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노동의 관점과 텍톨로지--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02


맑스에서 프롤레트쿨트로



10월 혁명 이후 프롤레트쿨트는 보그다노프의 오래된 친구인 루나찰스키가 위원장으로 있는 교육인민위원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위원회는 옛 차르 국가의 문화 및 교육 활동을 이어받았다. 반면에 프롤레트쿨트는 프롤레타리아 특유의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 루나찰스키가 프롤레트쿨트에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위원회의 지원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의 과제는 문자해득력을 늘리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지도부 가운데 부하린만이 프롤레트쿨트를 지지했다. 레닌은 확실히 아니었다. 프롤레트쿨트는 예산을 교육위원회로부터, 즉 볼셰비키가 통제하는 국가로부터 나왔으므로 자율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에 대한 욕망은 온전하게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한동안 상당한 열광을 불러일으켰으며 열광자들 가운데에는 의식 있는 노동자들도 다른 층 못지 않게 있었다.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안에서 볼셰비키에 맞서서 자기 나름의 대항스펙터클(counter-spectavle)을 만드는 데 거의 성공했다.

 

보그다노프의 생각에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을 조직하는 고유의 방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냥 부르주아 문화를 채택해서는 안 되고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발전시켜야 했다. 옛 형식 속에 새로운 내용을 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문화형식 속에 새로운 내용을 담는 것이어야 했다. 핵심적인 것은, 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협동적 노동의 경험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발전되어 나와야 했다. 부르주아 개인주의는 경쟁적 시장관계로부터 자라나온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협동의 정신은 가장 진전된 산업들에서 이루어지는 세련된 노동조직화로부터 자라냐올 것이었다.

 

이는 학술적 문제가 아니었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은 매우 힘든 결정에 직면했다. 전략적 자산을 장악하는 데 프롤레타리아가 동원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속하게 혼자서 움직인다면, 지도부는 전문가들, 기술자들, 기타 교육받은 계층의 도움 없이 혁명을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이것이 볼셰비키 정책이었다. 멘셰비키의 정책은, 적어도 설득력이 있었던 순간들에는, 천천히 진행하는 것, 프롤레타리아와 인텔리 사이에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보그다노프의 상상적 화성 혁명에서 일어난 일과 다르지 않다.)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운영 수단이 거의 없는 가운데에 국가와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쥐게 된 것이다.

 

프롤레트쿨트는 예술과 과학에서 스투디오들의 네크워크를 창출했다. 목적은 선전이나 의식고양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치활동이었다. 프롤레트쿨트는 권위, 종속, 재산 같은 물신들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보그다노프는 이것이 러시아에서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생활에 부르주아 규범들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롤레트쿨트는 사명을 가진 운동이었다.

- 예술과 노동을 융합함으로써 노동을 변화시키는 것

- 도시 내에서 협동적 삶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고 젠더 역할과 규범을 변화시킴으로써 일상적 삶을 변화시키는 것

- 정동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감정의 구조를 창출하며 노동(노동이 다시 그 욕구에 따라 자연을 조직한다)을 조직하는 데서 오는 정서적 마찰을 극복하는 것

이 그 사명이었다.

 

프롤레트쿨트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삼중의 실천

1) 창조성

개별적 창조자라는 물신을 전복한다. 창조에서 의식의 역할을 드러낸다.

신문은 집단적 창조성의 모델이었다. (* 지금의 조중동 같은 매스미디어를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의 인터넷이나 SNS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리자.)

2) 집단성

집단으로 작업하고 집단적 삶의 감각을 표현하는 것.

그러나 보그다노프는 특이성들을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공동체는 오히려 공통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가령 그의 화성인들은 구별이 안 되는 수에 지나지 않는 존재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들의 협동은 불완전하다.

3) 보편주의

분업을 분쇄하는 것.

이는 전문주의의 문제를 제기했다-- 프롤로레트쿨트는 전문적 예술가들이 필요한가? 상황이 수상해지면 플라토노프 같은 작가도 프로가 된다. 비록 그의 프로로서의 성공은 미미했지만. 전문화의 문제는 그 운동의 시기 전체에 걸쳐서 문제로 남아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프롤레트쿨트는 대부분의 노동자주의들과는 다르다. 프롤레트쿨트도 세계에 대한 경험의 가장 일반적인 설명을 향해 확대하려고 하기보다는 제한된 관점의 특정 물신주의로 향할 수 있다. 부르주아 문화를 격하게 거부하는 것은 순진한 무신론보다 나을 게 없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과거를 동화시킬 수 있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전환전유는 혁명적으로 보이는 조각들을 골라내는 문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를 신화로 만들기보다는 스스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The proletariat should be self-developing rather than self-mythologizing.)

 

보그다노프는 앙리 르페부르처럼 프롤레타리아의 자기결정의 집중점을 공장의 공간에서 도시에서의 일상 생활의 공간 전체으로 옮겨줄 사람들을 고대한다. 도시는 노동의 관점이 발전할 상활들을 제공한다. 실존을 위해 자연에 맞선 투쟁에서 개인이란 웹상의 한 점이라는 것을 노동자가 발견하는 것은 도시 내에서이다. 노동자들은 단독으로는 외부의 힘들에 놀아나는 무력한 장난감일 뿐이다.

 

도시는 협동적 행동의 시간과 복잡성을 확대한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플로레타리아는 경험을 조직하는 더 체계적인 방식을 배워야 한다.

 

보그다노프는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공저로 낸 적이 있는데 자본주의의 혁명적 힘과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서의 자본주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볼셰비키들의 직관에는 다소 어긋났을 것이다. 논의는 유기적 사회체계의 발전에 집중되었다. 한 선구적인 보그다노프 연구자에 따르면 보그다노프는 수 세기 앞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새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지에 대한 정확한 조언을 제공할 수는 없었다. 오랜 시기의 학습을 거쳐야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이었다.

 

보그다노프는 프롤레타리아의 주된 학습 영역은 새로운 에너지 체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석연료는 제한되어 있고 재생 불가능했다. 원자력만이 아니라 조력(tides)과 풍력이 활용되어야 했다. 원자력 또한 더 협동적 형태의 통치에 자극제가 될 것이었다.

 

협동적 형태의 통치란 그가 "biregulator"라고 부른 것이었는데 이는 두 체계들이 서로 규제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에 두 체계들은 노동과 자연이며 이 둘의 관계는 통계적 자동화의 관계이다.

 

보그다노프 :

사회에 혜택을 주기 위해서 자연의 힘들을 조직하는 것은 기술적 과정이다.

경험의 조직화는 의식의 과정이다.

사회 내의 인간의 힘들을 조직하는 것은 경제적 과정이다.

이 모두가 합쳐져서 사회적-생산적 에너지의 단일한 조직화를 형성한다.

 

조직화 지성의 결핍이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형성을 긴급한 과제로 만들었다. 볼셰비키 당의 주된 입장은 정치혁명이 문화의 계급적 기반을 폐지하고 과거의 모든 문화유산을 공동의 유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보그다노프는 문화는 새로운 형식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문화 자체가 특정의 계급성을 띤 일련의 형식들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데, 이 형식을 보그다노프는 가장 세련된 산업 노동에 구현된 협동적, 실험적 실천의 커먼즈가 확대되는 것으로 보았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란 사회주의 문화 산업에 의해서 대중을 위해 부르주아 소설과 교향곡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또한 혁명시기의 볼셰비키 선전(대중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의식화)을 확대하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노동이라는 실험실로부터, 그리고 실험실인 바의 노동으로부터 자라나오는 것이어야 했다.

 

이는 소련의 초기에 번성했던 전위적 모더니즘과도 다른 것이었다. 이 모더니즘은 혁신을 문학적 혹은 조형적 형식의 문제들에 국한시켰다. 보그다노프는 문화의 생산관계를 혁신하고자 했지 단지 문학 형식이나 정동적 내용만을 혁신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프롤레트쿨트는 시나 회화의 이러저러한 모더니즘 스타일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 문화, 심지어는 과학의 프롤레타리아 자신에 의한 협동적 생산을 의미했다.

 

프롤레트쿨트는 내전 시에 인기가 있었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트쿨트가 있는 곳에는 음식와 난방이 있기 때문일지라도. 프롤레트쿨트는 대중운동이 되었고 노조와 함께 국가 내에서 볼셰비키의 힘과 균형을 맞추는 듯했다. 내전이 볼셰비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당이 모호한 동맹군을 덜 필요로 하게 되자, 조합과 프롤레트쿨트의 힘은 현저하게 삭감되었다. 체이카(Cheka) 즉 비밀경찰의 힘은 그만큼 삭감되지 않았다.

,

프랑스 혁명처럼 러시아 혁명도 교육이 필요했고 이는 단지 개별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을 실행하는 새로운 방식의 문제였다. 보그다노프는 프롤레타리아 고유의 백과사전을 훌륭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지식을 새로운 종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재편집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트쿨트와 관련하여 보그다노프의 가장 야심에 찬 계획은 고등교육 분야에 있었는데, 짧은 시기 동안 그는 그의 경험일원론과 텍톨로지의 노선을 따르는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1919년에 프롤레타리아 대학(the Proletarian University)450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성인교육을 하고자 했었으며 교사와 학생의 평등을 강조했다.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의 기초를 포함하는 집중된 커리큘럼을 제공했다. 목표는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liberal arts college'라기보다는 'social arts college'였다. 작업장과 거리를 두기보다는 작업장과 긴밀하게 함께하고자 하는 대학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트쿨트의 쇠퇴와 함께 이것도 그로부터 박탈되었다. 보그다노픈는 학계와 행정 쪽에 자리를 지켰지만, 프롤레타리아는 독립적인 대중조직을 갖게 되지 않을 것이었다. 체이카의 손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던 많은 다른 비 볼셰비키 지식인들처럼 적어도 당분간은 보그다노프는 대학에 유배되어 있었다.

 

프롤레트쿨트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소련 초기의 다른 조류들만큼 잘 기억되고 있지 않다. 프롤레트쿨트가 성취했던 많은 것이 여전히 기록보관소에 묻혀있으며 집단적이고 공통적인 문화가 그 선구자를 알아볼 수 있을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에 프롤레트쿨트에서 출현하여 천재라는 부르주아적 범주에 드는 위대한 작품을 남긴 적어도 한 명의 작가가 있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Andrey Platonov)의 작품이 인식과 소통의 새로운 조직화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새로운 실천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플라토노프는 보그다노프가 프롤레트쿨트를 위해 제안했던 것의 폐허로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이다.

 

보그다노프가 원하던 대학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조직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어떻게 훈련시킬 수있는지에 대한 그의 계획은 남아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보아도 노동과 지식을 조직하는 법에 관한 놀라운 모델이다. 그런데 보그다노프의 가장 이례적인 성취는 그의 텍톨로지이다. 이는 전면전, 혁명, 내전과 같은 어려운 시대에 지식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아마 탄소해방전선 때문에 21세기에 다가올 기이한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관점의 세 축

1) 경험일원론 : 철학을 전환전유하여 그 안에서 조직화의 실천을 찾음.

2) 프롤레트쿨트 : 문화의 정동적 이끌림을 통한 노동 조직화

3) 텍톨로지와 비인간 세계의 조직화


계속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텍톨로지로

은유 기계로서의 텍톨로지

교환 수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