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7년 1월 26일자 글 “Andreas Karitzis on SYRIZA: We Need to Invent New Ways to Do Politic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안드레아스 카리치스가 보는 그리스
지금 우리는 거대한 혼란, 공포, 정치적 무질서의 시대를 살고 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미국인들을 포함하여 세계 전역의 민중은 사회정의와 사회의 기본적 기능의 정상화를 위한 새로운 유형의 민주적 전략을 찾고 있다. 민주적 가치들로 겉만 치장한, 내부로부터 파열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분명히 부적절하다.
다행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 하나가 우리가 아주 생생하게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과제들을 조명해준다. 그리스 좌파연합당인 시리자(SYRIZA)가 유럽의 채권단 및 그와 연합한 정부들과 부채를 재협상하는 긴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시리자의 목표는 여러 해 동안의 긴축정책, 공공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노략질, 그리고 사회 해체를 통해 반죽음이 된 사회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물론 트로이카[IMF,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연합(EU)으로 구성된 삼두체제―옮긴이]가 이 장중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인 시리자는 채권단이 부과한 가혹한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받아들였다. 채권단과 유럽 신자유주의자들은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금융자본이 한 민족의 민주적 의지를 가차 없이 짓밟으리라는 것을.
그리스가 신자유주의적 강압을 경험한 것은 아마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전체가 앞으로 겪을 것을 미리 맛본 것이므로 시리자의 경험을,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그것이 변혁 정치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를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시리자의 실패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진보 정치의 결함에 대해서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떠 유형의 새로운 접근법들이 필요한가?
아래에서 나는 프리랜서 작가 조지 수블리스(George Souvlis)가 시리자의 전(前) 대변인이자 중앙위원인 안드레아스 카리치스(Andreas Karitzis)와 가진 훌륭한 인터뷰에서 몇 대목을 발췌하여 소개할 것이다. (이 인터뷰는 정치 웹사이트인 LeftEast에 발표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카리치스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부과한 멍에와 부채 노예상태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좌파가 벌이는 투쟁에 대해 지극히 명민한 통찰들을 제시하고 있다. 카리치스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실천, 정치적 정체성, ‘정치하기’ 제도를 구축할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나는 인터뷰 전체를 보기를 권한다. (인터뷰의 1부와 2부로 가는 링크이다.) 그러나 바쁜 독자들이라면 아래 압축적으로 요약된 내용을 읽어도 좋다.
카리치스는 기본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요약한다.
우리는 지금 금융 경쟁과 이윤 논리를 치명적 폭력과 전쟁을 동반하는 전근대적 방식의 잔인한 지배와 결합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독재가 발생하고 있는 이행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역사에서 최초로 우리는 방대한 양의 구현된 능력들, 급속하게 발전하는 매우 다채로운 테크놀로지들, 여러 문화에서 나오는 가치들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험만이 아니라 유례없는 잠재력이라는 양 극단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깨닫는 것보다 더 광범하고 대담한 책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싸움을 싸우는 데 필요한 모두를 포함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재편성하는 방식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우리’는 과거로부터, 즉 순진함과 게으름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의 종말’ 시기로부터 끌어온 정체성들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이 시기에 개인들이 기꺼이 주려고 한 유일한 것은 개인적 참여의 순간들이었지요.) 이제 우리의 책무의 폭도 여러 ‘반자본주의들’의 전통적인 틀로는 더 이상 완전히 포괄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것은 인간 사회 구축의 실존적 심층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따라서 우리의 개인적인 정치적 정체성들을) 오늘날의 과제와 부합하고 자본의 논리를 넘어설 잠재력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다시 틀지어야 합니다. 나는 인간이 유적 존재로서 처한 현재의 교착상태를 강화하는 정치적 정체성들, 사고방식들, 그리고 구조들을 재생산하는 것보다 이 교착상태와 씨름할 책임을 맡을 새로운 ‘삶형태’를 탐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카리치스는 그리스 민중이 거리에 모이고 선거에서 승리하면 긴축을 끝낼 수 있고 신자유주의 정치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전제를 문제 삼는다. 시리자의 정치 전략의 전제는 다음과 같았다. “중요하게 보이는 유일한 것은 누가 그리고 어떤 집단이 정부와 국가에서 더 영향력을 갖고 있고 핵심적인 지위들을 가지게 될 것인가였습니다······ 여기서 암묵적인 전제는, 정부 안에 들어가서 정치적 결정들을 하는 것이 관건이고, 만일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이 결정들이 어떤 순전히 기술적인 국가기구에 의해서 실행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는 당연히 충분하지 않다. 카리치스는 자신이 나중에 “좌파의 주된 실패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논리 및 가치에 부합하는 형태의 통치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민주적·참여적·협동적 방식으로 기본적인 사회적 기능들을 운영하는 행정형태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으로 시리자가 실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부 공직자들의 임명이 지난 시기에 일어난 내부 권력 다툼의 결과에 의해 정해졌으며 그들이 위임받은 일은 광범한 정부 계획을 받쳐줄 구체적인 행동계획 없이 모호하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면 아무 것이나 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부의 행동을 당의 기능과 연결시키고 매우 어렵고 복잡한 국면에서 기꺼이 돕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는 사회적 행위자들과 연결시킬 조직적 ‘고리들’이 없었습니다.”
요컨대 시리자는 전통적인 정치제도 속에서 작동하는 전통적인 구조를 가진 정당이 엘리트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었다. 이는 결국 실패했다. “전장을 다시 형성할 실질적 도구를 박탈당한 정부와 당은 금융 독재와 맞서 싸우는 데서 벗어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평판을 가진 정치가 집단이 되는 쪽으로 점차 향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좌파가 낡고 판에 박힌 방식의 ‘정치하기’를 고수하는 것이라고 카리치스는 말한다. 이 방식으로는 금융 자본이 지배하는 정치적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와 당의 간부들이 계속 고수하고 있는 실존하지 않는 현실은, 선출된 정부의 민주적 책무를 엘리트들이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금융 엘리트들이 행사하는 권력은 피상적으로만 민주적이다. 그것은
경제적 힘이 없는 사람들이 결정적 의사결정에 접근하는 상황을―엘리트들을 대표해서―그저 용인하는 면에서만 민주적입니다. 시리자는 (과거에) 제도화된 민중권력이 소진되지 않았다는 전제에 기반을 둔 정치하기 방식만 알았습니다. 선거에서 이기면 아직 충분히 남아있는 제도적 힘―주로 국가권력과 일국 주권에 대한 국제적 존중의 형태로―을 (유로존에 남든 탈퇴하든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긴축을 끝내는 데 사용하겠다는 것이죠.
시리자는 정치가 수행되는 틀이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전제에 기반을 두고 전통적인 정치하기 방식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사회운동을 지원했고 연정을 구축했으며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었고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이런 식으로만 정치를 한 결과가 어떤지를 오늘 우리 모두가 압니다.
기존의 “민주주의 구조들”이 구제책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은 “재미있는 동시에 비극적”이라고 카리치스는 말한다. 대중의 항의 투쟁과 시리자의 트로이카와의 대치가 고조되었던 여름 동안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했던 것은, 우리가 채권단으로 하여금 협상을 받아들이게 만들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않은 채 사태전개에 말려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민주주의 수단들은 새로운 유럽 독재체제에서 정치를 하기에는 정말로 낡았습니다. (비록 이와 다른 정치 방법론에 끼워넣어지면 여전히 매우 유용할 수는 있겠지만요.)”
결국 시리자 지도부는 힘을 쓸 수 없어서 “민중의 욕구에 어떻게 가장 잘 복무할 수 있는지에 관한 평가의 중심을 ‘금융 독재에의 불복’에서 ‘현재의 힘을 유지하기’로 옮겼습니다. 긴축에의 동의 이후에 일어난 일은 조정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시리지가 원하는 변화를 성취하지 못한 이유는 “엘리트들이 중요한 권력과 결정적 문제들에 관한 결정력을 부르주아 국가의 민주적으로 구조화된 제도들로부터 뽑아냄으로써 사회의 기본적 기능들에 대한 통제력을 얻는 데 성공한” 데 있다. 그래서 “한 나라가 기본적인 서비스들을 운영하기 위한 제대로 기능하는 은행시스템과 충분한 유동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 반(反)민주적 제도들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카리치스는 좌파에게 냉정하고 냉엄한 조언을 하게 된다. “유럽에서 경쟁과 이윤의 논리를 전근대적 제도들 및 권력 형태들과 결합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독재가 급속히 출현하고 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말하자면 ‘현실 자유주의’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방식을 바꾸기
그러면 전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카리치스는 “스퀴즈 효과”―이는 “정치체제가 그리스 사회 내의 혼란과 절망감을 증폭시키는 여러 양태들”을 가리킨다―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서 정치 영역은 “인구의 실제 삶의 조건들”을 다룰 수 없게 되었고, “민중의 열망과 요구가 전혀 닿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긴축과 사회적 퇴락이 유발한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들과 그에 함축된 심리는 정치적 수준에 반영되지 못합니다. 이는 재현되지도 못하고 민주적으로 표현되지도 못하며 사회 안정과 결속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긍정적으로 변형되지도 못합니다. 정치적 재현 즉 대의(代議)의 제대로 된 기능이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심리적 상처가―부정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성향들의 형태로―사회의 모든 인간관계들의 망을 가로질러 확대되어 사회적 결속을 더 심층적으로 뒤흔들고 있습니다.
시리자는 트로이카가 대표하는 금융 독재에의 불복을 통해 기능하는 정치의 마지막 문지기였습니다. 그것이 지난 몇 년에 걸쳐 그리스 사회를 깊은 몰락으로부터 막았던, 시리자의 가장 소중한 역할이었습니다. 시리자가 권력에 머물기로 선택함으로써 일어난 정치체제의 내적 파열이 오늘날 더 심층적으로 사회적 결속을 뒤흔드는 핵심 요인입니다.
시리자의 항복은 사실상 “금융세력의 쿠데타를 정상화했”다고 카리치스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정치의 전제들과 유럽 전역에서의 신자유주의의 통치를 비준했다는 것이다. “시리자의 선택은 민중 계층이 고통스런 패배 이후 사용할 수 있는 결정적 도구―금융 독재에의 불복의 정치적 재현―를 박탈했습니다. 시리자는 전술적 후퇴의 가능성을 제거했습니다. 엘리트들이 유발한 싸움의 확대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제대로 다시 모으는 집단적 과정이며, 미래에 신자유주의의 정통성에 도전할 자원을 구축할, 더 효과적이고 탄력 있는 ‘민중전선’을 형성하는 집단적 과정을 제거한 것입니다.”
기존의 ‘민주주의’ 구조들이 아무리 존중받고 지속력을 가진다 하더라도 변형의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점은 (내 생각에) 좌파로서는 대응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들은 이제 막 ‘역사의 종말’이라는 환상[‘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정치적 발전의 불가피한 종점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라고 카리치스는 말한다.
새로운 정치적 운동들―광장점거운동, 오큐파이 운동 등―이 그러한 각성이 처음 힐끗 나타난 운동들이다. 이 운동들은 시리자, 코빈, 샌더스 등 주위에 존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활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조직 및 행동 형태들을 확연하게 업그레이드하고 대중의 기동(機動)을 창출하는 태도와 방법론을 근본적으로 변경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시작 단계에 있으며 새롭고 현실에 더 맞는 조직 및 투쟁 방식들을 향해 단호하고도 효과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카라치스는 다음과 같이 우직하게 결론짓는다. “우리가 전통적 정치실천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힘의 양은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민중 주권의 회복으로 가는 길을 트기에 불충분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처지라면 긴급한 문제는 ‘옳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내부에서 그리고 동시에 외부에서 정치하기의 새로운 개념적 틀을, 현재의 상황에 적절한 개념적 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이 이전의 전통적 정치 행동에서 보였던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과 자질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좌파의 정치적 실천의 지평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운동지향적이고 국가지향적인 접근법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조직하는 운동들, 국가를 향해 요구를 밀어붙이는 거리에서의 시위 및 투쟁, 그리고 의회수준에서 세력균형을 변화시키고 바라건대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를 구성할 목적으로 하는 투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접근법들 모두가―따라서 우리의 정치적 실천의 지평 전체가―대체로 국가권력을 중심에 놓는,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트들이 이미 정치권력의 무게중심을 반(反)민주적 제도들로 이동시켰고 국가를 신자유주의적 유럽 질서 내에 재위치시켰음을 압니다. 엘리트들은 사회의 기본적인 기능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억제 받지 않는 통제력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대로 된 것으로 간주되는 그 어떤 종류의 정책이라도 추구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위해서는 기본적 사회적 기능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일정 정도의 자율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엘리트들의 적대적인 행동에 맞설 수 없고, 그들의 특권에 감히 도전하는 사회에 기꺼이 고통을 가하려는 그들의 태도에 맞설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전투의 장소가 바뀌어서 우리의 전략이 무너졌다면, 불확실한 전장에서 더 능력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리치스는 “우선 사항을 정치적 재현에서 민중권력의 구축으로 바꿀 것”을 권고한다.
민중의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설계된 유럽적 틀에서 민중 계층을 정치적으로 재현하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자율적인 경제적·사회적 힘의 생산 네트워크( an autonomous Network of Production of Economic and Social Power, NESP)를 수립해야 합니다. 협동적인 생산단위들의 탄력 있고 역동적이며 상호연관된 회로들의 네트워크, 대안적인 금융 도구들, 지역의 자치체들, 기반시설·디지털데이터·에너지시스템·분배네트워크들에 대한 공동체의 통제 등입니다. 이것들이 엘리트들의 독재적 사회 통제에 도전하는 데 필요한 자율을 획득하는 방법들입니다.
이것이 가능한가요? 내 생각에 인간의 활동은 이윤과 금융 경쟁의 기생적 논리와는 배치되는 경험, 노하우, 기준들과 방법들, 혁신들 등을 말 그대로 매일 산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매우 많은 구현된 능력들과 여러 문화에서 나오는 가치들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요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류 맥락에서 양성되었을지도 모르며 종종은 표준적인 경제적 회로와 기능적으로 연결된 요소들이죠. 그러나 이 요소들의 더 나아간 발전, 이 요소들이 자본과는 다른 논리와 가치들이 지배하는 대안적인 일관된 패러다임에 점차 흡수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요소들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대안적인 패턴으로 기능적으로 구체화되는 것―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명확하고 체계적이며 전략적으로 폭넓은 지향을 가진 좌파의 (짧게 제시해본) 의무입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우리는 일정 정도의 탄력성을 성취할 것입니다. 민중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힘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 최선의 경우에는 우리는 필요한 헤게모니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민중은 단호하게 자율을 재천명하면서 적극적·창조적·대대적으로 기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리치스는 “더 이상 충분하거나 적절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는 우선 사항들, 정신적 이미지들, 방법들 및 조직습관들을” 좌파가 반사적으로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의 집단적인 행동들, 수사(修辭), 결정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략의 범위를 결정적으로 형성하는 암묵적이고 뿌리 깊은 규범들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하는 방법’입니다. 후자는 우리의 집단적 상상, 방법론 그리고 조직원리의 산물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낡은 틀에 고착되어 있다. 어떻게 좌파는 ‘정치적 재현’이라는 개념을 확대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카리치스는 “기존의 제도를 개편하고 민중 계층의 정치적 지렛대를 확연하게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재현의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정치적 재현을 ‘커먼즈’로서 구성하는 기획을 제출하는 것이 정치적 재현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향한 귀중한 통찰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존의 민주적 기능을 전제하지 않고 민중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민중권력을 새롭게 변형시켜 복원하기 위해서 정치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걸려있는 것이 매우 크다고 카리치스는 말한다. “유럽에서 극우 세력의 지배가 신자유주의와 긴축의 최종적 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더러운 귀결일 것이고 유럽의 몰락의 막판일 것입니다. 유럽 나라들이 서로 싸울 터인데, 이는 과거처럼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 몰락하는 지역에서 누가 덜 비참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표준적인 유럽 회로가 붕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시는 그리스에서 명백한데, 그리스에서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경제적 회로―직업이나 은행 계좌가 있는 것, ‘정상적 삶’을 사는 것―에서 배제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 전체가 몰락하는 중이며, 몰락하는 사회는 생존하기 위해서 반응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파악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기능들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민주적이고 탈중심적이며 민중의 역량의 해방에 기반을 두는 방식으로―수행하는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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