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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1

씨리즈 설명

나는 요즘에 와서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 재미있고 행복하고 쌔끈한세상이 오려면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활력의 관점에 대해서는 (비로 이 말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멋있는 철학자, 소설가, 시인, 예술가들이 말을 해놓았다. 이것을 내 말 속에 섞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동류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씨리즈도 완결을 안 해놓았는데 또 무슨 씨리즈를 시작하냐,고 스스로 항의한다. 그냥 일이 그렇게 되는 걸 어쩌겠는가,라고 스스로 답한다. 사실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씨리즈도 그렇지만) 이 씨리즈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대략 써놓았고 그 일부를 다듬어서 내보내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얼마 동안은 주로 하는 일(번역)이 있고 그 일로 인해서 백수이면서도 당분간은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번역 이외의 글을 쓰고 싶기 때문, 쓰지 않으면 못 배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동과 욕구를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다스리려는 사람은 덕과 그 원인에 대한 지식을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진실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즐거움으로 자신의 정신을 채우려고 한다. 그는 결코 인간의 단점들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동료들을 흠잡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유를 허위적으로 과시하는 데 탐닉하지도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 윤리학V부 정리10 주석)

 

 

활력의 관점은 철학적으로는 스피노자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

 

활력의 관점은 정동의 관점이다. 정동은 활력의 증감(+그에 대한 생각)이며, 따라서 정동의 관점에서는 기쁨(활력의 증가)과 슬픔(활력의 감소)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기쁨의 정동이 기쁨을 주는 대상에 대한 생각과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고, 슬픔의 정동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대상에 대한 의식과 함께 하는 것이 증오이다.

 

정동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하여금 사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한에서 나쁘거나 해롭다.”(윤리학V부 정리9 증명) 인간은 정동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정동의 방해를 받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핵심은 정동의 원인에 대한 적실한 생각(지식)의 형성이다. 형성된 적실한 생각은 다시 기쁨의 정동을 증가시킨다. 기쁨의 증가가 바로 다중만들기의 주요한 원리이다.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1

심판의 체제를 끝내야 한다.

 

적실한 생각(지식)의 형성을 막는 거대한 체제가 있다. 들뢰즈는 이것을 심판의 체제라고 불렀다.[각주:1] 들뢰즈에 따르면, 심판의 교설은 그리스비극에서부터 근대 철학에 걸쳐 다듬어지고 발전되었으며, 스피노자가 유대-기독교 전통과 단절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아마도 최초의) 철학자이다.

 

삶에 내재적인 정동의 체제와 달리[각주:2] 심판의 체제의 핵심은 삶을 삶의 외부에 있는, 혹은 삶보다 더 높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가치의 이름으로 재단하는 것이다.[각주:3] 심판의 교설은 정동의 체제를 전도시키고 대체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심판을 피하는 길은 자신을 기관없는 신체로 만드는 것, 기관없는 신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신체를 그 생성 속에서, 그 강렬성 속에서, 정동을 야기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활력으로서, 즉 활력에의 의지로서 정의하는 것이다.

 

심판의 체제를 떠받치는 단위는 인격’(person)이다. ‘인격은 정체성으로 환원된 신체를 전제한다. 사법적 재판은 바로 이 인격에게 가해지며 모든 심판의 성격을 가진 사회적개인적 비난도 인격에게 가해진다. 개인은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여러 행위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러 요소들 혹은 행위들 중 해로운 성격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것을 다른 전체에 뒤집어씌우는 것이 바로 심판의 성격을 가진 비난이다.[각주:4] 이렇게 부분을 전체에 뒤집어씌우려면 신체 외부에서 어떤 규범이나 코드를 불러와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성격을 갖지 않는 비난은 그저 증오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증오의 표현이 심판의 성격을 가진 비난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상대의 해로운 부분에 대한 증오가 상대의 유익한 부분에 대한 사랑과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스피노자에 따르면 후자가 더 강력한 활력의 표현이다.[각주:5]) 들뢰즈는 잔인의 체제 즉 실존의 특징 중 하나로서 전투(le combat)를 든다. 전투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물론 심판과 싸우는 전투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맞섬 전투’ le combat-contre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오한 형태의 전투는 전투를 하는 개인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전투, 즉 그 개인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전투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사이전투’le combat-entre라고 부른다) 맞섬 전투는 어떤 힘을 파괴하거나 물리치려고 하는 반면에 사이 전투는 어떤 힘을 잡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사이 전투는 생성의 다른 이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전투는 전쟁과 다르다. 전쟁은 맞섬 전투의 측면만을 가진다. 전쟁은 파괴에의 의지, 파괴를 무언가 정당한것으로 바꾸는 신의 심판일 뿐이라고 한다. 전쟁의 경우에 힘에의 의지란 권력(pouvoir)이나 지배의 최대치로서 힘을 원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내재적 활력의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활력이 가장 낮은 사례 즉 병이다. 이에 반해 전투는 힘을 힘으로써 보완하고 접하는 것을 풍요롭게 하는, 강력하고도 비유기적인 활력이다. 이렇게 볼 때 상대의 무력(활력의 부족 혹은 병)에 자신의 무력(전쟁)으로 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지 아니한가. 그런데 의외로 주위에서 늘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어리석음이다. 활력의 관점, 다중만들기의 관점에서는 스스로 생성하며(활력의 증가) 동시에 상대를 (만일 우리와의 사이에 공통적인 것이 조금이라도 형성된 상대라면) 생성시킨다.

 

  1. 들뢰즈의 Critique et Clinique(영어본 Essays Critical and Clinical))에는 이 주제에 관하여 두 개의 글이 실려 있다. [본문으로]
  2. 이것이 들뢰즈가 니체에게서 읽어내는 ‘잔인의 체제’이다. ‘잔인’이란 말에 속으면 안 된다. 잔인의 체제는 오직 정동에만 의거하는 삶에 내재적인 체제이다. 니체에게는 ‘잔인’이 바로 정의(正義)이다. 들뢰즈는 잔인의 체제를 그냥 ‘실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3. 『공통체』Common Wealth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삶의 외부를 초월적transcendent 차원과 선험적transcendental 차원으로 나눈다. [본문으로]
  4. 이는 비난이 표현되는 형태와 무관하다. 아무리 점잖게 표현된 것일지라도 심판으로서의 비난 혹은 비판일 수 있고, 욕의 형태를 띠더라도 정동의 표현일 수 있다. 아마 요즘 사람들은, 특히 지식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욕을 하는 것은 비난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활력의 관점, 정동의 관점에서 보면 욕을 하는 것이 삶의 외부에서 온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삶에 내재적인 것일 수 있다. 욕은 상대에 대한 자신의 증오만을 보여주며 상대가 옳다 그르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증오의 내재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 참조.) 따라서 옮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 즉 행위로 표현되는 활력의 외부에 있는 어떤 기준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증오의 표현일 뿐이다. 이런 한에서 욕은 심판과 다르다. 물론 욕이 증오의 표현으로서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욕은 자신을 전혀 높이지 않고 상대에게 증오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증오는 정동의 실재적 발현이다. 다중만들기는 물론 기본적으로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우리와 유사한 본성을 가진 존재에 해를 가한 자에 대한 증오(사랑에 기반을 둔 증오)인 ‘분노’는 다중만들기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분노를 결핍한 자들이 많이 있는 공동체(예를 들어 한국의 대학교)가 쉽게 망가지는 것을 교훈으로 삼으면 된다. [본문으로]
  5. 에 대해서는 제사에서 인용한 부분을 볼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