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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3 ―권력으로서의 테크닉주의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3

권력으로서의 테크닉주의

 

삶권력의 성격에 대한 연구에서 푸코의 기여 가운데 하나는 권력이 물리적 억압과는 다른 식으로 작동하는 데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작동양태들 중 하나가 테크닉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내가 이 말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어떻게?’에만 시야를 고정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원래 어떻게?’무엇을?’과 연관되어야 마땅하며 무엇을?’왜 그것을?’과 연결되게 마련이고 이것은 또 다른 것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는 것인 것인데, 테크닉주의는 이러한 연관을 끊고 오로지 어떻게?’만 부각시켜 물신화시키는 것이다.

 

삶권력이 그렇듯이 테크닉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러스킨이 베니스의 돌들에서 노예적이라고 불렀던 그리스 예술은 테크닉주의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 경우 뛰어난 한 명의 마스터가 전체 디자인을 창안하고 나머지 장공들은 자신이 할당 받은 부분에서 이 한명의 의도를 말하자면 기술적으로 뛰어나게 구현하기만 하면 된다. 동그라미는 매우 동그랗게 구현해야 하고, 네모는 매우 네모나게 구현해야 한다. 오직 한 명만이 형상을 창안한다. 나머지는 그 창안된 형상을 구현하는 기술만을 갈고 닦는다. (여기에 러스킨이 노예적이라는 형용어를 붙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결과는 기술적으로 탁월하지만 오직 한 명만이, 혹은 소수만이 사고하는 방식! 형상의 창안이란 곧 새로운 사유이므로.)

 

문학비평의 경우 테크닉주의의 지배는 창작가에게나 비평가에게나 매우 흔한 현상이었다. 내 견해로는 들뢰즈·가따리의 철학이 서구 지성사를 대대적으로 정화한(?) 이후 문학평론에서 테크닉주의에의 중독이 많이 사라졌다. 이른바 정동’(affect)에 초점을 맞추면 테크닉주의에 빠질 수가 없다. 계속적으로 새로운 사유와 (그것이 아무리 분자적이더라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테크닉주의는 대통령 선거와 같은 사건에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사실 선거의 장에는 많은 벡터들이 합류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테크닉주의는 이 다양한 벡터들을 휘감아 버리는 소용돌이로 작용한다. 선거는 권력을 대의의 방식으로 특정 집단에게 몰아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개를 대통령에 당선시킬 것인가?’라는 데 시선이 사로잡히면 1) 우리가 왜 권력이라는 형태의 힘을 추구해야 하며 2) 권력의 추구를 전제하더라도 왜 꼭 대의제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가 없게 된다. 일종의 세뇌인 것이다.

 

이 세뇌과정에서 어떻게?’가 모든 것을 가려버리는 것이다. ‘누구를?’어떻게?’에 종속된다. ‘누가 당선될 가능성이 큰가?’를 따지는 것이 바로 이 종속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후보가 어떻게?’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에 대한 차이를 두고 파가 갈리고 프로와 아마추어가 갈린다. 반대로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의 관점에서 서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그 당이 그 당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측면에서가 아닌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정치적 입장가르기도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한에서는 매우 낡은 것이지만) 선거에서 힘을 발하는 테크닉주의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전문적 정치평론가들이 (그들의 입장이야 어떻든) 대체로 이 테크닉주의의 전위 역할을 한다.

 

선거 국면이 정치적 테크닉주의의 독무대라는 말은 아니다. 이번 대선의 경우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팟캐스트의 활약 등으로 인해서 테크닉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벡터들이 다른 때보다 많이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벡터들이 테크닉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 새로 활성화된 벡터들이 다시 테크닉주의에 휘말릴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이 앞으로의 문제이기는 하다.

 

선거에서의 테크닉주의는 대의제가 사실은 귀족제의 한 형태이며 그것이 굳어지면 민주주의의 장애물이 될 뿐이라는 점권력과는 다른 종류이며 민주주의와 내적 연관을 지닌 힘인 활력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 테크닉주의는 이렇게 활력의 존재를 덮어버려 활력에 기반을 둔 정치가 어떨 것인지는 생각도 못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선거를 소외의 잔치로 바꾸어 버린다. 권력자의 선출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활력을 타인에게 굴복시키는 것이 소외가 아니고 무엇인가. 선거에서 테크닉주의의 만연을 보면서 활력에 기반을 둔 정치를 세울 과제가 또 한 번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덧붙임1>

모든 테크닉이 다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무슨 테크닉이든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절대화될 수 없는 유형의 테크닉도 존재한다. 이는 구획된 존재에 가두고, 미리 정해진 목적에 시야를 고정시키며, 전문가라는 이름의 소외의 전위들을 배출하는 테크닉이 아니다. 이는 새로운 존재를 창출하는 테크닉이다. 하이데거는 그리스 시대의 테크네’(techne)를 바로 이러한 의미로서 부각시킨 바 있다. 김수영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도 이런 의미의 테크닉이다. 들뢰즈·가따리의 테크닉으로서만큼이나 예술로서 나타나는 유목과학”(천 개의 고원)도 이와 통한다. 이런 테크닉은 창조를 낳는다.

 

<덧붙임2>

제논의 역설을 모두 알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역설이 아니라 기만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들어보라.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거북이를 아킬레우스보다 1km 앞에서 출발시킨다. 아킬레우스가 1k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0.1km를 가고,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0.1km를 가면 그동안 거북이는 0.01km를 나아간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린다 하여도 그 시간동안 거북이는 움직이므로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사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것은 뻔한데도, 그럴 듯한 수학적 방법으로 아킬레스가 마치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역설은 (기만으로서는) 일정한 지점(빨리 달리는 아킬레스가 느리게 기어가는 거북이와 만나게 되는 지점)에 무한히 접근할 뿐 거기에 도달도 못하고 따라서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의 정치적 삶을 바로 이러한 역설로 만드는 것이, 선거라는 지점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테크닉으로서의 정치이다. 소외의 전위들인 전문가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그 지점 너머로는 못 가!”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로, 활력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막은 이 지점을 유일한 민주주의인 것처럼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