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5장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의 내용 전체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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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The Real Problem Lies Elsewhere(「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앞에서 제기한 리더십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다음이 인식되어야 한다.
① 정치적 행동의 사회적 조건이 변한 정도
② 현재의 정치적 난국은 정치 영역의 자립성에 기반을 둔 순전히 정치적인 방식으로는 적절하게 타개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시끄러운 정치적 담론의 영역을 떠나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숨겨진 거처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과연 (근대를 넘어서)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재생산하는 경로를 발견할 수 있을까?
Blow the dam!
중앙집중화된 지도와 권위를 정당하게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구성(constitution)보다는 해체(destitution)가 필요한 때가 있다. 때로는 우리에게 다음의 경로가 필요하다 : ‘댐을 무너뜨려라!’
이것에 필요한 것.
① 자본주의 세력이 오늘날 사회·정치적 관계들의 총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욕망을 신비화하고, 우리의 생산성을 그들의 목표에 묶어놓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② 삶정치적 지배의 울타리, 화폐의 명령, 정치적 권위, 경제적 기율을 폭파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탄생과정]
다양한 형태의 저항— 반식민·반제국주의 투쟁, 반인종주의 운동, 페미니즘 운동, 노동자들의 봉기, 자본주의적 기율과 통제를 거부하는 여러 형태의 운동 등등—에 대한 대응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지배의 구조들이 등장했다. 이 투쟁의 효과 가운데 하나는, 주로 선진국들에서 공공지출이 그 한계를 넘고 공공 부채가 한 동안 발전과 사회불안에 대한 통제력 유지에 유일한 열쇠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는 확대된 사회적 억압과 사회질서의 재편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체제가 다시 조직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가 핵심이었다.)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가 탄생한다. 1973년 칠레의 쿠데타가 신자유주의적 실험과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의 적용의 길을 열었다. 새처(Margaret Thatcher)와 레이건(Ronald Reagan)이 자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을 개시했다. 그런데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은 (조금 나중에는 게르하르트 슈로더Gerhard Schroder)도 복지구조 및 노동보호를 파괴하고 전지구적 금융을 지배의 위치로 상승시킴으로써 그 전략들을 실제로 공고히 했다. 블레어, 클린턴, 슈로더는 자본가 계급을 위해서 ‘더러운 일’을 했으며 개량주의적 중도주의의 탈을 쓰고 “신자유주의 혁명의 승리(sic)”를 방관했다. 이 ‘더러운 일’이 공식적 좌파의 죽음을 나타냈으며, 오늘날 그 시체가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무겁게 누르고 있고 민중계급을 대표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봉쇄하고 있다.
그 당시 자본주의적 관계는 생산과정을 탈산업적. 삶정치적, 디지털 방식의 개혁을 가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력의 사회적 구성과 자본의 새로운 기술적 구성 사이의 갈등에서 이전에 존재했던, 생산적 사회와 자본주의적 정치 사이의, 저항의 형태들과 지배의 형상들 사이의 모든 상응관계들이 무너졌다.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늘날 점점 더 권력의 순전한 행사로 기능하며 사회적 불안을 엄정한 한계 내에 잡아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권력의 주권적 행사가 증가하면서 혜택과 특혜의 다양한 메커니즘들, 즉 부패가 증가한다.
이것이 1968년에서 1989년까지의, 노동계급의 정치적 구성과 자본의 정치적 구조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약사이다. 그런데 사회적 투쟁들이 중지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저항의 새로운 경로들을 여는 길을 발견했다. 1995년 치아파스에서 혹은 1999년 시애틀에서 탄생한 대안지구화 투쟁의 주기(cycle)는 9·11 공격 이후에 ‘테러에 대한 전쟁’의 부산물로 종식되었으나, 그 핵심 요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하나의 주기—야영과 도시공간의 점거로 특징지어지는 여러 ‘봄들’의 주기—가 2008년 이후에 탄생했다. 이 투쟁들은 타올랐다가 급속히 사라지는 듯했지만, 다른 곳에서 훨씬 더 큰 힘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이 투쟁들도 아직은 오늘날의 필요에 부합하는 새롭고 효과적인 조직형태를 발명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왜 투쟁은 그토록 풍성한데, 조직화는 빈약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과거에는 즉자와 대자의 변증법을 활용했다. 계급의 경험적 실존에서 의식화로. 지금은 이것이 낡은 것이 되었다. 이 변증법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은 의식, 정신, 이성에서 더 상위의 자연을 보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의식, 정신, 이성이 삶, 신체, 열정, 존재 자체를 지배한다. 우리는 근대 정치사상의 켄타우로스(반인반수)로 되돌아간다. 오늘날 삶정치의 맥락에서는 조직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것이 가능하다. 켄타우로스의 두 반절을 전복시키는 데서 시작해서 재빨리 그 이분법을 거부하는 데서 끝나는 성찰이다. 욕구의 체제가 감각과 의식을 조직화하고, 상상력이 이성과 열정 사이의 관계를 가로지르면서 재설정한다. 그리고 성찰은 수행 과정들과 미래에 열려있는 장치들(dispositifs)의 구축을 통해 온다.
정치적 구성이 새로운 노동형식의 기술적 구성에 상응하거나 그로부터 직접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고맙게도 노동계급 혹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계급부문이 투쟁에서 다른 이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던 때는 지났다. 산업노동자들이 농민들 대표한다,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백인 노동자들이 흑인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등등의 주장을 할 수 있던 때는 지난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본의 구조에 상응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조직화를 발명하는 것은 그것이 전복적인 형태일 때조차 공허한 몸짓이거나 더 나쁜 것이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들을 가로질러 뻗어가는 사회적 협동만이 조직에 적절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
정치적 구성과 기술적 구성의 관계에 물음을 던지는 것은 문화 및 정치라는 상부구조를 경제적 토대가 결정한다는 전통적인 규정(이는 맑스적이기보다는 엥겔스적이다) 또한 무너뜨린다.
그람씨와 알튀세르는 오래 전부터 이 틀을 정신주의 철학의 간접적인 산물이며 조야한 유물론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이는 실로 정신을 물질에서 분리하는 형이상학의 단순한 반영으로서 탄생했다.
그람씨 : “만일 구조라는 것이 ‘사변적으로’ 파악된다면 그것은 분명 ‘숨은 신’이 된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사변적으로’ 파악되지 말고 역사적으로 즉 실제 인간들의 움직임과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으로서, ‘문헌학’의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고 연구되어야 하는 객관적 조건들의 집합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1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들은 순전한 환상들(‘오류’)이 아니라 제도들과 실천들 내에 존재하는 재현들의 집합들일 뿐이다. 이데올로기들은 상부구조에 등장하며 계급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이런 대목들을 거쳐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넘어가는 것이 현 맑스주의의 오래된 경험(투쟁이 위로부터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을 해석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삶권력의 새로운 특징들과 그것을 전복할 다중의 전략을 놓고 볼 때 훨씬 더 확연하다.
Second response: seek the plural ontology of cooperative coalitions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운동은 종종 지하로 숨었다 지상으로 드러났다를 반복하는 성격(a Carsic nature)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실천과 주체성의 축적을 발생시킨다. 흐름에서 사회적 존재의 지질학적 침전층들을 낳는다. 우리는 이 정치의 다원적 존재론을 특징짓는 불연속적이고 다양한 흐름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존재론은 우리의 집단적 실존에 굳게 뿌리를 두고 형성되는 존재(현존재, Dasein, being there)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다. 그런데 ‘역사성이란 상대주의를 함축하는데 역사에 뿌리를 둔 존재론적 방법을 어떻게 제안할 수 있느냐’는 이견이 가능하다. 존재는 필연적인 반면에 역사는 항상 우연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견은 확실성을 의식의 (초월적인) 토대나 초재의 숭고한 차원에서 찾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함축한다. 이와 달리 우리의 역사적 존재론은 경험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으면 경험의 역사성을 그 닻으로 삼고 있다. 현존재(Dasein)의 역사와 역사성은 무차별하거나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이 현상을 절대적 진리를 전제하고 위에서 보면 상대화될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의 행동에서 그 행동에 의해 진실한 표현들을 창출한다. 그 진실은 새로운 공통적 존재를 구성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며 그 허위성은 공통적 존재를 파괴하거나 제한하는 정도에 의해 규정된다.
딜타이 (하이데거에 응답하면서) : 경험의 영역, 존재자적인 것(the ontic)의 체험의 영역에서 인간 행동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표현 활동(expressive operation)이 실존의 진실을 구축할 수 있다.
여러 운동들—2011년 도시공간 점거운동들, 2013년 터키와 브라질의 점거운동, 2011년 여름 이스라엘과 영국, 2012년 퀘벡, 2014년 홍콩, 미국의 경우 2014년 Black Lives Matter 시위.
이 운동들은 상이한 정치적 맥락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주역들은 상이한 삶형태를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운동들은 동일한 삶의 실재의 동일한 순환과 형상들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일까?
① 투쟁의 레퍼토리를 공유한다. 즉 동일한 악보로 연주를 한다.
② 새로운 민주적 제도를 위한 요구를 공유한다.
이 뒤에는 더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운동들이 표현하는 다원적 존재론(plural ontology)이다. 특수한 지역(동네) 문제들에 초점을 두는 소그룹들과 공동체들은 강력한 네트워크 형태로 서로 연결한다. 이 연결과 공통의 언어가 본질적이다. 운동들은 의식하든 아니든 연방 모델에 의거한다. 국가주권의 연방주의적 전통들에서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연합과 마디결합의 연방주의적 양태들이다. 광범한 그룹들과 주체성들이 각자의 자율과 차이를 포기하지 않고 연합을 형성하고 공통의 사회적·정치적 기획들에서 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억압적 힘들이 연합 논리를 깨는 데 집중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종교적 광신주의는 종종 분할을 창출하는 효과적 쐐기가 된다. 브라질과 영국에서는 인종주의적 운동들이 종종 성공적으로 도시와 교외의 집단들을 분할한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일부 시위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자극들이 불화를 창출한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구태의연한 경찰의 억압과 언론 캠페인들이 연결을 부수는 도구들이 된다.)
이 운동들은 다원적 존재론의 맥박치는 심장을 긍정한다. 상이한 전통들에서 나오고 상이한 목적들을 표현하는 다원적 주체성들, 다수적 시간성 모델들, 투쟁의 다양한 양태들이 협동적 논리에 의해 묶이는 강력한 떼(swarm)를 형성한다. 그 목적은 차이들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제도들을 창출할 수 있는 구성적 민주주주의 모델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에 맞서고 금융의 독재에 맞서며 지구를 파괴하는 삶권력에 맞서고 인종적 위계에 맞서며 공통적인 것의 자주관리에의 접근을 찬성하는. 그래서 운동의 다음 단계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활성화하고 육화하는 이러한 의지를 긍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들의 구축에 아래로부터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운동이 주로 ‘다원성의 정치’(politics of plurality)를 구축다면 이제 운동은 다원성의 ‘존재론적 기계’(“ontological machine” of plurality)를 가동시켜야 한다.
[다중]
우리는 이 다원적 존재론의 행위자에게 ‘다중’(multitude)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다중은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 기획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주체성들의 근원적 다양성을 지칭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정치적 기획으로 이해된 바의 다중은 다원적인 사회적 존재론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잇는 돌쩌귀( the hinge between the plural social ontology and the possibility of a real democracy)이다. 우리가 이 존재론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우리의 비전이 정치적 지형에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강력한 시위들, 반란들, 봉기들을 분석할 때조차도 그렇다. 운동 자체는 다중의 일상적 실천과 능력에 구현된 더 깊은 사회적 실재의 징후,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회로들의 징후일 뿐이다.
Third call: take power, but differently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적 힘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사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힘을 거부함으로써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기존의 권력의 자리들을 단지 더 많은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의도가 훌륭한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 (비록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낫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를 낳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이중구속에 잡힌 듯하다. 힘을 쥘 수도 없고, 안 쥘 수도 없다(we can’t take power and we can’t not take power). 그러나 이는 문제를 빈약한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힘을 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힘’이란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력과 활력]
많은 유럽 언어들에 힘을 나타내는 단어가 둘 있다.
| 권력 | 활력 |
라틴어 | potestas | potentia |
불어 | pouvoir | puissance |
독일어 | Macht | Vermoegen |
스페인어 | poder | potencia |
potere | potenza | |
영어 | power | power |
별개의 용어가 따로 없고 그저 power 하나인 영어. 처음에는 영어의 빈곤함의 사례인 듯이 보인다. 과거에는 ‘power’(활력)와 ‘Power’(권력)로 구분하는 방법을 써봤다. 그런데 더 면밀하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구분하지 않는 것이 역설적으로 영어의 힘일 수도 있다. 힘의 두 개념 사이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할 수밖에 없게 해주기 때문이다.
① 마키아벨리의 힘 정의 : 동의를 필요로 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통치의 관계를 구축하고 정당화하는 데서의 결정과 덕, 간지(奸智)와 운으로서의 힘.
② 푸꼬의 힘 정의 : “힘의 행사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작용하는 양태.” 힘에 종속된 주체에게 자유의 여지가 있음을 강조.
― 이 두 정의(定義) 모두 힘이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이 행위자들이 질적으로 상이하고 그 지위에 고정된 것으로 파악된다면, 즉 한쪽은 권위로 다른 쪽은 저항으로, 혹은 한쪽은 지배로 다른 쪽은 종속/동의로 파악되면, 그렇다면 권력과 활력 사이의 구분을 유지하고 분석의 초점을 양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대립되는가에 맞출 수 있다. 이것이 예를 들면 독단적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통설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힘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에 채택하는 해석틀이다. 한편에 자본이 있고 다른 한편에, 종속되고 적대적인 위치에 노동력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관계가 고정되면 한 쪽의 우월성과 다른 쪽의 종속성이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식이라는 외적 요인을 들먹이지 않고서는 문제를 그 관계 내에서 해결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와 푸꼬로 되돌아가서 더 자세히 살펴보면 힘의 관계가 어떻게 전복될 수 있고 어떻게 활력이 권력을 재구성할 수 있는지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열쇠가 되는 것은 권력(Power)이 그 자체로는 약하고 불충분하다는 것, 활력과의 관계로부터만, 피지배자들로부터 에너지를 빨아들임으로써만 살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자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여우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힘(force)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간지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야수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인간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기술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기계의 측면에서 파악되든, 이 모든 이미지들은 권력이 살아있고 파괴 불가능한 상대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런데 권력은 악한 실재일 뿐만이 아니다. 힘의 관계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에 맞서는 투쟁은 권력의 현재의 특징들(명령과 지배)을 탈구시키려는 노력일 뿐만 아니며, 권력의 구조적 (경제적/국가적) 골격을 부수어서 주체화와 노동해방의 과정을 가동시키려는 노력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권력과 활력 사이의 관계를 해체하여 균형을 무너뜨리고 관계의 중심에 활력 개념과 실재를 세움으로써 활력에 우선권과 헤게모니를 주는 노정(路程)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셋째 요청에 도달한다.
① 첫째 요청: 전략과 전술의 전도
② 둘째 요청 : 대의와 규제를 넘어서는 제도의 구축.
①② 첫째 및 둘째 응답 : 사회적 생산의 협동적 네트워크에 토대를 두고 정치적 조직화의 연합들을 읽어낸다. 다원적 사회적 존재론을 창출한다.
③ 셋째 요청 : 정치적 힘을 쥐되 기존의 권력의 자리들을 더 나은 지도자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칭하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권력 자체를 변형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 수단을 포착하는 것이 IV부의 주된 과제이다.
II부에서 말할 내용 : 오늘날 다중은 자본주의적 명령 조직화에 맞설 뿐만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자본의 능력을 넘어서는 삶형태들과 생산 및 재생산 형태들을 발명한다.
III부에서 말할 내용 : 자본이 이러한 사태전개에 어떻게 대응하려고 했는가. 착취 메커니즘의 조정, 금융명령 양태들의 개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 + 그 반대쪽에서 벌어지는 저항과 투쟁의 분석.
IV부에서 말할 내용 : 새로운 지속 가능한 민주적 사회조직화―공통적인 것의 군주(the Prince of the common)―의 구축에 이르는 저항과 전복적 실천의 경로를 설명.
Marxism against Das Kapital
루카치가 말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성취 : 맑스주의 정통성을 갱신하고 근대의 지배적인 권력관―권력을 분할할 수 없는 일자(“one and indivisible”)로 본다―을 극복한다. 로자의 뒤를 따라 서구 맑스주의는 제2, 3 인터내셔널의 기계론적 존재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로운 정통성은 ‘『자본론』에 반하는 맑스주의’로 정식화.
루카치는 맑스를 읽고 헤겔을 재해석하면서 철학적 행동을 총체성의 해석으로 자리매김한다. 1917년 이후 총체성은 소비에트와 노동계급의 혁명 과정에 의해 재편된다. 이 과정은 총체성을 두 측면으로 변형한다. 총체성을 생산하는 측면과 총체성의 생산물인 측면, 즉 주체와 객체.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에 의해 생산되고 지배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 해방시켜 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윤리적·정치적 행동의 양태이기도 하다. 혁명적 실천은 투쟁 행동의 다양한 특이한 양태들의 연계된 힘을 드러낸다. 서구 맑스주의는 바로 이런 식으로 태어났다. 서구 맑스주의는 스딸린주의적 독단주의에 의해 질식되었지만, 2차 대전 이후에 그리고 특히 1968년 이후에 이전보다 더 강하게 재탄생했다.
서구 맑스주의에서 서구적인 면은 쏘비에트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가진 동구적 독단성과 대조되는 데 있다. 이 이외에 유럽 바깥에 비서구적이며 비동구적인 맑스주의의 강력하고 창조적인 흐름들이 있다. 브라질의 Roberto Schwartz, 불리비아의 Alvaro Garcia Linera, 중국의 Wang Hui, 인도의 Ranajit Guha와 Dipesh Chakrabarty, 미국의 Cedric Robinson, 가이아나의 Walter Rodney. Christine Delphy, Mariarosa Della Costa, Nancy Hartsock 같은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저자들도 유럽이나 미국에 있을지라도 맑스주의의 또 하나의 비서구적 영토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이례적으로 두드러진 기여를 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서구 맑스주의에, 그 이론적 풍부함과 한계에 논의를 국한하기로 한다.
루카치에 대한 비판은 많다. ① 노동계급을 일종의 프로메테우스로, 이상적인 혁명과정의 장본인으로 만든 점 ② 노동계급을 유일하게 가능한 해방의 주체로 본 것을 이유로 그를 책망하기도 쉽다. 그러나 루카치의 맑스주의 재발명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세계를 자유로운 생산으로 재구축하는 사회적 주체를 노동자들의 욕망의 총체로 본다. 삶의 전부를, 그 총체를 혁명화하려는 노동계급.
1968년 이후 서구 맑스주의는 총체성 개념을 강렬하게 회복하고 시간 속에서 전개시킴으로써 재탄생한다. 과정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연속적 변이.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 사이에서 주체성의 생산을 함축하는 운동으로서의 노동계급의 행동.
뽕띠(Maurice Merleau-Ponty)는 역사성의 새로운 경험—생산물이자 생산작용—을 언어와 20세기 후반부의 프롤레타리아의 실천으로 옮겨놓음으로써 1968년을 앞질러 구현한다. 뽕띠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명시적으로 준거하면서, 역사의 주체성을 통합하고 주체화를 루카치의 프로메테우스주의로부터 (그 힘은 건드리지 않고 유지한 채) 해방시킨다.
뽕띠 : “루카치는 주체성을 부수현상으로 만들지 않고 역사 속에 통합하는 맑스주의를 보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적들은 공격하려고 한다.) 그는 맑스주의의 철학적 정수를, 그 문화적 가치를, 마지막으로는 그 혁명적 의미를 보존하려고 한다.”
여기서도 의식적 생산물과 의식적 생산성이라는 두 관계가 결합되어 있다.
뽕띠는 또한 루카치의 사상을 확대하고 심화함으로써 총체성 개념을 변형시킨다. 이제 관념적이고 총체화하는 퍼스펙티브는 자본의 신비화로서 제시된다. 이 신비화에 따르면 사회는 명령에 ‘포섭’된 것, 시장에서 ‘사물화’된 것으로서 재현된다. ‘실질적 포섭=삶권력.’ 그러나 명령에는 항상 저항이 있고 시장의 위계에 반하는 전복적 움직임이 존재한다. 즉 자본주의적 객관성을 내부로부터 뒤흔들어 혁명적 주체화의 장을 열려 하는 반란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다.
뽕띠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이들은 루카치의 작업을 무력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듯하다)처럼 자본주의적 총체성을 신격화하지 않고, 어떻게 계급투쟁이 권력의 실재 총체를 뒤흔들고 연속적으로 다시 여는지를 부각시킨다. 그는 루카치의 담론에서 사물화된 총체성이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총체화되어 있기에 열려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질서를 복구하는 관념론적인 ‘지양’(Aufhebung)이 아니라 파열의 초변증법(hyperdialectic)이다. 뽕띠는 혁명의 변증법적 과정을 정반합의 화해(pacification)로 보지 않고 환원 불가능한 갈등으로 보는 사고를 개시했다. 유물론적이고 신체적이며 살아있는 변증법이다.
1968년에 끝난 ‘단기 20세기’에 자본주의는 무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반대쪽도 마찬가지였다. “노동과 노동력의 변형은 삶정치적 생산의 시기를 낳았으며, 이 시기에는 주체성의 생산이 경제적 가치의 창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이 이행을 이해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더 촉진함으로써 그 생산성을 발전시킨다. 자본에 포섭된 사회에서 삶의 세계와 인간 자체의 사물화를 통해 종속을 이루는 자본의 관행은 노동력에 총체성 수준에서 구속복을 입힌다. 자본의 관리이론들을 보면 노동자들의 주체화를 지배하기 위한 이러저러한 정도로 명시적인 제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끔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애원하면서 말이다.”
서구 맑스주의의 성취는 사회변형의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진리로서의 총체’는 주체성의 해방적 차원에 우선권을 부여하면서 특이성들에 기반을 두어 총체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뽕띠에게서는 이 인식론적 모델이 소련식 독재에 대한 비판에 의해 틀지어져 있다. 소련식 독재는 주체성에 반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서 제시된다. 뽕띠: 코뮤니즘은, 근대와 단절한 변증법 개념을 통해, 통치를 혁명으로 대체하는 영속적인 위기와 계속적인 불균형의 사회가 된다. 이러한 의미의 코뮤니즘은 전통적인 진보관들이나 진보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명시적으로 표현되는 적은 별로 없지만, 서구 맑스주의의 또 하나의 성취는 권력관을 갱신한 것이다. 권력은 초월적 통합성이나 신학적 연속성 없이 완전히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들뢰즈가 푸꼬의 권력관을 해석한 것과 호응한다. “권력은 본질이 없다. 단지 작동할 뿐이다. 권력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이다.” 4 권력은 피지배자(the dominated)에게 ‘삼투되어’(invested) 그들과 그들의 실천에 속속들이 작용한다. 그러나 피지배자도 또한 권력에 대한 투쟁에서 권력이 그들에게 행사한 온갖 실천들과 행위들을 이용한다. 권력을 말하는 마지막 말은 ‘저항이 먼저 온다’이다. 들뢰즈: 푸꼬에게는 자본의 전략 이전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맑스주의로 보는 트론띠의 해석의 메아리가 있다. 권력은 다이어그램 안에 완전히 갇혀 있지만, 저항은 다이어그램이 그로부터 파생되는 “외부”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푸꼬에게서 저항이 완전히 횡단적인 다원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푸꼬가 서구 맑스주의의 최종 대표자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맑스주의 재해석의 시기에 저항과 투쟁의 연속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리더십(지도)의 문제. 권력을 본질로 보는 것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총체가 단편화된 것으로 나타날 때, 운동이 스스로 혁명의 전략을 주장할 때, 리더십은 어디에 있는가?
♣
- 원주4 Antonio Gramsci, Further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ed. and trans. Derek Boothma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5, p. 347 (Peter Thomas, The Gramscian Moment, Brill, 2009 p. 27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원주5 Louis Althusser, Essays in Self-criticism, trans. Grahame Lock, New Left Books, 1976, p. 155. [본문으로]
- 네그리가 이탈리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정리자가 추가함. [본문으로]
- 원주16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p. 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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