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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Commonwealth에서 칸트와 관련된 부분


 

Commonwealth에서 칸트와 관련된 부분


서문


▣ 가난, 사랑, 지적 힘

가난과 사랑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지적 힘이다. 예를 들어서 칸트는 계몽을 철학의 죽음을 낳는 “광신적인 비전들”을 몰아낼 수 있으며 더욱이 사유의 모든 단속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관점에서 파악하였다.(Immanuel Kant, for example, conceives of Enlightenment in terms of a force that can banish the “fanatical visions” that result in the death of philosophy and, moreover, can win out over every policing of thought.) 데리다는 “계몽된” 칸트를 따라서 이성을 회의하는 힘으로 되돌려놓았으며, 이성의 혁명적 열정이 역사의 주변부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1부

▣오늘날의 사회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초월적 분석에서 선험적 비판으로의 이동

  칸트가 일으킨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이성과 오성을 초월적(transcendent) 본질들과 물 자체에 근거시키려는 모든 중세적 시도들을 종식시켰다. 이제 철학은 사유와 경험에 내재하는 선험적(transcendental) 구조들을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했다. “나는 객체들과 관련되기보다는 객체들을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과 ―이것이 경험에 선행하는 한( a prioiri)에서―관련되는 모든 인식을 선험적(transcendental)이라고 부른다.” 칸트의 선험적 차원은 이렇듯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경험의 사실들 안에 전적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외부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이 선험적 영역은 지식과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들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칸트의 선험적 비판이 주로 이성과 지식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우리의 비판은 권력을 목표로 한다. 칸트가 초월적 본질들과 신성한 원인들에 대한 중세철학의 관심을 일소하였듯이, 우리도 예외에 대한 지배―이는 정말로 군왕의 특권들이라는 낡은 생각들의 잔재이다―에 입각한 주권이론들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법과 자본이 주된 힘들로서 작용하는 권력의 선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한 선험적 권력들은 주권자의 명령을 통해서, 심지어는 주로 무력을 통해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구조화함으로써 복종을 강요한다.


법이 선험적 구조로서 기능한다는 직관적인 생각은 한스 켈젠(Hans Kelsen)에서 존 롤스(John Rawls)에 이르는, 법과 헌법을 연구하는 학자들 전체로 하여금 법이론에서 칸트적 형식주의를 발전시키도록 했다. 인간의 사유와 행동에 본질적으로 갖추어진 것이라고 간주되는 재산은 입헌적 국가와 법의 지배에서 규제적 이념으로서 복무한다.(Property, which is taken to be intrinsic to human thought and action, serves as the regulative idea of the constitutional state and the rule of law.) 이것은 정말로 역사적 토대가 아니라 윤리적 의무이며 도덕적 질서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개인의 개념은 있음(being)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짐(having)에 의해서 정의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심층적인’ 형이상학적, 초월적 통일성에 준거하기보다는 재산 혹은 소유물을 부여받고 있고 오늘날 점차로 주주로서 ‘세습적인’ 관점에서 정의되는 ‘피상적’ 실체에 준거한다. 실상, 소유의 정당화라는 초월적 형상은 개인의 개념을 통하여 합법성의 선험적 형식주의로 통합된다. 예외가 구성(constitution) 내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본도 자기 나름의 법(칙)들―사회적 삶을 구조화하고 위계와 종속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경제적 법칙들―을 부과하는 지배의 비인격적(impersonal) 형식으로서 기능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요소들―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재산의 힘, 다수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할 필요, 전지구적 인구의 큰 부분이 착취의 회로들로부터조차도 배제되어 있는 것 등―은 모두 선험적인 것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이것을 폭력으로서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매우 정상적인 규범으로 되어 있고 그 힘이 매우 비인격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통제는 외적인 주권적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주로 내화된 법(칙)들에 의존한다. 금융메커니즘이 점점 더 높이 발전하면서 사회적 삶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자본이 규정하는 것도 더 광범하고 완전해진다. 물론 금융자본은 매우 추상적인 까닭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추상성이 선험적인 것이 갖는 일반적인 힘을 금융자본에 부여하는 것인데, 이 힘이 미치는 범위는 점점 더 보편적이 된다. 이는 개인적 및 국가적 부채를 통해서, 콩에서 컴퓨터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생산에 작동하는 금융적 도구들을 통하여, 그리고 통화와 이자율의 조작을 통하여 자신들이 금융시장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때조차도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험적 비판은 칸트의 논의의 형식을 좇아서 어떻게 자본과 법이 서로 얽혀있으며―우리가 소유의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것―사회적 삶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그 삶의 모든 측면들과 국면들에서 결정하고 지시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비판은 분명 칸트를 그에게 충실하지는 않은, 우리 나름의 의도를 가진 방식으로 전유한 것으로서, 이는 그의 저작 전체를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우리는 그의 인식론적 도식의 형식적 구조는 소유와 법의 힘의 형식적 구조에 상응함을 인식함으로써 그의 비판적 관점을 전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험적 영역을 긍정하기보다는 그것에 도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칸트는 자본 혹은 그 입헌적 국가의 지배를 전복하는 데 관심이 없다. 실상 존-레텔(Alfred Sohn-Rethel)은 칸트가 특히 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권력과 소유의 구조들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도록 만들면서 “부르주아 사회의 완전한 정상성을 입증”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칸트와 논쟁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도구들을 사용하여 오늘날 지배적인 권력들과 대면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부각해야 할 점은, 이 소유의 공화국에 대한 선험적 비판의 실천적 귀결들이 주권과 파시즘에 대한 ‘초월적’ 비판을 특징짓는 무력함과 씁쓸한 체념의 태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이다. 자본, 공화국 헌법, 그리고 양자의 교차를 권력의 선험적 형식들로 보는 우리의 비판은 용인이나 순종을 함축하지 않음은 물론 절대적 거부를 함축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비판은 저항과 변형의 능동적 과정으로서, 이 과정에서 민주적 미래를 가리키는 요소들을 새로운 발판 위에서 해방시키고 가장 의미심장하게는 자본 내에 갇힌 산 노동과 공화국 내에 갇힌 다중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과거로의 회귀나 무로부터의 미래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의 껍데기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변형의 과정을 목적으로 한다.


[과감하게 알라!(Sapere Aude!)]

칸트는 소유의 공화국의 예언자이지만, 그의 정치적․경제적 견해에서 직접적으로 그러한 것이라기보다는 간접적으로 그렇다. 즉 그가 그의 인식론적․철학적 탐구를 통해 발견하는 권력의 형식에서 그렇다. 우리는 칸트의 선험적 비판을 따르기를 제안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분명 빗나가는, 충실하지 못한 추종자로서, 그의 저작을 결에 거슬러 읽는다. 우리가 제안하는 정치적 기획은 (칸트와 함께 하는) 초월적 주권에 대한 공격이자 (칸트에 거슬러서) 소유의 공화국의 선험적 권력을 탈안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칸트를 넘어서는) 사회적 삶의 내재적 힘들의 긍정이기도 하다. 이 내재적인 장소야말로 민주주의가 구축될 수 있는 지형―유일하게 가능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내재성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사회의 직접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능력들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내재성의 사회적 차원은 정치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비판적 기획은 단순히 권력의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그 메커니즘에 대항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거부는 지배의 부과에 대한 중요하고도 강력한 대응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정적 몸짓을 넘어서 확대될 수 없다. 폭력 또한 종종, 우리의 뼈 속에 침전된 지배층이 가한 폭력을 되돌려 폭력을 발생시킨 권력에 반격을 가하는 일종의 부메랑 효과로서  결정적이고 필요한 대응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은 반작용적일 뿐이며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자생적인 반응들을 가르쳐 거부를 저항으로, 그리고 폭력을 힘(force)의 사용으로 변형시킬 필요가 있다. 각 경우에 전자는 직접적인 대응인 반면, 후자는 실재와 대면한 결과로 나오며 우리의 정치적 본능과 습관, 상상력과 욕망의 훈련의 결과로 나온다. 나온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힘의 연합적 사용과 저항이 권력에 대한 부정적 대응을 넘어서서 사회적 삶의 내재적 평면 위에서 대안을 구축하는 조직화의 기획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창안과 조직화의 필요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다시 칸트로 돌아가게 한다. 실제로는 칸트의 저작들을 관통하며 근대 권력의 명령과 권위에 대안을 제시하는 비주류적(minor) 목소리로 돌아가게 한다. 이 대안은 예를 들어서 그의 잘 알려진 짧은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명확하게 표면에 부상한다. 미숙의 상태―권위를 가진 자들에게 우리를 대신하여 말하고 생각하도록 의존하는 종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는 능력과 의지를 수립하기 위한 열쇠로서 텍스트의 서두에서 칸트가 호라티우스의 권고를 상기하여 말하는 것은 ‘과감하게 알라’(sapere aude)이다. 그러나 계몽에 대한 이러한 이해 그리고 계몽을 정의하는 권고는 칸트의 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끔찍하게 애매해진다. 한편으로 그가 우리가 채택해야 할 종류의 이성의 발휘를 설명해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결코 과감하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세금을 내고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고 궁극적으로 주권자인 프리드리히 2세의 권위에 복종하는 등 사회에서의 주어진 역할들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이, 그 삶이 매우 규칙적으로 조직되어 있어서 그의 아침 산책에 시계를 맞출 수 있다고들 말하는 그 칸트이다. 실로 칸트의 저작의 주류적(major) 계보는 계몽을 당대의 사회적 질서의 보존과 일치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이성의 교정’ 과정으로 보는 저 견고한 유럽 합리주의 전통에 참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칸트는 계몽의 권고를 거슬러 읽을 가능성을 연다. ‘과감하게 알라’는 동시에 ‘과감하게 되는 법을 알라’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순한 전도는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관여되는 위험과 함께 거기에 필요한 과감성과 용기를 암시한다. 이것이 비주류적(소수자적) 칸트, 담대하고 과감한 칸트이다. 칸트의 이 측면은 종종 숨겨져 있고 지하에 속하며 텍스트들 속에 묻혀 있지만, 때때로 맹렬하고 화산 같은 파열의 힘으로 분출한다. 여기서 이성은 기존의 사회적 권위를 지탱하는 의무의 토대가 더 이상 아니라 현재의 고정성을 뚫고 새 것을 발견하는 불복종적이고 반란적인 힘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들이 곧바로 복종의 총구에 의하여 잠잠해질 뿐이라면 도대체 우리가 왜 과감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칸트의 비판적 방법은 실상 이중적이다. 그의 비판들은 지식과 현상의 선험적 조건들의 체계를 결정하지만, 또한 때때로 선험적 차원을 넘어서 세계의 자유롭고 삶정치적인 구축으로 가는 열쇠인 활력과 창안에 대한 휴머니즘적 생각을  취하기도 한다. 주류 칸트는 소유의 공화국의 선험적 질서구축을 안정화하는 도구들을 제공한다. 반면에 비주류 칸트는 그 토대를 파열시켜 삶정치적인 내재성의 차원에서 변이와 자유로운 창조를 위한 길을 여는 것이다.


칸트 내부의 이 두 경향은 우리로 하여금 두 정치적 경로들을 구분하도록 돕는다. 주류 칸트의 노선은 정치사상의 장에서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가들에 의하여 가장 충실하게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이성과 계몽에 대해 말하지만, 과감하게 아는 것과 과감해지는 법을 아는 것이 일치하는 지형에는 결코 정말로 진입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계몽은 기존의 사회적 구조의 용인, 권리 및 민주주의에 대한 타협으로 훼손된 비전, 덜 나쁜 것[각주:1]의 묵인을 항상 필요로 하는 영속적인 미완의 기획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따라서 소유의 공화국을 결코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고 그 힘을 부주의하게 무시하거나 아니면 공화국이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와 평등의 사회로 될 수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와 존 롤스(John Rawls)의 사회민주적 기획들은 선험적인 형식적 도식들에 기반을 둔 사회질서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 하버마스와 롤스는 모두 활동의 초기에 사회변혁을 지향한 더 동적인 개념들을 제안하였다. 하버마스는 근본적인 생산적 주체적 능력의 가능성을 여는 간주체성이라는 헤겔적 개념으로 작업을 하며, 롤스는 사회적 결정들과 제도들이 사회의 가장 불리한 구성원들에게 가장 혜택을 주는 ‘차등 원리’를 강조한다. 이 제안들은 비록 상이한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사회적 변혁의 동학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을 해 나아가면서 이 사회적 변혁의 가능성들과 주체적 능력은 희석되거나 완전히 방기된다. 하버마스의 소통적 이성과 행동이라는 생각들은 모든 사회적 실재를 항상적으로 매개하는 과정을 정의하게 되며, 그리하여 기존의 사회질서의 주어진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강화하게 된다. 롤스는 주체적 능력과 변혁적 과정들을 중립화하는 형식적, 선험적 판단의 도식들을 구축하여 사회 체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강조를 둔다. 하버마스와 롤스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는 따라서 주류 칸트의 계몽관을 반향한다. 이는 그 교정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선험적 형식주의의 도식들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강화하는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와 울리히 벡(Ulrich Beck)은 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기반을 갖는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를 제안한다. 하버마스와 롤스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적 차원의 ‘외부’에 있는 출발점과 매개를 필요로 하는 반면에 기든스와 벡은 ‘내부’에서 시작한다. 기든스는 회의적인 입장을 채택하여 경험적이고 현상적인 수준으로부터 개혁의 과정에 있는 사회의 적절한 재현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인 것에서 선험적인 차원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사회가 순응하기를 거부할 때, 반란을 일으킨 게토와 도처에서 싹이 트는 사회적 갈등이 사회적 실재로부터 직접 출현하는 개혁주의적 매개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 기든스는 개혁과정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주권적 권력에 호소한다. 역설적이게도, 기든스는 선험적인 기획을 도입하며 그런 다음에 초월적 권력에 그렇게 호소함으로써 그 기획을 침해한다. 울리히 벡은 기든스보다도, 그리고 다른 어떤 사회민주주의적 이론가보다도 그의 발을 실재적인 사회적 장에 기꺼이 견고하게 들여놓고자 하며, 그 장을 구성하는 모든 애매한 투쟁들, 불확실성, 공포, 열정들을 다루고자 한다. 예를 들어 벡은 공장체제에 대한, 그리고 공장폐쇄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동학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는 근대의 공장생산체제와 같은 하나의 사회적 형태의 소진을 분석할 수 있지만, 새로운 사회적 힘들의 출현을 온전하게 파악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그의 사유는 선험적 구조의 고정성과 마주치며, 이것이 그에게도 궁극적으로 분석의 가이드가 된다. 벡이 보기에는 근대는 하이퍼근대(hypermodernity)에 자리를 내주는데, 하이퍼근대는 정말로 결국에는 근대의 주된 구조들의 연속일 뿐이다.


이와 유사한 사회민주주의적 입장들이 데이비드 헬드(David Held),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과 같은 현재의 다양한 지구화 이론가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보인다. 칸트의 반향은 여기서는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이론가들은 자본과 소유의 구조들을 결코 문제 삼지 않고 전지구적 체제의 변혁을 설교한다. 이 다양한 인물들에게 들어있는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은, 때때로는 심지어 평등, 자유,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지만 소유의 공화국의 구조들을 문제로 삼는 데 실패하는, 심지어는 강화하는 사회적 개혁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민주주의의 개혁주의는 자본의 개혁주의와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근대적 기획을 미완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마치 시간이 더 있고 노력을 더 한다면 바라는 개혁이 마침내 일어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주장은 완전한 착각이다. 개혁의 과정은 문제 삼지 않은 법과 소유의 선험적 구조들에 의하여 애초부터 봉쇄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주류 칸트의 선험론적 입장을 충실하게 이어받아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사회질서의 모든 요소들이 굳건하게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는 계몽의 과정을 옹호한다. 소유의 공화국을 개혁하기 혹은 완전하게 하기는 결코 평등과 자유를 낳지 않을 것이며, 불평등과 비(非)자유의 구조들을 영속화할 뿐이다. 17세기의 투철한 반동적 인물인 로버트 필머(Robert Filmer)는 이 장(章)[각주:2]에 제사로 달린 대목에서 자유와 소유는 불과 물처럼 상극이어서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한 신칸트주의적 입장들은 비록 착각에 빠져있지만,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몇몇 시점들에서, 특히 파시즘이 발흥하는 시기에 이 입장들은 피해를 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면 누구도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와 1930년대까지 신칸트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와 유럽 정치의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였으며, 이는 실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에 열려있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주로 마르부르크(헤르만 코헨Hermann Cohen과 파울 나토르프Paul Natorp)와 하이델베르크(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와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에서, 그리고 또한 옥스퍼드, 파리, 보스턴, 로마에서 모든 가능한 칸트의 변형들이 꽃을 피웠다. 정신과학계 전체에 걸쳐서 이데올로기적 콘서트(화합)가 이토록 광범하게 퍼지고 그 영향력이 이토록 심오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기업의 우두머리들과 씬디컬리스트들[각주:3],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역할들을 나누어서 일부는 오케스트라에, 다른 이들은 합창단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콘서트에는 심오하게 어긋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회의 불가피한 개혁과 정신의 진보에 대한 독단적인 신념이 그것인데, 이는 그들에게 부르주아 합리성의 전진을 의미했다. 이 신념은 변형을 가져오려는 어떤 정치적인 의지 혹은 심지어 투쟁에 참가하는 데서 오는 어떤 위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다음에 파시즘이 출현했을 때 근대의 선험적 의식은 곧바로 일소되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애도해야 하는가? 선험론적 환상을 가진 현대의 사회민주주의 사상가들은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들―이것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1930년대의 것들과 다르다―에 대해서 그들의 선배들이 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인 대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착각에 빠진 진보에 대한 신념은, 단순히 상투적인 것이 된 계몽의 지배를 유지하기보다 과감하게 알고 행동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선험적 메커니즘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행동과 투쟁의 실재적 수단을 가리거나 방해한다.


우리는 이어지는 논의에서 과감하게 아는 것이 동시에 과감하게 되는 법을 알기를 필요로 했던 비주류 칸트의 방법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 또한 계몽의 기획인데, 다만 유물론과 변형의 방법론이 저항, 창조, 창안의 힘들을 청하는 대안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 계몽이다. 주류 칸트가 오늘날까지도 소유의 공화국을 지탱하고 옹호할 도구들을 제공하는 반면에 비주류 칸트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전복하고 다중의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방법을 보도록 돕는다.

[과감하게 알라!] 절 끝


푸꼬는 비주류 칸트의 깃발을 이어받고 있다.



6부 2장

근대의 지배적인 정치적 통제방식은 북대서양 세계에서는 가장 분명하게 칸트 철학의 요소들에 기반을 둔 정체성들의 매개를 통해서 기능한다. (정신적 형식들 및 존재론적 구조들이 경험의 내용을 사전에 조직하는 명시적인 형이상학에 의해서 선험적 매개가 지탱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이 책의 여러 곳에서 강조하였다.) 고전적 형이상학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실체(substance)와 원인 혹은 양태와 관계라는 범주들이 존재론적 과정들을 정의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선험적 철학에서도 생산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매개의 범주들이 선험적 도식체계를 기계와 같은 어떤 것으로 구성한다. 칸트의 사상과 칸트주의에서 선험적 도식체계는 지식과 권력의 구조들을 구축하는 데서 점증적으로 자율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정체성들은 선험적인 것의 형식적 통일성 속에서 매개되는 동시에 확증된다.


반란을 사회적 존재의 짜임새를 변형하는 제도적 과정으로 확대하는 것―이는 혁명을 정의하려는 최초의 것으로서 훌륭하다. 칸트가 프랑스 혁명은 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자연 법칙에 토대를 둔 헌법의 진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선언할 때 그는 이 정의에 가까이 간다. 그는 특히 그 과정의 공적, 보편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 사건의 핵심은 인간이 행한 중요한 행동들이나 범죄들에 있지 않으며...하나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사라지면 다른 것이 땅 속에서 솟아오른 듯이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화려한 구식의 정치적 구조들에 있지도 않다. 정말이지 이런 것이 아니다. 이 거대한 혁명들의 게임에서 스스로를 공적으로 드러내며 혁명과 관련된 사람들 한쪽을 다른 한쪽에 반해서 그렇게 보편적이면서도 사심없이 편드는 것은 단지 보는 사람들의 사유방식이다.”[각주:4] 혁명은 반란이 일단 제도적 과정이 된 것이며 통치(정부)의 한 형태이다. 이를 칸트는 공적인 것이라고 정의하며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라고 부를 것이다.


칸트는 계속해서 사회적 존재를 혁명이 변형하는 것은 역사에서의 혁신을 구성하며 미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 보편성 때문에 이러한 사유방식은 인류 전체의 성격을 일거에 보여주며, 동시에 그 사심없음 때문에 인류의 적어도 경향적인 도덕적 성격, 인간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향한 진보를 희망하게 해줄 뿐 아니라 그 능력이 현재에 대하여 충분한 한에서 이미 그 자체가 진보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치의 새로운 형태로서의 혁명은 실상 진보에 대한 칸트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 꽉 물려있으며 기동할 수 있는 여지를 별로 남기지 않는다. 혁명은 이미 구성된 권력의 압박과 항상 싸워야하며, 과거의 축적된 사회적 무게와 항상 싸워야 한다. 예를 들어 혁명가들이 성자들과 왕들의 머리들을 떼어냄으로써 모독한 프랑스와 까딸루냐의 성당들의 고딕 양식의 앞면을 생각해보라. 그렇다. 귀중한 문화유산을 그들이 파괴한 것에 우리도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권력의 상징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이해한다.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우리를 미래로 출발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때조차도 과거는 종종 돌입하여 다시 우리에게 자신을 부과한다. 예를 들어 토끄빌은 과거가 때로 어떻게 혁명적 미래에 몰래 다시 나타나는가를 서술한다. 그러나 이는 반동적인 인물들이 종종 주장하듯이 역사의 법칙이나 혁명의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가능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가 첫째, 자연적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혁명적 투쟁에 토대를 둔 것으로서 제시될 때, 둘째, 제도적 형태로 공고화되고 강화될 때 진보에 대한 칸트의 신념을 공유할 수 있다.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통치를 창출하는 것은 과거를 저지하고 미래를 향해 여는 것이다.

 

  1. 덜 나쁜 것(lesser evil) : The lesser of two evils principle, also known simply as the lesser evil, is the idea that of two bad choices, one isn't as bad as the other, and should be chosen over the one that is a greater threat. / Originally, "lesser evil" was a Cold War-era pragmatic foreign policy principle used by the United States and, to a lesser extent, several other countries. The principle dealt with the United States's attitude regarding how third-world dictators should be handled, and was closely related to the Kirkpatrick Doctrine of Jeane Kirkpatrick. [본문으로]
  2. 1부 1장을 말함. [본문으로]
  3. Syndicalism is a type of economic system proposed as a replacement for capitalism and state socialism which uses federations of collectivized trade unions. For adherents, labor unions are the potential means of both overcoming economic aristocracy and running society fairly in the interest of the majority, through union democracy. Industry in a syndicalist system would be run through co-operative confederations and mutual aid. Local syndicates would communicate with other syndicates through the Bourse du Travail (labor exchange) which would manage and transfer commodities. (from Wikipedia) [본문으로]
  4. [원주] Immanuel Kant, The Conflict of Faculties, trans. Mary Gregor (Lincol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2), p. 153 (emphasis added). 독어 원문 : Diese Begebenheit besteht nicht etwa in wichtigen, von Menschen verrichteten Thaten oder Unthaten, wodurch, was groß war, unter Menschen klein oder, was klein war, groß gemacht wird, und wie gleich als durch Zauberei alte, glänzende Staatsgebäude verschwinden, und andere an deren Statt wie aus den Tiefen der Erde hervorkommen. Nein: nichts von allem dem. Es ist bloß die Denkungsart der Zuschauer, welche sich bei diesem Spiele großer Umwandlungen öffentlich verräth und eine so allgemeine und doch uneigennützige Theilnehmung der Spielenden auf einer Seite gegen die auf der andern, selbst mit Gefahr, diese Parteilichkeit könne ihnen sehr nachtheilig werden, dennoch laut werden läßt, so aber (der Allgemeinheit wegen) einen Charakter des Menschengeschlechts im Ganzen und zugleich (der Uneigennützigkeit wegen) einen moralischen Charakter desselben wenigstens in der Anlage beweiset, der das Fortschreiten zum Besseren nicht allein hoffen läßt, sondern selbst schon ein solches ist, so weit das Vermögen desselben für jetzt zureicht. (이어지는 인용문도 포함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