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1924년 보그다노프가 쓴 글 "The Workers’ Artistic Inheritance"(1924)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Source: The Labour Monthly, September 1924, Bogdanov, pp. 549-597;
CopyLeft: Creative Commons (Attribute & ShareAlike) marxists.org 2004.
https://www.marxists.org/archive/bogdanov/1924/artistic-inheritance.htm
이 글의 『햄릿』비평과 관련하여 http://minamjah.tistory.com/127의 '붉은 햄릿' 부분도 참조하라.
모든 강조는 옮긴이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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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물려받은 예술 유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노동계급이 물려받은 예술 유산의 사례로서 종교를 다루면서 나는 일부러 가장 논란이 되고 어려운 물음에서 시작했다. 1이런 식으로 해야 우리가 주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쉬울 것이다. 노동계급은 저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고 또 소화해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무기는, 내가 이미 서술한 집단노동의 ‘전적으로 조직론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비평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비평은 그 주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예술작품의 영혼은 우리가 그 “예술적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2 이는 바로 작품의 플롯과 그 구현의 정수, 문제와 그 해결 원칙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제 우리는 안다. 예술가 자신이 어떻게 보았든, 실재로 그것은 항상 조직화의 문제이다. 다음의 두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삶과 경험의 요소들의 특정의 집합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직화하는가가 문제이다. 둘째, 이런 식으로 창출된 통합이 특정의 공동체의 조직화 수단으로 복무하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만일 첫째가 성취되지 못한다면, 예술이 존재할 수 없고 혼란만이 존재한다. 만일 둘째가 성취되지 못한다면 작품은 저자 자신에게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세계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 옛 문화유산에서 가장 빛나는 금강석인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이 작품의 ‘예술적 이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괴로운 모순들에 의해 찢기고 행복·사랑·조화를 향한 노력과 고통스럽고 준엄하며 무정한 투쟁을 벌여야 할 필요 사이에서 분열된 인간 영혼의 조직화 문제이다. 이 모순에서 벗어날 출구는 어디에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화해될 수 있는가? 어떻게 조화를 향한 갈증이 삶의 불가피한 투쟁에서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이 투쟁에 필요한 강함·굳건함·냉정함을 그로부터 강탈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동시에 어떻게 한 사람이 존재의 모든 기쁨을, 모든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타격의, 상처에 난 피와 상처에 묻은 오물의 본의 아닌 잔인함을 피할 수 있는가? 그 가장 깊고 가장 숭고한 욕구와 환경의 적대성이 강압하는 긴급한 요구 사이의 날카로운 갈등에 의해 갈가리 찢긴 영혼에 조화를 복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조직화 문제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지를,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금세 인식한다. 이는 덴마크의 왕자에게만 닥치는 문제가 아니며, 우리의 중간계급과 그 문학에 나오는 여러 ‘햄릿들’과 ‘작은 햄릿들’에게만 닥치는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는 모든 사람이 삶에서 불가피하게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할 만큼 강한 사람은 그로써 자기의식의 더 높은 단계로 고양된다. 그 문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정신적 폐허의 원천이 되며 때로 그를 파괴하기조차 한다.
이 비극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따르는 사람의 영혼에 매우 날카롭게 파고들 것이며 노동계급의 집단적 심리에는 훨씬 더 그럴 것이다. 우애가 그 이념이며 인류의 조화로운 삶이 그 최고의 목적이다. 그러나 주위 환경은 이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으며, 부과되는 투쟁은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우울하며 잔인한가! 그러나 이전의 수없는 노력들에 의해서 획득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 사회적 존엄과 삶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잃고 싶지 않으면, 싸워야 한다. 조그만 기쁨들이 주어져 왔으며 이 기쁨들에 대한 갈증은 크다. 그러나 이 조그만 것들도 사회적 증오와 무질서의 불가피한 요소들에 의해서 늘 파괴와 왜곡의 위협을 받는다. 정말이지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능력 자체가 싸움의 격앙 속에서, 패배의 절망 속에서, 그리고 맞받아치는 타격의 분노 속에서 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햄릿의 비극은 바로 그런 기반 위에서 전개된다. 그는 훌륭한 예술적 성향을 지닌 매우 재능있는 인물이다. 삶도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왕자이자 왕위 계승자로서의 그의 교육, 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7년을 자유롭게 보낸 것, 과학과 예술에의 몰두가 가져다주는 충만한 즐거움, 우정과 활기의 환경에서의 삶, 마지막으로는 오필리어(Ophelia)에 대한 잔잔하고 시적인 사랑― 사람이 이렇게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드문 일이다. 햄릿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와 다른 삶은 경험한 적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달라지는 때가 온다. 삶의 공포와 끔찍함이 갑자기 그에게 닥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두운 전조로, 그 다음에는 고통스러운 명확함으로.
그의 가족은 파괴되었고, 그의 나라의 법질서는 무너졌다. 반역자이자 형제살해자가 그의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했으며 그의 어머니를 유혹했다. 왕궁에는 위선·음모·방자가 극성을 떨고 예전의 좋은 풍습의 쇠퇴가 나라 전역으로 확대되며 혼란을 낳고 있다. 법을 복구하고 범죄를 줄이고 아버지와 가족의 불명예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의 봉건적 사고방식에 따르는 질서 전체가 규정하는 햄릿의 신성한 의무이다.
그는 이 일을 완수하기에 충분하게 강한가? 그렇다. 그의 풍요로운 본성에는 필요한 힘들이 들어있다. 그는 예술가이자 운명의 총아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며, 사는 데 공기만큼이나 조화를 필요로 하는 ‘수동적인 미학가’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전사인 왕의 아들이며, 위대한 바이킹족의 후예이다. 그는 완벽한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에게는 투사의 능력이 들어있다. 물론 아직 펼쳐질 기회를, 시험할 기회를 갖지 못한 능력이며, 게다가 수동적 미학가와 결합되어 있는 능력이다.
여기에 이 비극의 본질이 있다. 투쟁은 햄릿에게 계교·기만·폭력·잔인을 수단으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의 온유하고 정련된 영혼에는 역겨운 것들이다. 더욱이 그는 그에게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 수단을 써야한다. 적의 진영에 그의 어머니가 있으며 오필리어도 그를 해치려는 음모의 도구로서 사용된다. 그의 적들은 이들을 내세워서 그의 영혼의 가장 약한 면들을 교묘하게 건드린다. 타격하기 위해 쳐든 그의 손은 멈추어진다. 내적 투쟁이 그의 의지를 마비시키며 순간적인 결단은 머뭇거림과 무위(無爲)에 자리를 내주고 결실 없는 명상에 시간만 흘러간다. 그 결과는 심한 이중성이며 한동안은 그의 인격이 무너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모순의 혼란 속에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햄릿은 “미치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황에 짓눌렸을 것이며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그는 절망의 고통 속에서도, 영혼의 아픔 속에서도 일보일보 진정한 해결을 향해 꾸준히 나아간다. 한 사람 속에 있는 두 분리된 인격의 요소들―미학가와 전사―이 서로를 관통하여 새로운 인격으로 융합된다. 능동적 미학가, 삶의 조화의 투사이다. 주된 모순은 사라지고 조화에의 갈증이 한바탕 벌어지는 싸움에서 출구를 찾는다. 싸움의 유혈과 오욕은 그것이 삶을 정화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올리는 데 복무한다는 의식에 의해서 곧바로 보상된다. 조직화 문제가 해결되며, 예술적 이념이 형태를 띠게 된다.
물론 햄릿은 죽었다. 이 점에서 위대한 시인 셰익스피어는 늘 그렇듯이 객관적으로 옳다. 햄릿의 적들은, 햄릿이 자신의 영혼의 힘들을 모으는 동안 행동을 하고 햄릿의 파괴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는 이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승자로서 죽는다. 죄는 처벌되었으며 법질서가 복원되고 덴마크의 운명은 굳건한 자, 즉 젊은 영웅 포틴브라스(Fortinbras)의 손에 맡겨졌다. 그는 햄릿만큼 위대하지는 않지만 햄릿을 고취시키기도 한 봉건 세계의 원칙들을 갖춘 조화로운 인물이다.
여기서 우리 비평의 둘째 측면이 시작된다. 조직화 문제는 풀렸다. 그런데 저자에게 이 문제의 구현을 위한 생생한 재료를 부여한 집단은 어떤 집단이었는가? 물론 프롤레타리아는 아니었다.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햄릿』의 저자는 그가 누구든―잘 알려져 있듯이 이는 논란의 대상이다 3―그 자신이 귀족이거나 귀족층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바로 귀족 세계로부터 자신의 드라마를 위한 재료의 대부분을 끌어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봉건적 왕정의 이념이라는 징표를 달고 있다. 저 사회적 질서의 토대들은 권위와 종속, 세상을 관리하는 신성에 대한 믿음, 고대로부터 수립되어온 질서의 신성함과 절대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태생에 의해 관리하고 지배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높은 존재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낮은 존재들이어서 복종하는 기능 말고는 다른 능력이 없기에 지배받게 되어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자, 이 모든 것은 노동계급에게 이 작품이 가지는 가치를 파괴하지 않는가?
나는 다른 물음으로 대답하겠다. 노동계급에게 자신의 것 이외에 대한 조직화 유형을 아는 것이 필요한가? 더 나아가. 노동계급이 일반적으로 다른 유형과의 비교 없이, 다른 유형에 대한 비평 없이, 다른 유형들을 다시 가공하여 그 요소들을 사용함이 없이 자신의 유형을 다듬어내고 형성해낼 수 있는가? 위대하고 솜씨 있는 예술가가 아니고 다른 누가 삶과 사상의 낯선 조직화의 심층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는가? 저 조직화의 역사적 의의를, 발전의 더 낮은 단계들과의 연관을,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긴요한 조건들 및 문제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비평의 과제이다. 이것이 달성되자마자 낯선 유형의 조직화의 영향에 굴복할 위험은 사라질 것이다. 그 유형에 대한 지식은 우리 자신의 조직화의 창출을 위한 가장 소중한 도구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위대한 예술가의 객관성이 우리의 비평에 최고의 지원을 해준다. 그는 목적으로 삼지 않고도 권위적 세계의 모든 보수주의, 그 내재적 협소함, 그 세계에서의 인간 정신의 취약함을 형상화하게 된 것이다. 영웅 포틴브라스의 출현을 기억하는 것이 좋은데, 이 출현으로 인해서 햄릿 자신의 영혼에서의 변화를 향해 충동이 가해지고 그 추동력으로 햄릿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로 이르는 행동의 경로에 들어서게 된다. 포틴브라스는 자신의 권리에 대한 당당한 확신으로 어떤 의심이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어 이 전쟁에서 죽을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의 피만큼도 가치가 없을 땅 한 뙈기를 정복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조직화 문제가 우리 앞에 설정되고 우리에게는 생소한 사회의 삶을 토대로 해결되긴 하지만, 해결의 일반적 측면은 현 시대에도 그리고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게도 (조화에 대한 갈증이 그 투쟁의 엄혹한 요구들과 상충할 때마다) 타당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큰 의미가 부여된다. 여기서 예술은 노동계급에게 조직화 문제의 보편적 설정과 보편적 해결을 가르친다. 이는 노동계급의 보편적 조직 이념의 달성에서 필요하다.
벨기에 예술가인 뫼니에(Constantin Meunier)는 조각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그의 조각상 <철학자>는 생각하고 있는 노동자를, 어떤 중요한 철학적 문제의 해결에 깊이 몰입된 노동자를 제시한다. 어떤 하나에 집중하고 거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사유능력을 발휘한다는 인상, 통합적이고 강한 인상을 맨 몸이 자아낸다.
이 조각상의 예술적 이념은 무엇인가? 그 조직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힘든 육체노동을 사유의 긴장과, 창조적인 정신적 노동과 결합할 것인가? 문제의 해결은···?
<철학자>를 직접 보기만 하면 된다. 이 인물에는 안으로 갈무리된 노력이 속속들이 배어있고 모든 보이는 근육들이 한껏 발동되고 있다. 어떤 외적 행동을 하는 데 발현되는 발동이 아니라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발동이다. 그리고 곧바로 가장 큰 생생함과 인상을 낳으며 해결이 제시된다. 다음과 같다. “사유는 신체의 자체 내에서의 발동이다. 그 성격은 노동의 성격과 같다. 둘 사이에 모순은 없으며 둘의 분할은 인공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엄정 과학의 결과들, 생리학적 심리학의 결과들이 이 생각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적 표현에서 더 친밀하고 이해 가능하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에게 가지는 엄청난 의미는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비평은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예술가는 그의 창조적 작품에서 어느 계급 혹은 사회집단의 관점에 서 있는가? 그 다음에 그가 비록 노동자들을 대표하지만 그는 노동계급의 이념가로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의 관점은 노동의 관점이지만 집단적 노동의 관점의 아니다. 노동자-사유자는 개인으로서 간주된다. 그의 사유의 발휘를 수백만 명의 신체적·정신적 발휘와 융합하여 그것을 노동의 보편적인 연쇄에서 하나의 고리로 만드는 연관들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혹은 기껏해야 매우 모호하게, 거의 식별 불가능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예술가는 그의 사회적 지위상 지식인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노동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자신의 노동이 그 기원에서나 그 방법들·문제들 면에서나 인류의 집단적 노동과 어느 정도로 연관되어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힘든 작업을 하는 지식인들의 관점은 부르주아지의 관점과 거의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적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우리의 비평은 예술가가 줄 수 없는 것을 보완해야 한다.
이렇게 과거의 예술과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 비평의 과제가 규정된다. 비평은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수천 년 동안 예술 형식들에 결정(結晶)화된 조직화 경험을 확고하게 통달하고 독립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노동계급에게 부여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비평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은 이와 다르다. ‘사회적 예술’의 입장을 방어하고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선동적 의미를 다루는 경우가 가장 잦다. 몇 년 전에 노동자 이반 꾸비꼬프(Ivan Kubikov)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구(舊)세계의 문학 가운데 예술의 교육적 영향의 측면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다음과 같이 연구해달라고 청했다. 4 이 문학에는 당연히 “순금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해로운 합금의 요소들도” 있다. 이 요소들은 “온건하게 만드는 보수적인 힘들”이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노동자는 황금과 합금을 구별하게 해주는 계급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예술로부터 받은 인상들을 세심하게 관찰한다면 우리는 황금만이 영향을 미치고 합금은 노동자의 의식을 그냥 지나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관찰을 하면서 반란 노동자가 가장 순수한 예술작품들로부터 혁명적 결론들을 끌어내는 일을 해내는 매우 놀라운 모습을 목격할 기회를 개인적으로 가진 바 있다.”(“Nasha Zaria,” Our Dawn, 1914, No. 3, pp. 48-49) 이는 나이브한 입장이며 그 바탕이 그릇되었다.
정말로 순수한 작품으로부터 혁명적 결론을 끌어내는 일을 “해내는” 그런 감각은 쓸모가 거의 없다. 잘못된 재현은 잘못된 재현이다. 그것이 무엇을 입증하는가? 직접적인 감정의 큰 힘과 객관성의 결여가 존재함을 입증한다. 사유가 이 감정보다 낮으며 감정에 종속됨을 입증한다. 이것이 보편적인 조직화 문제를 해결하도록 운명지어진 계급의 의식이 되어야 하는가?
꾸비꼬프는 “황금과 합금” 사이의 상호관계의 예로서 쉴러의 『돈 카를로스』(Don Karlos)를 든다. 그는 폭정의 간파와 포사 후작(Marquis Posa)의 불같은 연설이 황금이며 절대왕정, 계몽되고 인간적인 절대왕정에 대한 그의 꿈이 합금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맞지 않다. 사유의 모호함과 취약함에 동반되는 “불같은 단어들”을 들으며 독자의 정신이 어투만 혁명적인 방향으로 양성될 수가 충분히 있다. 반대로 계몽군주제의 이상을 살아있고 깊이 있게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비평의 입장에 서있는, 역사의식을 가진 독자에게는 결코 “합금”이 아니다. 이념은 조직화의 정신적 모델이다. 과거에 다듬어내어진 모델들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미래를 조직하는 소명을 가진 계급에게는 불가결하다. 예술가가 형상화하는, 영웅적인 인물들의 투쟁에서 그 시기의 사람들의 사상과 의지를 규정하고 결정한 사회적 힘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 힘들의 성격에 의해 불러내어진 상이한 이념들의 필요성을 식별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멸한 계급들, 혹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있는 계급들의 영혼에 대한, 그리고 아울러 현재 역사의 무대를 차지하고 있는 계급들의 영혼에 대한 예술적 통찰을 획득하는 것이 인간의 축적된 문화적·조직적 경험―새 사회를 구축할 계급에게는 가장 소중한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최고의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과거의 예술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감정과 마음가짐을 교육할 수 있는 한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심화시키고 계몽하며 인류의 모든 삶으로, 인류가 가는 힘든 길 전체로 그 관심의 범위를 확대할 수단으로서 복무해야 한다. 그러나 선동의 수단으로, 선전의 도구로 복무해서는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옛 문화의 위대한 작품을 소개하는 일을 해내는 비평가는, 예를 들어 연극의 경우에는 천재적인 작품의 공연 이후에 관객에게 그 의미와 가치를 집단적 노동의 조직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거나, 아니면 노동자 신문이나 잡지의 글에서 위대한 대가의 시나 소설을 설명할 수 있는 비평가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진지하고 중요한 작업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작업의, 중요하고 지속적인 것이 될 작업의 가장 광범한 영역이 여기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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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Art, Religion and Marxism,” in the last issue of The Labour Monthly (August, 1924; Vol. VI, No. 8) 참조. 또한 같은 저자의 “Proletarian Poetry” in the May and June issues of last year (Vol. IV, Nos. 5 & 6)와 “The Criticism of Proletarian Art” in the December, 1923, issue (Volume V, No, 6) 참조. [본문으로]
- [옮긴이] 이 글을 다 읽으면 더 분명해지겠지만, 보그다노프의 ‘이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도 아니고 헤겔의 ‘이념’도 아니다. 그것은 들뢰즈의 ‘이데’(idée)에 가깝다. 들뢰즈의 ‘이데’는 모든 종류의 창조적 활동을 관통한다. 창조를 한다는 것은 이데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파르네(Claire Parnet)와의 대담 가운데 ‘idée’ 부분을 참조하라. 이 대담은 DVD로 나와있다. [본문으로]
- [옮긴이] 셰익스피어가 진짜 저자냐 아니냐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을 말한다. [본문으로]
- [옮긴이] 이 단락의 나머지 부분은 꾸비꼬프의 말을 인용하고 그것에 대해 보그다노프가 논평을 다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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