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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들뢰즈, 심판의 종식을 위하여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4]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심판의 종식을 위하여)

Gilles Deleuze, Critique et Clinique

 

영어본

"To Have Done with Judgment"

Gilles Deleuze, Essays Critical and Clinical


*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매우 거친 번역입니다. 누락된 부분도, 오류도 많을 겁니다;;; 내용 파악용으로만 활용하세요. 주요 용어나 어구에 원어(프랑스어)를 병기합니다. 프랑스어 원본을 기준으로 하고 영어본을 참조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거대한 심판(jugement)[각주:1]의 교설이 다듬어지고 발전되었다. 비극적인 것(Ce qui et tragique)은 행동이라기보다 심판이며 그리스 비극이 처음부터 세운 것은 법정이었다. 칸트가 판단(jugement)에 대한 진정한 비판을 창안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 제목을 가진 책이 세운 것은 환상적인 주체의 법정이다. 바로 스피노자가 유대-기독교 전통과 단절하면서 비판을 수행했다. 그에게는 이 비판을 자신의 일로 삼아 더 밀고 나아간 4명의 위대한 제자들이 있다. 니체, 로렌스, 카프카, 아르또(Artaud)이다. 이 넷은 개인적으로 특이하게 심판으로 인해서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고소, 심의, 평결이 무한히 융합되는 지점을 경험했다. 니체는 고소당한 사람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돌아다녔고, 이에 대해서 그는 당당하게 맞섰다. 로렌스는 그의 얼마 안 되는 수채화들에 가해지는 부도덕과 외설이라는 비난 아래 살았다. 카프카는 그의 무한정한 약혼이 심판을 받는 호텔의 법정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이 순진한 가운데 악마적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르또-반 고흐보다 가장 모진 형태의 심판정신치료 전문가의 끔찍함으로부터 고통을 더 받은 사람이 있는가?

 

심판의 조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니체였다. “신에게 빚을 졌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빚이 무한해지고, 그리하여 갚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실존이 무한한 부채에 종속된 정도로만 심판을 하고 또 심판받을 수 있다. 빚의 무한성과 실존의 불멸성은 상호 의존하며 함께 심판의 교설을 구성한다. 빚이 무한하려면 채무자가 살아있어야 한다. 혹은 로렌스가 말한 대로 기독교는 권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권력 즉 심판하는 권력을 창안하였다. 심판이 최종적 심급이 됨과 동시에 인간의 운명은 지연된다.” 심판의 교설이 아메리카의 극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묵시록 혹은 최후의 심판에 등장한다. 카프카는 표면적 방면”(acquittement apparent)에서 무한한 부채를 보며, “무기 연기에서 지연된 운명을 본다.[각주:2] 이것이 심판관들을 우리의 경험과 이해 너머에 계속 존재하게 한다. 아르또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일을 부단하게 무한에 대립시킨다. 이 넷에게 심판의 논리는 가장 어두운 조직의 발명자인 사제의 심리와 융합한다. 나는 심판하고 싶다, 심판을 해야 한다......심판 자체가 내일까지 연기되고 지연되는 것, 무한대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다. 연기(지연)의 행위, 무한대로 가져가는 행위가 바로 심판을 가능하게 한다. 심판의 조건은 시간의 질서(order)에서 실존(existence)과 무한대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관계 속에 있다. 이러한 관계에 놓이는 것에 심판하고 심판받는 힘(pouvoir)이 부여된다. 지식의 심판(판단)조차도 공간의 무한, 시간의 무한, 그리고 시간과 공간 내에서 현상의 실존을 결정하는 경험의 무한을 감싸고 있다. (‘매번 ~할 때마다······’) 그러나 지식의 판단은 이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형식을 함축하며, 이 형식에 상응하여 실존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 무한과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신에 대해 빚을 진 실존자이다.

 

그런데 무엇이 심판과 구분되는가? 심판의 토양인 동시에 지평인 예단’(豫斷)(préjudicatif)을 거론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이는 스스로를 적그리스도로 파악하는 반()심판과 동일한 것인가? 토양이라기보다는 붕괴이고 산사태이며 지평의 상실에 해당하는 것 말이다. 실존하는 것들은 시간의 경과만을 구성하는 유한한 관계들을 따라 서로 대면하고 스스로 수정한다. 니체의 위대함은,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모든 교환관계에서 우선적이라는 것을 그 어떤 주저도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약속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빚은 신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관련자와의 관계에서 생기며, 양 당사자 사이에 작용하여 상태의 변화를 일으키며 무엇인가를 낳는 힘들에 따른다. 정동이 바로 이 무엇이다. 모든 것은 당사자들 사이에 일어나며, 시련은 신의 심판이 아니다. 신도 심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스(Mauss)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주저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니체는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심판에 대립되는 정의(正義)가 있다. 이에 따르면 신체들은 서로 표시를 하며 빚은 영토 속에서 순환하는 유한한 블록들을 따라 직접 신체에 새겨진다. 법은 영원한 사물이 가진 것과 같은 부동성을 가지지 않고, 피를 흘리거나 피로 갚아야 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부단하게 전위(위치이동)된다. 신체에 홈을 파고 색깔을 입혀 표시한 끔찍한 기호들이 해야 할 것과 만기가 된 것을 풍성한 살에서 드러낸다. 잔인의 체제(un système de la cruauté) 이다. 이 체제의 메아리를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과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 듣는다. 이와 반대로 심판의 교설에서는 빚이 책에 새겨진다. 이는 온건한 것 같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다. 실상 우리에게 끝없는 노역의 저주를 내리며 해방적 과정을 모두 파기하기 때문이다. 아르또는 잔인의 체제를 숭고하게 전개시킨다. 정의가 심판과 대립되듯이 책의 글쓰기와는 대립되며, 기호의 역전을 야기하는 피와 삶의 글쓰기이다. 이 또한 카프카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가? 그가 재판(Procès)이라는 거대한 책에 유형지 기계를 대립시킬 때 말이다.[각주:3] 이 기계는 신체에 새겨지며 글이며, 오래된 질서를 그리고 채무, 고소, 변호, 평결이 뒤섞이는 정의를 보여주는 글이다. 잔인의 체제는 존재하는 신체들이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유한한 관계를 언표한다. 이에 비해 무한한 빚의 교설은 불멸의 영혼이 심판과 맺는 관계를 결정한다. 어디서나 잔인의 체제가 심판의 체제에 대립된다.

 

심판은, 매우 다르지만 꽃을 활짝 피우는 데 유리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토양에서 출현하지 않았다. 파열과 분기가 필요했다. 신에 대한 채무의 형성이 필요했다. 채무가 우리가 놓이게 되는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부여한다고 생각되는 신과의 관계에서 사고되는 것이 필요했다. 많은 우회로가 필요했다. 신은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서 보듯이) 애초에는 수동적 증인이거나 원고여서 심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극에서 보듯이 차츰차츰 신들과 인간들이 좋든 나쁘든 심판하는 행동의 위치에 올라갔다. 심판의 교설은 신이 인간에게 운명을 할당하고 이에 따라 인간의 운명은 이러저러한 형식(form), 이러저러한 유기적 목적을 감당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나의 운명은 나를 어떤 형식에 바칠 것인가, 또한 나의 운명은 내가 욕망하는 그러한 형식에 상응할 것인가? 이것이 심판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실존이 운명 안에 맞추어 넣어지고 정동들은 운명 안으로 분포되며 그 다음에 우월한 형식들과의 관계에 놓인다. (삶을 그보다 우월한 가치들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는 이러한 주장을 규탄하는 것이 니체 혹은 로렌스가 늘 다루는 테마이다.)(c'est le thème constant de Nietzsche ou de Lawrence, dénoncer cette prétention de « juger» la vie au nom de valeurs supérieures.) 인간들은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평가하는 만큼 심판하며, 하나의 형식이 자신의 주장을 확인하거나 기각하는 만큼 심판을 받는다. 인간은 심판을 하는 동시에 심판을 받는다. 심판을 하는 것과 심판을 받는 것에서 동일한 즐거움을 느낀다. 심판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잘못 알 때에는 환각, 광기에 이르는 거짓된 심판의 형태로, 그리고 예의 형태가 다른 운명의 부과할 때에는 신의 심판의 형태로 세계에 파열을 불러일으킨다. 아약스가 좋은 사례이다. 심판의 교설은 애초부터 신의 심판만큼이나 인간의 거짓된 심판을 필요로 했다. 기독교에 와서 가장 최근의 분기가 일어났다. 이제 운명은 더 이상 없다. 우리의 심판이 우리의 유일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식도 더 이상 없다. 바로 신의 심판이 무한한 형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 한계점에서 스스로 운명을 배분하고 스스로 처벌하는 것이 새로운 심판 혹은 근대(현대) 비극의 특징이 된다. 이제 심판밖에는 없으며 모든 심판은 다른 심판과 관련된다. 아마도 오이디푸스가 이 새로운 상태를 그리스 세계에서 미리 구현했는지도 모른다. 돈 주앙의 테마에 들어있는 근대적인 요소는 희극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심판이다.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심판의 교설의 두 번째 운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우리는 형식이나 목적을 통해서 신에게 빚을 진 자가 더 이상 아니고, 우리의 모든 존재에서 유일신에게 무한히 빚진 자이다. 심판의 교설이 정동의 체제에 등을 돌리고 그것을 대체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지식 혹은 경험의 판단(jugement)에서조차도 발견된다.

 

심판의 세계는 마치 꿈(le rêve)에서인 듯이 자리를 잡는다. 운명이, 에제키엘의 바퀴가 돌아가게 만들고 형식들이 행진하게 만드는 것은 꿈이다. 꿈속에서 심판이, 지식과 경험의 요구들에 심판을 종속시키는 환경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마치 진공에서인 듯 솟아오른다. 바로 이 때문에 심판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꿈을 꾸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아폴로도 심판의 신인 동시에 꿈의 신이다. 심판하고 한계를 부과하고 유기적 형식에 우리를 가두는 신이 바로 아폴로이며, 심판에 그 이름이 동원되는 형식들 안에 삶을 가두는 것은 꿈이다. 꿈은 벽들을 세우고 죽음을 먹고 살며 그림자들을 부활시킨다. 모든 사물들과 세계의 그림자들을, 우리들 자신의 그림자들을. 그러나 우리가 심판의 구속(拘束)을 떠나자마자 우리는 꿈을 거부하며 마치 높은 조류에 휩쓸리듯 도취에 우리를 맡긴다. 우리는 도취, 주연(酒宴), 약에 취한 상태, 황홀의 상태 속에서 꿈과 심판 모두에 대한 해독제를 찾는다. 심판을 떠나서 정의(正義)를 향할 때마다 우리는 꿈 없는 잠에 들어선다.[각주:4] 예의 네 명의 저자는 꿈에서 너무 부동(不動)적이며 너무 방향지워져 있고 너무 제어된 상태를 규탄한다. 정신분석가들이든 초현실주의자들이든 꿈에 그토록 관심을 가진 집단들은 실제 현실에서도 심판하고 벌하는 법정을 재빨리 형성하려한다. 꿈꾸는 자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구역질나는 강박이다. 아르또는 초현실주의에 제한을 두면서, 사유는 꿈의 핵()과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꿈이 그것을 피해가는 사유의 핵에 부딪쳐 튕겨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르또의 경우에는 페요트[각주:5] 의식(儀式), 로렌스의 경우에는 멕시코 숲의 노래들은 꿈이 아니며 도취의 상태이거나 잠의 상태이다. 이 꿈 없는 잠은 우리가 실제로 자는 그러한 잠이 아니라 밤을 가로지르며 놀라운 명증함으로 밤에 거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낮의 빛이 아니라 번개의 빛(l’Eclair)이다. “밤의 꿈속에서 나는 꿈을 잡아먹기 위해서 배회하는 회색 개들을 본다.”[각주:6] 잠을 자지 않는 이 꿈 없는 잠은 불면이다. 불면만이 밤에 적합하며 밤을 충만하게 하고 밤을 사람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은 잠의 꿈으로서 혹은 백일몽으로서가 아니라 불면의 꿈으로서 다시 발견된다. 새로운 꿈은 불면의 파수꾼이 된다. 카프카에게서처럼, 이는 잠 속에서 생기는 꿈이 아니라 불면의 쪽에서 생기는 꿈이다. “나는 (시골로) 옷을 입은 내 몸을 보낼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황갈색 담요를 덮고 침대에 아늑하게 누워있을 것이고.” 불면하는 자는 움직이지 않고 쉴 수 있는 반면에 꿈은 실제적 운동을 취한다. 잠은 자지 않는 이 꿈 없는 잠, 자신이 닿을 수 있을 만큼 광대하게 꿈을 휩쓸어가는 이 불면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상태이며 심판을 피하는 방식이다.

 

잔인의 육체적 체제는 심판의 신학적 교설과도 세 가지 측면에서 신체의 수준에서 대립된다. 심판은 신체의 유기적 조직화를 함축하며 이를 통해 심판이 작동한다. 유기적 기관들은 심판관인 동시에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신의 심판은 바로 무한대로 유기적으로 조직화하는 권력이다. 여기서 심판과 감각기관들이 서로 맺는 관계가 나온다. 잔인의 체제의 신체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유기체가 아니기에, 그리고 인간이 심판을 하고 심판을 받는 이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화를 결여하고 있기에 그만큼 더 심판을 피해간다. 우리는 한때 활력 있고 살아있는 신체를 가졌는데, 신이 우리를 유기(적 신)체로 만들었고 여성이 우리를 유기(적 신)체로 전환시켰다. 신이 그의 심판을 행하는 데 필수적인 유기체화된 신체를 우리에게 안겨주기 위해서 우리에게서 훔쳐간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가 아르또에 의해 제시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정동적이며 내향적이고(강렬하고, intensif) 아나키스트적인 신체로서, (), 지대들, 문턱들, 변화의 정도들만을 가진다. 이 기관 없는 신체를 가로지르는 것은 강력한 활력이다. 로렌스는 해와 달의 극들을 가진, 문턱, 평면들, 단면들, (, plexus)들을 가진 그러한 신체를 그린다.[각주:7] 더 나아가 로렌스가 인물들에게 이중적 규정을 할당할 때, 우리는 하나는 유기적인 개인적 감정이지만 다른 하나는 활력 있는 신체 위를 지나가는, 다른 식의 힘을 가진 비유기적 정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음악이 더 훌륭할수록 그는 순전한 희열 속에서 더 완전하게 그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내부에서 격한 불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각주:8] 로렌스는 유기체의 관점에서는 결함이 있거나 매력이 없는 신체들살찐 은퇴한 투우사, 야윈, 개기름 번들거리는 장군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들을 거부하고 유기적 조직화를 무너뜨리는 강렬한 활력이 못지않게 가로지르는 신체들을 부단히 제시한다. 비유기적 활력(la vitalité non-organique)은 달이 여성의 신체를 장악하듯이 신체를 장악했거나 신체에 장악당한 힘들 혹은 지각 불가능한 활력(puissances imperceptibles)과 신체가 맺는 관계이다. 아르또의 작품에서는 아나키즘적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각주:9]가 힘 혹은 활력의 이러한 대면을 광물·식물·동물로의 생성으로서 부단히 보여준다.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 자신의 기관 없는 신체를 발견하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이미 니체의 기획이었다. 생성 중에 있는, 강렬함(내향성)(en intensité) 속에 있는 신체를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힘으로서 정의하는 것, 즉 힘에의 의지로서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카프카가 첫 눈에 이러한 흐름에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두 세계 혹은 두 신체를 공존하고 서로 작용하고 서로 통과하도록 만든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유기적 조직화가 일어나는 심판의 신체, 그 절편들(사무실들의 인접성), 그 분화들(법정의 관리들, 변호사들, 판사들), 그 위계들(판사층, 관료층). 그러나 또한 절편이 용해되고 분화가 상실되며 위계가 혼란에 빠지는 신체, 불확실한 지대들만을 구성하며 그 지대들을 전속력으로 가로지르고 거기서 활력과 마주하는 내향성(강도)만을 보유하는 신체, 이 아나키즘적 신체 위에서 그 자신이 되는 정의(正義)의 신체도 있다. (“정의는 그대로부터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정의는 그대가 오면 그대를 받아들이고 그대가 떠나가면 그대를 놓아준다.”)

 

이로부터 잔인의 체제의 네 번째 특징이 나온다. 전투(combat), 어디서나 전투이다. 심판을 대체하는 것은 전투이다. 물론 심판과 맞서는, 심판을 담당하는 당국과 그 인물들과 맞서는 전투이다. 그러나 더 심층에서 전투는 바로 전투를 벌이는 사람 자신이다. 전투는 자신의 부분들 사이에서, 종속시키려하는 힘과 종속되는 힘들 사이에서, 이 힘의 관계를 실험하는 활력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카프카의 모든 작품들에는 전투의 묘사라는 제목이 붙여질 수 있었다. 성에 맞선 전투, 심판에 맞선 전투, 아버지에 맞선 전투, 약혼자에 맞선 전투. 모든 몸짓은 방어, 혹은 공격, 회피, 과시, 되받기, 평소에 못 보던 가격(加擊)의 예측 혹은 평소에 알아보지 못하던 적의 예측이다. 여기서 신체의 자세의 중요성이 나온다. 그러나 이 외적 전투들은, 맞서는 전투들’(combats~contre)사이 전투들’(combats~entre)에서 정당화된다. 후자는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 내에서의 힘들의 구성을 결정한다. 타자에 맞서는 전투를 자신 사이의 전투로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맞서는 전투는 하나의 힘을 파괴하거나 밀어내고자 한다. (‘미래의 악마적 힘에 맞서서 싸우기.) 그러나 사이 전투는 이와 달리 어떤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악하고자 한다. ‘사이 전투는 하나의 힘이 새로운 집합 속에서, 새로운 생성 속에서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고 다른 힘들을 장악하며 다른 힘들에 자신을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카프카의 연애편지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이 약혼자에 대한 전투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는 약혼자의 육식성의 힘을 밀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약혼자의 힘들과 카프카와 결합한 동물적 힘들 사이의 전투 (이 동물적 힘들과의 결합은 자신을 먹어치울 수도 있는 힘을 더 잘 피하기 위한 것이다), 약혼자가 그를 먹어치우기 전에 그녀의 피를 빨아먹는 데 사용될 흡혈귀적 힘들과 약혼자의 힘들 사이의 전투이다. 이러한 힘의 연합들 모두가 생성을, 동물 되기를, 뱀파이어 되기를, 심지어는 여성 되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생성은 오직 전투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아르또에게서는 신, 도둑, 위조자와의 전투이다. 그러나 이 일은 전투를 하는 사람이 동시에 원리상의 전투 혹은 활력상의 전투를 행하며 살아가는 까닭에만 가능하다. 이 후자의 전투는 돌 안에, 동물 안에, 여성 안에 현실화된 원리들 혹은 힘들의 차원에서 일어나며, 그리하여 전투하는 사람은 바로 생성(돌 되기, 동물 되기, 여성 되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 적에게 맞서서’ (그에게 이 원리상의 전투가 부여하는) 동맹군들 모두와 함께 덤벼들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테마가 로렌스에게서 늘 등장한다. 남성과 여성이 종종 서로 마치 적인 양 대한다. 그러나 이는 가정극에나 어울리는, 전투의 가장 평범한 측면이다. 더 심층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싸우게 마련인 흐름들이다. 이 싸움에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교대로 장악하거나 아니면 서로 헤어져 각자 혼자 사는 삶에 몰두한다. 혼자 사는 것도 하나의 힘이요 흐름이다. 로렌스는 강렬하게 니체에 응한다. 좋은 것은 전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들의 공동의 선생은 전투의 사유가인 헤라클리토스이다. 아르또도 로렌스도 니체도 동양과 그 비()전투의 이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장소는 그리스, 에트루리아, 멕시코로서, 이들 모두 사물들이 그들의 힘을 구성하는 전투의 과정에서 나오고 생성하는 곳들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로 하여금 전투를 포기하게 만들 때마다 그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의지의 허무함’(néant de volonté)이며, 꿈의 신성화이고, 죽음의 의식(儀式)이다. 이 죽음이 개인으로서의 부처의 혹은 예수의 죽음처럼 (사도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어떤 것으로 만들었는지와는 별도로) 가장 감미로운 형태로 이루어지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전투는 무엇보다도 허무에의 의지가 아니다. 전투는 전쟁(la guerre)이 결코 아니다. 전쟁은 맞서는 전투’(le combat-contre)일 뿐이며, 파괴의 의지요 파괴를 정의로운 어떤 것으로 만드는 신의 심판이다. 신의 심판은 전쟁의 편에 서있으며, 결코 전투가 아니다. 다른 힘을 장악할 때조차도 전쟁의 힘은 그 힘들을 절단하면서 시작하고 그 힘들을 가장 낮은 상태로 환원시킨다. 전쟁의 경우에는 힘(la puissance)에의 의지란, 의지가 힘을 최대의 권력 혹은 지배로서 원한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니체와 로렌스는 전쟁에서 가장 낮은 정도의 힘에의 의지, 그 병을 보고자 한다. 아르또는 미국과 소련의 전쟁 관계를 환기하면서 시작한다. 로렌스는 고대 로마에서 현대 파시즘까지 죽음의 제국주의를 묘사한다. 이는 전투가 그것을 통과하지 않음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와 반대로 전투는 힘을 힘으로 보충하고 그것이 장악하는 힘을 풍요롭게 하는 저 비유기적인 강력한 활력이다. 아기는 이 활력을, 이 집요한 살려는 의지를, 모든 유기적인 삶과는 다른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아동들의 경우에는 이미 인격적인(personnelle) 유기적 관계가 들어서지만, 조그마하면서도 포석(鋪石)을 부수는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아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로렌스의 아기거북이). 아기에게는 강건하고(athlétique) 비인격적이며 활력 있는 정동의 관계가 존재한다. 아기에게서 힘에의 의지가 전쟁하는 사람(l’homme de guerre)에게서보다 무한히 더 정밀한 방식으로 출현하는 것은 확실하다. 아기가 바로 전투이기 때문이며, 작음이 힘들이 거하는 환원할 수 없는 장소이고 힘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예의 네 저자들은 미시화’, ‘소수화의 과정에 있다. 유희(게임) 혹은 유희하는 아이를 사유하는 니체. 로렌스 혹은 작은 팬(Pan)’. le mômo 아르또, “아이의 자아, 아이의 작은 의식.” 카프카, “자신을 작게 만드는 큰 부끄러운 사람

 

활력은 힘들의 특유성(une idiosyncrasie)이다. 그리하여 지배하는 힘이 지배받는 힘들을 통과화면서 스스로를 변형시키고 지배받는 힘들은 지배하는 힘들을 통과하면서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변신(métamorphose)의 중심이다. 바로 이것이 로렌스가 상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진동하고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아무 의미가 없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모든 방향으로 가능한 최대의 힘을 포획할 때까지 소용돌이치게 하는 내향적인(강렬한, intensif) 합성물(une composé)이다. 이때 각각의 힘은 다른 힘들과의 관계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의미를 받아들인다. 결정(la décision)은 심판이 아니며 심판의 유기적 귀결도 아니다. 결정은 우리를 전투에 끌어들이는 힘들의 소용돌이로부터 활력 있게 솟아나온다. 결정은 전투를 억압하거나 끝내지 않고 해결한다. 결정은 상징의 밤에 적합한 섬광(번갯빛, l’eclair)이다. 예의 네 저자들은 상징주의자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상징들의 책, 탁월한 전투서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에서, 카프카의 우화에서 출현하는 것은 이와 유사한 경향, 즉 힘들을 증식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경향, 서로 작용하는 힘들의 최대치를 획득하는 경향이다. 극장과 페스트 사이에서 아르또는 두 힘들 모두 상대를 배가시키고 재활성화하는 상징을 창조한다. 묵시록적 짐승인 말을 예로 들어보자. 로렌스의 경우 키득거리며 웃는 말, 카프카의 경우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나를 쳐다보는 말, 아르또의 경우 태양에 다름 아닌, 혹은 니체의 경우 이아’(Ia)라고 말하는 당나귀이것들은 힘을 모으면서, 활력의 합성물을 구성하면서 상징을 구성하는 형상들이다.

 

전투는 신의 심판이 아니라 신과 심판을 끝내는 길이다. 발전은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심판을 조금도 함축하지 않는 전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섯 가지 특징이 실존을 심판에 대립시킨다. 무한한 고문(拷問)에 맞서는 잔인, 꿈에 맞서는 잠 혹은 도취, 조직화에 맞서는 활력(la vitalité), 지배하려는 의지에 맞서는 힘에의 의지, 전쟁에 맞서는 전투. 우리를 괴롭힌 것은, 우리가 심판(판단)을 버리면서 실존하는 것들 사이에, 실존의 양태들 사이에 차이를 짓는 모든 수단을 잃는다는 인상을 받고 마치 이제는 모든 것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기준들(우월한 가치들)을 전제하는 것이 바로 심판 아니던가? 모든 시간에 선행하여 (시간의 무한대로) 실존하는 것 안에서 새로움을 포착할 수 없게 되고 실존의 양태의 창조를 예감하지도 못하는 것이 심판 아니던가? 그러한 양태는 활력적으로, 전투를 통해서, 불면 속에서, 자신에 맞서는 잔인을 일정하게 동반하면서 창조된다. 이 모든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심판에서 나오지 않는다. 심판은 실존의 새로운 양태가 발생하는 것을 모조리 막는다. 이 새로운 양태는 자신의 고유한 힘들을 통해서, 즉 그것이 포획하는 법을 아는 힘들을 통해서 자신을 창조하며, 새로운 조합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타당하다. 심판하지 말고 실존하게 만들라(faire exister, non pas juger)이것이 아마도 여기서 비밀일 것이다. 심판하는 것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것이 동등한 가치를 가져서가 아니라 반대로 가치를 가진 모든 것이 다름 아닌 심판을 거부하면서 발생하고 서로 구분되기 때문이리라. 예술에서 전문가적 판단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장차 올 작품에 관해 논평할 수 있던가? 우리는 실존하는 다른 것들을 심판(판단)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이 우리와 맞는지 아니면 안 맞는지를 감지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힘을 가져오는지 아니면 우리를 전쟁의 비참으로, 꿈의 빈곤으로, 조직화의 경직성으로 돌려보내는지를 감지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 말했듯이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증오가 관건이다. “나의 영혼과 신체는 하나이다······나의 영혼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한다. 나의 영혼이 증오하는 것은 나도 증오한다······신랄한 증오에서 열정적인 사랑까지, 계산할 수 없는 모든 섬세한 영혼의 공감들.”[각주:10] 이는 주관주의가 아니다. 문제를 다른 것이 아닌 힘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은 이미 모든 주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실존

심판

잔인

무한한 고문

도취(꿈 없는 잠)

활력

(유기적) 조직화

(활력)에의 의지

지배하려는 의지

전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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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어는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jugement’([영어] judgement)이지만 우리말로는 맥락에 따라 ‘심판’, ‘재판’ ‘판단’, ‘평가’ 등으로 다르게 옮겨질 수 있다. [본문으로]
  2. 『심판』에서 화기 티토렐리는 케이(K)에게 실질적(혹은 절대적) 방면(放免), 표면적 방면, 지연의 세 가지를 설명해준다. [본문으로]
  3. 여기에 『심판』( Der Process, The Trial)과 「유형지에서」("In der Strafkolonie", "In the Penal Colony")라는 두 작품이 함축된다. [본문으로]
  4. 古之眞人其寢不夢 : ‘옛날의 진인은 잠을 자도 꿈꾸지 않는다’ [장자(莊子)--대종사(大宗師)] [본문으로]
  5. peyote, peyotl. 멕시코와 미국 남서부 산의 선인장으로서 여기서 환각제가 채취됨. [본문으로]
  6. 로렌스, 『날개 돋친 뱀』, ch. 22. 영어 원문 : “I am the watcher, and master of the dream./ In the dream of the night I see the grey dogs prowling./ Prowling to devour the dream.” [본문으로]
  7. 이에 대해서는 D. H. Lawrence, Fantasia of the Unconscious (1922) 참조. [본문으로]
  8. D. H. Lawrence, Aaron's Rod [본문으로]
  9. Héliogabale ou l'Anarchiste couronné, 1969 [본문으로]
  10. 로렌스,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