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McKenzie Wark, Molecular Red의 「결론」 부분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서구 맑스주의와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은 현실의 문제와 대면하지 않는 위선적 이론(hypocritical theory)이 되었다. 위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련의 관점 전도가 필요하다.
1) 부르주아적인 것에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from bourgeois to proletarian)
위선적 이론은 자기 계급의 아름다운 것들, 부르주아적인 것들과 사랑에 빠져 있다. 지도자들을 물신으로 만들고 레닌과 모택동을 우상화한다. 노동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표자들만을 다루고 싶어 한다. 혹은 지난 부르주아 문화의 폐허 안에서 머물 변명거리를 찾는다. 바그너, 헤겔, 말라르메. 혹은 마치 신들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양 신학에서 피난처를 구한다. 혹은 자신이 속한 전문 분야에 충실하여 그 경계에서 다른 분야와 싸운다. 마치 자신의 분야의 노동의 조직화에 대한 비판은 감행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2) 상위 이론에서 하위 이론으로 (from high theory to low theory)
상위 이론은 드론처럼 다른 것들 위로 높이 나르는 치안 능력으로 간주되는 반면, 하위 이론은 내장을 관통하며 그 노동은 통제적이 아니라 소통적이다. 그 방법은 일종의 전환전유(détournment)로서 텍톨로지, 문학 공장[플라토노프의 구상이다―정리자], 다다(dada) 같은 것들이다. 하위 이론은 손에 잡히는 그 어떤 장치든 활용하여 정동·인식·개념을 노동의 한 도메인에서 다른 도메인으로 보낸다. 어떤 개념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어떤 이야기가 적절한지 아닌지를 확증하는 것은 각 노동과정 자체에 달려있다. 이론은 제안하고, 실천은 처리한다. 이론은 자신의 과제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 상황들에서 출현하는 것들을 탐지하며 각 분야에 다른 분야의 과제들을 알려준다.
3) 분열에서 체계로 (from schism to system)
위선적 이론은 분열과 단절, 진공(voids)과 아포리아에 관심이 있는데, 물질대사와 관계된 것들은 아니다. 위선적 이론은 비(非)정체성(nonidentity), 보완, 동일한 척도로 측정 불가능함, 우리의 주체성이 어떻게 내적으로 분리되어 있는가, 적대가 어떻게 정치를 구성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 대체(substitution)[보그다노프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정리자]는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상부구조들에서 출발하며 “분열이 아래까지 죽 이어진다”라고 상상하기 시작한다.(Jodi Dean’s The Communist Horizon, pp. 119ff.) [원주에서 워크는 노동의 경험에서는 모든 것이 적대인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정리자] 그래서 사회적 실존과 자연적 실존을 그물처럼 엮는 피드백 고리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은유―모든 것이 자기목적적이고 자기창조적이며 자기통치적인 체계들이다―를 부과하고 싶지는 않다. 총체들은 실천에서 다소 덜 총체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해러웨이 : “아무 것도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 모든 것은 무엇인가에 연결되어 있다.”
4) 그램분자적인 것에서 분자적인 것으로 (from molar to molecular)
아마 핵심은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하나가 다른 것 위에 부과되는 두 개의 규모(차원)로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식의 균형을 분자적인 것으로 훨씬 더 기울이는 것이리라. 노동의 관점에 가장 잘 상응하는 것이 분자적 규모이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에 저항하는 것이 자연이라면, 이 저항은 분자 알갱이들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램분자적인 것은 관리의 언어이다. 그것은 이념들의 대화인데, 이 대화에서는 노동을 조직하는 사람들[즉 관리자들—정리자]의 경험이 자신의 노동으로 물질적 세계를 직접 조직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대체한다.
5)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from human to inhuman)
그램분자적 드라마의 언어는 보통 인간 주체들에게 할당된 언어이다. 인간 주체들이 집단적 주체이더라도 그렇고, 드라마가 ‘인간 대 자연’ 아니면 ‘인간 대 신’일지라도 그렇다. 가따리의 경우에 분자적인 것이 종종 단지 은유일 뿐이지만, 이는 실로 분자적 조직화 차원까지 줄곧 확대될 수 있는 은유이다. 익명의 질료들과 연루된 관계를, 혹은 익명의 질료들이 서로 연루된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는 우리에게 없다. 비인간 세계의 감각을 매개해주는 비인간 장치들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6) 상부구조에서 토대로 (from superstructure to base)
인문학에서 훈련받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전문화된 전공이 기본 은유의 원천이 되어 상부구조를 자율적인 것으로 보거나 토대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투쟁으로부터 독립적인 혹은 그와 병행하는 어떤 ‘문화혁명’을 상부구조가 주도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편리했다. 이는 지적 삶 자체의 기반 시설이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변하기 시작하기 전의 일이었다. 21세기에는 학술노동조차 다른 노동처럼 불안정해지고 디지털화되고 알고리즘적이 되고 있다. 만일 이 기반 시설이 변하고 있다면 다른 것들도 필시 그럴 것이며, 따라서 현재 무엇이 기반 시설을 구성하는가의 문제 자체가 다시 물어져야 한다.
7) 상류에서 속류로 (from genteel to vulgar)
자신의 비판 방법은 속류 맑스주의(vulgar Marxism)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랫동안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얼얼할 정도의 속류성일 것이다. 속류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 보통의 것, 다중적인 것, 풍요로운 것, 조야한 것, 점잖지 않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쁜 것도 아니며, 적절한 것임은 확실하다. 이것이 당 학교(party school)에서 워크가 얻은 교훈이다.
속류 맑스주의는 보통 경제적 토대가 정치적·문화적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양태를 단순화한 모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기본 은유들은 결정론적이거나 경제주의적이거나 기계론적이거나 진화주의적인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기본 은유들은 실제로 그 시대의 노동과 과학의 진전된 형태들에서 왔다. 오늘날의 속류 맑스주의도 이와 비슷한 원천을 우리 자신의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상류 맑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문화적·정치적 상부구조의 (절대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상대적인 자율성을 강조한다. 토대를 놓고 보자면, 상류 맑스주의는 생산관계를 생산력보다 더 우위에 놓는다. 생산관계는 맑스에 의해 그 본질이 서술된 것으로 간주되고 그 현상 형태만 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증기와 강철에서 석유와 알루미늄을 거쳐 실리콘과 태양열에 이르는, 상이한 생산력들 사이의 질적 단절에는 거의 혹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재의 이 생산양식은 아직 자본주의적인기? 아니면 더 나쁜 어떤 것인가?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마치 자본이라는 ‘실재적’(real) 형식(플라톤)이 현상으로부터 (일상적 삶이라는 견고한 물질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서 자신의 거짓됨을 보였다는 듯이. 이 세속적인 것들, 이 지구 전체는 자본이 자신의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못 미친다. 자본은 이미 이 지구 말고 다른 더 많은 지구들을 장악하고 있다.
빛나는 상부구조를 위한 충분한 토대가 없다. 자본이 화성을 병합하더라도 그렇다. 플라토노프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상부구조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본의 머릿속에 들어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자본의 아래 놓여서 자본이 먹어치울 잉여를 제공하는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많은 양이 노력을 들여도 자본의 야심을 떠받치기에 충분히 큰 구덩이를 팔 수 없다.
그러나 너무 우울해지지는 말자. 오히려 묻자. 시간의, 정보의, 아니 삶 자체의 잉여가 어떻게 다르게 조직될 수 있는지를. 이것이 더 이상은 위선적이지 않은 이론의 과제가 될 것이다. 독해법(the arts of reading)처럼 이론이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것들이 할 역할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의심하는 독해방식보다는 구축적인/건설적인(constructive) 독해방식이, 그리고 다른 종류의 텍스트를 읽는 방법으로서 활용되는 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겠지만. 우리에게 아직 가능한 시간과 정보와 일상적 삶을 사용하여 다르게 사유하는, 다르게 노동하고 실험하는 과제를 조용히 그러나 명랑하게 시작하자. 보세프[플라토노프의 소설 Foundation Pit에 나오는 인물―정리자]의 가방에서 꺼낸 어수선한 인공물들처럼 다가오는 텍스트들에 대한 꼼꼼한 (혹은 충분히 꼼꼼한) 읽기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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