 차치하고요.) 가치법칙의 옹호는 자본주의의 옹호이고 이는 맑스와는 정반대 방향인데도 말이죠. 이에 반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자본주의를 일시적, 과도적 존재로 보게 해줍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들 가운데에는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그리고 자본의 발전의 정점에서) 자본주의 너머로의 이행을 분석, 통찰한 대목들이 속합니다. 아래는 그 대목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맑스는 아래의 대목이 속한 맥락에서 두 가지 경우의 일반성(일반적 노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경우는 고전적인 자본주의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개별적인 노동에 의해 산출된 개별적인 생산물이 교환과정을 통해서 화폐로 전환됨으로써사후적으로 일반성을 띠게 되는 경우이며, 둘째 경우는  공동체적 생산에의 참여를 통해 교환 이전에 이미 일반성을 띠게 되는 경우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화폐로의 교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명시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소득은 임금과는 다른 형태로 주어져야겠죠. 

아래에서 대괄호는 옮긴이의 삽입입니다. 정식 번역은 아니니 정밀한 참조를 위해서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한국어본을 이용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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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자체는 그 자체로는 주체적으로만(nur subjektiv), 활동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노동시간이 그 자체로 교환 가능한 한 (그 자체가 상품인 한) 노동시간은 양적으로만이 아니라 질적으로 특수하고 상이하다. 결코 일반적인, 자기등가적인 노동시간이 아니다. 특수한 상품이나 생산물이 일반적 노동시간에 그 객체(대상)으로 상응하지 않듯이, 주체로서의 노동시간도 교환가치를 규정하는 일반적 노동시간에 상응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특수한 상품과 병행하여 일반적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스미스의 생각, 바꾸어 말하자면 노동자는 그의 생산물들 가운데 일부에는 화폐의 형태를 부여해야 한다는, 더 일반적으로는 그에게 사용가치로서 기능하지 않고 교환가치로서 기능할 상품의 모든 부분을 화폐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스미스의 생각은, 노동자의 특수한 노동시간이 다른 모든 특수한 노동시간과 직접 교환될 수는 없다는 말, 그 일반적 교환가능성이 먼저 매개되어야 한다는 말, 그 일반적 교환 가능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객체적 형태, 자신과는 다른 형태[화폐]를 띠어야 한다는 말이 주체적으로 표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

 

생산행동 자체에서 바라본 개인의 노동은 그가 그의 특수한 활동의 객체인 생산물을 직접 사는 화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특정의(bestimmte) 생산물만을 사는 특수한(besondere) 화폐이다. 직접적으로 일반적인 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특수하지 않고 일반적인 노동이어야 한다. 즉 처음부터 일반적 생산에서의 연결고리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에 일반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교환이 아니다. 전제된 공동체적 성격(ihr vorausgesetzter gemeinschaftlicher Charakter)이 생산물들의 분배를 결정한다. 생산의 공동체적 성격이 생산물을 처음부터 공동체적이고 일반적인 생산물로 만들 것이다(Der gemeinschaftliche Charakter der Produktion würde von vornherein das Produkt zu einem gemeinschaftlichen, allgemeinen machen). 생산에서 원래 일어나는 교환은 (이는 교환가치들의 교환이 아니라 공동체적 욕구와 공동체적 목적에 의해서 결정되는 활동들의 교환이이라) 애초부터 생산물들의 공동체적 세계에의 개인의 참여를 포함한다. [첫째 경우에] 노동은 교환가치들에 기초하여 교환을 통해서만 일반적인 것으로 정립된다. 그러나 이 [둘째 경우의] 토대 위에서는 교환 이전에 그러한 것으로서 정립될 것이다. 즉 생산물들의 교환이 결코 개인의 일반적 생산에의 참여를 매개하는 매체가 아니리라. 매개는 물론 일어난다. 개인들의 독립적 생산에서 출발하는 첫째 경우에는 (172) (이 생산의 사례들이 사후에 상호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얼마나 결정하고 변경하든지 간에) 매개가 상품들의 교환을 통해, 교환가치를 통해, 화폐를 통해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은 동일한 관계의 표현이다.

 

둘째 경우에는 전제 그 자체가 이미 매개되어 있다. 즉 공동체적 생산, 공통체성(eine gemeinschaftliche Produktion, die Gemeinschaftlichkeit)이 생산의 토대로서 전제된다. 개인의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서 정립된다.(Die Arbeit des einzelnen ist von vornherein als gesellschaftliche Arbeit gesetzt.) 그래서 그가 창조하거나 그 창조작업을 돕는 생산물의 특수한 물질적 형상이 무엇이든, 그가 자신의 노동으로 산 것은 특정의 특수한 생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적 생산에의 특정의 참여이다. 따라서 그는 교환해야 할 특수한 생산물이 없다. 자신의 생산물은 교환가치가 아니다. 생산물은 각자에게 일반적 성격을 가지기 이전에 먼저 특수한 형태[즉 화폐]로 옮겨져야 할 필요가 없다. 교환가치의 교환에서 필연적으로 창출되는 분업 대신에 각자가 공동체적 소비에 참여하게 되는 노동의 조직화가 발생한다. 첫 경우[화폐의 매개가 필연적인 경우]에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물이 교환가치로 고양되고 이 교환가치들이 교환됨으로써 사후에 정립되었다. 둘째 경우에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전제되며, 생산물들의 세계에의 참여, 즉 소비에의 참여는 서로 독립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이 활동하는 사회적 생산조건들을 통해서 매개된다. 따라서 각자의 노동을 (자신의 생산물 또한) 직접적으로 화폐, 실현된 교환가치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노동을 직접적으로 일반적 노동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노동이 화폐와 교환가치로 되어야 하는, 그리고 사적인 교환에 의존하는 조건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요구는 그것이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 조건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 교환가치에 기초한 노동은 개인의 노동도 그의 생산물도 직접적으로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산물이 이 대상화된 매개를 통해서만, 자신과는 상이한 화폐를 통해서 비로소 일반적 형태를 띤다는 것을 전제한다.

 

공동체적 생산의 기초 위에서는 물론 시간규정(Zeitbestimmung)이 본질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사회가 밀, 가축 등을 생산하는 데 시간을 덜 들일수록 다른 물질적·정신적 생산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개인의 경우에 그 발전의 전면성, 그 향유와 활동이 시간의 절약(Zeitersparung)에 달려있다. 모든 경제는 궁극적으로 시간의 절약으로 수렴된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전반적 욕구에 적합한 생산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을 합목적적으로 분배해야 한다. 이는 개인이 적절한 비례로 지식을 얻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활동에 대한 다양한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을 정확하게 분배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렇듯 시간의 경제가 생산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 노동시간을 계획적으로 분배하는 것과 함께 공동체적 생산이라는 토대에서 제1의 경제법칙으로 남아있다. 실상 거기서 더 높은 정도로 법칙이 된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노동시간으로 교환가치(노동 혹은 노동생산물)를 측정하는 것과는 상이하다. 동일한 노동부문에서의 각자의 노동과 노동의 상이한 종류들은 양적으로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르다. 사물들 사이의 단지 양적인 차이란 무엇을 전제하는가? 그 질들의 동일성이다. 따라서 노동의 양적 측정은 등가성, 그 질의 동일성을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