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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내공과 외공

내공과 외공의 차이는 무협소설에서 제시되는 무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문자로 된 텍스트, 더 넓게는 기호로 된 담론을 접하면서 사유 능력을 발전시키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선 두 가지 측면에서 배경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내가 내공과 외공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차이에 민감하게 된 계기, 다른 하나는 이 차이를 내공과 외공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게 된 계기이다.

 

전자에 대하여 : 내가 예의 차이에 민감하게 된 계기는 첫째는 여러 이론적 입장들이 충돌하는 논쟁을 (참여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청중으로서) 겪으면서이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나에게는 단지 입장의 차이만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차이가 더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눈을 가지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문학 공부의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문학작품을 볼 때에는 의미의 확정이나 고정보다는 의미의 불확정이나 변화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구조에 대한 감각보다는 생성에 대한 감각이 문학에 대한 감각으로서도 상위의 감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긴 글을 하나 쓰고 싶다.) 물론 문학 공부에도 외공 스타일의 것이 있다. 이른바 문학연구가 대체로 그렇다. 그러나 문학비평은 외공에 멈추어서는 A = B라는 재현적 동어반복 말고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맑스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동어반복은 설명이 아니며 설명이 못되는 것이 비평이 되기는 어렵다. 다른 한편, 철학 공부 역시 여기에 일조를 했다. 특히 ‘잠재성’의 차원을 개념화한 들뢰즈를 만나고 나서는 문학 공부에서 형성되던 어떤 것이 (유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철학적 표현을 얻게 되었다. 이는 줄곧 읽어오던 맑스를 계속해서 (다시?) 읽는 데에도 작용했다.

 

후자에 대하여 : 무협소설을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직접 기수련을 한다는 점 (결코 성실한 수련자는 못 된다), 그리고 몸으로 하는 일을 머리로 옮겨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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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공은 알 수 있음을 절대적 원리로 삼으며 내공은 알 수 없음을 상대적 원리로 삼는다.

 

외공은 현실성(actuality)의 차원과 연관되고 내공은 잠재성(virtuality)의 차원과 연관된다.

 

외공은 확연하게 유형화되고 코드화된 형태의 지식들을 축적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 내공은 지식을 조건짓는 무형의 힘을 추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외공은 푸꼬가 말한 ‘지식’의 차원과, 내공은 푸꼬가 말한 ‘힘’의 차원과 연관된다.

 

외공은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말하는 ‘기호작용’(signification)의 차원과 연관되고 내공은 들뢰즈가 말하는 ‘의미’의 차원과 연관된다.

 

외공은 그램분자적이고 내공은 분자적이다.

 

외공에서 공력의 성취는 축적된 지식의 양에 달려있고, 내공에서는 어떤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차원의 높이는 이질적으로 상이한 것을 얼마나 많이 연결시키느냐에 달려있다.

 

외공은 창조된 의미의 소통이 핵심적 영역이고 내공은 의미의 창조가 핵심적 영역이다.

 

외공에서는 지식이 생산된 그대로 전달되므로 지식 생산자는 언제나 개인으로만 나타난다. 내공에서는 지식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재창조되므로 지식 생산자는 소통하는 집단 전체이다.

 

외공은 쌓아올리고(고체화) 내공은 변화시킨다(액체·기체화).

 

외공은 배제의 원리를 따르고 내공은 포함·공존·중첩의 원리를 따른다. 그래서 외공은 n개를 1개로 환원하기를 좋아하고 내공은 1개가 같은 자리에서 n개와 동시에 공존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외공은 컴퓨터를 모델로 하고 내공은 두뇌를 모델로 한다.

 

내공도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는 이미 유형화된 지식을 이루는 단위들 내에서 변이·생성·상상·발명의 틈을 포착하는 것이다. 내 속의 우주. 다른 하나는 예의 단위들 사이의 관계에서 변이·생성·상상·발명의 틈을 포착하는 것이다. 내 밖의 우주. 그러나 알고 보면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공은 다 특이하다. 셰익스피어, 블레이크, 디킨즈, 로렌스. 스피노자, 맑스, 니체, 들뢰즈, 푸꼬.

 

러스킨이 『베니스의 돌들』에서 대조시킨 바, 그리스 예술은 외공이고 고딕 예술은 내공이다.

 

들뢰즈·가따리가 말한 다수과학(국가과학)은 외공과 연관되고 소수과학(유목과학)은 내공과 연관된다.

 

리비스가 말한 ‘산문적 언어사용’(확연한 것으로 미리 고정된 것의 정확한 전달)은 외공과 연관되고 ‘시적 언어사용’(새로운 의미의 창조)은 내공과 연관된다.

 

키츠(Keats)가 말하는 ‘negative capability’(불확정적인 것을 불확정인 채로 포착하는 힘)는 내공의 한 양태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덧붙일 수 있다.

 

참고 : 푸꼬에서 지식의 차원과 힘의 차원

 

수용성(receptivity)

발로성(spontaneity)

지식

형식이 부여된 질료

형식화된 기능

빛, 가시적인 것

언어, 표명 가능한 것

서술적-장면

진술-곡선

빛의 선들 → 윤곽, 색깔들

곡선들 → 어구들, 진술들

비담론적 다양성

담론적 다양성

외부성(exteriority)

구성됨(composed)

현실화(actualization), 통합(integration)

지층화(stratification), 역사적 형성체들(historical formations)

제도가 힘의 관계들을 통합, 힘(들의 관계)을 전제

external and heterogeneous

보고 말하기(seeing and speaking)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

형식이 부여되지 않은 물질

형식화되지 않은 기능

외부(the outside)

구성함(composing)

잠재성

탈지층화, 진실의 생산

전략화(힘들forces의 관계), 지식보다 우선적, 지식을 함축

non-place, non-relation, emergence(역사)

사유하기(thinking)

both closer and farther away

다이어그램(diagram)과 그 외부로부터의 저항, 저항이 우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