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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 1 ― 빗처들의 문화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 1 ― 빗처들의 문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정책이나 기업들의 고용 관련 정책에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신과 감성에 내화되어 특정 유형의 주체성―가따리가 ‘자본주의적 주체성’이라고 부른 것―을 산출하는 문화현상이기도 하며, 이런 의미에서 삶권력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내가 문화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처음, 그리고 어떤 이론적 인식의 매개 없이 직접 감지한 것은 대학에서 일어난 변화에서이다. 이 변화는 90년대 중반 정도부터 시작되어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었다. 나는 이러한 문화가 대학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되어 있다는 것을 곧 확인하였으며, 현 대통령의 당선도 이러한 문화가 ‘대한민국’에서 일정하게 지배적이 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신자유주의적 문화의 한 측면을 ‘빗처들의 문화’라고 부를 것이다. 빗처(Bitzer)는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의 소설 『어려운 시절』 (Hard Times, 1854)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하나로서 공리주의적 원리에 입각하여 설립된 학교의 우등생이다. 그는 공리주의와 정치경제학의 원리 위에서 철저하게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하는 인물로 키워진다. (“우리가 호소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자기이익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잡고 있어야 할 유일한 것이지요.”) 그의 모든 행동은 냉철한 이해타산의 결과이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여 정상적인 업무를 보는 것 외에 밀고자 노릇을 하여 보너스를 더 받으며 살아간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후에 어머니를 구빈원(workhouse, 빈자들을 수용하여 저렴한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곳)에 보내는데, 1년에 겨우 차[茶] 반파운드를 어머니에게 보내드리면서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정치경제학의 법칙을 자신이 어긴 것에 스스로 못 마땅해 한다. ‘공짜’로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연합하는 일과 관련해서도 밀정 역할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존재의 제일의 고려사항”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다닌 학교를 설립한 사람의 간곡한 부탁을 냉정하게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학교에서 공부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돈을 냈어요. 거래였지요. 졸업하면 거래는 끝난 거지요.”

지금 한국의 대학은 바로 이러한 빗처들의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대학 운영자들, 교직원, 학생 할 것 없이 다 이 문화에 푹푹 절어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빗처와 같다는 말은 아니다. ‘빗처들’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빗처들이 ‘인격’(person)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빗처는 모든 사람들의 주체성에, 그 정신과 감성에 작용하는 하나의 경향, 하나의 힘이다. 실제로 개인들은 이 힘, 혹은 경향과의 관계에서 스펙트럼의 형태로 분포된다. 한 쪽 극단에는 거의 빗처의 현신이나 다름없는 개인들이 있고 다른 쪽 극단에는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에서도 그렇듯이) 빗처의 것과는 전혀 다른 원리로 사는 개인들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 사이의 어떤 위치에 있다. 이렇듯 어떤 식으로든 이 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바로 ‘빗처들의 문화’는 현재 지배적인 문화이다.

문교부, 교육부, 교육인적자원부, 교과부로 이어지는 교육 관련 부서가 줄곧 대학을 실질적으로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대접해 주었다는 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의 대학운영자들의 문화는 항상 빗처들의 문화였으므로, 이들에 관해서는 새로이 말할 것이 없다.[각주:1]  주목할 것은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 빗처들의 문화가 정착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주체성,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으로 환원된 주체성이 형성되는 현상이다.

이제 대학을 새로운 삶을 살거나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성장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찾기가 쉽지 않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예리하게 갈고 닦겠다는 학생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취업에 대한 걱정에 강박되어 있거나(소극적 유형)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학점을 포함한) ‘이익’을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적극적 유형). 학생들의 대학생활이 이 방향으로 유도되는 배경에는 사실 대학 내 신자유주의자들의 대학운영 방침 이외에도 청년실업이라는 사회적 사실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대학생활이 청년실업이라는 문제를 절대로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청년실업은 자본의 논리 및 지배층의 신자유주의적 태도와 연관된 사회적 문제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은 사회적인 방식으로만, 즉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의 증가와 집단적인 이론적․실천적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만 생각해서는, 자신의 이익만 쫓아서는 상위 몇 퍼센트를 제외하고는 취업에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로서의 청년실업은 그대로 온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위 몇 퍼센트가 되려면 실력이 필요하다. 자본이 바로 이 실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학생들이 대학을 다니면서 모은 이익들이 ‘하이 스펙’이란 이름으로 취업에 중요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실력과는 다른 것이다. 경쟁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실력을 쌓는 것은 우연히 중복될 수는 있지만 원리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전자는 고정된 척도를 전제하지만, 후자는 고정된 척도를 부단히 초과하는 노력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실력이니 뭐니 하기 전에 개인들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으로만 환원시키는 빗처들의 문화는 현대 사회의 핵심적 특성인 소통 및 네트워킹 능력의 양성에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자본의 ‘이익’에 반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자신의 증식을 위해 요구하는 것들 중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 이른바 ‘인간 자본’(human capital) 즉 개인들의 지적, 정신적, 감성적 능력인데, 빗처들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능력의 양성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교수 또한 빗처 같은 존재로 양성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회적으로 교수에게 요구되는 일이란 실재의 어떤 측면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창출하는 것(연구)과 학생들의 활력 즉 지적․감성적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교육)이다. 연구는 인류 전체를 향해야 하고 교육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향해야 한다. 칸트는 전자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불렀고 후자를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이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새롭게 양성되는 교수형상은 이 공적, 사적 차원 모두로부터 일탈한다. 이른바 업적평가는 교수들의 연구 및 교육을 증진시키기보다는 교수들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존재로 축소시켰다. 연구의 경우 그 내용보다는 개인의 업적평가 점수로 환원되는 측면이 더 중요해지고, 강의의 경우도 강의가 가진 실제적인 교육효과보다는 개인의 점수로 환원되는 측면만 중요해진다. 요컨대 평가는 내용으로부터 분리되어 순전히 형식적이 되고(아주 낯익은 관료화의 과정이다) 그럼으로써 교수의 활동을 증진시키는 촉진제가 되기보다는 통제의 메커니즘으로서 작용한다.

이와 더불어 이른바 대학에서 일어난 고용의 불안정화 및 비정규직화는 교수들의 지위를 현저하게 약화시켜 노예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었고, 이와 함께 대학본부를 거점으로 하는 중앙 권력이 공고화되었으며 이 중앙 권력은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문구들로 사회를 기만하면서 대학의 탈민주화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대학마다 그 정도나 양태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민주적인 대학이 하나라도 있는가?

제대로 된 학문연구는 오로지 자유로운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은 이제 정리해고된 지 오래다. 제대로 된 교육은 오로지 선생과 학생의 애정 어린 상호작용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도 벌써 퇴출당했다. 주위에 만나는 사람을 (아무나!)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자신의 점수(이익)가 올라가는 컴퓨터 게임이 있는데, 빗처들에게 사회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죽여야 할 주위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원리적으로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이 ‘챙기는’ 그 이익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생산된 것이라는 자본주의의 상식에도 눈을 닫는다. 일종의 사회적 싸이코패스이다. 그렇다면 빗처들이 사회를 장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자본의 산물들이 자본의 토대를 갉아먹는 시대를. 니체가 말한 최후인들의 시대를. ♣




  1. ‘사유재산’은 물론 국립대학교의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국립대의 운영자들 중 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의식을 투철하게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