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검(重劍) 익히기
검에 마음을 실으면 살검(殺劍)이 활검(活劍)이 되고
말에 마음을 실으면 사랑으로 가는 길을 연다.
무협소설에 보면 검을 운용하는 방식이 중검, 쾌검(快劍), 환검(幻劍)으로 크게 나뉜다. 내가 보기에 이 셋 가운데 최고는 단연 중검이다. 중검은 검에 기를 싣는 검법이다. 기는 마음이 가는 곳을 따르니 기를 검에 싣는다 함은 곧 마음을 검에 싣는 것이다. 그러니 무거운 듯하지만 마음의 속도만큼 빠르고, 변화가 없는 듯하지만 마음만큼 많은 변화를 품을 수 있다. 중검의 단순함은 수많은 빛깔들이 모여 흰빛이 되는 것과 같다.
태극권에는 ‘뜻’[意]으로 치라는 구결이 있는데 원리가 같은 것이다. 마음을 실은 검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검사의 몸과 마음의 일부이다. 그래서 ‘검아일체’(劍我一體)라고 말한다.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는 이렇게 쓴 바 있다.
I will not cease from Mental Fight,
Nor shall my Sword sleep in my hand:
Till we have built Jerusalem,
In England's green & pleasant Land.
나는 정신의 싸움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검도 내 손에서 잠자고 있지 않으리라.
잉글랜드의 푸르고 즐거운 땅에
예루살렘을 지을 때까지.
(William Blake,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 4연)
“정신의 싸움”이란 시를 쓰는 일을 말하며, “검”은 동판화에 새기는 도구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시를 동판화에 때로는 그림과 함께 새겼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말하자면 해방된 삶의 터이다.
사실 시인에게는 말이 곧 검이다. 그래서 시인의 문제는 곧 말에 마음을 싣는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시인들이기에 말에 마음을 싣는 문제는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한국 신자유주의자들의 유체이탈 화법은, 말이 말을 한 사람과 아무런 관계없이 그저 떠돌아다니는 기표일 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말을 도구로 보는 사고방식이 수사법이 발전할 때 이미 충분히 발전하였다면, 유체이탈 화법은 도구적 언어관이 이보다 더 나아간 (신자유주의자들의 말로는 ‘선진화’된) 것이다. 사실 이는 표현성을 잃은 말이 자기이익의 추구에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과 관련된 우리의 과제는 말의 표현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말에 마음을 싣는 것이 이 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말에 마음을 싣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아니, 우리는 과연 우리의 마음이 무언지를, 어떤 지를 잘 알고나 있는가?
모른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자신의 입장이라든가 소감 혹은 견해라든가 하는 형태로, 심지어는 사상이라는 형태로 확연하게 준비해가지고 있는 것들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마음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숨겨놓았다가 털어놓는다고 마음이 실린 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집안에 들여놓은 가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의미의 집도 아니고 존재론적인 의미의 집은 더더욱 아니다. 가구는 바꿀 수도 있고 닳아 없어질 수도 있다. 가구가 집의 일부가 되려면 단순히 유용한 사물이기를 넘어서서 액자에 끼웠거나 사진첩에 넣어둔 사진첩들처럼 어떤 의미심장함을 띠어서 집과 영원히 일체가 되어야한다. 그리고 그 집은 다시 단순한 물리적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 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마음도 나의 몸 안의 어느 곳― 에를 들어 두뇌의 어떤 부분 1 혹은 심장―에 위치해있는 비신체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세계와의 정신적·정동적 상호작용의 한가운데에 형성되어 있는 어떤 것이며 이 상호작용의 가변성으로 인해서 결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할 수 없는, 늘 변이하는 어떤 것이리라.
마음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니체의 「역사 지식이 삶에 대해 가지는 효용과 단점」으로부터 도움을 빌어보기로 하자. 니체가 보기에 삶의 활력은 ‘조형 능력’을 가진다. “조형 능력이란 자신으로부터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성장해나가는 능력, 지나간 것과 낯선 것을 자신 속으로 통합하는 능력,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된 것을 보완하며 부서진 형태를 재창조하는 능력이다.” 이 조형능력이 클수록, 혹은 니체가 한 다른 말을 빌자면, 어떤 사람의 본성의 내적 뿌리가 강할수록, 예컨대 더 많은 지식을 소화시키고 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조형능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지식에 대해서는, 다시 말해서 소화시키지 못하는 지식에 대해서는 그것이 삶에 해로운 것이므로 ‘망각’이라는 보호막을 친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삶의 공간을 니체는 ‘지평’(Horizont)) 혹은 ‘대기권’(Atmosphäre)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지평 혹은 대기권이 마음이 존재하는 방식일 듯하다. (들뢰즈·가따리의 ‘리토르넬로’와 사실상 유사하다.) 이 지평 혹은 대기권에서 활력의 강렬함은 보호막 부분, 앎과 모름의 경계에 상대적으로 더 집중된다. 들뢰즈·가따리의 말을 빌자면 카오스와의 싸움이 진행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경계는 활력이 증가하면 확대되고 활력이 감소하면 축소된다. 정지되어 있는 경우라면 팽팽한 힘의 관계의 균형의 결과이다.
이렇듯 마음은 우리의 앎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활력이 존재하는 한 방식, 한 양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망각과, 카오스와 접하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지 늘 알쏭달쏭한 상태에 처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피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의 활력의 강도를 나타내준다. 경계 부분에 내적 힘(intensity)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는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이데’의 차원, 즉 잠재성의 차원의 특징을 그대로 가진다. 명제들보다는 문제들로 구성된 탐구적 차원이며, 새로운 감성, 새로운 사유가 발생하는 창조의 차원인 것이다. 따라서 말에 마음을 싣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은, 이미 잘 준비되고 완결된 입장, 소감, 감정,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묻고 탐구하는 과정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눌한 말, 더듬거리는 말, “모국어 속의 외국어”(들뢰즈·가따리)이다. 이것이 진정한 진심이요 진정한 솔직함이다.
예의 대기권 혹은 지평으로서의 마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마음이 우리의 존재 이전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활력의 정도에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마음은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활력에 따라 만드는 것이기에 늘 미완의 것이고 늘 변이하는 것이다. 예의 대기권의 밝은 부분 안쪽에는 우리가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서 거의 기계적인 된 행동들(무술로 치면, 반복연습을 통해 몸에 배인 동작들)이 있다. 바로 우리가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습관도 우리 존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우리가 카오스로 풀어져버리는 위험을 막아준다. 2 (그게 아니면 이른바 신선의 경지―변이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 인간들의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대기권의 경계면에서는 계속 미지와의 마주침이 일어나고 카오스와의 창조적 씨름이 일어나며, 그 결과로 나의 마음이 혁신되고 나의 존재가 혁신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실은 말, 물음과 탐구의 말은 곧 나의 마음,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창조적인 말이 된다.
마음을 실은 말은 묻고 탐구하는 말이며, 나의 존재를, 나의 마음을 창조하는 말이다. 곧 시(詩)이다. (다중 만들기는 다중의 군주 되기일 뿐만 아니라 다중의 시인 되기를 포함한다.)
마음을 담은 말은 희귀하다. 거의 대부분의 말들이 습관을 섬기는 말이다. 그것은 기계적인 반복의 언어다. 물론 수사로서의 말, 전략적(전술적)으로 구사되는 말이 있다. (유체이탈 화법의 말도 크게 보면 여기에 속한다.) 우리의 삶의 상당 부분이 전략과 전술의 작용공간이므로 전략적으로 구사된 말은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으로서 다가올 수 있고 말의 기술(테크닉)이 말과 관련된 활력의 발휘인 듯이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푸코에게서 전략의 지대 3와 삶의 지대 4가 구분되고 있음을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한 바 있다. 5 아래 그림에서 2가 전략의 지대이고 4가 삶의 지대이다. (그림에서는 “접힘(주체화의 지대)”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더 이상 힘들의 관계에 의해서 측정되지 않는 삶의 선이며, 인간을 공포 너머로 데려가는 삶의 선이다. 이 선은 균열에 대하여 고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살 수 있고 실상 <삶>이 탁월하게 존재하는 태풍의 중심’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마음을 싣는 것은 삶의 활력의 표현이다. 그런데 전략적으로 구사된 말은 삶의 활력의 증가가 아니라 자신에게 해로운 힘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힘을 수세적으로 보존하는 데, 혹은 상대의 힘을 공세적으로 파괴하는 데 복무한다. 그것은 상대를 나의 활력에 해로운 ‘적’으로 규정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적과의 싸움―예컨대 성명서를 쓰거나 투쟁적 대자보를 쓰거나 하는 경우―에 필요한 말이지 사랑하는 사람들, 함께 모여서 더 활력있는 공통적인 삶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필요한 말이 아니다.
마음을 실은 말은 대화상대에게 함께 묻고 탐구할 것을, 함께 창조할 것을 청한다. 따라서 오랫동안 대화를 해온 사람들은 그 대기권들이 서로 점점 중복되어 함께 묻고 탐구하고 창조하는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제 마음이란 한 개인의 배타적 ‘속성’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잃게 된다. 그렇다고 개인의 활력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통해 더욱 증가한다.
우리의 마음이란 우리가 함께 순간순간 삶아가는 삶이 카오스와 접하는 면에 의해 형성되는 잠재적 대기권이다. 마음을 실은 말은 물음의 말이요 탐구의 말이며, 생성의 말이요 창조의 말이며, 협동의 말이요 창조의 말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말이요 말로 표현되는 삶이다. ♣
-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서문, “This view is much favored by Descartes. He maintained that the soul or mind is united in a special way with a certain part of the brain called the pineal gland, by means of which the mind senses all movements that occur in the body, as well as external objects, and by the mere act of willing it can move the gland in various ways.” [본문으로]
- 습관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는 『다중』 268-271쪽 참조. [본문으로]
- 이는 힘들(forces) 사이의 관계의 지대, 즉 권력(pouvoir)의 지대이다. [본문으로]
- 이는 힘의 자기관계의 지대, 혹은 활력의 중가의 지대이다. [본문으로]
- 『푸코』 맨 마지막 장(章)의 후반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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