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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권력의 '벡터'적 성격에 관하여





권력의 뿌리를 뽑기

권력의 벡터적 성격에 관하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그러나 천지불인(天地不仁), 돕는 하늘이란 없다.

스스로를 돕는 우리 자신만이 있다.

아니, 우리가 바로 하늘이다.


메켄지 워크(McKenzie Walk)는 그의 해커 선언(A Hacker Manifesto,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벡터 계급’(the vectoralist class)을 포착해낸다. 그에 따르면 벡터 계급은 자본가 계급보다 더 나아간 지배계급, “우리 시대에 새로 출현하는 지배계급이다.”

 

이 벡터 계급을 이해하려면 벡터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하고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기본 아이디어는 이렇다. 토지는 자연 사물 그 자체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추상하여 법적 사물(재산)로 만들면 이것을 워크는 법적 해킹’(legal hack)이라고 부른다 토지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추상화된 사물로서 재산으로 변형된 토지는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렇듯 추상이란 물질적·현실적 차원에 속하는 실재를 비물질적·잠재적 차원의 실재로 전환시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질적·현실적 차원에 속하는 실재 위에 비물질적·잠재적 차원의 실재를 포개는 것, 두 차원을 마디결합시키는 것이다.

 

토지의 재산으로의 전환에서 보듯이 추상의 수준이 높아지면 흐름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생산자 개인에게 딱 붙어있던 생산능력도 추상적으로 되면서 (즉 노동력이 되면서) 사유재산이 되어 교환(판매·구매)의 방식으로 혹은 이주의 방식으로 이동하는 흐름의 성격을 띠게 된다. 워크가 말하는 벡터는 무언가를 옮기는 매체, 혹은 무언가가 흐르는 통로이다. 물은 콜레라를 옮기는 벡터이고 여객선은 해상에서 승객들을 옮기는 벡터이다. 일단 추상에 의해 흐름의 성격이 부여되는 것은 각 추상의 수준마다 거기에 상응하는 벡터가 존재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추상적인 흐름인 정보의 통로를 독점하여 사유재산을 증식하는 계급이 바로 벡터 계급이다.

 

워크는 벡터 계급을 포함하여 세 개의 지배계급을 구분해낸다. 토지계급, 자본가계급, 벡터계급이다.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독점한 계급이 토지계급이고, 이 토지로부터 추상된 자본을 독점한 계급이 자본가계급이며, 자본으로부터 추상된 정보를 독점한 계급이 벡터계급이다


토지계급 농업계급

자본가 계급 노동계급

벡터 계급 해커 계급

토지

목초지, 농지

자본

, 제작소

정보

정보의 비축, 흐름, 벡터

지대

이윤

마진

추상도

추상도

추상도

독점가능성

독점가능성

독점가능성

법의 힘에의 의존성

법의 힘에의 의존성

법의 힘에의 의존성


워크에 따르면 위의 표에서 보듯이 독점하는 대상의 추상도(=흐름의 정도)는 토지에서 정보로 갈수록 높아지지만, 독점가능성은 토지에서 정보로 갈수록 낮아지고, 그만큼 법에의 의존성은 높아진다. 추상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흐름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벡터는 바로 이 흐름을 독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흐름은 길을 형성한다. 그러한 둑을 세우고 방벽을 세워 특정의 수로를 만들어 놓으면 흐름을 그 길로만 가게 된다. 이것이 벡터이다. 이럴 때 그 길을 막으면 삶의 흐름이, 물질의 흐름이 정지하게 된다. 그러면 통과를 위한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독점적 전유, 혹은 재산을 낳는다. 흐름이 거세면 둑과 벽을 허물 정도로 넘쳐흐르겠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넘쳐흐르지 못하면 길을 막은 힘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산적이 길을 막고 있다고 해보자. 다른 길로 갈 수 있다면 모를까 그 길을 반드시 가야한다면, 산적을 무찌르고 통과하거나 산적에게 통행세를 내고 통과하거나 아니면 산적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뺏기거나 세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산적이 우월한 무력을 갖춘 경우에는 뒤의 두 가지 경우만 남는다. 벡터 권력은 처음에는 바로 이런 식으로 형성되는 것이다.[각주:1]

 

자본의 시초 축적이 바로 이렇게 일어났다. 공유지를 비롯한 토지로부터 축출됨으로써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된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원자들이 된 생산자들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유재산으로 전환된 노동력을 판매해야했는데, 상인자본으로 모여있던 화폐가 이 노동력을 흡수하는 통로를 독차지함으로써 자본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벌거벗은 주체성으로서만 남은 생산능력[각주:2]이 생활수단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된 화폐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이 된 노동력을 통행세로 치러야 하는 상황이 자본을 권력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모든 현대인들에게 당연한 이 메커니즘이 그 당시 땅에서 축출된 노동자들에게는 처음으로 겪는 것이었다.)

 

이렇듯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노동력을 생산수단에 전달하는 벡터의 역할을 독차지한다는 면(생산의 측면)에서, 그리고 생활수단을 노동자에게 전달하는 벡터의 역할을 독차지한다는 면(소비의 측면)에서 권력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화폐 일반에게 확대되어 화폐가 물신(物神)의 위치에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물신의 힘이 물신 자체에 있지 않듯이, 화폐의 권력은 (이어지는 인용문에서 맑스가 말하듯이) 화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지 및 봉건적 토지관계가 파괴되고 새롭게 자리를 잡은 보편화된 교환관계에서 화폐가 차지하는 벡터 독점적 위치 때문인 것이다. 모든 길은 화폐를 거쳐서!


모든 생산자가 자신의 상품의 교환가치에 의존하는 식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면 질수록, 생산물이 실제로 교환가치가 되고 교환가치가 생산의 직접적 대상이 될수록, 그럴수록 화폐관계가 발전하게 마련이며 화폐관계 즉 생산물들이 화폐로서의 자신과 맺는 관계에 내재한 모순이 발전한다. 교환의 욕구와 생산물들의 교환가치로의 전환은 분업과 함께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함께 전진한다. 그러나 이것이 커지는 정도로, 화폐의 힘도 커진다. 즉 교환관계가 생산자들의 외부에 그들로부터 독립한 힘으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원래는 생산을 촉진하는 수단이었던 것이 생산자들에게 낯선 관계가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생산자들이 교환에 의존하게 됨에 따라 교환은 그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나타나며 생산물로서의 생산물과 교환가치로서의 생산물 사이의 간극이 벌어진다. 화폐가 이러한 대립과 모순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순과 대립의 발전이 초월적인 것처럼 보이는 화폐의 힘을 낳는다.[각주:3]

여기서 맑스는 사실상 그가 모순과 대립이라는 헤겔의 언어로 말한 것, 화폐를 권력으로 만든 바로 그것의 근본적 원인을 함축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교환관계의 보편화란 공동체적 관계 및 행동을 상실한 원자화된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이다. 이것을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다른 곳에서는 사물에의 의존성에 기초한 사적 인간들의 독립성라고 불렀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여기서 독립성이란 자율성, 자치, 자기조직화의 정반대이다. 오랫동안 공유지에서 생산(경제)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왔던 개인들은 이제 먹을 것은 자본에 의존하고 정치적 행동은 국가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자본(화폐)의 이러한 벡터적 측면은 맑스가 소외라고 부른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맑스가 말하는 소외의 핵심은 본래 개인들의 관계에 내재하던 사회적 관계가 개인들의 관계로부터 소외되어 개인들의 외부에 존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들이 가진 힘이 화폐 벡터를 통해 자본가들에게로 이월됨으로서 자본이 권력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외의 관점에서 자본을 보는 것은 곧 권력의 관점에서 자본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에 대한 맑스의 통찰을 그의 초기의 낭만적 미숙의 표현으로 치부하는 것은 자본을 권력으로 보는 관점을 포기하는 것이며, 이러한 포기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영속화에 부지불식간에 기여하는 쪽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근대 국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권력을 획득한다. 원래 국가가 초기의 주권적 권력의 소재지였을 때에 그 주권자인 군주의 권력은 벡터로서의 성격을 가진 권력이 아니라 직접 행사되는 권력이었다. 그런데 주권이 왕에게서 명목상 국민에게로 넘어가고 대의제를 통해 소수의 선출귀족들이 국가(의 제반 장치들을)를 운영하게 되면서 국가는 국민개인들의 정치적 행동을 흡수하는 벡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떤 개인에게 정치적 연관이란 그 개인의 사회 전체와의 관계를 말한다. 이제 개인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다른 개인들과 사회적 관계(정치적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벡터적 위치에 기초하여 국가는 권력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가 과연 사회 전체와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주느냐 하는 것, 건전한 정치적 활동을 보장해주느냐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벡터적 권력은 민주주의의 부정, 다양성의 부정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근대 국가의 이러한 성격을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에서처럼 근대 국가들에서도 의식적인 , 일반적 관심사의 진정한 실체는 순전히 형식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식적인 것만이 실질적인 일반적 관심사이다.

 

맑스만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다. 디킨즈는 리틀 도릿(Little Dorrit, 1855-57)이라는 장편소설에서 <돌려말하기부>(Circumlocution Office)[각주:4]라는 가상의 관청을 통해 국가의 근본적인 무능을 표현한다. <돌려말하기부>의 근본적인 특징은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국가적 효율성의 정신”(spirit of national efficiency)에 입각함으로써 일 안하는 법’(How not to do it)을 가장 탁월하게 통달한 부서이다. 일 안 하기의 구체적인 양태는 뺑뺑이 돌리기[각주:5],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마땅히 기계’(Behoving Machine)[각주:6], 서류양식들의 지배[각주:7], 의회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다른 주제에 대하여 답을 하는 기술등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돌려말하기부>가 벡터 권력으로서의 성격을 띠는 것은, “이러한 국가적 효율성의 정신으로 모든 것에 참견을한 데 있다.

 

기계공들, 자연철학자들, 군인들, 선원들, 청원자들, 진정인들, 불만을 가진 사람들, 불만스런 사항을 예방하고 싶은 사람들, 불만스런 사항을 고치고 싶은 사람들, 한 자리 주는 사람들, 한 자리 받는 사람들, 장점이 있어도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 결점이 있어도 처벌받지 않는 사람들--이들 모두가 <돌려말하기부>의 대판 양지(大判洋紙) 서류들 아래 뒤섞여 접혀 있었다. 

 

그 결과

나라의 모든 일이 <돌려말하기부>을 빠져나가지 못한 것 말고는 <돌려말하기부>을 거쳐갔다. 그런데 빠져나가지 못한 일의 수가 군대를 이룰 만큼 많았다.

나라의 모든 일이 자신을 통과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벡터의 장악인 것이다. 만일 <돌려말하기부>가 벡터의 장악자가 아니라면 문제가 조금 있더라도 그게 무슨 큰 상관일까. (<돌려말하기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http://minamjah.tistory.com/38 참조.)


그런데 벡터적 성격을 공히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과 국가에는 차이가 있다. 자본은 그래도 무언가를 통과시켜준다. 다만 노동시간의 일부로 자신의 살을 찌울 뿐이다. 그러나 국가는 맑스에 따르면 형식적으로만 관여하고 디킨즈에 따르면 통과시켜주지 않는다. 이는 자본이 국가에 비해 더 상위의 권력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자본을 통과했던 생산능력이 이제는 자본의 통과를 욕망하는 쪽으로, 화폐가 물신화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시에 소외의 측면이 점점 망각되게 된다.) 이는 화폐가 부의 일반적 재현자이기도 하다는 점, 화폐가 위조지폐가 아닌 한에서는 적어도 진정한 부(만일 그것이 생산물로서 존재한다면)로 데려다 주는 역할은 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가 점점 더 자본에 종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큰 차이가 있더라도 자본과 국가 양자가 벡터의 장악을 그 권력의 주된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벡터로서의 권력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권력이 스피노자적 의미의 자연력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예컨대 물리력은 그 자체로 자연력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권력이 되지는 않는다. 무술 고수의 신체적 힘이 그 자체로 권력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큰 물리력이 상대적으로 작은 물리력을 파괴하더라도 그것이 곧 권력은 아니다. 양을 잡아먹는 늑대의 힘을 권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 권력은 인간 사회에서만 소외의 산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힘의 양태(사이비 힘)이다. 지주와 국가의 폭력(이는 물리력이다)에 의해 뒷받침된 종획(공유지의 파괴)처럼 개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에 의해 발생하는 소외도 있지만, 자본주의와 국가 형태가 발전하여 개인들의 무의식과 욕망을 흡수하는 벡터가 발전하게 되면서 소외가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경향을 띤다. 다시 말해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양도하여(alienate, 소외시켜) 권력을 형성하고 키우는 일이 빈번해지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푸꼬의 권력 연구가 적절해지는 지점이다. 푸꼬는 알다시피 억압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유통(흐름)으로서의 권력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내 생각에 권력은 유통되는 어떤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연쇄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권력은 이곳저곳에 장소를 잡지 않으며 소수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나 상품이 전유되듯이 전유되지도 않는다. 권력은 기능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들을 통해 행사되며 이 네트워크들에서 개인들이 유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권력에의 굴복과 권력의 행사를 동시에 행한다. 개인들은 결코 타성적이거나 동의하는 권력의 표적들이 아니다. 개인들이 권력의 중개점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권력은 개인들을 통과한다. 권력이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각주:8]

 

 여기에는 권력의 벡터로서의 속성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개인으로서 권력을 쥐고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사람에서부터 뽑으라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추동한 사람들, 집단들, 기관들, 언론 등을 통해 정점에 자리한 대통령에게로 흘러가는 것, 그렇게 특정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메커니즘이 바로 권력인 것이다. 따라서 이 메커니즘의 한 요소를 바꾸는 것은 그 요소가 비록 정점에 자리한 대통령일라도 권력의 권력으로서의 속성을 제거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권력의 분석을 자신의 연구작업으로 삼는 사람은 아니지만, 칠레의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권력에 대해서 말한 것도 권력의 벡터적 성격에 대한 포착을 함축한다.

 이상할 만도 하지만, 권력은 복종이 있을 때에만 출현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당하는 개인들의 결정들과 구조에 의존하는 복종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권력이 독재자들에게 부여됩니다. 우리는 어떤 것생명, 자유, 재산, 직업 관계 등등을 지키거나 구하기 위해 타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합니다. ‘권력은 복종을 통해 탄생한다라는 게 내 주장입니다.[각주:9]

마뚜라나의 이 발언은 억압을 주된 성격으로 하는 권력의 소지자인 피노체트, 즉 박정희와 비슷한 유형의 독재자를 놓고 하는 말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만일 권력이 이렇게 부여되는 것이라면 권력의 뿌리는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복종하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고 따라서 권력의 뿌리를 뽑는 것은 복종하는 자들 자신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로만 가능하다.

 

맑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노동자들의 생산하는 힘이 가변자본의 형태로 자본 안에 통합된 상태를 나타낸다. 고전적 자본주의의 기준으로는 완전고용이 곧 완전통합을 나타낸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발전은 통합을 깨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기계로 노동력을 대체하기, 공장 내의 노동을 피해 공장 바깥으로 나가기, ‘노동의 유연화등은 모두 자본 구성의 탈유기화(달리 말하자면 노동력의 자본으로부터의 배제)를 나타내는 현상들이다. 원래 노동력은 자본에게 음식과 같은 것이다. 이 음식을 먹고 일부(필요노동)는 배설하고(노동자에게 필요노동의 대가인 임금의 형태로 주고) 다른 일부(잉여노동)는 자신의 몸을 불리는 데 쓴다. 따라서 자본의 노동회피의 결과는 자본의 성장 중지이다. 그리고 성장이 중지된 자본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다. 물론 자본은 다른 수단을 강구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직접 다른 몸을 먹어치우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들어와서 일반화된 사유화, 혹은 강탈에 의한 전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특정 자본들의 몸 불리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총자본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므로 전체로서의 자본에게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탈유기화에 작용하는 또 다른 경향은 노동의 추상성의 상승, 인지노동의 부상,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등으로 말해지는 경향이다. 고정자본의 전형적 형태인 기계가 디지털화되고 거기에 소프트웨어가 동반됨으로써 소프트웨어와 연결되는 인간의 두뇌가 고정자본의 핵심적 일부를 구성하는데, 이 두뇌는 기계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탈유기화는 이제 기존 권력(자본과 국가)의 유지를 위해 대중의 욕망, 관심, 의식·무의식을 흡수할 벡터의 필요성을 더욱 높여준다. 이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된 것이 바로 매스미디어이다. 매스미디어는 대중에게 사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통해 대중의 눈과 귀를 흡수하는 벡터가 됨으로써 소통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권력이 된다.


근대 사회 이전에도 백성들은 서로 소통을 했으며 이 소통의 중요성은 고전적인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푸꼬는 영토, 안전, 인구10강에서 반란의 문제와 관련하여 베이컨을 원용하는데, 베이컨에 따르면 반란은 공화국의 삶에 내재한다.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entirely normal, natural phenomenon)이다. 베이컨에 따르면 반란은 폭풍처럼 가장 예상하지 못했을 때, 가장 평온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당시의 군주에게는 반란이 언제 일어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텐데, 반란의 형성을 알려주는 징조 가운데 하나가 소문이다. 국가를 비방하는 말이나 팸플릿이 도는 것이다.

 

피터 라인보는 그의 마그나카르타 선언한국어판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웅성거림과 수군거림이 민중 사이의 소통의 수단이었으며, 민중은 지배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되고 명확한 표현에는 미치지 않는 형태로 스스로를 표현할 정도로 지혜로웠으며, 바로 그 때문에 더욱 더 지배자들에게 불길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지배계급은 그러한 목소리들을 배제하고 싶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가 기반을 둔 기록보관소를 통제하고 싶었다.

매스미디어는 소문, “민중 사이의 소통의 수단을 대체하고 국민의 눈과 귀를 흡수하며 그러한 흡수를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만든다. 그리하여 대중이 매스미디어에 자연스럽게 의존할 때, 그때 매스미디어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뚜렷한 권력이 된다. 모든 권력이 그렇듯이 권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흔히 말하는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지속 가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에 (모든 권력은 언젠가는 사망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매우 충실하게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은 자신의 눈과 귀를 따로 개발할 필요도 없이 거의 전적으로 매스미디어에 의존할 것이고 바로 이것이 매스미디어의 권력을 튼튼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신뢰를 사는 권력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매스미디어의 권력적 속성이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권력지향성 때문이 아니라 벡터의 독점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변화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종이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보다는 인터넷으로 옮겨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종이신문들은 점차 (상대적으로 젊은) 대중의 눈과 귀가 몰리는 인터넷에서의 활동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될 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는 눈과 귀를 가장 많이 흡수하는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이 점점 더 권력을 가진 위치에 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종이신문에서 포털로의 권력 이동은 벡터의 경로가 변한 데 있는 것이지 포털에 종사하는 개인들의 능력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다. 오히려 포털의 권력이 더 세기에 능력이 상대적으로 더 뛰어난 개인들이 포털로 이동하게 된다. 종이신문이든 포털이든 여전히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권력을 가장 오래 지속하는 방법이지만, 권력의 기회주의적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매스미디어가 눈앞의 이익에 정신이 팔려서 거짓말과 교묘한 조작을 일상적인 활동으로 만들었고, 사실상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명을 재촉하고 있다.

 

스스로 재촉하고 있는 이들의 명을, 이들의 권력의 뿌리를 끊어줄 조건은 이미 마련되고 있다. 소통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자율미디어의 토대를 마련했고 이 자율미디어는 과거 민중의 웅성거림과 수군거림을 새로운 수준에서 가능하게 하였다. 이제 매스미디어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식당, 작업장, 대합실 등의 장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자신들의 눈과 귀를, 따라서 뇌를 한 구석에 놓인 텔레비전 방송에 맡기는 사람들의 수는 자율미디어가 발전할수록 줄어들게 마련이다. 종이신문에서 인터넷신문으로 그리고 포털로의 권력 이동은 포털이 힘이 있음을 알려주기보다는 그 연장선상에서 자율미디어에 의한 매스미디어의 해체가 큰 현실적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일 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 언론이 보이는 행태는, 저들이 무의식적으로는 스스로의 사망을 감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망하기 전에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더 챙겨놓으려는, 기회주의적인 발악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들의 발악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그러한 가운데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매스미디어는 사실보도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흡수하기보다 조작한다는 점에서 권력으로서도 이미 터전을 잃었다. 그것은 화폐와 위조지폐의 차이이다. 화폐는 그것이 권력이면서도 일정한 가치를 담지할 수 있지만, 위조지폐는 그것이 위조지폐임이 밝혀지는 순간 권력과 가치가 모두 소멸한다. 물론 매스미디어 가운데 일부가 사실을 충실하게 보도하게 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의 차원만으로는 사회에, 벡터 권력의 뿌리를 끊을 개인들에게 창조성과 자유를 돌려주지는 못한다. 매스미디어가 백터 권력을 자연스럽게 포기하고 자율미디어의 한 마디로 편입되는 방법은 있다. 이는 한 방면의 전문가가 다중의 외부에 혹은 위에 군림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다중과 함께 하는 전문가가 되는 것과 원리적으로 동일하다.

 

모피아 행태도 권력의 벡터적 성격을 설명하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누가 모피아인가는 중요하지는 않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공무원이 잠재적으로 모두 모피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사실이다. 명백하게 모피아에 속하는 자들도 사회가 달라지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모피아적 행태가 중요하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모피아 행태는 (내 기억에 따른 것이므로 사실상 최초가 아닐 수도 있다) 대교협(대학교육협의회)의 형성이다. 관리 출신들 가운데 일부가 어떤 단체를 만들어서 대학을 평가하는 일을 담당한다. 법에 써있는 것도 아닌데 모든 대학들이 이 평가기관의 평가에 의탁하고 그것이 관습처럼 고정되면서 이 기관으로 집중되는 벡터가 형성되게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이 기관은 힘을 가지게 되고 그에 뒤따르는 여러 이익들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대학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대교협은 대학이 실제로 어떤지에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대교협의 평가에 시간과 노력을 빼앗긴 대학들은 그만큼 더 연구와 교육을 사실상 등한히 하게 된다.

 

대교협의 뒤를 이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이나 공인인증서를 다루는 금융결제원, 그리고 현재 정부에서 밀고 있는 샵메일을 주관하는 세력도 모피아 행태의 사례이다. 이밖에도 내가 모르는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핵심은 그 흐름을 나에게로 끌어오는 것, 나를 통과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삶에 얼마나 방해가 되느냐 아니면 도움이 되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사실 권력의 벡터적 성격에 대해서는 이 정도를 가지고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권력에 대한 연구를 누구라도 더 해나가야겠지만, 나는 그 전에 단 한 가지를, 권력의 뿌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들이라는 점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분명히 해놓고자 이 엉성한 글을 서둘러 썼다.

 

대한민국의 벡터 장악자들은 확실히 사이비들이다. 사이비를 진짜로 대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진짜가 과연 있을 수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혹시 있다고 한다면 지금보다는 더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것이 권력임에는 변함이 없음을 말하고 싶으며, 이제 우리는 벡터를 장악하는 식의 (한때는 최신의 것이었으며 그래서 한국의 촌스러운 지배세력으로서는 그저 흉내를 낼 수 있을 뿐인) 권력이 낡은 것이 되고 있고 그 뿌리를 뽑는 것이 전지구적으로 과제가 된 시대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이제 특정의 벡터로 몰려가고 벡터 담당자를 뽑는데 사회적 욕망을 낭비하는 국민대중이 아니라, 스스로를 (권력이 아니라) 활력으로서 조직하고 안으로는 서로를 향하며 바깥으로는 모든 곳을 향하는 다중의 형성이 관건인 시대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속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나는 사람을 특정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설득시키는 일이 또한 벡터의 장악을 부지불식간에 노리는 일이다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이 말을 듣던 안 듣던 스스로 자신의 두뇌로 생각하고 자신의 심장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이들이 서로 협동할 때, 그리하여 다중의 커먼즈(commons)를 구성할 때, 그리고 그 커먼즈들이 이 세상에 가득 찰 때 권력은 뿌리를 내릴 곳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서둘러 일단락을 하느라고 교육문제를 벡터 권력과 관련하여 거론하지 못했는데, 이는 나중에 짧은 글로라도 다룰 생각이다

  1. 무력의 직접적인 뒷받침이 없이 벡터 권력이 형성되는 경우는 나중에 발생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말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주체성으로서의 노동(die Arbeit als Subjektivität)”, “모든 객체성을 상실한 노동의 순전히 주체적인 실존”, “인간의 직접적 육체성과 일치.” 이상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본문으로]
  3.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이 저작은 노트들의 모음이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내용의 대목들이 더 있다. [본문으로]
  4. '에돌림청'이라고도 옮긴다. [본문으로]
  5. “1번이 그를 2번으로 돌리고 2번이 3번으로 돌렸으므로, 그들 모두가 그를 4번으로 돌렸을 때 이미 그는 그것을 3번 진술한 상태였는데도, 4번에게 다시 진술해야 했다.” [본문으로]
  6. ‘이 자유로운 나라의 장관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it behoves a Minister of this free country~) [본문으로]
  7. “우리 부서는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두어지게 한다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 존재합니다. 그것이 그 부서의 의미이고, 그 부서의 목적이지요. 물론 그 곳이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한다고 보이게 하는 어떤 형식(form)이 유지되어야 하긴 하지요. 그러나 그건 형식일 뿐예요. 정말이지 우리 부서는 서류양식(forms) 뿐예요! 당신이 거쳐간 많은 서류양식들을 생각해봐요. 그리고 당신은 어떤 목표점으로 더 가까이 간 적이 한 번도 없지요?” (804면) 이에 따라 이 부서는 의회에서의 보고에서 사용한 잉크와 종이의 양으로 자기 부서의 업적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8. (『‘사회는 방어되어야 한다’』) [본문으로]
  9. 움베르또 마뚜라나, 베른하르트 푀르크젠과의 대담, 서창현 옮김, 『있음에서 함으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