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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의 관점에서 세상보기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2―‘자신에 대한 용기’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2자신에 대한 용기

 

로렌스를 읽다보면 자신에 대한 용기’(courage with oneself)라는 표현을 만난다. 대체로 용기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휘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자신과의 관계에서 용기란 과연 무엇일까?

 

로렌스는 들뢰즈, 네그리가 활약하기 이전에 벌써 자아특이성들의 다중 혹은 다양체(multiplicity)’로 보았던 작가이다. 그에게 자아(진정한 의미의 자아)는 늘 변하는 여럿이다.

 나는 불일치하는 부분들의 아주 이상한 집합이다. 오늘 내가 말하는 !’(yea)는 내일 내가 말하는 !’와 다르다. 오늘 내가 흘리는 눈물은 1년 전에 내가 흘렸던 눈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Why the Novel Matters")

물론 이 부분들이 중구난방으로 모여있는 것은 아니다.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을 기반으로 다중을 이루듯이 말이다.

 

이러한 모든 변화 속에서도 나는 어떤 온전성을 유지한다.("Why the Novel Matters")

 

이러한 자아의 다수성을 로렌스는 미국 고전소설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나다.

나의 영혼은 시커먼 숲이다.

나의 알려진 자아는 숲에 있는 작은 개간지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신들, 이상한 신들이 숲에서 나와 나의 알려진 자아의 개간지로 들어왔다가 돌아간다.

나는 그들이 왔다 가도록 허용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는 인류가 나에게 무언가를 뒤집어씌우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안에 있는 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신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려고 항상 노력할 것이다.[각주:1]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위에서 말한 알려진 자아가 숲과 단절되어 자립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인간은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자신이 되기를 그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어떤 개별적 존재가 자신의 개별적 고립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존재는 즉시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자신의 한계를 형성한다. , 정신이 주관적 현실과 객관적 현실의 양자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자마자 원초적인 통합적 자아(the primal integral I)이는 대체로 다른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살아있는 연속체이다는 붕괴되고 자신이 아닌 현실을 창문으로 내다보는 자아가 생긴다. 이것이 어린아이 때부터 처하게 되는 현대적 의식의 상태이다.(“[the individual consciousness v. the social consciousness]”)

 

 

이는 일종의 병이다. “다른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살아있는 연속체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니체가 늘 근대자신의 입장에서는 현대를 병든 시대로 보았음을 생각해 보라. 로렌스는들뢰즈가 확인한 바이지만니체와 큰 사상적 친화성을 가진다.) “현실을 창문으로 내대보는 자아는 이른바 객관적 현실과 분리될 뿐만 아니라,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필시 그 결과로, 앞에서 말한 으로서의 영혼과의 연결도 상실한다. 이러한 폐쇄된 자아에 극도의 섬세함이 적용된 결과가 바로 로렌스가 당시의 일부 소설들에서 본 자의식의 과잉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음침한 것이며, 임종(臨終)의 희극이 길게 늘어진 것이다. 이는 아주 잘게 부수어져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 후각에 의존해야 할 정도의 자의식이다. 수천 페이지에 걸쳐서 조이스 씨나 리처드슨 양[당시의 통속 소설가인용자]은 자신을 조각내고 그 가장 작은 감정들을 가장 가는 실오라기가 될 때까지 벗겨낸다....("Surgery for the Novelor a Bomb")

 

이제 자의식 혹은 창문으로 내다보는 자아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피치 못할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자아의 성립은 옛 공유지의 몰락 및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이는 인간의 능력이 사유 재산이 되는 것을 변별적 특징으로 한다)의 지배라는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러한 자아가 더 양성되고 강화된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실천적 핵심은 마치 공유지(공통재)에 둘러쳐진 사적 소유의 울타리처럼 우리의 자아에 둘러쳐진 벽을 무너뜨리고 자아를 넓은 자유의 공간으로 여느냐 아니면 울타리 안에 안주하거나 오히려 울타리 안에 있는 나의 것, 나의 자아, 나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느냐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한 자신에 대한 용기란 바로 이러한 자아에 둘러쳐진 벽과 싸우는 용기를 말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현재 자신이 자신의 자아라고 알려진 것로렌스가 나의 알려진 자아라고 말한 것―이 보잘것없는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의 벽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감수할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안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현상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싸움은 잠재적으로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 싸움의 방법에 대하여 로렌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에 대한 진솔함에 대하여] * “Pornography and Obscenity”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사람은 자의식의 모험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여 자신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알 만큼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깨달을 만큼은 자의식적이어야 한다. “나를 넘어서는 것은 바로 내 속에 있는 삶의 활력의 충동이다. 이 삶의 활력이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잊도록, 그리고 세상의 거대한 거짓을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반쯤 생겨 일고 있는 충동에 굴복하도록 몰아가는 것이다.”(“Pornography and Obscenity”) 자의식의 악순환에 갇힌 삶, 거짓에 갇힌 삶은 나에게 무가치하다. 자유란 무엇보다도 거짓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우선은 나로부터의 자유, 나에 대한 거짓으로부터의 자유, 내가 중요하다는 거짓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다음은 사회의 거대한 거짓순수성과 더러운 작은 비밀의 거짓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다른 모든 괴물 같은 거짓은 이 주된 거짓의 외투 아래 숨어있다. 순수성의 외투 아래. 순수성-거짓을 죽여라. 그러면 돈-거짓은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다.

 

우리 속에 있고 우리를 넘어서 있는 활력의 충동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기를 그치고, 모든 정동의 중심들(affective centers)에서 우리 자신을 그냥 놔두는 법을 배운다. 우리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강제하지 않고, 우리의 성을 강제하지 않는 법을. 내부의 거짓을 해결한 다음 우리는 외부의 거짓을 공격한다. 이것이 자유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안주에서 벗어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대하여]

물론 오랫동안 좁은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그 답답함과 비좁음에 익숙해지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곳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늑해지면, 아늑한 벽인 줄 알았던 곳에 새로운 눈부신 구멍이 뚫린 것을 보게 될 때 당연히 공포에 질리게 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공포에 질린다. 구멍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의 차가운 흐름을, 마치 그것이 당신을 죽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그 틈으로 양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게 되고 바깥에서 새 세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Surgery for the Novelor a Bomb", Phoenix, 520)

 

 

[추기]

로렌스가 말한 은 네그리와 하트가 공통체』(Commonwealth)에서 특이성 내부의 다수성”(a multiplicity within itself)이라고 부른 것이다. 현실을 창문으로 내대보는 자아는 정동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자아이다. 이러한 자아더러운 작은 비밀를 기반으로 한 학문이 바로 정신분석학이다.

 

 

 

  1. 로렌스에게 '신'은 삶의 특이한 활력을 의미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