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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보그다노프, 객관성

* 아래는 보그다노프의 살아있는 경험의 철학(The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가운데 6장 3절 객관성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객관성은 사회적 주체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 주체의 실천에 기반을 두고 구성된다는 취지의 글이다. 단편적이지만, 이 글이 가지는 의의를 알 수 있으려면 조금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주객분리를 전제하고, 주체로부터 독립한 객체를 전제하며, 진리의 기준을 주체와 무관한 객관적 법칙에 두는, 요컨대 주체(맑스의 산 노동’)를 객체(맑스의 죽은 노동즉 자본)에 종속시키는 사고방식은 이제 이 사고방식의 오랜 요새였던 자연과학에서조차 추방되었다. 슈뢰딩거에 의하면 그리스 시대부터 자연과학을 장악한 이 사고방식은 뉴턴 물리학을 지배했으며 아인슈타인에게도 남아 있다가, 이른바 카오스론으로 넓게 지칭되는 새로운 조류들에게 밀리기 시작했으며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물리학에서는 완전히 무력해졌다. 자연과학보다는 주객 이원론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철학에서는 스피노자, 맑스, 니체를 이어받은 들뢰즈, 푸꼬, 네그리의 계보에서 주체성의 자율과 활력에 초점을 두는 철학적 사유가 한껏 표현되었다. 해방을 위한 사회운동에서도 자칭 객관적 진실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지도부에의 의존 없이 민중 스스로의 (다중으로의) 자기조직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보그다노프는 전위주의를 대표하는 레닌과 동시대인이지만 이러한 최근의 경향의 선구자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객관주의 철학을 대표했고 바로 그런 입장에서 자신을 관념론자로 비판한 레닌에 의해서 볼셰비키로부터 쫓겨났다. 한국의 운동에서도 자주 복사된 레닌의 전위주의는 보그다노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보그다노프는 전위주의가 속한 권위적 유형의 관계는 노동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본다. (사실은 더 이전의 것이 부르주아 시대에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노동계급에 속하는 것은 지도가 아니라 협동이다. 보그다노프에 대해서 더 알려면 일단 이 블로그에 올린 일련의 글들(매켄지 워크의 책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알려면··· 러시아학회에서 검색되는 몇 편의 논문들 말고는 아직 우리말로는 없는 듯하다···.

 

 

객관성

 

이제 경험의 체계에서 요소들이 분류되는 수단을 살펴볼 것이다.

 

우선,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사이의 차이와 만나게 된다. 경험비판가들(empiriocritics)은 이 차이의 본질이 (양 경우에 동일할 수 있으므로) 요소들 자체에서 발견되지는 않으며 그 상호 연관의 성격에서, 즉 요소들이 결합되는 방식에서 발견된다고 매우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든 정신적 현상에 대해서든 요소들의 상호 연관에 대한 정확하고 만족스러운 설명을 내 놓을 능력은 경험비판가들에게 없다. 그런데 문제를 인간 사회의 살아있는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일을 쉽게 할 수 있다.

 

물리적 물체로서의 도끼가 정신적 복합체(complex)로서의 도끼도끼에 대한 지각이나 정신적 이미지실천적으로는 어떻게 구분되지 한번 생각해보라. 물리적 물체로서의 도끼는 나무를 자르는 데 유용한데, 정신적 이미지로서의 도끼는 어떤가? 당신은 물론 나무를 자르는 데 유용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것이며, 이는 본질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것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은 꿈에서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사람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물리적 물체가 아니라 정신적 형식일 것이다. 그래서 꿈에 나오는 도끼는 도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꿈을 꾸는 사람들만이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당신은 철학적 논쟁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회의 혹은 비판 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경험에서는 정신적 이미지들 혹은 외적 현상들말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당신이 깨어있을 때에도 당신에게는 도끼와 도끼로 하는 일의 정신적 이미지들이 주어진다고 당신에게 설명할 것이다. 도끼와 일의 실재는 당신에게서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말이 맞는다면, 당신은 물리적 물체로서의 도끼를 정신적 형식으로서의 도끼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개인적 경험의 영역에, 즉 과거의 인지이론들의 통상적인 주인공인 고립되어 사유하는 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한 이러한 난점들과 스콜라 철학적 세밀함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깰 때 꿈속의 도끼가 사라진다는 사실조차도 사태를 조금도 본질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첫째, 실제 도끼 또한 당신으로부터 박탈될 수 있다. 둘째, 정신치료의 분야에서 알려진 환각 가운데에는 상상된 허구가 매우 지속적이고 체계적이어서 환자의 상태가 아무리 변해도 사라지지 않고 완벽한 지속성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는 환각이 존재한다. 환영들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왔다 갔다 하며 시각·청각·촉각이 이 환각에 관여하여 환자에게 확증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개별적인 를 인지의 주체로 삼으면, 세계 전체를 이런 종류의 환각이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다듬어진 복합체로 파악하는 데 원칙적으로 아무런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끼라는 물체는 당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도구로서 적합하다. 꿈속의 도끼는 이와 달리 당신에게만 존재한다. 다른 누구도 그것을 집어들 수가 없다. 전자는 동일한 순간 동일한 장소에 당신과 당신이 소통하는 다른 사람에게 공히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동일한 부분들로 구성되며 동일한 성질들을 가지고 있고 일반적으로 동일한 요소들이 동일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것에 관한 사람들의 경험은 사회적으로 동의된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도끼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내 도끼를 가지고 일하는 벌채 노동자에게 그 도끼는 도끼로는 거의 일을 하지 않는 재단사에게보다 더 많은 양의 성질들을 가지고 있다. 물리학과 화학에 밝은 학자에게 그 도끼는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보다 더 많은 수의 더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사람들의 경험에는 일치가 존재하며 모순은 없다. 하나의 집단 전체에게 물리적 도끼가 동일한 사물이라고 생각되기에 충분한 만큼의 동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타당한 혹은 객관적인 경험이다. 이 철학적 용어들은 항상 많은 오해들을 낳았는데, 이는 철학적 연구가 사회적 관점을 취하지 않은 한 이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내적 의미가 우리에게 분명하다. 물리적 경험의 객관성은 그 사회적 조직화에 있다.

 

정신적 복합체지각, 정신적 이미지, , 환각, 착각 등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도끼에 대한 나의 지각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무관하게,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그들도 유사한 지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과 무관하게 일어난다. 나는 특정의 도끼를 다른 누구도 그것을 쳐다보지 않고 있는 때에 쳐다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 도끼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시선을 돌렸을 바로 그 순간에 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있다. 또한 내 기억에 하나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그 이미지가 등장하느냐 아니냐와 혹은 그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형태와 무관하다.

 

병이 든 어떤 사람의 환상이나 환각은, 만일 그 사람이 의심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적 상호연관성의 도움으로 확증될 수 있다. 환자는 자신이 지각하는 이미지들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일치하는지즉 그 이미지들이 사회적 유의미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미지들이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에 속하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실재에 속하나요?’라고 그 환자가 묻는다. 물음이 제시되는 방식이 실재라는 관념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여기서 실재물리적 경험이라는 관념과 부합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맞아요, 우리도 당신이 보고 들은 것과 같은 것을 보고 듣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즉 그 환자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일치한다면 (즉 사회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그 환자의 경험은 실재적 대상들과 관계가 있다. 즉 객관적인 물리적 현상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그 환자가 지각하는 이미지들이 자신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경우 환자의 경험은 주관적일 뿐, 정신적일 뿐이다. 그것은 환상이거나 환각이다.

 

정신적 혹은 주관적 경험은 또한 조직화가 결여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정신적 이미지들, 기억으로부터 오는 이미지들, 심지어 꿈과 환각 속의 상들은 모두 일정한 상호연관성과 규칙성을 지니고 의식을 통과하는데, 이 연관성과 규칙성에 의해 그 가운데 일부가 다른 일부 이미지들에 부착되며 또 다른 일부는 그와는 또 다른 이미지들에 부착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것이 개인의 정신 전체를 포괄하고 조직하는 연상적 상호연관성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조직화는 일정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개인의 삶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경험이 개인적으로 조직된 경험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정신적혹은 주관적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사회적으로 조직된이라는 용어와 개인적으로 조직된이라는 용어는 다름 아닌 조직화의 방법을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적 경험이나 개인적 경험이라는 용어와 전혀 동일하지 않다. 사회적 경험이나 개인적 경험이라는 용어는 경험이 집단에 속하는지 개인에 속하는지를 표현하지 조직화의 방법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을 두세 개의 사례로 설명해보자.

 

새로운 혜성을 발견하는 천문학자라면 그것의 공간에서의 위치, 그 경로와 크기를 계산하며 그 형태와 구성 등을 결정한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이 혜성을 보거나 이 혜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을 발표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한동안은 이 혜성은 이 천문학자의 개인적 경험에 속하지 사회적 경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가 그 경험을 조직하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다듬어낸 과학적 방법에 의해 발견되고 정체가 확정되고 측정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혜성이 이미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에 진입하였으며 일련의 객관적인 물리적 현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관찰자라도 그 혜성을 첫 발견자가 발견한 것과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발견하리라는 사실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난다.

 

아직 미신에서 못 벗어난 광범한 농민층에게는 숲도깨비들과 집귀신들이 살아있는 현실을 나타내며 물리적 세계의 현상으로서꼬리, , 이례적인 힘 등 특별한 특징들을 가진 특정 종류의 인간 같은 존재들로서받아들여진다. 이 농민층 말고 다른 사회적 집단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숲도깨비들과 집귀신들은 현재까지도 객관적성격을 가질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동의된 경험으로서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다른 더 진보적인 계급들을 포함하며, 이 계급들은 다른 더 풍부하고 더 일관적으로 상호연관된 경험을 집단적으로 과학의 이름으로 구축했고, 과학은 숲도깨비들이나 집귀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을 실재로서 간주하지 않으며, 널리 퍼진 환상의 산물로서 취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숲도깨비에 관한 현 인류 전체의 경험은 사회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상태이다. 상이한 계급들과 집단들에 의해서 동의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사회적 집단의 경험이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꿈에서 이와 같은 환상적 존재를 만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전히 정신적 사건으로, 정신적 이미지들의 연상에 의해 소환된 어린 시절의 기억의 결과로, 요컨대 개인적으로만 조직된 경험으로 규정할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상의 역사에서 객관성이 때로는 인류 전체와 견해가 다른 단 한 사람의 편에 있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는 천문학적으로 객관적인 현실이 그에게만 존재했으며 수억 명의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었다. 실상 코페르니쿠스만이 그때까지의 모든 축적된 천문학적 경험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는 이 경험을 인류의 집단적인 작업에 의해 성취된 수준에 상응하는 방법들에 의해 일관되게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경험을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만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에게는 경험이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조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볼 때 객관성의 문제가 다수결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저 비판가들이 경험의 사회적 조직화 이론을 얼마나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가 분명해진다. 실상 다수(majority)조직화는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점점 더 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나왔다.

 

본질적으로 매우 단순하며 사회적 노동에 입각하여 인지(cognition)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이 이론은 내가 그것을 처음 정식화한 이래 지난 10년 동안 많은 비판가들이 머릿속에 정말로 엄청난 오해를 낳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몰이해는 보통 가장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몰이해가 그렇듯이 매우 심대하다. 이 몰이해는 이 관점을 창조하는 명예를 전적으로 나에게만 전가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전가는 부당한다.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비록 지나가면서이지만) 맑스에 의해 완전하고도 결정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객관성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실천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여러 번 언급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이 점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테제에서 그는 현실(Wirklichkeit)객관적 세계을 인간의 실천으로서, 따라서 사회적인 것으로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그가 두 번째로 이에 대해 말한 것은그는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다―『자본론에서였다. 여기서 그는 교환사회의 특징인 상품물신주의를 짚어내서 설명한다. 상품물신주의란 (우리가 이미 알듯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분업)를 사물들(상품들) 사이의 관계의 형태로, 그리고 바로 가치’(매매될 수 있는 능력)의 형태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이다. 맑스는 이 물신주의를 폭로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는 주어진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수단에 대해서는정확히 말하자면 상품생산에 대해서는사회적으로 타당한, 따라서 객관적인 형식들이다.” 그러나 그가 더 설명해가면서 다른 생산수단의 관점을 채택하자마자 모든 물신주의가 사라진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고대의 공동체적인 노동조직화와 미래의 사회주의적인 조직화이다.) 따라서 특정의 사회적 조건에서 객관적인 것은 다른 사회적 조건에서는 더 이상 객관적이지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유용하지않게 된다. ‘사회적 타당성이라는 맑스의 표현에는 이 두 의미가 다 포함되어있다.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스스로 맑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라고 선언하는 작가들이 지금 사회적 객관성 이론에 유별나게 화를 내며 반응하고 있다. 나는 가장 전형적인 반대견해를 인용할 것이다. 플레하노프(G. Plekhanov)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사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악마들 일반과 특히 집귀신들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정한다. 오늘날 악령들이라는 말은 그 어떤 사회적 타당성도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전적으로 타당하고 집귀신의 객관성을 반박할 생각이 그 누구에게도 들지 않았던 때이는 더욱이 극히 오랜 시간이었다가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무엇이 도출되는가? 집귀신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당신더 높은 객관성 기준의 도움으로 사고를 한다면 그 답은 필연적으로 일 것이다. (From Defence to Attack, pp. 778)

 

당신의 객관성 이론의 명확하고 반박 불가능한 의미에 따르면 우리는 집귀신의 실존이라는 문제에 이렇게 답해야 한다. 집귀신이 본래적으로 객관적 존재였던 때가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얼만 전까지만 해도 우리 농민들은 집귀신을 이렇게 불렀다)는 나중에 객관적 존재를 박탈당했으며 지금은 모스크바의 상인들의 아내들에게만 혹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는 재미있는 관습을 가진 다른 개인들에게만 존재한다고. (From Defence to Attack, pp. 79)

 

보는 바대로 논증 전체가 객관적 존재를 절대적 의미로 이해하는 데로 수렴된다. 숲도깨비와 집귀신이 선조들의 시대에 절대적으로 존재했거나 아니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거나 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며 이에 우리의 비판가는 자신의 개명한 사상을 자랑스러워하며 후자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 자신도 변증법을 널리 펴면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변증법은 혹은 아니오-아니오라고만 말해야 하는 식의 낡은 사고방식을 거부하며 변증법에서는 아니오가 실제로 동시에 존재한다고. 설혹 과거의 플레하노프들이 자연력의 정령들을 절대적 존재로 보았고 나중의 플레하노프들이 그들을 비존재로 보았다고 하더라고 이 플레하노프들은 비변증법적이고 비역사적인 사고방식을 매우 중요한 공통적인 특징으로 공유한다. 그러나 현실을 사회적 실천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의 먼 선조들에게 깊은 숲은 위험한 신비들로 가득했다. 사람은 거기서 신비한 소리들, 유동하는 흐릿한 형태들, 수많은 두려움들과 위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야수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밤새들이 눈에서 인광을 발하며 울어댔으며 습지에서는 불을 피워도 추웠고 나뭇잎들 사이에서 빛과 그림자가 묘하고 환상적으로 결합되어 수천의 환상들을 낳았다. 길을 잃은 사람은 직선으로 걷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은 원을 그리며 걷는다는 것을 우리 선조들은 몰랐다. 땅거미를 타고 몰래 접근하는 포식성 동물들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상존했다. 이 모든 것이 합해져서 복잡한 복합체를 형성했으며, 여기에는 자신의 활동터전을 벗어나 있다는 느낌, 걱정, 그리고 주위 환경에 대한 불신감이 포함되었다. 그 당시의 사고는 구체적이었으며 권위적 유형이었다. 사람들은 이 복합체를 자연력의 살아있는 형태들로서숲의 지배자로서말고는 다른 방식으로 상호연관시키고 통합할 수 없었다. 이 존재가 풍부하고 현실적인 살아있는 내용에 형태를 부여했다. 이는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즉 객관적인 형태였다. 그것이 존재했는가? 이 질문은 그 대답에 절대적인 혹은 아니오를 요구한다면 순진한 질문이다. 그것은 숲의 자연 현상과 인간의 정신상태이는 숲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다의 살아있는 총합으로서 존재했다. 그것은 민중의 의식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다신교적 세계관의 한 형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사회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존재했다. 모든 것이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듯이, 즉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상대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숲도깨비들은 플레하노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 존경받는 비판가에게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첫째, 과거의 숲도깨비들이 우리 세대에게 객관성을 결여한 것으로 보이듯이 그가 반박될 수 없이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실들의 다수도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마찬가지로 객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둘째, 사상가 플레하노프는 이 숲도깨비들과 기타 마귀들모두가 누구에 의해서 실제로 멸절되고 파괴되었는지를 알아채지 못했는가? 이들은 과거의 절대적으로 정통인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단들에 의해서, 플레하노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플레하노프의 적들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정통은 숲도깨비들을 오랫동안 강력하고 열심히 방어했으며 우리의 선배들이단들은 낡은 객관성의 힘에 의해 혹독한 시련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플레하노프들은 그들의 과거의 숲도깨비들을 배반하고 절대적으로거부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오직 절대적 진실, 절대적 객관성, 절대적 물질 등의 현대적 숲도깨비들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자주 되풀이되는 다른 반대견해를 보자. 이번에도 플레하노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리적 세계는 사회적으로 동의되고 사회적으로 조화롭게 된, 즉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임을 이미 보그다노프씨 당신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의 실존이 우리의 행성의 실존에 선행한다는 추론이 나온다. 먼저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면서 발화를 하기시작한다. 그런 다음 이 운 좋은 상황 덕분에 물리적 세계 일반,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 행성이 등장한다. 물론 이는 발전이기도 하지만, 뒤로 가는 발전일 뿐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From Defence to Attack, p.80)

 

플레하노프는 숲도깨비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처럼 지구가 인간의 대화의 결과로 등장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이 또한 그의 명민함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만일 누군가 그가 두세 명의 다른 비판가들이 말한 것을 반복하면서나에게 전가하는 바와 같은 것을 주장한다면 자존심 있는 작가라면 굳이 나서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비판이 완전히 불필요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입장에 대한 잘못된 설명에 기반을 둠을 의미한다. 사실 다 쳐내면 남는 것은, ‘물리적 경험이라는 생각을 속되게 잘못 재현한 것이다.

 

다음이 특징적이다. 바로 이 비판가가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을 러시아어로 옮긴 바 있다. (이미 언론이 주목한 바이지만, 사실 매우 형편없이 옮겼다.) 이 테제들에서 맑스는 실재가 인간의 실천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번역자가 반대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명백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지 않은가? 지구, 태양, 시리우스 모두가 실재에 속하는데, 이 실재를 인간의 실천으로 간주해야 한다면 분명히 처음부터 사람들이 존재했어야 한다고. 실천에 관여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며, ‘이 행복한 상황 덕분에지구, 태양 그리고 기타의 사물들이 등장한 격이라고. 이 주장은 마찬가지로 반박 불가능한 것일 수 있었으며 위험한 이단은 그 싹부터 잘릴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경우에 맑스가 틀림없이 인정했어야 할 것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물질의 왜곡된 본질이 아닌 진정한 본질은 무엇인가? 물리적 경험은 누군가의 경험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전 과정에 있는 인류 전체의 경험이다. 이는 엄밀하고 확정된 다듬어진 규칙성의 세계이며 특수하고 정확한 상관관계의 세계이다. 이는 모든 기하학의 정리들, 역학·천문학·물리학 등의 모든 공식들이 작동하는 잘 질서지어진 세계이다. 세계, 경험의 체계를 인류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이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기하학의 정리들과 자연의 법칙들이 집단적 노동의 산물들이며 도구들임을 이미 보았다. 우리는 이것들을 인식할 때 인류와 인류의 활동 또한 인식한다. 플레하노프가 우리의 행성이 인류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설득할 때, 그는 물론 지구를, 태양계에서의 그 특수한 위치를, 지구가 관성·만유인력의 법칙들 등에 종속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이를테면 만유인력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고 항상 그래왔다고 누군가 말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 법칙에 따르면 물체들의 당김은 그 질량에 비례하며 양 물체 사이의 거리에 반비례한다. 이 법칙의 작용이 질량 및 거리의 측정을 전제하며, 더 나아가 이를 위해 사람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다듬어진 장기적이고 정확한 척도들을 사용함이 분명하다. 이는 분명하게도 사람들이 수행하는 곱하기, 나누기, 제곱하기라는 산술적인 작업들을 전제한다. 측정척도단위들, 계산단위들 등의 수립이라는 사회적 실천을 내던지면 중력의 법칙에서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중력의 법칙이 인간이 있기 이전에도 작용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것이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의 활동을 그 역사적 경계 너머로 조건부로 이월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인류가 수백만 년 전에 존재했다면, 만일 인류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측정과 계산의 방법들을 사용했다면, 그렇다면 인류는 그러한 법칙의 도움으로 천문학적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류와 그 노동 및 인식의 방법들을 완전히 빼놓고 본다면, 그렇다면 물리적 경험이란 없을 것이며 규칙적인 현상의 세계도 없을 것이다. 우주의 원소들의 자연발생성만이 남을 것이며, 이는 아무런 법칙도 모를 것이다. 측정·계산·소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를 이해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인류를 다시 도입해야 하며, 인류는 우주를 알고 바꾸고 조직하기 위해서 그 자연발생성과 씨름하는 노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우리는 물리적 경험을 그 목표인사회적으로 다듬어지고 사회적으로 유용한규칙성과 함께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