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2007년 6월 24일 The European Graduate School(http://www.egs.edu/)에서 ‘사랑’에 대하여 한 강연의 골자이다. 이 강연은 http://www.youtube.com/에서 볼 수 있다.
1. 왜 정치적 개념으로서 ‘사랑’을 말하는가?
1.1 현재의 상태 그대로 인류가 스스로를 다스리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나이브할 것이다. 레닌이 당대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을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자생성’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 고착되어 있는 듯하다. 이 틈을 사랑이 메울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은 민주적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 심지어는 훈련의 장(field of training)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사랑이 갖는 의미이다.
1.2 유대(solidarity)나 우애(friendship)가 아니고 왜 사랑인가?
① 유대는 상호이익 때문에 서로 돕는 단결하는 이익의 계산이다. 사랑은 이익의 합리적 계산을 넘어서 있다. 사랑은 이성과 열정(passions, 감성) 사이에 다른 관계를, 혹은 다른 종류의 합리성을 발전시킨다.
② 사랑은 변형을 포함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운데 달라진다(변이한다). 우애는 상호작용은 있으나 변형은 일어나지 않는 관계이다.
1.3 사랑은 자연스러운(natrural) 것이지만 자생적(spontaneous)이지는 않다. 훈련, 조직화가 필요하다. ‘악’(evil)이 되지 않도록.
1.4 용어와 개념은 다르다. [* 하트는 양자가 혼동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말한다.] 우리는 개념이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의미하지 않을 때 새로운 용어를 만들거나 아니면 개념을 강조한다. [* 하트는 여기서 후자를 택한다.] 사랑의 개념은 씨름할 만한 거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2.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사랑과 부정적으로 기능하는 사랑
부정적으로 기능하는 경우 |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경우(이것이 바로 하트가 말하는 ‘사랑의 정치적 사용’이다) |
① 정체성주의적 사랑(identitarian love), 동일한 것에 대한 사랑, 가까운 것에 대한 사랑 : 가족, 민족, 인종 등. |
① 열려진 사회적 맥락에서의 사랑, 타자에게 열려있는 사랑. |
② 에로스(개인들 사이의 낭만적 사랑)와 아가페(인류에 대한 사랑)의 분리. |
② 에로스인 동시에 아가페,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 |
③ 통일성(unity)으로 융합, 차이의 파괴. |
③ 차이(특이성)에 기반을 둔 사랑, 차이들의 보존과 증식으로서의 사랑. |
④ 사랑을 카리타스(caritas)로 환원, 빈자를 대상화한 사랑. |
④ 빈자가 주체인 사랑, 빈자의 창조적 힘. |
⑤ 무력한 것으로 이해된 사랑, 수동적 겪음(passion), 센세이션, 그냥 일어나는 것. |
⑤ 생산적인 힘(심지어는 존재론적으로 생산적인 힘)으로서의 사랑, 능동적 행동, 학습되고 실천되는 것. |
3. 악
사랑의 반대는 증오나 폭력이 아니다. (폭력도 사랑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악(evil)이 바로 사랑의 반대이다. 악은 사랑의 결여가 아니라 잘못된 사랑(love gone bad), 왜곡되고 타락한 사랑이다. 파시즘, 파퓰리즘, 종교적 근본주의 등은 다중의 사랑의 힘이 왜곡된 경우들, 혹은 앞에서 말한 부정적으로 기능하는 사랑이 공고화된 경우들이다.
4. 결론
우리의 정치적 문제는 우리의 사회적으로 구성적인 능력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회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을 변형할 수 있는가이다. [* 여기서 하트는 스피노자의 사랑 개념을 원용한다.] 스피노자에게 사랑은 외적 원인을 인식하는 상태의 기쁨이다. 기쁨은 사유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의 증가이다. 따라서 사랑은 외적 원인(타자들)을 인식하는 상태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
민주주의는 차이들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의 공간이며, 기쁜 조우들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그러한 민주주의를 행할 수 있는 주체성들의 창출을 위한 훈련의 터전 같은 것이 될 것이다.
(Democracy is the space of the free interaction of differences, and one that facilitates joyful encounters. In this sense love would be a kind of training ground for the creation of subjectivities capable of such a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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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윤리학』 5부 정리10 주석.
“이렇듯 자신의 정동과 욕구를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다스리려는 사람은 덕들과 그 원인에 대한 지식을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덕들에 대한 진실한 앎으로부터 나오는 즐거움으로 자신의 정신을 채우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의 단점들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들의 흠을 잡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유의 거짓된 모습에 탐닉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Qui itaque suos affectus et appetitus ex solo libertatis amore moderari studet, is quantum potest nitetur virtutes earumque causas noscere et animum gaudio quod ex earum vera cognitione oritur, implere; at minime hominum vitia contemplari hominesque obtrectare et falsa libertatis specie gaudere.)
- “실로 사랑은 자신의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동반한 기쁨에 다름 아니며 증오는 자신의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동반한 슬픔에 다름 아니다.”(Nempe amor nihil aliud est quam lætitia concomitante idea causæ externæ et odium nihil aliud quam tristitia concomitante idea causæ externæ.) 『윤리학』 2부 정리13 주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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