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 수혈
1921년에 Essays in Tektology가 나왔을 때 보그다노프의 위치는 불안정했다. 부하린은 명령을 받고 그를 글로 공격했다. 보그다노프의 친구인 레오니드 크라신(Leonid Krasin)은 보그다노프가 다치지 않게 런던으로 일을 맡겨 보냈다. 런던에 있으면서 보그다노프는 수혈에 대한 최신 이론과 기술을 접했다. 이는 보그다노프에게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이었다. 그의 『붉은 별』의 화성인들은 이를 행하고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돌아오자 이를 실험하기 위해서 소수로 구성된 비밀그룹을 만들었다. 1923년 그가 체포되었을 때 그는 반대파 그룹인 <노동자의 진실>(Worker’s Truth)의 주동자로 몰렸다. 그의 글들이 그런 그룹들에게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관련을 모두 부인했다. 비밀경찰은 루비앙카 감옥의 지하실에서 그를 2주 동안 취조했다.
1924년에 보그다노프는 두 사람이 동시에 피를 교환하는 식으로 수혈을 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피는 신체의 집단적 자원이며 이는 다시 신체들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였다. 이 아이디어의 생리학적 기반은 취약했다. 또한 보그다노프는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통제조건의 결핍으로 인해 그의 실험 성과는 별 게 없었다. 그러나 그는 1925년에 크라신이 빈혈증에서 회복하는 데 실제로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 빈혈증으로 고생했던 코뮤니스트 지도자는 크라신만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탈진’이라는 유행병이 볼셰비키 지도층을 관통하고 있었다. 적만이 아니라 친구도 추방하거나 감옥에 보내면서 국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었다. 당의 지도층은 개인적인 건강관리 체계를 만들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풍토병인 탈진을 다루기 위해서였다. 1926년에 보그다노프는 자신의 연구소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임무는 당 지도자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혈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연구소는 보통의 방식으로 승인되지는 않았으며 이제는 매우 방대해진 소련의 과학 기구의 외부에 있었다. 과학적으로 더 엄밀한 연구자들은 이 연구소를 무시했다.
보그다노프는 1928년에 비활성 결핵을 가진 학생과의 교환 수혈의 결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부하린이 추도연설을 했는데 이 일의 의미는 다소 불명확했다. 부하린으로 하여금 장례를 주재하게 한 것은 보그다노프가 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는 부하린이 보그다노프처럼 당에서 이미 배제된 사람들의 집단에 합류함을 의미하는 쪽이었다. 1929년에 그의 연구소에는 그의 이름이 붙여진다. 그리고 동시에 본격적으로 과학적인 연구소가 되며 현대적 수혈체제를 수립하는 데 기여한다. 스탈린이 사회 전체를 동원하고 군사화하는 사업의 일부로서 수혈에 자원을 투자했던 것이다.
보그다노프를 스탈린의 선구자로 만들려는 시도가 간혹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가 스탈린 유형의 흠집내기 전술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있을 때 그가 프롤레트쿨트처럼 들리는 문화 혁명의 수사(修辭)를 동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권력에 의한 하향식 조작이지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노동의 아래로부터의 자기조직화가 아니었다. 어떻든 스탈린은 일단 목적을 달성하자 곧 그런 수사를 버린다.
획득된 성질이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보그다노프가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초가 되어서도 다윈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오류였다. 다윈적 선택과 멘델의 유전학이 본격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스탈린이 바빌로프(Vavilov) 및 다른 유전 과학자들을 탄압하고 리셍코(Lysenko)의 겉으로는 ‘변증법적 유물론적’이지만 사실은 사기인 작업을 존경할 만한 과학적 성취로 고양시킨 것은 보그다노프의 잘못이 아니다.
보그다노프의 유산은 철학과 과학에서라기보다는 공학(engineering) 문화에서 계속 살아있다. 레닌의 전기공급 프로그램의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보그다노프주의자들이었다. 플라토노프는 프롤레트쿨트에서 수력공학으로 이동하여 프롤레트쿨트의 문학적 열망과 기술적 열망의 이례적 종합을 이루었다. 플라토노프는 기술이나 문학 분야에서 당대의 주된 인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의 시대의 위대한 목격자로서만이 아니라 위대한 이론가로서 크게 자리잡고 있다.
보그다노프와 레닌의 사이가 틀어진 것이 그를 스탈린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로 인해 그는, 자신들이 스탈린의 왜곡 이전의 진정한 레닌주의 사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바의 서구 맑스주의의 정통을 공고히 한 신좌파에 의한 맑스주의 사상의 부활은 보그다노프를 선택에서 배제했다. 그 관심은 대체로 정치적·문화적 이론들을 맑스주의 정치경제에 접목하는 데 있었으며 이를 위한 자원을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맑스주의 철학자들에게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해방전선들 가운데 <탄소해방전선>이 상승세인 21세기에는 아마도 보그다노프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의 방법 자체가 텍톨로지적인 것일 수 있다. 텍톨로지에서는 한물 간 조직들조차도 효용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텍톨로지는 인류를 위해 그 노동의 상당 부분을 과거의 진실들에 결정화되어 있는 상태로 보존하고 저장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진실들 또한 낡아지고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텍톨로지는 이들조차도 단순히 버려지지 않고 미래의 세대들의 눈에 결실 없는 순전한 환상들로 전환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이다.” 이 말에서 미래의 독자들에게, 바로 우리들에게 호소하는 보그다노프가 보인다. The Essays in Tektology는 거꾸로 된 과학소설이다. 미래에 대한 현재의 글이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과거의 글이다. 보그다노프는 화성인들을 위해 썼으며 우리가 바로 화성인들이다.
텍톨로지는 가장 확대된 상태에서는 모든 인간을 동지로 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동지로 만든다. “그러나 텍톨로지적 통일성 자체의 기원은 무엇인가? 과학이 발전할수록 이 통일성은 유전적 통일성의 결과일 뿐이라는 점, 기원의 유대가 거기서 표현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비록 이 유대가 매우 먼 것이지만. 이 유대는 우리가 접근 가능한 경험의 우주 전체로 펼쳐진다. 그리고 형식적 합류는 더 간접적인 실제적 합류로 전환된다.”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이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정립될 수 있다. 과학과 노동이 실천을 통해 독특한 텍톨로지적 형식들을 발견하며, 모든 사물들은 이 형식들을 통해 서로 포용하고 변형시킨다. 그러나 실천이 완벽하게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유한한 자연이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의 유적 존재를 지울 수도 있는 선택의 무정한 압박 아래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유적 존재에게는 충분한 투쟁이다. 이것이 특별히 핵심적인 요점이 될 수 있다. <탄소해방전선>을 풀어놓은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과학이며 우리 자신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탄소해방전선>은 진보적 선택이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로 진행되도록 한다.
텍톨로지는 체계이론(systems theory)을 처음으로, 아마도 때 이르게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그다노프의 체계들은 묘하게도 자기창조적(autopoetic)이라기보다는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공창조적’(sympoetic)이라고 부른 것에 해당한다. 체계이론은 ‘과학의 과학’이 되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과학에서 다른 하나의 과학으로 옆으로(수평으로) 움직이는 일련의 은유들과 기술들을 산출하여 체계들과 구조들을 조명했다. 그렇다면 텍톨로지는 ‘과학의 과학’에의 실패한 시도라기보다는 지식의 특정 종류의 수평적 조직화에 대한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보그다노프는 집단 노동의 큰 과제는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분업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방법들을, 상품교환이 아닌 다른 방법들을 찾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찾은 것은 일종의 실험적 실천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는 하나의 노동과정에서 발전된 개념들이 은유적으로 다른 노동과정들에 이전되어 거기서 실천 속에서 시험될 수 있다.
보그다노프 시대의 노동과 지식 실천들은 그러한 텍톨로지를 위한 기반시설로서의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개별 노동들에서의 질적 경험을 동지적으로 공유하는 수단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보그다노프가 혈액 공유로 사망했다는 사실에는 마음을 짠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생물학적 자료의 공유나 개념적 자료의 공유나 아직 가능하지 않았다. 교환 수혈처럼 텍톨로지도 유토피아에 속했다.
그러나 21세기의 활씬 더 발전된 과학기술의 기반시설은 여러 분야들 사이의 (은유 형태의 대체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대체를 뒷받침한다. 기후과학 같은 새로운 분야에서는 보그다노프의 조숙한 통찰들 다수의 메아리를 보는 것이 확실히 가능하다. (대기 중의 탄소에 대한 통찰도 이에 속한다.) 보그다노프의 작업에 대한 기억을 복원해야 할 이유 가운데 어엿한 하나는 그가 우리 시대가 직면하게 될 체계상의 그리고 조직상의 문제들을 이미 예측했다는 것이다.
프롤레트쿨트라는 아이디어는 어떠한가? 텍톨로지처럼 이 아이디어도 소련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롤레트쿨트의 가능성을 보여준 이례적인 사례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안드레이 플라토노프(Andrey Platonov)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소련의 기록보관소에 오랫동안 묻혀온 플라토노프의 주요 작품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맑스주의자들과 다른 비판이론가들이 아직도 가지기 쉬운 어떤 어리석음들을 꿰뚫어서 <탄소해방전선>의 시기에 쓰일 수 있는 새로운 비판장치를 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보그다노프의 독창성의 일부는, 맑스의 저작의 중심적 취지는 변증법이나 유물론이나 정치경제학비판이 아니라 노동의 관점이라는 것을 강조한 데 있다. 보그다노프는 들뢰즈가 ‘개념적 페르소나’(conceptual personae, 개념적 인물)이라고 부른 것(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What Is Philosophy?, London: Verso, 1994, pp. 61– 85)이 맑스에게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보그다노프의 독해에 따르면 맑스는 노동자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자본을 사유했다. 노동자 페르소나는 다른 계급의 페르소나들과의 관계에서, 특히 자본가 페르소나와의 적대적 관계에서, 맑스의 사유의 공간의 지형도를 그리는 동시에 구성한다. 노동자 페르소나는 저자의 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페르소나와 저자는 서로 구성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들은 특정의 정동도 가지고 있고 특정의 외관도 가지고 있지만, 소설의 인물들이라기보다는 개념의 구현자들이다.
플라토노프가 노동자 페르소나에 추가하는 것은 동지라는 페르소나이다. 그는 맑스나 보그다노프에게서 종종 보이는 대로 노동자 관점의 보편성을 단순히 전제하지는 않는다. 그는 함께 동지가 되는 투쟁에 관심이 있다. 들뢰즈의 경우 페르소나는 실존의 가능한 양태들을 동반한다. 플라토노프는 매력 있는 동지들과 끔찍한 동지들 모두를 그리는데, 이들 모두가 그의 사유에 필수적이다. 그의 사유는 동지의 다양한 양태들 사이의 공간에 대한 사유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토노프를 이해하는 것은 보편적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複數)로서의 동지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1부 1장 끝>
* 순서가 거꾸로 되었는데, 이후에 「서문」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소개는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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