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Assembly(2017)의 10장 가운데 4개의 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0장 금융은 사회적 가치를 포획한다
금융은 추상(abstraction)과 중앙집중화의 도구들을 제공한다.
금융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가치를 추출한다. 땅에 묻힌 물질의 가치들과 사회에 담긴 가치들 모두를 추출한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생산되며 그 추출(extraction)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위로부터 본 금융과 아래로부터 본 금융
1970년대에 금융이 경제 및 사회 전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 금융의 발생은 (지구화에 상응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저항과 봉기의 힘의 결과이자 그에 대한 대응으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국가 재정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공공 부채를 민간은행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공 거버넌스 메커니즘에 대한 지배권을 금융시장이 쥐게 되었다. 부채의 구조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자 경제발전과 사회 정의가 전지구적 시장과 금융에 종속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인 행정이 금융메커니즘들을 사용하여 국가를 재조직하고 공공 부채와 국가 거버넌스의 이중 위기를 관리하게 된다. 금융화로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저항과 반란 →정부 지출 → 재정 위기 →금융화 |
이러한 진행의 더 작은 버전이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특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1960년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저항과 도시봉기들은 1967년 뉴어크(Newark)와 디트로이트의 봉기에서 그리고 마틴 루터 킹 2세의 암살 이후 널리 퍼진 봉기에서 정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일련의 봉기들을 뒤이은 것이 도시의 극적인 재정위기였다. 도시에서 재정 위기들은 증가된 지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다음에 주로 기인했다 : 공적 자원(자금)을 대도시 중심들로부터 먼 곳으로 옮긴 것, 도시로부터 빠져나오는 부유한 백인 인구들에 의해 세금 기반이 급속하게 감소된 것, 그 결과 건강에서 주택, 안전, 물 공급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서비스들이 극적으로 감소한 것. 이 위기들은 민간 은행들, 금융펀드들의 개입으로써만 ‘해소’되었으며, 은행들과 펀드들은 ‘비상사태’를 활용하여 공적 재화의 큰 부분을 전유하고 공공 기관들의 민주적 기능을 무너뜨렸다.
1970년대의 뉴욕은 이 과정의 고전적 사례였다. 데이빗 하비 : “뉴욕 재정 위기의 관리가 신자유주의적 과정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 이 과정은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권에서 국제적으로는 1980년대에 IMF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금융기관들에 의한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재정 위기의 ‘해소’가 오늘날 이 과정을 계속하고 있으며 비극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고 있다.
[금융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
① 가치의 생산과 무관하다. 기존의 가치의 소유를 이동시킬 뿐이다. 선진국들은 현재 아무 일도 안 하며 ‘진짜’ 생산은 중국에서만 이루어진다. 금융은 도박이다.(카지노 자본주의).
② 어떤 학술적 주장들은 금융을 도박이 아니라 박탈(dispossession)의 장치로 본다. (금융이 한 역할을 하는 이러한 ‘시초 축적’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 이런 견해들은 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의 견해는 부의 발생이 아니라 부의 이전에만 초점을 둔다.
아래로부터 보면 금융이 도박에 덧붙여 사회와 자연 세계로부터 (종종은 숨겨진) 가치들을 포획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무게중심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있다. 금융이 자본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하는 것은 오직, 공통적인 것이 탁월한 생산력으로서 그리고 가치의 주된 형태로서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추출
금융자본은 근본적으로 추상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생산하는 사람과 생산을 통제하는 사람 사람의 거리가 증가한다.
추상은 중앙집중화를 함축한다.
힐퍼딩, 레닌: 중앙집중화는 경쟁을 제거하고 통제를 몇 개의 은행에 집중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금융은 독점을 낳는다. 생산을 지배하는 화폐의 독점.
화폐의 그리고 생산에 대한 통제력의 은행에의 집중은 이윤율 균등화 경향을 낳는다. 이윤율 균등화는 ① 더 높은 이윤을 찾아다니는 회사들의 이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② 그보다 더 낮은 정도이지만 일과 더 높은 임금을 찾아다니는 노동자들의 이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동은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제한된다. 맑스는 이를 “이러저러한 정도로 중요한 지역적 차이들을 산출하는 실질적 마찰들”이라고 부른다. 1 그런데 화폐의 이동은 회사나 노동력보다 제한을 덜 받는다. 따라서 금융과 신용제도가 균등화 과정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금융자본이 최대한의 수익을 찾아 여기저기 흘러다니면 울퉁불퉁한 지형을 흐르는 물처럼 평평한 표면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의 은행들에 통제력이 집중되는 것 그리고 이윤의 비교와 균등화를 향한 경향이 세계 시장의 창출에 기여하는 요인들이다.
금융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생산은 산업자본만큼이나 리얼하다. 주된 차이는 생산과 특히 생산적 협력이 지금은 자본의 직접 관여의 외부에서 조직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금융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부로부터 어떻게 가치를 추출하는가이다. 이것이 추상과 추출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금융과 사회적 생산이 1970년대부터 나란히 우세한 지위에 이르게 된 방식을 보게 해주는 창문 하나를 파생상품들의 작동이 제공한다. 특히 파생상품들이 척도와 측정의 메커니즘들을 창출하는 방식. 파생상품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어떤 기초자산(underlying assets)), 지수(index), 증권으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계약이다. 파생상품은 보통 미지의 미래를 참조하며 따라서 리스크를 방지하거나 투기의 수단으로서 사용된다.
파생상품들은 수 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1960년대까지는 주로 쌀, 돼지, 밀 같은 상품들의 선물(先物)시장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훈육에 기반을 둔 산업질서와 재정국가가 붕괴하면서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경제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파생상품 시장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기초자산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파생상품은 매우 복잡하여 여기서 그 작동에 대해 적절한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 훨씬 너머에 있다. 우리의 논의의 핵심은 파생상품들의 척도로서의 역할에 집중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자본이 더 이상 가치를 (적어도 이전의 방식대로는) 적절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맑스와 리카도가 이론화했던 것처럼 노동시간의 양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분명히 더 이상 불가능하다. 노동이 더 이상 부의 원천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은 부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것이 창출하는 부가 이제는 (혹은 더 이상) 측정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지식, 정보, 돌봄이나 신뢰의 관계, 교육이나 건강서비스의 기본적 결과—이것들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은 사회적 생산성과 가치의 측정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파생상품이 측정 문제에 대한 자본의 반응의 일환이다. 파생상품은 기초자산으로부터의 추상이기 때문에 이 추상성으로 인해서 부의 광범한 형태들 사이의 전환의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할 수 있다. 여러 형태의 파생상품들은 통화의 미래 가치나 수확의 결과와 같은 미지의 휘발적인 자산을 파악하여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든다.
[Bryan and Rafferty]
이러한 거래의 수립 덕택에 파생상품들은 미지의 가치에 대한 시장 벤치마크를 제공한다. 2 모든 파생상품은 자본의 형태 전환의 패키지이다. 이 상품들이 모두 합쳐지면 자본형태전환의 복잡한 그물망 즉 파생상품들의 체계(a system of derivatives)를 형성한다. 이 체계에서는 자본의 어떤 조그만 부분이든 다른 조그만 부분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3
이렇듯 파생상품과 파생상품 시장은 계산의 계속적 과정을 작동시키고 동일 척도로 계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수립하여 이미 존재하거나 미래에 존재할 엄청난 범위의 자산들을 시장에서 서로 대비하여 측정 가능하게 만든다.
[Randy Martin]
파생상품들이 핵심적으로 하는 일은 미래를 현재에 묶고 상이한 위치, 부문, 특징을 가진 모든 종류의 자본들을 서로 동일한 척도로 측정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4
그 가치들이 정확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는 제대로 된 물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 맥락에서 측정(치들)이 정밀하고 효과적이냐이다.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가치들은 미지의 것, 측정될 수 없는 것,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들은 그것들에 수량을 각인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의적이지만 실제로 효과를 발하는 수량이다.
금융은 (파생상품은 더욱더) 허구적이고 기생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회적 부의 총체를 놓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혹은 측정한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자들인 금융의 대장들과 중개의 군주들은 ‘맘대로 해봐’라고 코웃음을 친다. 이들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을 통해 방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한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런 금융 메커니즘은 위기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킨다는 것을. 곧 살펴보겠지만, 금융의 휘발성이 영속적인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주된 양태로 만드는 한 요소이다.
추출의 여러 얼굴들
특히 자연자원의 추출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본은 시계를 되돌린 듯하다. 오늘날의 토지수탈과 무자비한 자원 사냥은 뽀또시(Potosi)의 은광과 요하네스버그의 금광 그리고 토착민으로부터의 토지절도를 상기시킨다. 실로 정복·식민주의·제국주의의 역사는 부를 추출하려는 탐욕에 의해 추동되었다. 인간 역시 노예로서 추출될 수 있었다. 토지에서 인간까지 모든 것이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노력의 보답인 선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추출이 점점 더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되고 변형되어 사유재산으로 되므로, 오늘날의 추출을 이해하려면 추출이 의존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추적하는 것이 좋다.
추출은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
② 사회적 부
이 두 형태가 추출주의(extractivism)의 여러 얼굴들을 이해하는 데 첫 가이드가 될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로부터의 추출
지구와 그 생태계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돌봄과 지속 가능한 사용의 관계를 함께 수립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추출은 불의(不義)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심지어는 파국적인 파괴를 낳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과 상품화는 오랫동안 파괴적 영향을 미쳐왔다. 추출주의는 어떤 점에서 이 파괴의 과정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본 대 지구— 둘 가운데 하나만 생존할 수 있다. 둘 다 생존하지는 못한다.
추출산업, 특히 에너지 산업 환경과 사회를 파괴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점점 그 파괴의 크기와 빈도가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 Galicia, the Gulf of Mexico, Uzbekistan, Kuwait, Angola 등등. 석탄채굴과 금속 채굴도 광부의 건강과 환경을 계속적으로 파괴했다. 추출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페르시아만의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많은 나라들이 화석연료 회사처럼 행동하게 됨에 따라 어떤 측면에서는 스밤파(Maristella Svampa)가 경제의 ‘reprimarization’[채광, 석유, 목축과 같은 1차 부문이 다시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정리자]이라고 부른 것이 발생했다.
새로운 것은 추출주의 전선의 극적 확대이다. 지구의 어느 구석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채굴]
디지털 장비를 위한 금속 채굴.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석유 채굴을 위한 새로운 지형을 열었다(캐나다 앨버타의 타르샌드 5 유정, 미국의 fracking수압균열법) 이 방법은 새로운 지진 지대를 발생시키고, 대기와 지하수를 오염시켜서 전통적인 방법보다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농업]
대규모 농업도 여러 측면에서 추출 산업이 되었다. 옥수수나 콩이 식품이나 사료로 쓰이지 않고 에탄올과 플라스틱의 생산에 직접 투입될 때, 옥수수 밭이나 콩 밭은 유정과 다르지 않데 된다. 땅으로부터 부를 에너지와 산업자원으로서 흡수한다. 삼림파괴에서 농약의 사용까지 이것이 가져오는 환경파괴는 다른 추출과정의 경우와 맞먹는다.
[기후변화]
추출주의의 환경파괴 효과는 기후변화의 전망에 의해 한 등급 더 높아진다. 과거에는 사고로 인해, 유정과 탄광으로 인해 생기는 오염과 파괴가 비교적 지역에 국한되고 잠재적으로는 역전 가능한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반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괴의 전망이 내재한다.
맥키븐(Bill McKibben) : 지구 기온이 평균 섭씨 2도가 넘지 않으려면 석탄 및 석유 매장량의 80%가 땅 속에 그대로 묻혀 있어야 한다. 화석연료 산업은 악당 산업이다. 공공의 적 제1호이다.
② 사회적 부로부터의 추출
현대의 추출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로부터 박탈한 가치만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다른 범주인 사회적 생산 및 사회적 삶으로부터의 가치 포획도 알아야 한다.
㉠ 기업들은 인간 신체 자체를 부의 저장소=추출 대상으로 본다. 신체에 담긴 유전자 정보도 재산으로 추출되어 특허로 보호될 수 있다. 기업들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등이 ‘생물약탈’(biopiracy)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전통적인 지식—이는 오래 전에 전통적인 공동체에 의해 개발되어 공동으로 유지되던 것이다—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 데이터 채굴 혹은 데이터 추출. 오늘날 디지털 골드러시가 존재한다. 데이터의 채굴과 추출이란 거대한 데이터 풀(pool)에서 패턴을 찾음으로써 그리고 그 데이터들이 저장되고 팔릴 수 있도록 구조화함으로써 가치를 포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이터 개념은 가치가 생산되고 포획되는 방식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에서 우리는 구글의 PageRank 같은 알고리즘이 사용자들의 지식과 지성에 의해 산출된 가치를 포획하는 방식을 서술한 바 있다. 소셜 미디어도 사용자들 사이의 관계와 연결로부터 가치를 포획하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했다. 달리 말하자면, 데이터의 가치 뒤에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지성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추출의 다음 얼굴은 사회 영토 자체이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스는 건설된 환경 이상의 것으로서 공통적인 것이 생산되는 가마솥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동학, 사회적 관계의 패턴들, 혁신적 언어, 정동적 감성 등이 포함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도시 영토 자체에 함입된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는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혈암에서 석유를 끌어내는 것과 유사하다. 금융이 지배하는 부동산 시장은 도시 및 시골 영토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가치를 추출하는 방대한 장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 추출의 그 다음 얼굴은 협력적 사회적 생산의 여러 형태들이다. 이는 다른 여러 측면들을 조합하는 측면이다. 예를 들어 애너 칭(Anna Tsing)은 야생버섯이 오리건에서 채취되어 일본에서 팔리기까지 과정을 추적하면서 자본이 자율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를 포획하는 능력을 짚어낸다. 자본가의 통제 없이 생산되는 가치를 이용하는 것을 그녀는 ‘salvage’(상품 수집[←고물 수집: 정리자])라고 부른다. 6 ‘상품 수집’은 실로 사회적 생산과 사회적 삶의 생산에서 산출되는 가치를 자본이 포획하고 추출하는 방식을 탁월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추출은 공통적인 것의 자국을 좇는다. 추출은 산업과 달리 상당한 정도로 자본의 관여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부의 형태들에 의존한다. 자동차는 공장에서 생산되지만, 석유와 석탄은 땅 속에 이미 존재한다. (물론 추출 자체도 생산과정이며 추출된 재료는 정련되고 분배된다.) 이 구분은 사회적 지성, 사회적 관계, 사회적 영토와 관련하여 훨씬 더 명확해진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가 부과하는 시간표와 규율에 따라 협력하지만, 여기서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직접 조직되지 않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적 협력을 통해 생산된다.
이렇듯 부활된 추출의 중심성은 이윤에서 지대(임대료)로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맥락에 위치한다. 이윤이 목적인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임대소득자(rentier)는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며 생산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기존의 부를 축적한다. 임대소득자의 부활된 중심성은 단지 과거의 잔존이거나 역사적 순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추출주의의 여러 얼굴을 밝혀낸 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발전과 역사적 진행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이 발전과 진행은 단순히 직선형도 아니고 순환적이지도 않다. 다양한 지리적·문화적 차이들을 통해 복잡한 혼종적 시간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금융은 현대의 추출주의와 이중의 관계를 맺는다.
① 토지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초기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이 추출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추출 회사들과 그 기획들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에 금융의 통제력도 점점 더 커진다. 이는 앞에서 말한 사회적 장과 및 생물학적 장을 ‘채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② 금융은 또한 직접 추출한다.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로부터의 가치추출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한다.
[부채]
부채는 사회적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는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홈 모기지, 임대사업, 폐쇄(foreclosures), 퇴거는 빈민과 중산층으로부터 부를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들이다. Matthew Desmond : 가령 페이데이론(payday loan)[월급을 기반으로 한 소액의 대출—정리자]은 빈민의 호주머니로부터 돈을 끌어내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금융 테크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치들을 통해 추출된 사회적 가치는 비활성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협력의 회로들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Veronica Gago :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이주민 공동체들을 연구하면서 가치의 사회적 생산과 그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이는 금융이 때때로 소비를 목적으로 한 미시대출을 통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때 드러난다. “위로부터 추동되는 금융화는 민중의 자율적인 생산·재생산 실천 형태들을 독해하고 전유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7
금융은 그 자체가 추출적 산업이다. 추상과 중앙집중화의 힘일 뿐 아니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가치를 직접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이다. 아래에서 보면 이 과정은 사회전역에 걸친 수많은 상호작용과 협력에 의해 구성되는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추출을 위로부터 이해하고 싶으면 화폐를 따르라. 그러나 아래로부터 포착하고 싶으면 공통적인 것을 따르라.
사회적 생산에서 금융으로
아래에서 보면 사회적 생산을 앞에서 말한 이중적 의미에서 인식하게 된다. 즉 ①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② 사회를 생산한다. 우리가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금융의 우세가 사회적 생산의 점증하는 중심성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겼다는 것, 궁극적으로 금융은 (산업과 훈육의 체제의 기반을 파괴한) 저항과 봉기의 축적에의 대응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이는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 나타내는 자본과 노동의 새로운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포디즘 시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업노동의 계획된 협력에서 생성되는 이윤에 의해 추동되는 훈육체제 및 축적에 의해 구조화되었다면, 포스트포디즘 시기에는 생산적 지식과 협력의 사회적 능력이 사회에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금융이 사회적 생산을 통제하고 동시에 사회적 생산이 발생시키는 가치를 지대(임대소득)의 형태로 추출하는 데 복무한다.
추출의 우세함이 착취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이는 새로운 기준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맑스의 착취 개념이 가진 시간적 분석틀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일의 일부 동안 생산된 가치에 대해 임금을 받고 노동일의 나머지 시간 동안 생산된 가치는 자본가가 전유한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착취와 생산조직화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착취와 생산조직화의 메커니즘들은 서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멀리서 가치를 추출하며 생산주체들을 추상적으로 덩어리로 보는 자본주의 기업가들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를 자연이 주는 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파생상품 시장과 중개거래(arbitrage) 전략에 눈독을 들이는 그들은 더 이상 생산을 조직하고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며 노동협력을 발생시키는 주인공들이 아니다. 반대로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협력하고 생산을 계획할 능력은 점점 더 커진다.
그렇다면 하나의 열쇠는 사회적 생산의 일반성과 그것을 활성화하는 노동 형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의 노동은 종종 지식, 지성, 인지 능력의 측면에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은 디지털 세계의 정점―가령 구글의 Alphabet―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노동의 상이한 층이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러시아 인형처럼 차곡차곡 안에 넣어져 있다—건강, 교육, 가사 돌봄을 담당하는 핑크칼라 안에 공장의 블루칼라 안에 사무실 칸막이 안의 화이트칼라 안에 키보드를 두들기는 칼라 없는 노동자—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오늘날 산업들 사이의 시차란 없다. 산업은 1930년처럼 기능하고 농업은 1830년대처럼 기능하는 식이 아니다. 나라마다, 그리고 전지구적 시장 전체에 걸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 노동조건들과 과정들은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불규칙적으로 교차하고 혼합된다. 금속노동자가 디지털 도구로 극히 전문화된 작업을 수행하고 인지노동자가 일관작업의 방식으로 데이터를 조작하며 건강 및 교육 노동자가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함께 지식과 돌봄, 지성과 정동을 사용한다.
Carla Freeman : 바르바도스의 데이터프로세싱 시설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교차의 탁월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 보험회사를 위해 의료(보험)청구 양식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디지털 과제를 수행한다. 이 시설은 노동이 멍하게 만들 정도로 반복되는 블루칼라 공장의 특징을 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처럼 하이힐을 신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작업은 상투화되었을지라도 칼라 없는 노동자의 경우처럼 지식과 지성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은 핑크칼라로서 명시적으로 여성화되어 있다. 8
오늘날 스펙트럼으로 펼쳐진 노동—델리의 법률사무소들에서 스톡홀름의 편의점들까지, 상파울로의 자동차공장들에서 오리건의 반도체 공장들까지—은 모든 노동 체제들의 교차로 특징지어진다.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전체에 걸쳐서 사회적 생산이 생산활동(지식과 협력의 사용)에서나 생산물(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구성요소들)에서나 점점 더 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열쇠는 금융으로 하여금 부를 추출하고 모으게 하는 사회적 생산의 특징들 바로 그것이 또한 저항과 봉기의 씨앗과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맑스의 논의의 도움으로 이 두 날을 가진 성격이 세 단계의 논리적 과정— ① 추상에서 ② 사회적 생산을 거쳐 ③ 주체성으로—을 거쳐 발전함을 파악할 수 있다.
① 추상
맑스 :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관계는 노동이 예술/기예의 모든 특징을 잃는 데 비례해서 더 순전하게 발전한다. 그 구체적 숙련이 더 추상적인 어떤 것이 되면서. 점점 더 “순전히 추상적 활동”이 되면서. 9
사회적 생산에서 추상은 여러 면에서 극적으로 증가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지식을 내화하고 협력에서 그것을 발전시킬 때 그들의 노동과 그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는 더 추상적이 된다. 그러나 맑스는 ‘예술’의 상실을 향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특수한 예술이나 기술의 상실은 이득이기도 하다.
맑스 : “노동은 이런 노동, 저런 노동이 아니라, 순전한 노동, 추상적 노동이다. 그 특정의 규정성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지만 모든 규정성이 가능하다.” 10
그렇다면 노동의 추상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성격으로 완전히 꽉 찬 것이다. 생산과정과 가치의 추상성이 더 높아지면 자본에 대한 저항과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의 이례적 잠재력이 생긴다.
② 사회적 생산
노동의 점점 더 일반화되는 능력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전제한다. 특수한 개별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 정립된다. 맑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전제되며, 생산물들의 세계에의 참여, 즉 소비에의 참여는 서로 독립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이 활동하는 사회적 생산조건들을 통해서 매개된다.” 11
그렇다면 생산과정의 점증하는 추상은 사회적 관계망에 의존한다. 달리 말하면,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에는 공유되는 지식, 문화, 협력의 회로들이 포함된다.
③ 주체성
셋째 단계는 이 사회적 토대를 주체적으로 가동시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총체성에 노동의 총체성이 맞선다.
맑스: “노동은 물론 특수한 노동으로서는 특수한 자본을 구성하는 특수한 물질에 상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본 그 자체는 모든 물질의 특수성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특수성들 모두로부터의 추상인 동시에 그 특수성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자본에 맞서는 노동도 주체적으로는 동일한 총체성과 추상성을 자체 내에 지니게 된다.” 12
노동이 추상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사실에 주체화의 잠재성이 담겨 있다. 다만 여기서 동질적이고 획일적으로 통일된 주체성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주체성들이 협력하고 갈등하는, 차이들의 열려진 장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적 생산의 이 수많은 이질적인 주체성들로부터 구성된다.
공통적인 것에의 자본의 접근과 공통적인 것의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조직화는 서로 갈라진다. 이는 사회적 복지의 부분 즉 교육, 주택, 건강, 아이들 및 노인 돌봄, 과학적·의학적 연구에서 명백하다. 이 모든 활동들은 자본주의적 척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들을 함축한다. 이 부문들에서 우리는 생산성에 대한 자본의 이해와 사회적 이해 사이의 점증하는 간격을 인식할 수 있다. 이 간격은 다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에서의 차이를 알려준다. 자본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로부터 최대의 이윤이 추출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구가 사용하고 인구에 복무할 수 있도록 열려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적으로 적대의 선을 구성한다. 맑스:
한편으로, 자본은 부의 창출을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노동시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하여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을 살리고 사회적 결합과 사회적 교류의 모든 힘을 살린다. 다른 한편, 자본은 그렇게 창출된 엄청난 사회적 힘들이 노동시간에 의하여 측정되기를 바라고 그 힘들을 이미 창출된 가치를 가치로서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계 내에 가두기를 바란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하늘로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 13
주체성의 다수성과 이질성을 강조하게 되면, 상황은 훨씬 더 폭발의 잠재력을 갖게 된다.
사회적 생산의 다수적 차원이 일정한 폭발성(휘발성)을 함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노동력이 생산에서 헤게모니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생산과정에 들어있는 추상이 공통적인 것의 여러 형태들의 출현을 함축한다면, 그리하여 자본가로서는 생산자들의 종속(subjection)이 필요하고 생산자들에게는 주체화(subjectivation)의 잠재력이 열린다면—그렇다면 자본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만일 자본이 사회적 생산에 긴밀하게 관여한다면, 이는 완전히 생산과정을 봉쇄하는 데로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화폐라는 극단적이고 격렬한 형태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명령을 부과해야 한다. 이로써 가치의 금융적 추상이 구현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전복적 주체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확연한 계급 분할의 진행이며 계급적대의 원천이 된다. ① 한쪽에는 금융시장에서 생성되는 이자로 먹고 살며 자신들이 축적한 사유재산에의 배타적인 접근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② 다른 쪽에는 집단적 지식과 지성 및 사회적 소통 능력, 돌봄 능력, 협력 능력을 통해 사회적 부를 생산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자유롭고 열려있는 접근을 통해 안전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전선은 이렇게 형성되어 있다.
♣
- [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David Fernbach, Penguin, 1981, volume 3, p. 275. [본문으로]
- [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Capitalism with Derivatives, Palgrave Macmillan, 2006, p. 37. [본문으로]
- [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Financial Derivatives and the Theory of Money,” Economy and Society, 36:1, p. 141. [본문으로]
- [원주] Randy Martin, “After Economy? Social Logics of the Derivative,” Social Text, 31:1, Spring 2013, p. 88. 또한 Lawrence Grossberg, “Modernity and Commensuration,” Cultural Studies, 24:3, 2010, pp. 295−332 참조. [본문으로]
- [정리자] 타르샌드 →오일샌드(oil sands) : 신기술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석유자원 가운데 하나로서 점토나 모래 물 등에 중질 원유가 10% 이상 함유된 것을 말한다. 원유가 굳어져 반쯤 고체 상태로 땅 표면 가까이 부존하는 경우 이를 역청(瀝靑)이라 부른다. 역청이 모래진흙 등과 섞여 있는 것이 바로 석유모래다. 석유모래에서 역청을 분리한 뒤 이를 가공하면 기름샘에서 뽑아 올린 원유와 성분이 같아진다. 이렇게 생산한 원유를 보통 원유(conventional crude)와 구분해 합성원유(synthetic crude)라 부른다. 오일샌드가 가장 많이 매장된 국가는 베네수엘라이며, 그 다음이 캐나다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본문으로]
- [원주]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p. 63. [정리자] 애너 칭은 이 저서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지구적 공급망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종식시켰다. 선도적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을 통제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노동을 표준화하는 것은 교육과 정규직 일자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윤과 진보가 연결되었다. 이와 달리 공급망에서는 여러 경로로 모아들인 재화가 선도적 회사를 위한 이윤을 낳을 수 있다. 직장에의 헌신, 교육, 복지는 더 이상 수사적으로라도 필요하지 않다. 공급망은 특정 종류의 상품 수집(salvage)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한 구획에서 다른 구획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포함된다. 미국-일본 관계의 근대적 역사는 이러한 관행을 세계 전역으로 퍼뜨리는 요청과 응답의 대위법이다.” [본문으로]
- [원주] Veronica Gago, “Financialization of Popular Life and the Extractive Operations of Capital,” South Atlantic Quarterly, 114:1, January 2015, pp. 11–28, quote on p. 16. 또한 Veronica Gago and Sandro Mezzadra, “Para una critica de las operaciones estractivas del capital,” Nueva sociedad, no. 255, January−February 2015, pp. 38–52 참조. [본문으로]
- [원주] Carla Freeman, High Tech and High Heels in the Global Economy, Duke University Press, 2000. See also Andrew Ross, No Collar, Basic Books, 2003. [본문으로]
- [원주] Marx, Grundrisse, p. 297. [본문으로]
- [원주] Marx, Grundrisse, p. 296. [본문으로]
- [원주] Marx, Grundrisse, p. 172. [본문으로]
- [원주] Marx, Grundrisse, p. 296. [본문으로]
- [원주] Marx, Grundrisse, p. 7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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