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Commons Transition의 2017년 6월 5일자 글 “Commons in the Time of Monsters: How P2P Politics Can Change the World, One City at a Time”의 전반부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저자는 안 마리에 우뜨라뗄(Ann Marie Utratel)과 스따꼬 뜨론꼬소(Stacco Troncoso)이다. 이 웹싸이트의 글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Peer Production, P2P Attribution-ConditionalNonCommercial-ShareAlikeLicense가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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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시대의 커먼즈―P2P 정치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커먼즈가 정치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다. 그 방법과 원칙들이 더 가시화되고 있으며 참여자들이 유럽의 여러 도시들의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선 현재의 정치적 맥락을 보고 그 다음으로 커먼즈 정치의 이 새로운 물결의 탄생과 궤적에 대해 평해보기로 하자.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 풍경이 얼마나 나쁜지 점검해보자. ‘차악주의’(lesser-evilism)의 번성? 맞다. 대안 우파(Alt-right)의 전 세계적 확산? 맞다. 한때 찬란했던 (시리자Syriza나 뽀데모스Podemos 같은) 좌파 정당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무능력 등으로 인해 이제는 녹슬었다? 맞다.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나쁜 상황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도한 행태들이 그 지적 신뢰성의 남아있는 흔적마저 싹 부식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무도함은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것이 되어서, 안전에 대한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행동의 여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제공한다. 장기화된 긴축정치와 복지국가에 대한 약탈이 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절망에 빠뜨리고 분노시켰으며 발흥한 우파 포퓰리즘 운동이 이것을 이용하여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 참여는 의미 없는 선택에 국한된 듯이 보일 수 있다. 흘러내리는 바위들 위를 기어서 익숙하지만 변하고 있는 지구화된 자본주의라는 땅을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21세기의 오만(즉 브렉시트, 트럼프주의, 대안 우파 혹은 극우)을 가득 싣고 곤두박이로 달리고 있는 화차에 편승할 것인가? 대의 민주주의의 실험을 버릴 때인가? 더 인간적이고 참여적인 정치를 위한 적극적인 모델들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정치적 맥락은 많은 책들과 글들에서 개괄되었으나 슬프게도 불가피한 파멸을 저지할 실행 가능한 대안들은 거의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글은 롤러코스터 같은 시장과 관료제로부터 해방된 정치체제를 다시 상상하는 시도를 서술한다. 여러 장소에서 선거에서 승리한 현존하는 효과적인 정치운동에 기반을 둔 이 글은 거버넌스, 생산, 돌봄 노동, 문화적·자연적 유산의 파수에서 이루어진 발본적인 혁신에 대한 서술이며 아래로부터의 체계 구축을 위한 반석을 놓는 정치에 대한 서술이다. 이는 커먼즈와 P2P의 정치로서, 공통자원의 공유된 창조와 관리를 확장한 것이고 자치도시 선거에서의 최근의 성공적 분출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괴물 시대의 커먼즈
그람시가 말했듯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듯이 1)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있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지금은 괴물들의 시대이다.” 신자유주의화와 사회적 해체가 점진적으로 진행된 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정치는 자신의 증오정치를 국가권력 장치에 연결시키는 데 골몰하는, 여성 혐오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이며 금융 면에서 특권을 쥔 ‘뉴 라이트’에 의해 매우 공공연하게 뒤엎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국가주의 정치와 선거 무대가 부과하는 구조적 제한에 의해 효과적으로 봉쇄된다면, 행동의 여지는 어디에 있는가? 민중이 동의하든 안 하든 국가권력을 먼저 쟁취한 다음 공정하고 지속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레닌주의적 사고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음 체제는 그저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점점 더 황량해지는 이러한 정치 풍경 안에서도, P2P 동학을 사용하여 커먼즈를 구축하는 친화성 기반의 네트워크들과 공동체들이 행동을 취해왔다. 많은 분야에서 이루어진 소규모 혁신들이 참되고 지속 가능한 자원관리와 토대를 가진 사회적 결속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고 있다. 공동체에 의해 가능해진 이러한 전개과정들은 거버넌스, 작물 재배, 서비스 공급, 과학, 연구 및 개발, 교육, 심지어는 금융과 통화(通貨)에서 어떻게 우리의 삶이 다르게 조직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소에 기반을 둔 이러한 노력들 다수가 문서로 기록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복제되고 있다. 끌어다 쓸 지식 커먼즈의 씨앗을 다시 뿌리는 과정인 것이다. 이는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일명 P2P(peer-to-peer, person-to-person, people-to-people)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 테크놀로지는 건설적 변화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 이 테크놀로지는 소규모에서 이루어지는 동학이 더 높은 수준의 복잡성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게 하며, 힘을 되찾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힘으로 사람들은 생산, 공개 회계, 자연적·문화적 공통재의 파수에서 혁신을 창출할 수 있으며, 또한 거버넌스에서도 그럴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합해지면 진정으로 아래로부터 구축되는 체계의 기초적 요소가 된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합쳐져서 ‘탈자본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이는 스스로를 커머너라고 의식하는 사람들이 이 체계들을 알아보고 증진하고 발전시키며 그 문화적인 영향력과 중요하게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증가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커머너들은 유사한 수단을 사용하여 매우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다른 세력들이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시적인(prefigurative) 접근법들이 합리적인 대안들을 구축하는 핵심적 요소들 가운데 일부이다. 그러나 이 접근법들이 단독으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이 접근법들은 기존의 체계들의 제한 내에서 구축된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가 부과하는 종획 2을 통해서든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증오 정치를 통해서든 사람들이 기대하거나 바라는 ‘정상적인’ 조건은 틀림없이 위축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영향을 미칠 것인데, 일자리 보장, 연금, 실업, 합리적인 노동시간과 조건, 공정성이 여기에 속한다. 그 결과로 저 생산적인 공동체들의 작동에 필수적인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불가피하게 줄어들 것이다.
서구의 맥락 바깥에서 보자면, 이 바꿀 수 있는 여지는 ‘특권’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시장을 최대화하는 브뤼셀(유럽연합)의 명령 아래에서 그러한 특권은 사라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2008년에 커튼 뒤의 조종자가 드러났으며, 갑자기 타오른 대항적 정치활동이 2011년에 세인의 주목을 최고로 받는 정점에 도달했다. 2017년에 물음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용적인 것이 되었다. ‘낡은 세계의 껍데기 안에서, 이 껍데기가 압착되어 닫히기 전에,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인가?’
2011년 이후의 항의운동은 우파로부터 일어 오르는 증오의 파도에 충분히 잘, 혹은 빨리 맞서는 일을 정치적으로 잘 해내지 못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발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로의 회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현재 유럽의 정치 풍경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외국인 혐오적 행태들은 능숙한 인터넷 기술 및 소셜 미디어 기술만이 아니라 P2P 전술도 사용하여 그 사회적 기반을 구축했다. 대체로 P2P 전술과 도구들은 더 포용적이고 정당한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장려되었지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세력에 의해 장려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상처에 소금을 뿌린 셈이다.
우리는, 금융세력이 항상 그들의 이익을 지켜줄 극우 혹은 파시스트 노선을 선호하리라는 점을, 그리고 재분배를 추구하는 그 어떤 정치 노선도 인정사정없이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으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0년대의 해로운 정신이 되돌아오면서 지체할 틈이 사라졌다. 지금 인내는 치명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이제는 설득력 있고 실질적인 정치적 대안들로 집단적인 문화적 상상력을 채우고 신자유주의의 정상화가 죽은 선전임을 폭로할 때이다. 우리를 아연케 하는 광경(브렉시트, 트럼프 등)이 또 하나의 약물중독임을 폭로할 때이다.
바로 그래서 지금은 커먼즈 운동이 더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활동성을 띨 때이다. 자기조직된 생산, 돌봄 노동, 생태 파수를 넘어서, 심지어는 윤리적인 생성적(generative) 시장을 넘어서, 더 효과적인 정치적 참여가 들어설 때이다. 복지국가 모델의 정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과 공동체에 의해 조직되는 실천들을 촉진하는, 발본적으로 다시 상상된 정치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커먼즈 지향적 정치 참여의 모델들이 스페인의 자치도시 운동(municipal movements)에 들어있다. 지금부터는 이 운동을 개략할 것이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정치적’이라는 말이 대의정치만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실행 가능한 권리 또한 포함한다는 점이다. 즉 공론장(public sphere, 공공영역)을 포함한다. 지금 새로운 대안들을 구축하려는 노선과 기존의 정치적 채널들을 해킹함으로써 변화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선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두 접근법―예시적 접근법과 제도적 접근법―이 모두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전위주의 ―21세기에 우리를 조심시키는 교훈적 이야기
이제 유달리 주목을 받은 한 당의 기원을 되돌아볼 때이다. 이 당은 포용적이고 커먼즈 지향적인 정치적 과정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해주었으나 그 기대에 부응하는 데 결국 실패했다. 그래도 그 초기의 공개집회들에는 커먼즈 정신이 존재했다. 이는 나중에 이루어진 자치도시 당들의 발생을 고찰하면서 유념해야할 요소이다.
2014년 1월 마드리드 자율대학의 일단의 정치학 교수들이 스페인의 국영 방송에서 꽤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당의 형성을 선언했는데, 이는 “거리로 돌아가는 정치, 겪을 것을 다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하는 정치”를 요구하는 당이었다.
대표자들의 더 큰 관대함, 더 큰 수평성과 투명성, 공적 미덕과 사회정의라는 공화주의적 미덕들의 부활,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현실의 인식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우리 자신이 결정을 하고 우리의 문제에 우리가 응답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절해진 지 수십 년이 되었다. (모베르 피차 선언 3)
몇 달 후의 유럽 의회 선거에서 이 새 당은 120만 표 이상을 얻어 유럽 의회에서 5개의 의석을 차지한다.
우리는 지금 뽀데모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당의 궤적은 커먼즈 지향의 정당이 할 수 있는 것―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려준다. 이 당의 초기의 활동은 긴급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한 것을 알려주며 민중의 욕구와 욕망을 표현하면서 민중의 희망에 호소하는 데 쓸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뽀데모스의 초기의 성공은 그들의 작업이 구별되면서도 연관되는 두 수준―대중매체와 네트워크 미디어―에서 공히 이루어진 데 기인한다.
TV토론에서 첫 경험을 쌓은 뽀데모스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은 (주로 남성들이다) 그들이 ‘라 카스타’(영어로 ‘the cast’라는 말로서 특권계급이라는 조롱을 담고 있다)라고 칭한 해묵은 정치 계급의 주장을 두들겨 팸으로써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모든 것이 쇼 비즈니스는 아니었다. 뽀데모스는 15-M 운동의 네크워크화되고 수평적인 정치를 포착할 만큼 충분히 영민했다. 지리적 위치와 관심별로 형성된 어마어마한 수의 모임들(‘시르쿨로스’circulos 4라고 불렀다)이 레디트(Reddit), 루미오(Loomio) 같은 온라인 도구들을 통해 현실화되고 강화되었다.
뽀데모스는 수많은 전술을 통해 많은 유형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토템이 되었다. 그 한 유형은 한때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던 사람들로서, 이들은 뽀데모스의 대표인 빠블로 이글레시아스(Pablo Iglesias)에게서 중산층에 대한 자신들의 경멸을 모아 ‘라 카스타’를 파괴하는 반역의 아바타를 본다. 그 다음 유형은 신자유주의와 긴축정치에 헌신하는 사회노동당(PSOE) 5에 환멸을 느낀 오래된 좌파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스페인 공산당의 부산물인 더 좌파적인 정당을 지지했다가 환멸을 느낀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빤하지만 언급할 만한 유형은 15-M과/이나 그 이전의 대안지구화 운동 동안 광장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재)발견한 활동가들이다.
물론 뽀데모스의 이야기가 이 글의 핵심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시간이 가면 어두워지고 칙칙해진다. 한때 선거에서 높은 인기와 리더십을 맛보았던 뽀데모스의 중앙위원회는 뒤에 쳐진 사람들을 위해 권력을 잡는 전위주의적 ‘선거기계’가 되는 쪽으로 기울었다. 뽀데모스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선거에서 이겨서 침묵하는 대중에게 해방을 가져다주고자 하는 듯이 보였다. 대중이 이렇게 위에서 부과되는 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없이 말이다.
3년 후 그 결과는 명백했다. 사회노동당과 이유가 무엇이든 늘 제1당인 국민당(프랑코의 옹호자들과 브뤼셀에 아첨하는 자들의 소굴)에 뒤쳐진 뽀데모스는 한때 자신들의 주장대로 “두려움으로 하여금 편을 바꾸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에 지중해 건너편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져왔다. “‘아니오’라고 말한 작은 나라”의 당인 시리자이다. 이제는 자신들을 권력의 자리에 올려놓은 사회운동들로부터 분리된 이 작은 나라의 정치적 대표자들은 ‘아니오’라고 말한 후에 새로운 게임을 구축하기보다 조작된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마지막 유형의 주도 아래 2014년과 2015년 사이에 새로운 정치 환경이 형성되었다. 15-M을 거친 활동가들이 한층 성장하여 정치로 진입한 것이다. 이들은 대의정치의 수용자들이 아니라 창조자들이 되고 싶었으며 다른 많은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촉진자들로서 행동하고 싶었다. 스페인의 자치도시연합(municipalist coalitions)의 발생이 바로 이 새로운 이야기로서, 피부로 느끼는 변화를 창출하는 성공적인 커먼즈 기반의 정치 전략에 열쇠가 되는 점들이 여기서 이야기된다.
운동의 죽음, 과장되게 선언되다
이 다른 이야기의 기원은 15-M의 표면상의 쇠퇴에 있다. “표면상의”라는 말이 여기서 핵심이다. 가시성에 관해서 말하는 한 우리는 오큐파이 운동을 이 사라지는 과정의 일부로서 인정해야 한다.
2011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라 시위자였다. 이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며 미디어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네트워크화된 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이는 주류 미디어에 걸맞은 배경을 바탕으로 하나의 응집된 인간 형상군을 제시했다. 여기서 우리는 15-M과 오큐파이 운동이 어떻게 해산했는가와 어떻게 해산되었는가를 구분해야 한다.
스페인에서 활동가들은 『손자병법』의 한 대목을 취하여 대규모 점거들을 동네 집회들로 탈중심화하는 식으로 자발적으로 분산시켰다. 미국에서 FBI는 국토안전부, 통합 테러리즘 태스크포스, 민간부문 기관들(특히 은행들), 해당 지역 법집행기관, 몇몇 저명한 시들의 시장들과 연계하여 우선 점거자들 사이로 침투하고 그 다음에 격렬하게 점거를 분쇄했다. 만일 우리가 오큐파이 운동의 의의를 미디어의 높은 주목을 받은 이 광장에서의 몇 달에 국한시킨다면 우리는 이 운동이 “사망한” 것이라기보다는 암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과 미국 모두에서 미디어는 (마치 지리적 가까움이 네트워크들의 친화적 관계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것인 양) 이 운동 및 그와 비슷한 모든 전 세계의 운동들이 사망했다고 서둘러 선언했다. ‘2011년의 올해의 인물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이는 자연사가 아니라 큰 운동을 실종처리 하려는 잔인한 시도였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의 말을 좀 바꾸어 쓰자면, ‘운동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크게 과장되었다.’ 6 그런데 만일 이 운동들이 아직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의 공모와 동의로 이 운동들이 ‘실패’로 낙인찍혔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각설탕을 생각해보자. 각설탕을 손에 들면, 실팍하고 알아볼 수 있는 모양과 짜임새를 하고 있어서 측정하고 서술하기 쉽다. 이것을 커피 잔에 넣어 저으면 마법이 일어난다. 각설탕은 사라지지만 커피를 한 입 마시면 설탕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는가!
이 비유가 15-M/오큐파이/신타그마타(Syntagma) 및 기타 다양한 지역 운동들이 살아서 잘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비록 분산되어 있고 직접적으로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운동들의 효과가 쉽게 포착될 것이다. 점거활동들 이후 6년이 채 지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이는 히피가 여피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구속력 있는 계약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에서는 오큐파이가 어떻게 버니 쌘더스의 선거운동(이 또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는 기성의 세력에 의해 침식되었다)에 활력을 불어넣었는지를 인식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여성의 행진>(Women’s March)에서, 파업들에서 그리고 반(反)트럼프 운동의 일부들에서 그 영향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절절한 기억과 몸으로 겪은 산 경험을 가진 활동가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택했으며, 실제로 승리했다. 여러 지역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계속>
어번 커먼즈의 발생
커먼즈 이행 :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거버넌스의 정치적 어휘를 구축하기
- [원주] 그람시가 실제로 그 말을 했는가? 사실 여부가 뜨겁게 논란이 되는 이 발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세계정세를 포착해준다. [본문으로]
- [원주] 1776년에서 1825년까지 영국 의회는 주로 정치적으로 연결된 토지소유자들을 위해서 커머너들로부터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데 필요한 4000개 이상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에 의하면 공유지(커먼즈)의 이러한 종획은 영국에서 모든 경작지의 약 25%에 대해 행해졌으며 그 소유권을 소수의 인구에 집중시켰다. 이러한 ‘합법적’ 종획은 또한 수백만 명의 민중을 땅에서 축출했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말살했으며 산업화, 직업의 전문화, 대규모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를 강제적으로 도입했다. 오늘날 우리는 ‘종획’이라는 말을 지적 재산의 사유화,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어나는 대대적인 토지강탈, 디지털 콘텐츠를 관리하는 디지털 권리의 부과, 씨앗과 인간 유전자의 특허내기와 같은 끔찍한 행동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한다. 종획, 인간관계들을 서비스로 전환시키기, 커먼즈를 상품으로 전환시키기와 같은 근대의 경향은 커먼즈 학자 데이빗 볼리어에 의해서 “우리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비극”이라고 지칭된 바 있다. [본문으로]
- [옮긴이] 이 선언은 뽀데모스 당의 것이다. ‘모베르 피차’(Mover ficha)는 말 그대로는 장기판의 말을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영어로는 ‘circles’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텍스트에는 ‘Social Democrat’라고 되어 있으나 원어로는 ‘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이고 우리말로 옮기면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이다. 여기서는 조금 줄여서 ‘사회노동당’으로 옮긴다. [본문으로]
- [옮긴이] 마크 트웨인은 사촌이 아픈 것이 와전되어 자신이 죽은 것으로 보도된 것을 놓고 과장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the report of my death was an exaggeration”)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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